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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라(3)
남에게 주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안겨 주실 것이다
2016년 7월 24일 / 대예배 / 누가복음 6:27-38
눅 6:27-36 / 모두 내 말을 들으라. ➊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➋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 28) ➌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➍ 너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29) ➎ 만일 누가 네 한쪽 뺨을 치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 대고 겉옷을 달라 하거든 속옷까지도 주라. 30) ➏ 네게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주고, 누가 네 것을 가져가거든 도로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 31) ➐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가 먼저 남에게 해주라. 32) … 35) ➑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보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37) ➒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➓ 남을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만일 너희가 남에게 주면 너희는 그것을 다시 얻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대로 되돌려 받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보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일이 될 수 있으나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 특히 천국 백성들의 경우는 그러한 세상 사랑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는 것은 칭찬받을 것이 전혀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해야 합니다.
♬ 패티김 작사 : 길옥윤 작곡의 ‘사랑이란 두 글자는’이라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사랑이란 두 글자는 외롭고 흐뭇하고 사랑이란 두 글자는 슬프고도 행복한 것
사랑이란 두 글자는 씁쓸하고 달콤하고 사랑이란 두 글자는 차갑고 따뜻한 것
사랑하는 기쁨에 태양이 빛나고 너무 행복하고 사랑하는 슬픔에 달빛이 흐려지네
가끔은 쉽고 어떨 땐 아프고 가끔은 또 너무나도 흥분돼 사랑이란 두 글자는 길고도 짧은 얘기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슬픔도 있고 아픔도 있지만 기쁨이 태양처럼 빛나고 남들이 느껴보지 못하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라’는 주제를 가지고 3주째 예수님께서 간곡하게 명하신 말씀들을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예수님이 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왜 그렇게까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우리들이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여러 가지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차원을 넘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차원을 넘어서 우리 자신들이 잘 되기를 원하셔서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며 ②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며 ③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며 ④ 용서를 받을 것이며 ⑤ 남에게 주면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사랑하라는 사랑은 그냥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이기를 원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있는 가지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요 15:10-12 / 너희가 내 말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사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며 그분의 사랑 안에 사는 것과 같다. 11)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와 같은 기쁨이 너희에게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 너희 기쁨의 잔이 넘칠 것이다.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참고적으로 불교의 주장을 잠시 봅니다. / 불교는 지혜를 추구하는 종교이지만 지혜와 함께 불교의 특징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자비이다.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양 날개와 같아서 어느 것 하나도 따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가장 잘 닦은 사람은 가장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불교에서의 자비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랑은 나와 남을 이미 분별한 상태에서 베푸는 것이지만, 불교의 자비는 그렇지 않다. 누구든지 나와 한 몸이라고 생각하고 자비를 베푼다는 ‘무연대자, 동체대비(無緣大慈, 同體大悲)’라는 말처럼 나와 인연이 있든 없든 모든 중생을 한 몸으로 생각하고 한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기독교는 자칭(自稱) 타칭(他稱)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대단히 사랑이 많고 사랑을 많이 실천하며 산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처럼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가 아니라 설령 유대인 랍비라든가 대제사장의 교훈에 의한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세우신 기준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고 너무 고상(高尙)해서 실천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아니 전혀 인간으로서는 지키기가 불가능한 계명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다.
요 14:6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지 못한다.
