조선역사
> 역대 국사교과서 > > > 本朝紀 > 廢王 燕山君 紀元後 一百十三年 甲子
[十年]
追崇廢妃尹氏 成廟朝妃 以罪廢死 燕山深憾之 至是 殺先朝舊臣殆盡 至有碎骨舂磨之刑 乃追崇尹氏 權達手·李荇杖流
○ 四月 大王大妃韓氏【德宗王妃】昇遐 【祔葬敬陵】
○ 前安陰縣監鄭汝昌卒 汝昌字伯勗 號一蠹 河東人 金宗直門人也 成宗朝擧學行 授職不就 後登第就仕 戊午史禍作 坐謫鍾城 至是 卒 年五十五 【中廟朝 贈右議政 諡文獻】
○ 殺金宏弼 宏弼字大猷 號寒暄堂 瑞興人 金宗直門人也 成宗朝擧學行 授職 及戊午史禍作 杖流順天 至是加罪戊午黨人 遂被刑 年 五十一 【宣廟朝 贈領議政 諡文敬】
○ 追罪南孝溫 世祖朝廢昭陵 卽文宗王妃陵也 成宗朝 孝溫上疏請復之 不聽 至是追論孝溫請復昭陵之罪 剖棺斬屍 孝溫號秋江
○ 置運平樂工 命諸道各邑 皆設倡妓 號運平樂工 擇運平三百人入內 日事淫戱
○ 築內都城 【因撤去城外人家】
조선역사
번역
폐비 윤씨(尹氏)를 추숭(追崇)하였다. 성종의 왕비로서 죄를 지어 폐위되어 죽었다. 연산군이 깊은 한을 품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선대 왕조의 구신(舊臣)들을 거의 다 죽여 없앴다. 심지어는 뼈를 바수고 찧어서 가는 형벌까지 하였다. 이에 윤씨를 추숭하고 권달수(權達手)·이행(李荇)은 매질하여 유배하였다.
○ 4월에 대왕대비 한씨(韓氏) 【덕종 왕비】 가 승하하였다. 【경릉(敬陵)에 합장하였다.】
○ 전 안음 현감(安陰縣監) 정여창(鄭汝昌)이 졸하였다. 정여창은 자는 백욱(伯勖)이고, 호는 일두(一蠹)이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성종 때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연좌되어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중종 때에 우의정으로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 김굉필(金宏弼)을 죽였다. 김굉필은 자는 대유(大猷)이고,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며, 서흥(瑞興) 사람이다. 김종직의 문인이다. 성종 때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을 제수받았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매를 맞고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무오 당인(黨人)에게 죄를 더하면서 마침내 사형을 당하였다. 나이 51세였다. 【선조 때에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이미 죽은 남효온(南孝溫)에게 죄를 주었다. 세조 때 소릉(昭陵) 곧 문종 왕비의 능을 없앴는데, 성종 때 남효온이 상소하여 복구하기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남효온이 소릉의 복구를 청한 죄를 추론(追論)하고, 부관 참시하였다. 남효온의 호는 추강(秋江)이다.
○ 운평 악공(運平樂工)을 설치하였다. 여러 도의 모든 고을에 명하여 창기(倡妓)를 설치하도록 하고 운평 악공이라고 불렀다. 운평 300명을 뽑아 궁궐 안으로 불러들여 매일 음란한 놀이를 일삼았다.
