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20 연중2주간 목- 133위 035°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 3,11).
133위 035° ‘하느님의 종’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이름 : 김덕심(金德深) 아우구스티노, 성 김성우 안토니오 弟
출생 : 1798년, 구산
순교 : 1841년 2월 19일, 옥사, 남한산성
김덕심(金德深) 아우구스티노의 본관은 경주,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만집’(萬集)으로, 1841년에 서울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0.1] 성인의 아우이다. ‘덕심’은 아우구스티노의 자이며, 집안에서는 ‘치영’(致英)이라고도 불렀다.[1]
1798년 경기도 광주의 구산(현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서 김영춘(金永春) 바오로와 청주 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1830년 무렵에 천주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2][2.1] 이때 그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처음에는 입교를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는 형제들이나 친척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고,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구산마을은 교우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3]
1839년 기해박해 초기에 구산의 김씨 형제들은 박해자들에게 고발되어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4]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포교들이 다시 구산으로 들이닥쳤고, 이때 김덕심 아우구스티노는 아우인 김윤심(金允深) 베드로 알칸타라와 사촌 한 명과 함께 체포되어 광주 남한산성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잠시 피신할 수 있었던 김덕심 아우구스티노의 형 김성우 안토니오도 그 뒤에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5]
남한산성으로 압송된 김덕심 아우구스티노는 동생과 사촌과 함께 판관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천주교를 배반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는 판관 앞에서 그는 의연하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하였고 다시 형벌을 받았지만, 동생과 사촌과 함께 용감하게 이를 참아 받았다. 그런 다음 남한산성 옥에 투옥되어 오랫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이듬해 박해가 끝나자 김덕심 아우구스티노의 자식들은 아버지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지만, 아버지를 석방시킬 수는 없었다. 김덕심 아우구스티노는 옥고에 시달리고 낙망(落望)의 유혹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순교를 할 수도 없고 자유를 되찾을 수도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러다가 1841년 초에 병이 들었고, 이 때문에 고통을 겪다가 1841년 2월 19일(음력 1월 28일)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가지고’ 옥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다.[6] 순교한 뒤 그의 시신은 아들이 거두어 고향인 구산에 안장하였다.[7]
[註]__________
[0.1] 聖 김성우(우집) 안토니오(1795-1841) : 경기도 광주 구산(龜山)에서 부유한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천주교를 알게 되자 두 동생과 함께 곧 입교,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의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 뒤 1830년경 양친을 여의고 서울 느리골(현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하여 동대문 밖 근처 마장안으로 다시 이사하여 막냇동생 김윤심(문집) 베드로 알칸다라와 함께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 바로 밑 동생 김덕심(만집)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망설였다. 김성우는 세례를 받고 회장이 되어 서울 자기 집을 공소로 개조하여 신부님을 모시고 교우들을 보살폈다. 1836년 여름 내내 유방제 신부님이 그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기해박해가 인지 얼마 안 된 1839년 3월 21일, 포졸들이 구산을 급습하여 두 동생과 사촌 김주집이 체포되었다. 광주 유수(留守, 수도 밖에 요긴한 곳을 다스리던 정이품의 外官 벼슬)가 있던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둘째인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뒤 고문을 참아 받으면서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2월 19일 옥중에서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하고 말았다. 반면에 막냇동생 김윤심(문집)과 사촌인 김주집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형벌을 배교를 강요받았지만, 신앙을 지켰다. 옥살이를 자신의 집처럼 하며 갇힌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여 2명을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도를 맞은 후 이튿날인 4월 29일 15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 김정태 소장, 『경주 김씨 족보』; 하성래, 『김성우 안또니오와 구산의 순교자들』, 천주교 구산 교회, 1984, 42면.
[2]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 절두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회차 28(1883.6.12.), 김 막달레나의 증언. 아우구스티노의 부친 김영춘의 세례명이 ‘베드로’라는 증언도 나온다(같은 책, 회차 31, 엄 체칠리아의 증언).
[2.1] ‘하느님의 종’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가계도
[3]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508. 아우구스티노는 상처한 뒤에도 재혼하지 않고 4명의 자식들을 돌보면서 살았다고 한다.
[4] Mgr. Imbert, Relation de la Persécution de Sehoul en Coreé en 1839, A-MEP, Vol. 579, f. 143.
[5] A. Daveluy, Op. cit., f. 509.
[6] A. Daveluy, Ibid., f. 509; 샤를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하권, 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 18면.
[7] 하성래, 『김성우 안또니오와 구산의 순교자들』, 천주교구산교회, 1984, 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