그러나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도우심을 받지 않고는 결코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을 받지도 행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에 관심을 갖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 니고데모는 옥토에 뿌려진 씨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롭게 거듭나는 은혜를 체험했을 뿐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중책을 맡아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요 3:1-6 / 어느 날 밤이 이슥할 무렵 바리새파에 속한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께 회견을 청해 왔다. 2) `선생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선생님을 보내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이신 표적이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 모두는 새로 거듭나지 않으면 니고데모와 같은 율법학자요 지도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거니와 하나님 나라에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음에 뜨거운 결단을 기초로 하여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면 능히 거듭날 수가 있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의 계명도 지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실천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은 마땅히 실천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서 자신들의 잘못을 옆 사람에게 전가하는 본성이 변질된 인간의 상태가 나타나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교훈은 먼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나누어 받아야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벧후 1:2-8 /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더욱더 받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배우십시오. 3) ➊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지니신 위대한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생활을 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➋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선한 품성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4) ➌ 그리고 그 같은 권능으로 놀라운 은총을 풍성하게 내려 주시기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정욕과 부패에서 해방되어 그분의 품성을 나누어 받게 된 것입니다. 5) 그러나 이런 은사를 받아 간직하려면 ➀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도록 덕을 쌓아야 합니다. ➁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6) ➂ 더 나아가 여러분은 욕망을 버리고 인내와 경건을 몸에 익히며 ➃ 기쁨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7)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과 즐겁게 사귈 수 있고 친밀해지며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8)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익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 본문 누가복음 6장 27절에서 보듯 예수님은 먼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시작부터 그 차원이 아주 높습니다. 일반적으로 원수(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응어리진 마음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원수라는 말 자체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실 어느 종교에서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그 자체부터 모순일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머지않아 자신이 그것을 십자가 위에서 실행하실 예수님이시기에 제자들에게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의 사랑을 맛본 사람만이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27하)고 하셨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선하게(착하고 어질게)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앞서 하신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일반적인 권면의 구체적인 적용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너희를 저주(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람)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28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주하는 것은 그저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것입니다. 미움이 커지면 저주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미움이 커져서 저주까지 하는 자에게는 그만큼 더 크게 좋은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즉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이것은 자기가 저주 아래 놓인 자이었음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의 복을 거저 얻었음을 깨달은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용서와 죄의 탕감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계산을 좀 하려고 합니다.
마 18:21-22 / [용서의 교훈]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이렇게 교훈을 해 주셨습니다.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의 돈을 탕감하였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을 만나자 멱살을 잡고 당장에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그 사람이 엎드려 조금만 시간 여유를 달라고 빌었으나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다른 종들이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고해 바쳤다. 그러자 왕은 용서해 주었던 그를 불러서 말하였다. ‘이 악독하고 뻔뻔한 놈아! 네가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겨 내가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러니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왕은 몹시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보내고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게 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탕감받은 은혜,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화폐로 환산해 봅니다. 1달란트(금으로 20~40kg)는 6,000데나리온으로 6,000일 즉 16년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하루의 품삯을 7만원으로 계산할 때 1달란트는 4억 2천만 원입니다. 그런데 1달란트도 아닌 일만 달란트라도 했으니 숫자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 더욱 편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용서해주라고 요구하시는 1백 데나리온으로 7백만 원입니다.
참고로 용서하지 않으면 분노로 인해 두통, 소화불량, 불면증, 우울증 등 심인성 질환을 얻게 됩니다. 미움은 죄로 타락한 사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탄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미움으로 가득한 사람, 누구를 미워하고 사는 사람, 용서하지 못하고 품고 사는 사람은 지금 이유가 어떻든지 사탄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면 좋고 안 해도 상관없는 선택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내 생각에는,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돼. 용서 할 수가 없다, 아니 못해 … .’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저럴 수 있어. 어머니가, 자식이, 형제가, 친구가 … 저 사람 왜 저래. 집사, 장로, 목사, 교회가 왜 그래 … .’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정의감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자기는 경건하며, 자기는 잘못이 없고, 자기의 판단은 정의롭다는 교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용서하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의 쓴 뿌리는 결국 인체를 산성화시켜서 효소의 활성도를 떨어뜨리며 각종 병원균 때문에 저항력이 감소되어 병적인 체질이 된다고 합니다. 즉 평생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심을 품고 살아간다면 … 마음에 미움을 가득 품고 살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용서는 이해하며 그 사람의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acceptance) 것입니다. ‘그래 그렇지 뭐’하며 받아들이면 됩니다. 누가복음 23:34에 나오는 말씀처럼 “아버지, 이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십자가 못 박는 자들을 이해하며, 사랑해 주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너의 간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마 16:19 /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마 18:18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땅에서 매어 놓은 것은 무엇이나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어 놓은 것은 무엇이나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 예수님은 계속해서 ‘너희를 모욕(깔보고 욕되게 함)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28하)고 하십니다. 이것은 어쩌면 원수 사랑의 가장 확실한 표현이고 증거일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좋은 일을 하고 나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은 속으로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사실은 마음에는 없으면서 마지못해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하는 기도는 싫으면 안 해도 누가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원하거나 좋아하지 않고는 하지 않는 일입니다.
