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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 한 사람 … (1)
2020년 11월 8일 / 눅 11:9-13
눅 11:9-13 / 기도도 이와 같다. 구하라, 주실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된 사람으로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느냐?' 12) 아들이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1.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 / 의인 한 사람(중보기도자)을 찾으시는 하나님
성경에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선지자는 예레미야이다. 예레미야는 B. C. 626년 요시야 왕 13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지자가 되었다(렘 1:2, 2:3) 그 무렵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범죄가 극에 달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렘 2:8 / ① 너희의 제사장들은 내게 물어 보는 일이 없었고 ② 백성을 가르치는 스승(레위사람)들도 내가 준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다. ③ 백성의 지도자들도 언제나 내게 대항하여 범죄하였고, ④ 선지자들도 바알신의 이름을 내걸고 떠들어 댔다. 어느 누구도 내게 묻거나 내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한결같이 우상을 숭배하고 전혀 도와줄 수 없는 우상에게만 도움을 요청하였다.
▶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바리새인들도 그러했다. 많은 분들이 지금도 과거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아니 우리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과연 기도였는가? 누구의 기도가 상달되었나?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나? 바리새파 사람이 성전에서 서서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듯이 이들의 종교 행위(?)는 지금의 우리들이 흉내조차 내기가 쉽지 않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회개기도를 드렸다. 예수님께서 내리신 판정은 이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관원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외형적으로 기도하는 시간도 많았지만 중언부언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였다. 그뿐 아니라 늘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며 율법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모른다고 하셨고,, 유다 백성들이 율법은 알고 있지만 율법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이 없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있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중상모략을 하며 핍박까지 하더니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 예레미야 선지자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장과 3장에서 유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4장에서는 그 죄악으로 인해서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선포하셨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범죄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채찍을 내리칠 수밖에 없으셨다.
이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제안을 하셨다.
렘 5:1 / 너희는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빨리) 의인을 찾아보아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모든 광장(廣場)을 둘러보면서 진실한 사람을 찾아보아라. 너희가 거기서 법대로 사는 사람이 있어서,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공의 -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을 단 한사람이라도 찾는다면 내가 그 성읍 전체의 죄를 용서하겠다.
‘공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남보다 더 의롭고, 남보다 더 정직한 것이 공의일까? 사람들은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누가 더 옳고 그르냐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의 세운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공의’란 헬라어에 보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치’를 의미한다.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마 5:48)는 ‘예수님의 말씀+예수님처럼 해야 한다’(빌 2:5-8)는 것이다.
이 말씀의 배경 / 주전 7세기로 이미 120여 년 전에 북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만 숭배하다가 결국 하나님께서 ‘앗수르’라는 채찍을 들어 심판하심으로 그들은 멸망했는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것은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죄의 결과였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멸망을 당한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계속해서 그것을 강조하면서 유다 백성들에게 그 북 이스라엘을 거울삼아 ‘망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외치는데도 어리석게 남 유다는 깨닫지 못하였다. 한 두 사람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 전체가 정신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여전히 죄악과 타락의 길을 걸었다. 어느 누구 하나 바른 신앙과 바른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 않았다. 백성들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망할 지경에 이르자 오히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급하게 찾으셨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한 사람’ 즉 예루살렘 성안에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을 찾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한 사람’을 찾으면 예루살렘 성을 멸망하지 않고 용서하겠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저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님이 비유하신 것처럼 말이다(눅 18:9-14).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 때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제안대로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찾아보려고 생명까지 걸고 회개를 외쳤다. 멸망으로 치닫는 나라를 살려 보려고 몸부림쳤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의인 10명이 없어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보다 남쪽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의인 10명도 아닌 1명이 없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한다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 10명보다 쉬운 하나님의 제안이었다.
의인 ‘한 사람’만 찾으면 지금까지 지은 죄로 인하여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저들을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예레미야는 목이 터지도록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외쳤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심판에 관한 예언을 듣기 싫어했다. 자기네들 귀에 듣기 좋은 말씀만 원했다. 오히려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 했다. 이러한 모습에 예레미야는 더욱 슬퍼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 이러한 일들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예레미야처럼 에스겔도 심판을 가로막아 기도하는 의인 한 사람을 찾았다(겔 22:27-30). 지도층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선지자들은 거짓 예언만을 외쳤다.
겔 22:28-29 / ❶ 그런데도 이 나라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죄악을 회칠하여 덮어 놓으려고 듣기 좋은 말만하고 있다. 그들은 거짓으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며 그럴듯하게 꾸며대며 거짓 예언을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 내가 그들에게 부탁한 일이 없는데도 내 이름을 걸고 설교한다고 떠들어댄다. 순전히 기만적인 망상들을 퍼뜨린다. 29) ❷ 이 나라의 지도자와 학자들은 탄압과 강탈을 일삼고 있다. 백성의 스승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이들을 착취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 갈데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처럼 재앙이 멈추기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의인 한 사람을 찾으셨다.
겔 22:30 / 나는 혹시라도 민족을 위하여 무너진 성벽의 틈 사이로 뛰어들며, 내가 이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내 앞에 막아서서 멸망의 위기에 놓인 네 백성을 구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이라도 있을까 두루 찾아보았다. 그러나 나는 한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 그렇다면 예루살렘을 향하여 울부짖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기도는 헛수고였을까?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기도는 헛수고였을까?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하였으니 예레미야의 수고가 헛된 것일까? 에스겔 선지자의 부르짖음이 헛된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을 비롯하여 남아있는 하나님의 종들의 눈물어린 기도를 들어주셨다.