○ 내도성(內都城)을 쌓았다. 【이로 인하여 성 밖의 인가를 철거하였다.】
원문
[十年]
追崇廢妃尹氏 成廟朝妃 以罪廢死 燕山深憾之 至是 殺先朝舊臣殆盡 至有碎骨舂磨之刑 乃追崇尹氏 權達手·李荇杖流
○ 四月 大王大妃韓氏【德宗王妃】昇遐 【祔葬敬陵】
○ 前安陰縣監鄭汝昌卒 汝昌字伯勗 號一蠹 河東人 金宗直門人也 成宗朝擧學行 授職不就 後登第就仕 戊午史禍作 坐謫鍾城 至是卒 年五十五 【中廟朝 贈右議政 諡文獻】
○ 殺金宏弼 宏弼字大猷 號寒暄堂 瑞興人 金宗直門人也 成宗朝擧學行 授職 及戊午史禍作 杖流順天 至是加罪戊午黨人 遂被刑 年五十一 【宣廟朝 贈領議政 諡文敬】
○ 追罪南孝溫 世祖朝廢昭陵 卽文宗王妃陵也 成宗朝 孝溫上疏請復之 不聽 至是追論孝溫請復昭陵之罪 剖棺斬屍 孝溫號秋江
○ 置運平樂工 命諸道各邑 皆設倡妓 號運平樂工 擇運平三百人入內 日事淫戱
○ 築內都城 【因撤去城外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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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훤당 김굉필 선생 생가터 표지석 설치 청원서 제출
대종회추천 0조회 3319.06.20 14:40댓글 0
건 의 서 (建 議 書) 서흥 : 제19-5호 수신 : 서울특별시장 참조 : 도로 주소명 관리팀장 발신 : 서흥김씨대종회 회장 제목 : 한훤당 김굉필 생가터 표지석 설치 청원서
일천만 서울시민의 살림을 맡으셔서 불철주야 분투하시는 시장님께 아낌없는 성원과 감사를 올리는 바입니다. 여러 모로 촌각의 틈도 없으신 줄 사료 되오나 아래와 같이 건의 하오니 배려있으시길 앙망합니다. 서울시내 곳곳에 있는 도로명 즉 을지로 세종로, 충정로, 퇴계로, 사임당로, 율곡로 등은 옛성인의 호를 따서 명명한 도로 등이 있습니다. 우리 서흥김씨 문중 및 한훤당선생 기념사업회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거론되어 아래와 같이 문헌자료를 동봉하오니 혜량하시고 다음 심사기회에 상정하시어 의결하여 주시도록 건의하는 바입니다.
김굉필(金宏弼) 자(字) : 대유(大猷). 호(號) : 한훤당. 시(寒暄堂 謚) : 문경공 본관(文敬公 本貫) : 서흥어모장군 충좌위사용 유(瑞興禦侮將軍 忠佐衛司勇 紐)의 아들로 조선조단종(朝鮮朝端宗2年(1454) 5月25日 한성부 정릉(漢城府 貞陵)洞(現 서울 정동(貞洞)에서 탄생(誕生)하여 성장(成長)하시고 후(後)에 현풍현(玄風縣)으로 이거(移居) 대성리학자(大性理學者)로서 연산군(燕山君3年(1497)에 형조좌랑(刑曺佐郞)에 이르렀으나 무오사화(戊午史禍)때(1498) 김종직(金宗直) 先生의 제자(弟子)라는 까닭으로 평안도 희천(平安道熙川)에 유배(流配)되었다가 후(後)에 전라도 순천(全羅道 順天)으로 이배(移配) 연산군(燕山君 10年(1504) 10月 갑자사회)甲子史禍) 때 사사(腸死)됨.
先生은 일찍이 육경연구(六經硏究)에 전심(專心)하여 성리학(性理學)에 통달(通達)하였으며 특(特)히 실천궁행(實踐躬行)하여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조종(祖宗)이 되었고 충효대절(忠孝大節)이 조야(朝野)에 떨쳐 모두 경앙흠모(敬仰欽慕) 하였음 (왕조실록전(王朝實錄云 충효대절(忠孝大節) 용동당세(聳動當世) 이상과 같이 불우(不遇)했던 관운(官運)도 사후(死後)에야 빛을 보아 중종(中宗 12年(1517)에 본조형좌랑(本朝刑佐郞) 증(贈) 대광보국 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정감춘추관사(大匡輔國 崇錄大夫議政府右議政兼 領經庭監春秋館事
선조 宣祖 8年(1575) 12月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됨 (王朝實錄 24卷 538面, 燃粲室記術 2卷, 유서애집( 무오당적 등 참조(柳西厓集 戊午黨籍等 參照)
광해군(光海君 2年(1610) 9月4日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수현(首賢)인 先生을 비롯하여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 滉) 等 제선생(諸先生)과 더불어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다. 門下에 조광조(趙光祖) 김안국(金安國) 이연경(李延慶) 정 붕(鄭 鵬) 等 많은 學者가 배출(輩出)되었다. 사액서원(賜額書院(1607) 인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위시(爲始)하여 희천(熙川)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나주(羅州)의 경현서원(景賢書院) 等 全國에 14개 서원(書院)에 배향(配享)되었음. 이상(以上) 간략(簡略)하게 기술(記述)합니다만 우리나라 유교(儒敎) 特히 도학발전(道學發展)에 위대(偉大)한 업적(業積)을 남기신 先生을 기리기 爲하여 그의 배출지(出生地)인 정동(貞洞) 즉 현재(現在) 대한문(大漢門)에서 옛 MBC 방송국 方面, 또는 신아일보 근처에 한훤당 탄생 표지석(標識石)이라도 설치하여 주실것을 간곡히 건의 드립니다. 단 설치에 따른 비용은 저희 서흥김씨대종회에 부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5월 29 일
서흥김씨 38,000명 대표
서흥김씨대종회 회장 김 희 근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길 10 연지드림빌 801호 전화 02-3672-1485(FAX겸용). 2234-98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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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제6권 /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 무오당적(戊午黨籍)
김굉필(金宏弼) 처음에는 호를 사옹(簑翁)이라 하다. 갑술년에 나다.