따라서 나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원수 사랑의 가장 확실한 표현이고 증거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사랑의 모습 중 최상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까지 끌어들여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기도는 자녀들을 사랑하는 부모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은 모든 자연적인 본능과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 29-30절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가르치시며 요구하시는 사랑의 다른 면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눅 6:29-30 / 만일 누가 네 한쪽 뺨을 치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 대고 겉옷을 달라 하거든 속옷까지도 주라. 30) 네게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주고, 누가 네 것을 가져가거든 도로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하나 달라면 둘을 주는 기계적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역설적인 반항이나 비아냥거림도 아니고 위장된 보복 심리의 표출도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단순한 너그러움도 아닙니다. 피해를 끼친 자에게 한 차례의 너그러움을 보이고는 더 이상 그를 상종하지 않거나 그를 잊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나에게 피해를 입힌 상대방에 대한 변함없는 관심입니다. 비록 원수 같은 자라 할지라도 그를 포기(하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림)하거나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 서서 그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입니다.
내 뺨을 쳤고 내 옷을 빼앗았으며 내 돈을 꾸고 갚지 않은 사람에게서 다시는 같은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그를 피하거나 기왕에 잃어버린 것들과 함께 그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또 한 대 맞게 되고 다른 옷도 빼앗기게 되며 더 많은 돈을 떼이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에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를 그의 입장에 서서 진지하게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이 진정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참된 사랑이란 희생을 동반하는 것임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뺨을 맞는 것은 인격적 피해를 입는 것이고 옷을 빼앗기고 돈을 떼이는 것은 물질적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그러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더욱 사랑하며 베푸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백성을 한 번도 포기하신 일이 없이 한결같은 사랑으로 찾아오곤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런 사랑을 분명히 우리들에게도 보이셨습니다.
▶ 31절의 말씀인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갑자기 사고의 흐름을 흐트러뜨리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상호평등주의를 내세우는 것 같은 말씀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단순한 상호평등주의의 구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남에 대한 최선의 관심과 세심한 배려를 권면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남을 대접하되 내 식으로 내가 편한대로 내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의 필요에 따라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인격과 그의 의지와 그의 감정과 그의 자존심이 최대한 존중되도록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대접 받는 위치에 있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대접 받기를 원하듯이, 상대방도 그가 가장 좋아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대접 받게 하려는 예민한 관심과 섬세한 배려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 32-34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가르치시는 사랑의 특성을 새롭게 드러내 주십니다.
눅 6:32-34 /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해서 너희가 상을 받을 줄 아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33) 너희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그것이 그렇게 장한 일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하고 있다. 34) 만일 너희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돈을 꾸어 준다면 그게 무슨 선한 일이겠느냐? 악한 사람들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꾸어 준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은 대가성 없는 사랑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자기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며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는 것은 이 세상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해야 할 사랑은 이 세상의 그런 계산적 사랑의 기준을 훨씬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가성이 없는 사랑이 순수한 사랑이고, 순수한 사랑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 35-38절은 오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론을 담고 있습니다.