렘 31:16-18 / … 이제 너는 탄식을 그치고 울음도 그쳐라. 네가 자식들을 헛되게 키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이제 원수의 나라에서 고국산천으로 돌아 올 것이다. 17) 네게는 희망과 미래가 있다. 네 자식들이 이제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내가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네게 주는 약속이다.’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에브라임 백성이 슬프게 탄식하며 애원하는 소리를 내가 잘 들었다.’
▶ 사랑하는 에브라임(남유다)이 바벨론에 의해 무서운 징계를 받은 것을 마음 아파하시며 저들과 새로운 언약을 일방적(一方的)으로 맺었다.
렘 31:31-34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 백성아, 너희는 똑똑히 듣고 알아라.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 전체를 상대로 새 계약을 체결하겠다. 32) 물론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도 계약을 체결한 일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것과 아주 다른 새 계약이다.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나는 그들을 데리고 나왔다. 내가 이렇게 그들을 해방시키던 날에 그들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나는 그 계약을 충실하게 지켜 주었으나 그들이 일방적으로 그 계약을 깨뜨려 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미워하고 징계하였다. 33) 그러나 이제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체결하려는 새 계약은 계약 자체가 완전히 옛 것과 다를 것이다. 이 계약은 내가 각 사람과 개인적으로 체결하겠다. 나는 이제 나의 새 계약을 돌판에 써서 그들에게 주지 않고 그들 각자의 마음과 양심에 새겨 놓겠다. 나는 이렇게 내 법을 그들의 가슴속에 새겨 놓고 그들의 부드러운 살과 핏속에 넣어 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도록 하겠다. 34) 그러면 아무도 다른 사람을 훈계할 필요가 없고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여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가장 친한 사람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내가 누구인가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나를 알 때가 오면 나도 모든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을 용서하고 더 이상 인간의 악행과 허물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하는 말이다.”
● 에스겔 선지자를 통한 말씀도 예레미야를 통한 말씀과 동일하였다(겔 11:19-20).
●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식을 하면서 새언약을 언급하셨다.
마 26:28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개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새언약을 맺으려고 예수님은 본문을 통해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눅 11:9-13 / 구하라, 주실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어주실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 13)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2.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한 사람’은 사람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죄를 멀리하여) 귀하게 쓰이는 자이다.
▶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면 어느 누구라도 위대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곳,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뽑으셔서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신다. 또 아모스 선지자는 양 치는 목동이요, 뽕나무를 배양하며 뽕따서 밥 먹고 사는 농부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극히 평범한 그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선한 역사를 이루어 가셨다.
약 5:17-18 / 엘리야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18) 다시 비가 오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자 비가 쏟아져서 초목이 다시 푸르게 되고 들의 곡식들이 자라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엘리야를 우리와 전혀 차원이 다른 슈퍼맨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엘리야는 우리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 아니 오히려 우리들보다 별 볼일 없는 길르앗에 우거하던 촌뜨기였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슈퍼맨 같은 능력의 사람을 쓰시지 아니하고 오히려 별 볼일 없는 평범한 ‘한 사람’을 쓰시기를 원하신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나 요셉과 같은 ‘한 사람’을 찾으시며, 그 ‘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
딤후 2:20 / 부잣집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어서 값비싼 그릇은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이고 값싼 그릇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데 쓰입니다.
위의 20절은 21절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를 든 것이매 21절을 주목해야 한다.
딤후 2:21 / 만일 그대가 죄를 멀리한다면 순금으로 만든 그릇, 곧 집안에서 가장 비싼 그릇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대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 나무그릇들은 엄연히 질적(質的)인 차이가 있지만 그런 것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네가 금그릇이냐? 은그릇이냐? 질그릇이냐? 나무그릇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네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먼저 불의한 일에서 떠나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누구든지 금 그릇처럼 귀하게 사용될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달리 자기를 깨끗하게 한 사람이 제일 귀한 그릇이라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잘못 알고 있다. 사람들은 무턱대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했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모르고 있다. 능력이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적인 기준을 그대로 하나님의 일에도 적용하려고 하는 우(愚)를 범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형적인 준수한 외모만을 보았다. 사실 사울 왕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 외모로 볼 때 가장 뛰어난 남성이었다. 이스라엘에 그보다 잘생긴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키가 커서 다른 사람들이 그 옆에 서면 어깨 아래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사람이 보는 것은 달랐다. 얼마 가지 못해 아니 2년도 못 되어 사울 왕의 거침없는 행동은 하나님의 눈 밖에 벗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버림받은 왕으로 삶을 마쳤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사무엘 선지자마저 심지어는 하나님께서도 사울 왕에게 실망하고 돌아섰다.
슬픔에 젖어 있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 기도를 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실수를 한 사무엘 선지자(삼상 16장) / “너는 사울 때문에 언제까지 슬퍼할 작정이냐? 나는 이미 그를 버렸다. 그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다. 너는 이제 올리브기름을 뿔에 가득 채워 가지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라는 사람을 만나라. 나는 그의 아들 가운데서 새 왕이 될 사람을 하나 골라 놓았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즉시 길을 나섰다.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도 제사에 초대하고 그들 역시 몸을 씻은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오게 하였다. 이새가 자기의 아들들을 거느리고 성소로 들어서는데, 맨 먼저 장자 엘리압이 사무엘의 눈에 띄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속으로 ‘그가 틀림없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아들이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그의 용모가 특출하고 키가 큰 것만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사람은 눈에 뜨이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본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대목에서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새의 아들들을 면접하였더라면 이러한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새는 엘리압의 뒤를 이어 아비나답 그리고 삼마를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 아들도 여호와께서 뽑으신 사람이 아니오.”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이새가 자기 아들 일곱을 모두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매번 “이 아들은 여호와께서 뽑으신 아들이 아니오.” 하였다. 그러더니 사무엘이 이새에게 물었다. “그대의 아들은 일곱뿐이오?” 이새가 대답하였다. “막내아들이 아직 남았는데 그 아이는 지금 들에서 양 떼를 지키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명하여 사람을 보내어 막내아들을 데려왔다. 그는 눈에 총기가 있고 혈색 좋은 청년이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바로 내가 택한 사람이니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이에 사무엘은 가져온 뿔에서 올리브기름을 다윗에게 붓고, 그의 형들이 보는 앞에서 왕으로 삼았다. 그 순간 여호와의 성령께서 다윗을 사로잡고, 그 이후로는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함께 계셨다.