김굉필은 자는 대유(大猷)이며, 호는 한훤당(寒暄堂)이요,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공의 아버지는 뉴(紐)인데 무과에 올라 사용(司勇)이 되었다. 김굉필은 경자년에 생원과에 오르고, 갑인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고, 벼슬이 형조 좌랑에 이르렀다.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희천(熙川)으로 귀양갔다가 경신년에 순천으로 옮기었다. 갑자년에 화를 당했으니 나이 51세였다. 중종(中宗) 정묘년에 도승지를 증직하고 정축년에 특별히 우의정을 증직하였으며, 선조(宣祖) 을해년(8,1575)에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주었다. 광해군(光海君) 경술년에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는데, 배향된 오현(五賢) 중에서 공이 그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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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厓先生文集卷之十七 / 跋 / 睡軒集跋
成廟臨御歲久。愛養人才。激勵風節。於是士之英偉卓犖者。蔚然並出。可謂盛矣。而遭罹厄會。一敗塗地。譬如春氣方至。草木敷榮。猝遇冰霜之慘。風雨之灾。離披摧折。索然而無餘。亦可哀也。嗚呼。善人何負於國哉。達城府伯權侯灝元。乃睡軒先生之從孫也。家藏睡軒遺稿。而散失殆盡。灝元迺更極意裒集。僅百餘篇。以鋟于梓。又取當時罪籍附于後。又令其友豐山柳成龍略記師友之同禍者。如子厚先友記。幷附之。百年之後。使睡軒文章事蹟。不至於泯滅而無傳者。灝元之力也。噫。後必有三復斯編。廢書而流涕者矣。
附 戊午黨籍
金宗直字季昷。司藝淑滋之子。號佔畢齋。善山人。世祖朝登第。歷事睿宗成宗。官至刑曹判書。諡文簡。有孝行。文章高潔。爲一時儒宗。喜奬進後學。多有成就。鄭汝昌,金宏弼以道學名。金馹孫,兪好仁,曹偉,李宗準,南孝溫,洪裕孫等以文章顯。其餘指授蹊徑。成名者甚衆。燕山戊午史禍起。時公已卒。禍及泉壤。有文集行于世。
金馹孫字季雲。號濯纓。執義孟之子。其先金海人。世居淸道。受業於金宗直。能文章。性簡亢。少許可。仕至吏曹正郞。燕山戊午。遭史禍。或云李克墩爲全羅監司。成廟之喪。不進香京師。而載妓而行。馹孫書其事於史草。克墩爲堂上。實起此禍云。權五福字嚮之。號睡軒。見序文
權景裕字君饒。又字子汎。安東人。成廟乙巳登第。由藝文館檢閱。入玉堂爲正字。屢遷至校理。燕山朝。知時事漸變。乞外爲堤川縣監。戊午禍起。與金馹孫同日死。秋江南孝溫云君饒性剛毅。不喜作爲云。
李穆字仲雍。全州人。剛直敢言。嘗在太學時。尹弼商以大臣當國。穆因天旱上疏曰。烹弼商。天乃雨。弼商遇諸途。呼之曰。君必欲食老夫肉耶。穆昂然不顧而去。燕山初。擢壯元科。及史禍起。弼商爲堂上。挾前憾。以穆嘗受業於金宗直。構殺之。
許磐字文炳。陽川人。秋江集。磐志於性理之學。恬於進取。欲事事慕古。大猷服其端雅。嘗語左相洪應曰。世子國之儲君。萬姓所仰賴。今與宦寺居處不可云。戊午登第。權知承文院副正字。遂與史禍死。
姜謙晉州人。登庚子科。選入弘文館。屢遷至正郞。坐戊午獄杖流。兄詗爲大司諫。死於甲子之禍。表沿沫字少游。新昌人。成廟壬辰登第。有文名。所與交游。皆一時名士。嘗爲翰林。同僚宴飮設牛肉。爲上所知。例罷。自後見禁肉。輒去之曰。不忍更犯法也。服喪盡禮。事聞命加一資。後官至同知中樞府事。
洪翰南陽人。登乙巳第。官至參議。性直少許可。忤權貴。罹戊午禍。杖流道卒。中廟朝贈吏曹參判。
鄭汝昌字伯勖。河東人。號一蠹。以孝行薦爲參奉。辭不就。登第爲翰林。官至安陰縣監。與金宏弼同志。師金宗直。事性理學。戊午。謫鍾城以卒。旣而又剖棺。後追贈右議政。諡文獻。