눅 6:35-38 / ➑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보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37) ➒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➓ 남을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먼저 35절에서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하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의 사랑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선대하며"라고 하신 것은 사랑의 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한 것은 대가성 없는 사랑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상(보상)이 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상(보상)보다 더 좋은 것을 언급해 주셨습니다.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상보다 더 좋은 것, 아니 상중에 가장 큰 상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 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바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최고의 상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도리를 말씀하시는 데로 옮겨가십니다. 그 도리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닮아야 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그리고 이 말씀은 자연스럽게 36절의 권면으로 연결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그리고 37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자가 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비판(심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아 비판(심판)하고 정죄하는 일에 있어서는 느리고 신중하되 용서하는 일에는 신속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가 누릴 상도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 앞에서 비판과 정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비판(심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우리가 남에게 너그러우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그러우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너그러우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너그러움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남에게 인색하고, 성질이 나쁘고, 쩨쩨하고, 이기적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색하고, 성질이 나쁘고, 쩨쩨하고, 이기적으로 대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 마지막 38절은 37절의 연속이면서 또한 본문 전체에 대한 결론입니다.
눅 6:38 / 만일 너희가 남에게 주면 너희는 그것을 다시 얻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서 차고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너희에게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대로 되돌려 받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라"고 하신 것은 일차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물질을 거절하지 말고 주되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한 본문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권면들을 요약한 것이기도 합니다. 즉 원수에게까지 사랑을 주되 억지로가 아닌 `마음을 다하여 주고, 사람에게서 대가나 보상이나 칭찬이나 인정을 바라지 말고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여기서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다윗처럼 우리의 모든 행동이 오직 궁극적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의 결산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최후의 심판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랑을 베푸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갚으시되 어떻게 갚으실 것인지를 설명하는 그 다음 문장은 하나의 그림입니다.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 문장 안에서만도 몇 단계의 동작이 보입니다. 먼저 후히 되고, 되에 담긴 것을 누르고, 그것을 또 흔들어 가라앉게 하고, 가라앉은 만큼 더 담되 넘치도록 담아 안겨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것입니다.
이렇게 곡물을 파는 사람이 되로 곡물을 달아주는 당대의 관행적 방법을 어떤 주석가는 다음과 같이 조금 더 자세하게 묘사했습니다. 파는 사람은 두 다리 사이에 됫박을 두고 바닥으로 몸을 구부립니다. 그리고는 먼저 됫박의 사분의 삼만 채우고는 곡식알들이 잦아들도록 원을 그리며 잘 흔듭니다. 그리고는 됫박의 꼭대기까지 새로 채우고 다시 한 번 잘 흔듭니다. 그 다음에는 됫박 속 곡물 전체를 두 손으로 세게 꾹꾹 누릅니다. 끝으로 그 위에 원추형으로 곡물을 또 쌓습니다. 이때 곡식알 하나라도 더 얹히도록 두 손으로 조심스레 두들겨가며 쌓습니다. 이렇게 됫박에 곡식알 하나도 더 얹힐 수 없을 때까지 쌓아서 사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행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복을 어떻게 주셔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우리 삶의 이 구석 저 구석 빠짐없이 꾹꾹 눌러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렇게 뿌드득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복 받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않으며, 구하는 자에게 주며,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않으며, 칭찬 받을 생각을 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같아 보입니다.
그렇게 살자면 손해만 보고 너무나 괴롭고 억울하리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속이 터지고 울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해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꾹꾹 눌러 퍼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누리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세상 사람으로서는 행하기 힘든 사랑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복을 우리에게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로 하여금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과 19장에 나오는 세리장으로 부자였던 삭개오에 대한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부자 청년 | 부자 삭개오 |
① 영생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옴. ②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함. ③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다가 네 재물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심. ④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침울한 표정으로 가버렸다.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 ⑤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보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을 터인데 … ⑥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 ①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②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눅 18:13). ③ `삭개오야! 빨리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무르겠다.'고 하심. ④ 삭개오는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⑤ 삭개오는 주님 앞에 일어서서 말하였다. `선생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세금을 누구에게 더 부과한 것이 발견되면 제 돈으로 네 배를 갚겠습니다.' 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 집이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의 자손중의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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