사도행전 13장에서 이렇게 보충설명을 하였다.
행 13:21-22 / 이때 백성들이 왕을 세워 주실 것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셔서 40년 동안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22) 그리고 그를 물러나게 하신 뒤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고 칭찬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무엇보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 즉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자기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마음과 정성, 힘을 다하여 순종할 때에 귀한 그릇이 된다.
신 8:2-3 /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 돌아보십시오. 그 목적은 여러분의 고집을 꺾어 겸손하게 낮추어 놓는 한편, 여러분이 과연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 여러분의 마음을 시험하여 알아보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3) 주께서 여러분의 고집을 꺾으실 때에 여러분을 굶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여러분도 몰랐고 여러분의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주께서 여러분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주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요셉이나 다윗은 무슨 능력이나 자격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 아니었다. 요셉이나 다윗뿐일까?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을 보시라. 아니 가깝게는 우리 자신과 옆에 있는 분들을 보시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우리가 무슨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시 147:5)께서 겨자씨만한 능력이 필요하실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오직 성결된 사람이다.
성결한 삶은 한꺼번에 또는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성결하게(to be sanctified)” 된다. 성결한 삶을 위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깊은 교제(交際)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지켜 나가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마태복음 6:33에서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시며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교훈하셨다. 한국어 성경에는 없지만, 영어성경에는 33절 서두에 ‘그러나(But)’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것은 33절 앞에 나오는 내용과 달리하기 위해서 사용한 단어이다.
33절 앞부분인 25절 이하를 보면 먹고, 마시고, 입는 의식주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의식주 문제를 이야기하며 두 가지 예화를 소개하고 있다. ❶ ‘공중에 나는 새’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공중에 나는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새들을 살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❷ ‘들의 핀 백합화(원문에는 잡풀)’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들에 핀 잡풀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돌보시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너희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도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방황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물질, 시간, 재능과 은사도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문제에 깊숙이 관여해주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때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책임져 주실 것이다.
▶ 그렇다. 이제라도 하나님께 기도하자.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결케 되기를 위해 기도하자.
눅 11:13 / 너희가 비록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요 14:12-17 /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행하는 일을 그도 행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일도 이룰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나 구하라. 내가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 14) 그렇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말을 지키라. 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며,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자를 너희에게 보내 너희와 영원히 같이 계시게 할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영이다.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일 수 없다. 세상이 그분을 찾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지금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훗날에는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 금과 은을 귀히 보고 나무와 흙을 천히 보는 것은 세상적인 기준이다. 목사나 장로는 귀하게 보고 집사나 일반교인은 낮게 보는 것은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귀한 그릇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직분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쓰임 받느냐?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느냐?”이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하인들처럼 말없이 순종한다면 귀한 일군(축복의 통로, 기적의 통로)이 될 수 있다.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이 마음껏 쓰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이 귀한 일군의 태도이며, 최선을 다하여 일하고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 입니다.”(눅 17:10)라는 고백을 할 때에 하나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일군이 될 것이다.
3.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자
1. 다니엘과 친구들이 위기일 때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합심하여 기도했다.
단 2:1-13 / 느부갓네살왕이 바벨론을 다스린 지 2년째 되던 해 어느 날 밤에 꿈을 꾸고 마음이 매우 심란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2) 그래서 느부갓네살왕은 자기가 꾼 꿈을 해몽하라고 점쟁이와 마술사와 요술쟁이와 점성가를 불러들였다. … 3) 왕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엊저녁에 꿈을 꾸었는데 도무지 마음이 심란하여 견딜 수가 없구나. 그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해 다오' 4) 그러자 점성가들이 아람 말로 아뢰었다. ` … 소인들에게 임금님께서 꾸신 꿈을 말해 주시면 소인들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5) 왕이 점성가들에게 말하였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너희들이 내게 그 꿈까지 말해 주어야 한다. 물론 해몽까지도 말이다. 만일 내가 꾼 꿈을 알아내어 해몽하지 못하면 너희의 사지를 찢어 버리고 또한 너희 집까지도 모조리 거름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 6) 그러나 너희가 내가 꾼 꿈을 알아내어 해몽까지 해준다면 내가 푸짐환 상을 내리겠다. 또한 많은 상금도 주고 큰 영광도 누리게 하겠다. … 7) 그들이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 `임금님, 아룁니다. 임금님께서 꾸신 꿈을 말씀해 주소서. 그리하면 소인들이 임금님께서 꾸신 꿈을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8) 그러자 왕이 입을 떼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꾼 꿈을 너희가 내게 말해 주어야 한다. 이제 보니 너희가 시간을 벌려고 이러고 있구나. 내가 꾼 꿈뿐만 아니라 해몽까지 하라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지 않았느냐? 내가 생각을 바꾸기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냐? 9) 내가 꾼 꿈을 말해 주어야만 너희가 내 꿈을 해몽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알 것 아니겠느냐? 만일 내가 꾼 꿈을 알아내지 못할 때에는 너희를 가차없이 처형해 버리겠다.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엉뚱한 말을 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라.' 10) 점성가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임금님, 이 세상에서 임금님께서 지금 아시고 싶어하는 것을 말씀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신들이 아니면 그 누구도 임금님께 말씀드리지 못할 줄로 압니다. 곧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은 그 누구도 대답해 드리지 못할 줄로 압니다.' 12) 그러자 왕은 분통이 터져 화를 벌컥 내며 바벨론 안에 있는 모든 현인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13) … 죽이라는 명이 내려지자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이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요구가 이론적으로 맞는 요구인가? 만일 다른 사람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그렇게 요구했다면 느부갓네살 왕은 어떻게 대답을 하였을까?
