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이해가 간다. 테무진의 신체는 엄청난 출혈을 견뎌야 했다. 그러니 액체를 가장 먼저 찾는 건 자연스럽다. 왜 꼭 아이라크여야 했을까? 아이라크는 초원 유목민들의 기본 음료다. 칼슘 등 영양성분이 풍부한 젖을 재료로 쓰는데다, 발효과정에서 영양이 더 풍부해진다. 또 술이기 때문에 몸에 빨리 흡수되는 느낌을 준다.
테무진의 입에서 아이라크라는 단어가 나왔다. 의학지식이 거의 전무한 젤메는 다른 음료-물이나 가축의 피-가 아니라 꼭 아이라크가 있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씨바, 그 흔한 아이라크가 없었다. 워낙 급하게 이동하느라 아이라크 같은 것까지는 미처 챙겨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젤메는 목숨을 걸기로 한다.
4⃣
우리 편에 아이라크가 없다. 그렇다면 아이라크를 재빨리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타이치우드 진영이었다. 젤메는 적진으로 넘어가 아이라크를 훔쳐올 계획을 세웠다. 정신나간 짓이었다. 버뜨. 젤메는 의학지식은 없었지만, 머리는 정말 좋았다. 성격도 대담했다.
젤메는 옷을 벗고 알몸인 채로 400여미터를 걸어가 타이치우드 진영의 목책을 넘었다. 초원 문화에서는 알몸을 보이는 일이 상당한 금기였다. 물론 몸을 가리는 건 동서고금에 흔한 문화다. 하지만 신체노출이 자연스러운 문화도 많다. 현대의 한국인들도, 한여름 해변가에서 비키니차림을 한다고 무슨 큰일이 생기지는 않는다. 초원은 그렇지 않았다. 주르킨족이 테무진의 후방 부대를 약탈할 때 피해자들의 옷을 벗겨간 것도 일부러 그들을 모욕하기 위해서였다. 주르킨은 옷까지 벗겨갈 정도로 먹고살기 힘든 집단은 아니었다.
젤메는 테무진을 위해 목숨을 물론이고 자존심도 내놨다. 스스로 옷을 벗고 걸어다닌다... 술에 만취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 초병이 젤메를 발견하더라도, 술 취한 동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료의 체면도 지켜줘야 하고 스스로 민망하기도 할테니, 고개를 돌리게 마련이다. 언뜻 스치는 순간에 얼굴을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는 밤의 어둠이 가려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히면?
젤메는 플랜 B도 마련해놓았다. 초병에 적발되어 붙들리면 이런 핑계를 댈 생각이었다.
"그동안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테무진에게 충성했건만, 사소한 실수로 심기를 건드렸다고 이렇게 옷을 벗겨 모욕을 주지 뭡니까... 자칫하면 지금 딸랑 입고 있는 (팬티에 해당하는)속옷도 벗기겠더라고요. 분하기도 하고, 이 속옷만큼은 사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어쩌겠습니까. 도망 나왔지요. 역시 테무진은 인간도 아니었어요! 이제부턴 타이치우드족에 충성할랍니다!"
일단 이렇게 귀순해 놓고는, 때를 봐 적당히 실종된 다음 테무진 진영으로 넘어오려고 한 거다.
플랜 B까지 갈 것도 없었다. 어떤 초병도 젤메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그는 아이라크가 있을 만한 곳을 열심히 뒤졌다. 하지만 씨바, 타이치우드 진영에도 아이라크가 없었다. 급하게 이동하느라 살림살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건 타이치우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타이치우드 진영엔 테무진 쪽에 없는 게 있었다. 젤메는 운 좋게 응유(凝乳) 한 덩이를 훔칠 수 있었다.
'응유' 라고 하면 뭔가 신비한 식품일 것 같지만, 사실은 걍 요거트다. 젖이 발효하면 요거트가 된다. 요거트가 더 발효하면 술이 되는데, 이게 아이라크다. 물론 마유주(馬乳酒)라고 하는 만큼, 말젖으로 만든다. 말젖은 다른 가축의 젖에 비해 굳지 않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계속 저어주어야 하지만, 치즈가 되지 않고 술이 된다.