茂豐副正摠字百源。太宗之曾孫。能詩善彈琴。構別墅于楊花渡。具小艇漁網。常自刺漁船。邀詩人騷客。日致好詩無慮千百篇。自號西湖主人。戊午杖流遠地。
姜景敍字子文。晉州人。號草堂。成廟丁酉登第。又捷重試。燕山戊午。以佔畢齋門徒。杖流會寧。後放還。中廟朝官至左副承旨。有草堂集一帙。後追贈禮曹判書。
李守恭字仲平。廣州人。遁村之後。領議政克培之孫。成廟戊申擢壯元科。歷正言,掌令。有諍臣風。入弘文館。拜校理,應敎。陞典翰。戊午謫昌城。移光陽。甲子賜死。年四十一。中廟初贈都承旨。
鄭希良字淳夫。號虛菴。燕山初登第。爲藝文館檢閱。旣而坐戊午獄。謫義州。希良善推卜知吉凶。嘗曰甲子之禍。甚於戊午。一日絶跡逃去。不知所終。有詩集行于世。
鄭承祖登燕山甲寅科。選補翰林。戊午。杖流遠地。李宗準字仲勻。號慵齋。能文章。善書畫。成廟乙巳登第。嘗以書狀官赴京。見驛館畫屛不佳。以筆塗沫殆盡。譯官招通事怪詰之。通事曰。書狀能書畫。必不滿其意而然也。譯官悟而首肯之。回程至其處。張新粧素屛二坐。宗準一書一畫。俱臻其妙。觀者歎賞。戊午謫北界路。經高山驛。書李師中孤忠自許。衆不與一律於壁上而去。監司以聞。燕山以爲有怨意。逮鞠殺之。洪貴達救解不得。
崔溥字淵淵。號錦南。羅州人。博聞强記。英傑不羈。成廟朝再登第。爲弘文館校理。奉使濟州。船爲風所漂。泊于中原浙江寧波府。邊臣疑倭寇將殺之。溥應對捷給。得免。成廟令上行錄。撰漂海錄以進。官至禮賓寺正。戊午被謫。後竟逮被殺。
李黿字浪翁。慶州人。益齋之後。成廟己酉登第。官至戶曹佐郞。戊午杖流遠地。死于甲子之禍。
中廟初。命贈都承旨。南秋江孝溫師友錄云。益齋之後。朴彭年之外孫。二家之賢。萃于一人。
李胄字胄之。固城人。杏村之後。能文章有氣節。自號忘軒。成廟戊申登第。拜正言。戊午。以佔畢齋門徒流珍島。後被殺。
金宏弼字大猷。號寒暄堂。師事佔畢齋。東方人士。皆以文詞爲業。其潛心性理之學。律己以禮。求濂洛關閩之緖。自宏弼始。以薦起爲刑曹佐郞。戊午謫熙川。移順天。被極刑。後追贈右議政。諡文敬。
朴漢柱字天支。密陽人。自號迂拙子。遊學佔畢齋門下。成廟乙巳登第。歷正言獻納。言事直截。出爲醴泉郡守。戊午杖流碧潼。甲子被殺。中廟初命贈都承旨。
任熙載字敬輿。豐川人。登戊午科。俄以佔畢齋門徒杖流。熙載。士弘之子。世說熙載善書。嘗題祖舜宗堯自太平。秦皇何事苦蒼生。不知禍起蕭牆內。虛築防胡萬里城一絶于屛上。燕山一日猝幸士弘家。見屛問之曰。誰所書也。士弘對以實。燕山有怒色曰。卿子不肖人也。我欲殺之。於卿意何如。士弘卽跪對曰。此子性行不順。果如上敎。臣曾欲啓之而未果。遂被禍。或曰。熙載常諫其父。故士弘不悅而譖之云。
康伯珍字子韞。信川人。佔畢齋外甥。成廟丁酉登第。官至司諫。戊午杖流。
李繼孟字希醇。全義人。成廟己酉登第。詩文爲佔畢齋所取。戊午。坐佔畢齋門徒杖流。中宗朝起廢復用。官至贊成。諡文平。性放達不檢。初爲己卯士類所短。及士類敗。獨申救不已。與權姦忤。憂懣而卒。
姜渾字士浩。號木溪子。晉州人。文名亞於馹孫。燕山末年。喪其嬖姬。哀悼甚。令羣臣誄之。渾作祭文極稱美悲傷之狀。燕山悅。自是頗得幸。爲士類所賤。中廟朝。仕至判中樞府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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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정초본] 33권, 광해 2년 9월 5일 정미 6번째기사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5현을 문묘 종사하는 일로서 교서를 내리다
국역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일로 교서를 내리기를,
"하늘이 대현(大賢)을 낸 것은 우연치 않은 일로서 이는 실로 소장(消長)의 기틀에 관계되는 것이다. 덕이 있는 자에게 상사(常祀)를 베풀어야 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일이니 존숭하여 보답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반포하여 귀의할 바가 있게 한다.