다니엘 2:16-23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특별한 꿈을 꾸었다. 사실 꿈이나 환상, 이상 또는 묵상 등은 해몽의 은사를 받기 전에는 바로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하여 해몽케 하려고 작정하셔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보이신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왕은 보통 꿈이 아니기에 박사와 술객을 불러서 그 꿈을 알아맞히고 또 해몽까지 하라고 윽박지른다. 박사들은 기가 막혔다. 꿈을 말해 주어도 해몽하기가 쉬운 것이 아닌데, 남이 꾼 꿈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꿈을 먼저 말해달라고 한다. 그러자 왕은 분노해서 바벨론의 모든 박사와 술객을 다 죽이라고 하였다.
다니엘도 박사도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다니엘은 시위대장 아리옥을 통해 왕 앞에 나아가 시간을 주면 알아내겠다고 했다. 다니엘이 믿은 게 무엇일까? 세상 지혜일까? 어느 책에 기록되어 있기에 찾아보겠다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다니엘이기에 친구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그 꿈을 알아내고 해몽도 해 주었다(단 2:31-43).
다니엘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이라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근간으로 해서 기도했다. 믿음의 기도는 큰 능력을 발휘하였다. 밤새워 3친구와 더불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왕에게 주신 꿈과 해몽을 가르쳐주셨다.
단 2:14-19 / [꿈의 뜻을 보이시는 하나님] 왕실 시위대장 아리옥이 왕의 명령대로 바벨론의 현인들을 잡아 처형하려고 나갈 때 다니엘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슬쩍 물어 보았다. 15) `시위대장님, 임금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준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시위대장이 그 자초지종을 일러주자 16) 다니엘은 즉시 왕 앞으로 나아가 `임금님, 말미를 주시면 임금님께서 꾸신 그 꿈을 알아내고 또한 해몽까지 해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17) 다니엘은 집으로 돌아와 세 친구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18) 그리고, 그 친구들에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어여삐 보아 달라고, 기도드리며 하나님께서 그 꿈과 해몽까지 알려 주셔서 자기들이 다른 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지 않도록 간청하자고 일렀다. 19) 그날 밤 다니엘이 기도하는 데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왕이 꾼 꿈의 비밀을 알려 주셨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합심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어여삐 보아 달라고 기도드리며 하나님께서 그 꿈과 해몽까지 알려 주셔서 자기들이 다른 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지 않도록 간청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꿈을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으며 그 꿈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해몽까지 해 주셨다.
뒤이어 해몽을 해주자 왕인 느부갓네살은 ❶ 땅바닥에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을 하고 ❷ (하나님께)제사를 올릴 제물과 분향제물을 다니엘에게 갖다 주라고 신하들에게 명한 후에 다니엘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신들 가운데서도 뛰어나신 신이요 또한 모든 왕들을 당신 뜻대로 다스리시는 분이구나. 그러하시기에 그 비밀스런 일을 밝히 드러내시지 않는가! 그대가 이 비밀스런 일을 밝히 드러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대가 섬기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겠는가!” ❸ 이어서 왕은 다니엘을 높은 벼슬자리에 앉히고 여러 가지 선물을 주었다. 다니엘을 바벨론의 각 지방 책임자로 책봉하여 바벨론의 현인들을 관할하는 자리에 앉혔다. 다니엘은 왕에게 요청하여 그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 관리로 일하게 하였고 자신은 왕실에 남아 일을 보았다(단 2:46-49).
이 일로 인하여 다니엘과 그 세 친구는 나라를 잃고, 예루살렘 성전마저 파괴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그야 말로 캄캄한 절벽과 같은 암흑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었을 뿐 아니라 70년만에 이스라엘을 회복케 하는 초석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그렇게도 원하셨던 이방나라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지혜와 하늘의 비밀을 아는 은사를 받자.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의로운 삶과 믿음의 기도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지만 믿음 속에 철저한 경건한 삶과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통해 필요한 은사를 주시고 우리 또한 감당할 수 있게 된다.
2. 무시로 기도하되 자신만의 기도시간과 장소를 가지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한 사람은 위험에 빠질지라도 경건을 유지할 수 있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신앙세계에서 우연히 생기는 기적이란 없다. 하나님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긴급하게 찾고 있는 사람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이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을 모두는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도하기에 힘썼던 사람들이다.
기도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는 다니엘처럼 신앙을 견고히 하려면 자신만의 기도의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120개의 도를 다스리는 3명의 총리들 위에 있는 다니엘이었다. 정말 많은 일을 분주하게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 우리에게도 다니엘처럼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있는가? 혹시 너무 일이 많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는가? 새벽이든, 점심시간이든, 하루를 정리하는 저녁시간이든지 정해서 기도하는 것 매우 중요하다. 그 장소가 교회이든, 내 집의 골방이든지 그 어디든지 정하시기 바란다. 일이 많고 바쁜 것은 핑계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다니엘도 시기와 질투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으로 내몰렸다(단 6:1-9). 그럴지라도 하나님께 기도를 쉬지 아니하였다.