▲ 사진 - 론니플래닛
젤메가 '입수' 한 응유는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아이라크를 만들다가 전쟁통에 방치되어 굳은 것일 수도 있고, 다른 가축의 젖일 수도 있다. 가능성은 적지만, 물에 섞어 먹으려고 준비한 전투용 비상식량일 수도 있다(분유의 말뜻은 이유식이 아니라 '가루젖' 이다.). 꿩대신 닭이라고... 그래도 젤메, 아이라크와 가장 비슷한 걸 구했다.
젤메는 응유 한 덩어리를 들고 타이치우드 진영을 빠져나왔다. 들어가다 잡히면 핑계가 있지만, 돌아오는 길에 잡히면 뭐라 설명을 하기가 애매하다. 따라서 적 초병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이때가 젤메에겐 가장 긴장된 순간이었을 것이다. 젤메는 무사히 돌아왔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테무진이 누워 있는 게르에 달려가 응유를 물에 개어 테무진의 입 안에 흘려 넣었다.
몇 시간동안 출혈을 견디고 처음 음료를 마신 테무진은 드디어 눈을 떴다. 그가 의식을 찾고 처음 본 건 젤메와 바닥을 적신 자신의 피였다. 테무진이 죽다 살아나서 처음 한 말은?
"다른 데 뱉을 수 없었나?"
너무하다 싶은데, 생각해보면 뭐 이해는 간다. 테무진은 젤메가 어떤 밤을 보냈는지 전혀 몰랐던 데다가, 피에 대한 미신도 있었으니.
"아픈 형님을 두고 차마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어서... 너무 걱정돼서요... 피를 보지 마시라고 계속 삼켰는데, 더 이상 들어갈 데가 없을 정도로 마셔서 어쩔 수 없이 옆에 좀 뱉었습니다."
"아, 음... 그래? 그럼 응유는 어디서 구한 거냐? 우린 그런 건 안 챙겨온 걸로 아는데?"
"아, 그거요. 타이치우드 놈들 진영에 건너가서 훔쳐온 겁니다."
"뭐... 뭐 색햐? 거기가 어디라고! 만약 네가 잡혀서 고문이라도 당했다 치자. 그래도 내가 몸져 누웠다고 발설하지 않았겠느냐?"
맥락을 잘 살펴보면, 테무진은 젤메의 충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테무진은 고문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상식선에서 인간을 판단했다. 물론 우리 역사엔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절개를 지킨 독립운동가들이 많지만, 이러한 극기를 자신이 선택하는 것과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테무진은 극기에 해당하는 충성을 바란 적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테무진은 '고문에 굴복할 지도 모르는' 젤메의 충성심을 의심한 게 아니라, '고문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을 감수한' 젤메의 무모함을 탓한 것이다.
최악의 컨디션으로 찌뿌둥했던 테무진과 달리, 보스가 살아난 걸 본 젤메는 기쁨에 겨워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전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신나게 설명했다. 엇... 테무진, 할 말이 없어졌다. 보통 지위가 높은 사람은, 특히 남자는, 아랫사람이 자기가 틀렸음을 증명하거나 자신의 예측을 벗어난 훌륭함을 보일 때 불쾌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민망한 순간에 테무진의 장점이 나온다. 그는 젤메를 잘못 판단했음을 즉시 인정하고 영원한 신의를 맹세했다.
"젤메, 넌 좀 짱이다. 내 목숨을 네가 살렸다. 오늘 일을 잊으면 나는 사람이 아니다. 너의 충성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마."
테무진과 젤메 사이의 온도가 훈훈하게 올라가던 그때, 타이치우드 수뇌부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5⃣
"도망가면 따라붙고, 도망가면 따라붙고... 저 새끼들은 전생에 거머리였나..."
"놈들의 추격을 벗어날 수 없는 건 우리와 놈들의 조건이 같기 때문이에요. 우리나 저쪽이나 군사에 더해 백성들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니 일정한 거리가 쭉~ 유지되는 거죠."
"당연한 말을 해서 뭐해?"
"만약 백성들을 버려두고 군사만 움직이면..."
"그런 말도 안... 으음 말이 되는데?"