우리 동방을 돌아보건대 나라가 변방에 치우쳐 정학(正學)의 종지(宗旨)를 전수받은 일이 드물었다. 기자(箕子)에 의해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가르침이 펼쳐져 예의의 방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 시대의 준재들도 사장(詞章)의 누습(陋習)을 벗어나지 못했고,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천 년 동안에 겨우 포은(圃隱)092) 한 사람을 보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조종(祖宗)께서 거듭 인덕(仁德)을 베푸시는 때를 만나 참으로 문명을 진작시키는 운세를 맞게 되면서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과 같은 다섯 신하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들이야말로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제자(諸子)093) 가 전한 것을 터득하고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을 이룩한 이들로서 그 법도가 매한가지이니, 참소하고 질시하는 무리들을 그 누가 끼어들게 할 수 있겠는가. 포부를 펴고 못 펴는 것은 시대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설령 한 시대에 굴욕스러운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시비는 저절로 정해지는 것이니 어찌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만 알 성질의 것이겠는가.
이황만 보더라도 양조(兩朝)의 인정을 받은 현신(賢臣)으로서 뜻은 삼대(三代)094) 를 만회하려는 데 있었는데, 그의 주장과 가르침을 보면 실로 해동의 고정(考亭)095) 이라 할 만하고, 잘못을 바로잡고 규계(規戒)를 올린 것은 하남(河南)의 정씨(程氏)096) 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내리는 일은 융성하게 거행했지만 단지 종사(從祀)하는 일만은 미처 행할 겨를이 없었다.
정덕(正德)097) 기원(紀元)098) 때에 처음으로 종사하자는 유신(儒臣)의 요청이 있었는데, 그뒤 선왕(先王)께서 즉위하신 초엽부터는 다사(多士)의 항장(抗章)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건대 그 거조를 경솔하게 취하기가 어려워서 그렇게 하신 것일 뿐이니, 어찌 높이고 숭상하는 것이 지극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야 있겠는가.
내가 왕위를 계승함에 이르러 그들과 같은 시대에 있지 못함을 한탄하며 전형(典刑)이 나에게 있어 주기를 바랐으나 구천에서 다시 일으킬 수 없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이에 문묘에 종사하여 제사를 받들면서 백세토록 사표(師表)로 삼게 하는 동시에, 40년 동안 고대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응답하고 천만 세에 걸쳐 태평의 기업을 열 수 있도록 하리라 생각하였다. 이는 대체로 이만큼 기다릴 필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이니, 어찌 하늘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렇게 하겠는가.
이에 금년 9월 4일에 증(贈) 의정부 우의정 문경공(文敬公) 김굉필, 증 의정부 우의정 문헌공(文獻公) 정여창, 증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文正公) 조광조, 증 의정부 영의정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증 의정부 영의정 문순공(文純公) 이황 등 다섯 현신을 문묘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종사하기로 하였다. 아, 이로써 보는 이들을 용동시키고 새로운 기상을 진작시키려 하는데, 이 나라의 어진 대부들은 그 누구나 모두 상우(尙友)099) 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고 우리 당(黨)의 문채나는 소자(小子)들은 영원히 본보기로 삼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이에 교시하는 바이니, 모두 잘 이해하리라 믿는다."
하였다. 【대제학 이정귀(李廷龜)가 지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