단 6:10 / 다니엘은 그 금지령에 왕의 도장이 찍혀 어명으로 공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집으로 돌아가서는 이층방으로 올라가 늘 하던 대로 예루살렘 쪽으로 나 있는 창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매일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다니엘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 있다’고 하듯이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갈 때에 사자굴에서 던져졌으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이 사자들의 입을 틀어막아 상한 데 한 곳 없었다. 이에 다니엘은 사자의 굴에서, 그를 모함했던 악한 자들에게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이번 일로 인하여 오히려 크게 영광을 돌렸다.
기도의 사람 다니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이 다리오 왕을 통하여 온 제국에 널리 퍼져나갔다. 상상치도 못한 일들이 의인 다니엘로 인하여 나타났다.
단 6:25-27 / 다리오왕은 제국내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 곧 인종이 다르고 쓰는 말이 다른 모든 백성들에게 글을 써서 어명을 내렸다. `그대들에게 평안이 있기를 빈다. 26) 나 다리오가 그대들에게 명을 내리노라. 내가 다스리는 제국 안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겨라. 그분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 영원히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니 그분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 그분의 권세는 결코 꺾이지 않으리라. 27) 그분은 사람을 건지시는 분, 사람을 구해 내시는 분,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이적을 베푸시는 분, 놀라운 일을 일으키시는 분, 바로 그분께서 다니엘을 구해 내셨다. 사자굴에서 아무 흠도 없이 건져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라고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은혜를 받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란다. 교회 일을 하느라고 바빠서 성경도 안보고 기도도 못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여인처럼 물을 길러가면서도 기도하자. 다니엘처럼 공적인 일을 하면서도 기도하자(1분 기도). 환란과 핍박 중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바울처럼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자.
살전 5:15-24 / 아무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언제나 서로 선을 베풀도록 힘쓰십시오. 또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십시오.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언제나 기도에 힘쓰십시오. 18) 어떤 처지에 있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20) 예언하는 자를 비웃지 마십시오. 21) 어떤 일이든 그것이 참으로 옳은 것인가를 확인해 보고 만일 옳은 것이거든 받아들이십시오. 22) 모든 종류의 악을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흠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24) 여러분을 불러 자녀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한 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의 사람
약 1:5 /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 알고 싶거든 하나님께 여쭈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후하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결코 여러분을 꾸짖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기도하지 말라.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른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 속에서 마왕이 나온다. 그리고 알라딘에게 묻는다.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소원이 무엇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알라딘이 자기의 소원을 이야기하면 마왕은 알라딘의 소원을 다 들어준다. 우리의 믿음은 마법과 같은 것인가? 우리의 기도가 그런 것인가? 하나님을 마왕처럼 생각하고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간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기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꺾어서라도 나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기도일까? 아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요 우리는 종일뿐이다.
한국에서 오래 동안 선교하였던 선교사가 ‘한국의 기독교인만큼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 선교사의 그 다음 말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인만큼 기도 응답을 잘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없다’고 했다. 왜 사람들이 많이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응답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기보다 자신의 요구사항만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전달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옛날보다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하는 사람이 줄었다고 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묻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한다.
■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때 링컨대통령이 이끌던 북군이 남군에 밀리던 때가 있었다. 링컨대통령의 각료와 장군들이 전쟁에 관해 모여서 논의하던 중에 한 각료가 ‘우리가 기도해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제안했다. 그 소리를 들은 링컨 대통령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자리에 참석해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링컨 대통령을 쳐다보았다. 그때 링컨대통령은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임덕순 목사의 설교 ‘성공적인 기도’에서 /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기도와는 영 다르다. 세상의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요구하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 세상은 자기 소원을 성취하려는 요청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다. / 세상은 자기의 공로를 가지고 요청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긍휼을 바란다. / 세상은 요청과 간구만 있지만, 우리의 기도에는 감사와 회개가 꼭 있어야만 한다. / 세상은 기도대로 되어야 응답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야 옳은 응답이다. / 세상은 때와 장소가 제한되어 있지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곁에 계신 주님께 한다. / 세상은 자기 인내와 의지로 기도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기도한다. / 세상은 고행중 하나로 기도하지만, 우리는 행복한 교제로서 기도를 한다.
다윗을 기도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 삼상 23:1-5 /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블레셋 족속이 아둘람 남쪽에 있는 요새 그일라를 치고 타작한 곡식을 약탈해 가고 있습니다.' 하고 전해 주었다. 2)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 출전 여부를 여쭈었다. `제가 나가서 블레셋 족속을 치면 그들을 쫓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출전을 허락해 주셨다. `어서 나가 싸워라! 가서 블레셋 족속을 쳐서 몰아내고, 그일라 주민들을 구해 주어라.' 3) 그런데 이번에는 다윗의 부하들이 항의하고 나섰다. ‘우리는 이미 여기 유다 땅에 사는 것만으로도 위험 천만한 일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우리가 어떻게 저 국경선에 있는 그일라에까지 나가 블레셋 족속과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4) 그래서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여쭈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대답은 여전히 같았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어서 그일라로 나가 싸워라! 내가 블레셋 족속을 네 손에 넘겨주겠다' 5) 그래서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일라로 나가 블레셋 족속을 공격하였다. 그는 우선 모든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싣고 가는 블레셋 족속의 가축들부터 전리품으로 끌고 온 다음에 그들을 쳐서 크게 무찔렀다. 다윗은 이렇게 외적을 무찔러 백성을 보호하는 왕처럼 그일라 주민들을 구해 주었다. 그러나 이때도 사울은 왕의 의무를 외면한 채, 오히려 백성의 구원자인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중이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심 / 삼상 23:7-14 / 그런데 다윗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족속과 싸운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사울은 ‘이제야 하나님께서 그를 내 손에 넘겨주시는구나! 그는 성벽과 성문으로 둘러싸인 그일라 성읍 안에 스스로 들어가 갇혀 있으니 이제 올무에 걸린 짐승이나 마찬가지로다!’ 하고 쾌재를 부르며 좋아하였다. 8) 그래서 사울은 온 백성을 다 동원해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잡기 위하여 그일라를 포위하려고 하였다. 9)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이렇게 엄청난 전쟁을 준비하자, 다윗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 10)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이 성으로 내려와서 주민들을 모조리 죽일 작정이라고 합니다. 이 모두가 저 한 사람 때문입니다. 11) 그렇게 되면 그일라 사람들이 저를 사울에게 넘겨 주겠지요? 사울이 정말로 이 성을 치러 오겠습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가르쳐 주십시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렇게 응답해 주셨다. ‘사울이 내려올 것이다.' 12) 다윗이 또 물었다. `그러면 그일라 사람들이 저와 제 부하들을 사울에게 넘겨 주겠습니까?' 대답도 여전하였다. `그들이 너희를 넘겨 줄 것이다.' 13) 다윗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해 주었으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을 사울에게 넘겨줌으로써 자기들만 살길을 찾게 될 것이 확실해지자, 다윗은 600명 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거기서 떠나 유다의 이곳저곳으로 숨어 다니게 되었다. 다윗이 이렇게 그일라에서 빠져 나갔다는 소문이 사울에게 전해지자, 그는 즉시 출전 명령을 취소하였다.