타이치우드 수뇌부는 백성들을 버리고 튀기로 했다. 그러면 속도가 빨라지는데다가, 테무진 군은 백성들을 약탈하느라 추격속도가 더 늦어지겠지... 참으로 비겁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과연 비겁한 결정이었을까? '보호자' 와 '착취자' 는 크게 다른 말이 아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백성들은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존재했다. 기실 이 보호라는 것도 지배층의 기득권이 보장되고 난 후에 발동되는 혜택이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 하층민을 보호하는 상층계급은 없다. 가족주의를 외치며 직원들에게 군대식 충성을 요구하던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IMF때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가족' 을 자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봉건적이다.
테무진은 달랐다. 이건 타이치우드 지배층이 특별히 비겁한 게 아니라 테무진이 별난 경우다. 그의 위대함 대부분이 여기에 있다. 테무진은 자신과 울루스(백성,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백성들의 나라)의 관계를 지배와 복종이 아닌 상호계약으로 봤다. 백성에겐 테무진에 대한 의무가 생기면, 동시에 테무진 입장에선 그들에 대한 책임이 발생한다. 뭐랄까, 뜬금없을 정도로 근대적이다.
테무진이 배신자를 그토록 혐오한 이유는 그가 사회의 구성원리를 '약속' 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자기 자신도 백성들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착취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그냥 착취다. 테무진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에 굉장히 예민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사치를 멀리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가 된 후에도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나는 평생 누더기를 입고, 병사들과 같이 한데서 잤다. 언제나 백성들이 먹는 것과 똑같은 음식을 먹는다."
이런 소양이 가능한 이유는 경험 때문이다. 테무진은 출신과 배경에 의해 권력을 얻지 않았다. 그는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여러 계급을 거쳤고, 개인적 역량으로 부하들을 '모집' 했다. 그래서 자신이 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칸인지 계속해서 증명해야 했다. 테무진의 무리는 혈통집단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를 가진 이익집단이었다. 그렇다면 테무진의 부하들은 무엇을 위해, 어떤 이익을 위해 모여들었을까?
설마 테무진이 정복자의 운명을 타고난 영웅이고, 영웅의 위대한 여정에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 충성을 맹세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을까? 그럴 리가... 불안하고 가난한 초원에서, 좀 더 잘 먹고 잘 살아보자고 모인 거다. 테무진은 이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배신을 혐오하면서도, 부하들에게 '먹고사니즘' 을 넘어서는 충성을 요구한 적은 없다.
대표적인 예가 전쟁을 할 때의 태도다. 테무진은 패색이 짙어지면 자신을 위해 죽거나 다치지 말고 각자 살 길을 찾아 도망가라고 명령했다(물론 끝까지 남는 사람들을 쫓아내진 않았다.). 또한 병가지상사라는 말이 있듯이 싸우면 질 수도 있고 후퇴할 수도 있다. 그러니 안 되겠다 싶으면 명령이 없어도 알아서 도망가야 한다. 테무진의 병사들은 목숨만 살아 돌아올 수 있으면 승리, 약탈품, 군 보급품등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었다. 이건 권고사항이 아니라 군율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테무진의 이런 태도가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궁극의 충성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테무진의 부하들이 한 말 중에 이런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물을 가리키면 물에 뛰어들고, 불을 가리키면 불에 뛰어든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날이 밝았다. 타이치우드 수뇌부와 군사들은 말 그대로 '튀었다'. 버림받은 타이치우드 백성들은 그냥 그 자리에 눌러앉아서 운명을 기다렸다. 자포자기 상태였다. 도망가봐야 잡히고, 싸워봐야 가망이 없다. 타이치우드 진영에 들어온 테무진의 군대... 절망의 순간, 테무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놀라 도망한 백성들일 뿐이다. 모두 살려준다. 자기 군사들에게 가든, 야영지로 돌아가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놓아주도록 한다."
주르킨 정벌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을 제외한 적의 지배층에만 책임을 물겠다는 뜻이었다. 뜻밖의 '사면' 을 받은 타이치우드 백성들이 짐을 꾸려 자기네 병사들이 도망한 곳을 향해 피난행렬을 이룰 때였다. 저 멀리, 웬 붉은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고개에 올라서서 울부짖고 있는 게 아닌가?
"테무진, 테무진! 테무진이다! 테무진을 찾았다!"
'뭐지, 저 여자는? 머리에 꽃 꽂았나...'
테무진은 병사 하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 저 여자 말이야. 가서 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 물어보고 와."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