기도의 사람 다윗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 삼상 23:14-15 / 다윗은 유다 땅 남쪽에 있는 광야를 헤매다가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산지로 숨어들었다. 그는 주로 십 광야에 있는 산골에서 살았다. 사울은 그동안에도 쉬지 않고 다윗을 찾아다녔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그를 잡아 죽일 수는 없었다. 사울이 다윗의 목숨을 노리고 출동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미리 알려 주셔서 언제나 도망칠 수 있게 하셨다.
삼상 23:26-28 / 이제 사울과 다윗 사이에는 산이 하나 가로막혀 있을 따름이었다. 사울은 산의 이편 능선을 따라 추격하고, 다윗은 저편 능선을 따라 도주하였다. 다윗은 추격해 오는 사울과 그의 부하들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사울의 군대를 당해 내지 못하여 거의 붙잡힌 것이나 다름없는 위기에 부딪혔다. 27)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전령 한사람이 나타나서 사울에게 급한 소식을 전하였다. ‘어서 돌아오셔서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블레셋 족속이 쳐들어와서 모두 약탈해 가고 있습니다.’ 28)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다 말고 돌아서서 블레셋 족속과 싸우러 갔다.
결 론 / 어떤 마음으로 기도할 것인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기도의 사람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맛을 보았고, 나름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 2:5)을 품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보이신 자세를 본받으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인간)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 모두도 그 분의 뒤를 따르라.
요일 3:16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고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 작가 정연희 [원수사랑] /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무슨 말입니까? 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게는 그리도 엄격하시면서 어찌 내 원수에게 그리 관대하십니까?” / “보아라, 나와 함께 하는 것아! 네가 원수와 똑같은 얼굴이 되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어도 ‘어디까지 알아듣느냐?’가 문제가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알아듣는데, 하나님께서 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지 그 뜻을 모르면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
사무엘상 24장부터 30장까지는 집요하게 사울왕이 다윗을 추적하여 죽이려하지만 오히려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장인이자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편히 가도록 보호를 해 준다. 이 대목은 지금도 성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삼상 31장에서는 사울 왕이 길보아산에서의 전투에서 죽음으로 다윗과 사울왕의 이야기는 끝난다. 이후 기도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던 의인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의 제2대 왕으로서 40년 간(B. C 1077~1037) 통치하였다.
■ 어느 목사님의 간증 / 내가 군대를 제대한 후 대학 3학년으로 복학한 때였다. 하루는 자취방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군대 고참에게 구타를 당한 생각이 났다. 그 고참은 나를 30분 동안 부동자세로 세워놓고 주먹과 발길질로 구타를 했다. 그 때만 해도 군대에 구타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던 때였다. 그 생각이 나자 갑자기 내 마음은 견딜 수 없는 분노와 복수심이 맹렬한 불길처럼 타올랐다.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며 그 고참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고 있노라니 한 5분도 안 되어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몸과 마음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나는 하나님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성령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제 마음에 ‘그 고참을 긍휼히 여기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고참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자 정말 그 고참 역시 폭력과 악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그를 위해 기도하고나자 내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다. 그 후로는 그가 생각이 나면 분노 대신 긍휼의 마음과 기도가 나왔다. 그 기도는 내 자신을 파괴하는 분노와 복수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마 5:44-48)고 하신 이유였다. 이렇게 순종하는 성도들에게는 평안과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은 거룩함이 있다. 우리가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평화도, 기쁨도, 거룩함도 없다. 복수심을 버리고 원수를 사랑할 때 평화와 기쁨과 거룩함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눅 11:9-13).
■ 미국에 죠라는 노예 / 충성을 다하는 그에게 주인은 모든 일을 의논하여 맡기곤 했다. 어느 날 주인이 다른 노예를 사기 위해 죠와 노예 시장에 갔을 때이다. 힘 좋고 젊은 노예를 사려는 주인에게 죠는 어떤 병들은 노예를 사자고 하도 간곡히 부탁해서 죠의 말대로 했다. 죠는 병들어 일도 못하는 노예를 시간만 나면 치료해 주고 돌봐 주었다. 그것을 이상히 여긴 주인이 왜 그렇게 하는가를 물었을 때 죠는 이렇게 말했다. “저 노예는 나를 유괴해서 노예 상인에게 판 사람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 사람도 노예가 되어 병들어 있습니다. 저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제 저는 저 사람이 하나님께 갈 때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은인종차별정책에 저항하다가 27년 감옥 생활했다. 그의 대통령 취임식 때,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그를 만나 물었다. “진정코 그들을 미워하지 않나요?”, “미워했지요, 그러나 어느 날 채석장에서 바위를 깨다가 문득 그들이 내 정신과 마음 말고는 모든 걸 뺏어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만은 절대 내주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감옥 안에서는 그렇다 치고, 감옥에서 나올 때 다시 증오가 솟구치지 않던가요?”,“맞습니다, 그랬지요, 하지만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나를 27년이나 감옥에 가뒀는데, 그들을 증오한다면 계속 갇혀 있는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나는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증오를 털어버리기로 했습니다.”
■ 하나님을 만난 북한 성도들의 순교 / 1972년 북한 곡산에서 고속도로를 공사하던 중 갑자기 땅이 무너지면서 땅굴 속에 숨어살던 김태용 목사님과 36명의 성도들이 발각되었다. 성도들은 1953년 북한의 공산당이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할 때에 땅굴로 들어가 19년 동안이나 숨어서 예배를 드렸다. 36명이 되는 성도는 수용소에 갇히는 것도 없이, 재판도 없이 바로 들판주변에 가서 하나씩 하나씩 죽이는데.. 먼저 가장 사악하게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이다. 의자위에 13살 된 사내아이의 목에다 두터운 밧줄을 걸고 손을 뒤로 묶으려고 하는데 아이가 엄마를 불렀다. 죽는 게 무서웠을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니 사형집행자가 짜증난 듯이 “이 아이 엄마가 누구요? 나오시오.”하고 하였다.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 뒤쪽에서 아이엄마가 터벅터벅 걸어 나오면서 아이한테 하는 말 “예수님 만나러 가는 거야. 이쁘게 가!” 그랬더니 아이가 “예! 엄마.”하고 대답을 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이 아이엄마가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 만나러 가는 거라고 애기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자기도 모르게 아이를 받히고 있는 의자를 치니 아이가 떨어지면서 손으로 밧줄을 잡고 매달린 상태가 되었다. 손이 묶이지 않은 상태이니 살려고 밧줄을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 엄마가 하는 말 “이 아저씨 미워하지 마라. 천국에서 만나자.” 그랬더니 아이가 밧줄을 잡은 손을 놓으면서 “예! 엄마.”하면서 그대로 밧줄을 놓자 죽어갔다. 갑자기 주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죽은 아이 형이 다음 차례로 옷을 벗겨 죽이려 하는데 “엄마! 고마워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엄마가 “뭐가 고맙니?” 하니 아이가 “천국 가서 예수님 만나게 해줘서 … .”라고 말하자 엄마가 “잠시 후에 천국에서 보자.”라고 말을 하였다. 죽으러 가는 아이가 집행관 아저씨를 보면서 말했다. “아저씨! 동생도 죽였고, 저도 죽이고, 엄마도 죽일 터인데. 그래도 아저씨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가 나를 사랑하니?”,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아저씨를 사랑한대요.” 이렇게 큰 아들도 교수형을 당해 죽었다. 그리고 서서히 한 사람 한 사람 교수형을 당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김태용 목사님을 벌거벗겨 아스팔트 까는 그 불도저로 그것도 아주 천천히 발부터 깔아 버렸다. 목사님은 그래도 남자였는데... 무릎까지... 올라올 때 살아서... ‘아~악’하면서 악을 섰다. 그런데 너무 놀라운 게... 무릎을 깔고 그 뒤로 넘어가는 순간.. 찬양을 하는 것이다. ~ ♬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 더욱 사랑" 그러다가 머리까지 넘어와서 깔아버리고 그렇게 죽었다. ♬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1.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2.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3.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 모퉁이돌 선교회 이삭 목사님은 중국에서 선교하던 중 고안들에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 매도 맞고 전기고문으로 머리가 상했고, 몸도 망가졌다. 10년 이상을 하혈을 했다. 마음으로 중국을 특히 고문하던 그놈들을 용서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용서가 안 되냐? 나는 너를 용서했는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늘가는 밝은 길을 하면서도 용서가 안 되니. 가라 너를 고문한 곳으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울면서 갔다. ‘안 가면 안 되요?’하며 갔던 그날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여자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목사님이시죠? 목사님 때문에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저기 서 있는 저 놈이 목사님을 고문했어요. 저 분 뭐하는지 아세요? 용서하셨어요?’ 이삭 목사는 대답을 못했다. 갖가지 고문을 했던 저들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남편 뭐해요?’ ‘13년 동안 열심히 교회 다니더니 지금 목사님이 되셨어요.’ ‘하나님께서 그 놈 하나 목사 만드시려고 나를 짓이겨 놓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 간증을 하던 중 울면서 하는 말이 그런 일들이 또 다시 일어난다면 다시 고문도 불사하겠다는 말을 하였다.
■ 《벤허》라는 유명한 영화는 류 월리스(Lew Wallace, 1827-1905)의 동명 소설 《벤허》를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영화이다. 류 월리스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을 지휘하던 장군이요, 언론인이며, 저술가였다. 그는 원래 기독교에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던 불신자였고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굴레에 묶여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그 굴레로부터 벗겨주고자 그의 친구 한 사람과 다짐을 했다. 그는 기독교를 반박하는 책을 펴내기 위해 유럽과 미국의 도서관에서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그는 주님 앞에 엎드리어 무릎을 꿇고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사건이 있은 후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벤허》라는 유명한 소설을 저술하였다.
벤허의 주인공인 유다 벤허(Judah Ben-Hur)는 서기 26년, 로마 제국시대, 예루살렘의 제일가는 유대 귀족이었다. 어느 날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해오는데, 그 총독 일행과 함께 주둔군 사령관으로 벤허의 옛친구인 멧살라(Messala)도 온다. 그러나 옛날과는 달리 멧살라와 벤허는 로마와 이스라엘이라는 적대적인 상황에 의해 우정에 금이 간다. 다음날 신임 총독의 부임 축하 행진 중에 벤허의 여동생의 실수로 기왓장이 총독의 머리에 떨어지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다. 멧살라는 벤허 가족의 무고함을 잘 알면서도 계획적인 사고로 취급하여 벤허 가족을 체포한다. 결국 벤허의 어머니 미리암(Miriam)과 누이 티자(Tirzah)는 감옥에 투옥되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한 채 벤허는 노예로 팔려간다. 그로부터 5년 후 벤허는 죽음의 노예 함선을 젓는 노지기로서 짐승같은 비참한 삶을 살던 중에 벤허가 젓는 배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게 되고 그때 벤허는 함대 사령관 아리우스(Quintas Arrius) 제독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 결과 제독의 양자가 되고 로마의 자유 시민이 되어 로마에서 편안한 삶을 살게 되지만 가족의 소식이 궁금해진 벤허는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고향에는 옛날 자신의 집의 노예였던 에스더가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돌아온 벤허는 자신과 가족들을 처참하게 만들었던 친구 멧살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멧살라와 함께 전차 경주에 출전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차 경주가 시작되고 승리를 위해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던 멧살라는 결국 말과 전차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멧살라는 죽음에 직면해서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아직도 살아 있으며 나병에 걸려 나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골짜기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준다. 멧살라는 죽는 순간까지 벤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나병 골짜기로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나러간 벤허의 슬픔과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벤허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가지만 때마침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에게 물을 갖다주면서 벤허는 자신이 노예로 팔려가던 중에 나사렛에서 자신에게 물을 떠주었던 사람임을 알고 깜짝 놀란다. 벤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을 지켜보며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지자 갑자기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치고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나병이 깨끗이 낫는 기적이 일어난다. 영화는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나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벤허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증오와 복수심을 버리고 용서하는 삶으로 변화된 것을 암시하고 있다. 벤허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전에 자기 집의 노예였다가 자유인이 된 에스더에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면서 비로소 자기의 마음속에서 로마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 사라졌음을 알려준다. “그때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그분의 그 음성이 내 손의 칼을 거두어 가는 것을 느꼈오.”(I heard Him say, “Father, forgive them…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And I felt His voice take the sword out of my hand.”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다.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롯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얼굴을 넣음으로써 그림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다의 얼굴이 제일 먼저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다빈치와 싸운 사람의 모습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어서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혀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그의 최고의 역작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빈치는 즉시 동료를 용서하고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다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해서 세계 최고의 걸작품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게 되었다. 미움을 가지고서야 어찌 그리스도의 사랑스런 모습을 그릴 수 있겠는가?
■ 코리 텐 붐 여사의 용서와 사랑 /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쓴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82-1983) 여사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코리 텐 붐 여사 집에 유대인을 숨겨준 죄로 가족들이 모두 독일군에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부모님과 언니는 그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수용소에서 죽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녀는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주의 종이 되었다. 그녀가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민족이기 때문에 지금 큰 상처를 입고 있다.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그녀는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가라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독일에만은 못 갑니다. 하나님. 그 곳 만은 빼 주십시오. 독일 사람이 우리 부모님도 죽이고 언니도 죽였습니다. 내가 강제수용소에서 당한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 독일 사람에게 가서 내가 복음을 증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랑하는 딸아! 내가 나를 저주하고 욕하고 등진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을 기억하라. 네가 내 딸이면 독일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 말씀을 듣고 그녀는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서자 많은 사람들이 악수하기 위해 줄을 섰는데, 허름한 외투를 입은 한 남자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코리 여사는 심장이 멎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자기에게 무시무시한 고통을 가한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 간수였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한겨울 이른 새벽에 여자 포로들을 나체로 밖에 서 있게 하고 먹을 것도 주지 않고 갖은 횡포를 다해 괴롭힌 장본인이다.
바로 그 사람 손에 여사의 사촌언니 벳시가 강간당하고 견디지 못하여 끝내 수용소에서 죽었다. 강제 수용소에서 있었던 악몽 같은 괴로운 기억들이 주마등같이 스치는데 앞에 있는 바로 그 남자가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전쟁 당시 수많은 여자 포로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꿈에도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강단에서는 용서를 외쳤지만 자기와 같이 벌거벗기운 채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언니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 되면서 자기의 청춘을 짓밟은 장본인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서 손을 내어 밀지를 않았다.
도저히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할 수가 없어서 얼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예수님 저는 하늘에서 진노의 벼락이 내려 이 사람을 때리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저를 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나를 못 박고 죽이고 침 뱉으며 채찍으로 때리고 조롱하며 가시관을 씌워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했지 않느냐? 너도 용서해 주어라”,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못합니다.”라고 여사가 기도하자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 여사의 손이 나가서 그 사람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무거운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 사람인 당신이 전쟁 때 우리 독일 사람이 저지른 죄를 용서하고 복음을 전해 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늘 주님 앞에 나왔으니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 순간 갑자기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임했다. 순식간에 미움과 원한이 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를 용서하고 나자 그녀의 영혼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즐거운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며 거기에서 10년이나 젊어지는듯한 재생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코리 텐 붐 여사는 그리스도의 큰 사랑으로 그 사람을 용서해 주었고, 그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그 때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쓰라린 원한의 상처가 치료를 받고 그 이후로 온 세계에 다니면서 용서와 사랑을 힘 있게 전할 수가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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