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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 권철신 · 권일신의 죽음과 순교 문제 재조명
심상태 (수원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장)
I. 이승훈의 죽음과 순교 문제
1. 배교자 죽음설
2. 기교자(棄敎者) 죽음설
3. 죽음의 배교 / 순교 판정 유보설
4. 배교 후 순교설
5. 신앙 증거자로서의 순교자설
6. 제3차 세미나 발제자의 소견
II. 권철신의 죽음과 순교 문제
1. 순교자 죽음설
2. 배교자 죽음설
3. 배교 / 순교 판정 유보설
4. 제3차 세미나 발제자의 소견
III. 권일신 죽음과 순교 문제
1. 순교직전의 굴복설
2. 제3차 세미나 발제자의 소견
IV. 이승훈 · 권철신 · 권일신 죽음과 순교문제의 신학적 재조명
1. 이승훈
2. 권철신
3. 권일신
V. 맺는 글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 시복 시성을 위한 제1차 세미나가 2002년 “한국천주교의 창설 주역과 천주 신앙”을 주제로 하여 권철신․이벽․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그리고 순교 여부를 규명하는 내용으로, 그리고 2005년에 제2차 세미나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이벽의 죽음과 순교”를 주제로 개최된 데 이어 3년만인 올 해에 다시 이승훈‧권철신‧권일신 등의 삶과 죽음을 주제로 제3차 세미나가 개최됨을 뜻 깊게 생각한다. 이들은 이벽(李檗)과 함께 한국교회 창설을 주도했던 선구자이자 주역으로서 한국 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드러난 사계 전문가들의 이견 때문에 1984년 시성되어 공경을 받는 103위 순교자 성인들을 위시하여 공식 절차에 따라 진행 중인 후속 시복시성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후대 순교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하고, 지대한 공헌에 상응하는 맞갖은 존경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논자는 이들 세분 창설 주역의 죽음과 순교 문제를 신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하기 위하여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국내외 교회 사학자들이 수행한 연구 작업들이 어떠한 사료들에 의거하여 견해를 표명하는지를 가급적 요지만이라도 분명히 확인하고자 한다. 그래서 먼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교회 사학계 안에서 정설처럼 간주되어 오고 있는 이들의 배교자 내지 기교자(棄敎者) 사망설의 입장을 살펴보는 한편, 배교나 순교 여부를 식별하기 위해 진상 파악이 더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나 오히려 신앙 증거자로서 사망했다고 보는 연구자들의 주장도 아울러 일별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번에 개최된 제3차 세미나를 위해 수행된 여러 학자들의 새로운 연구 결실들도 참고한 기반 위에서 이승훈‧권철신‧권일신 등의 순교자 죽음 여부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I. 이승훈의 죽음과 순교 문제
오늘날까지 이승훈의 죽음에 관하여 한국 교회 안에는 대략 다섯 가지 다른 견해들이 공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이승훈이 배교자로서 사망하였다는 입장, 이어서 기교자(棄敎者)로서 죽음을 맞은 때문에 순교일 수 없다고 보는 입장, 다음으로 그의 배교자 내지 기교자 또는 순교자 죽음 여부를 확정적으로 규정하기 위하여 사실 확인이 더 필요하다고 보는 유보 입장, 네 번째로 그가 세 차례에 걸친 배교 행위 뒤에 순교자로 죽음을 맞았다는 주장과 끝으로 그는 아예 배교한 일 없이 영세 후 시종 신앙 증거자로서 살다가 순교로 죽음을 맞았다는 각기 구별되는 주장들이다. 논자는 이 주장들의 주요 논거를 구명하고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되는 학자들의 입장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 배교자 죽음설
근년에 이르기까지 이승훈이 배교자로서 사망하였다는 주장은 한국 교회 안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1985년판『한국가톨릭대사전』에도 반영될 정도로 교계 안에서 거의 정설로 인정받는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가톨릭 사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온 파리외방 선교회 소속 달레(Ch. Dallet, 1829-1878) 신부의 저서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1874)』의 기록과 조선 관변 문헌 등에서 확인되는 공초 진술에 의거 이승훈이 배교자로서 죽음을 맞았다는 주장이 주류 교회 사학계에서 줄곧 피력되어 왔기 때문이다.
1) 논자는 우선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가 한국 교회 사학계에서 차지하는 중차대한 비중에 의거 이승훈이 배교자로서 죽음을 맞았다고 규정하기에 이른 경위기술 부분을 일별할 필요를 느낀다.
“… 날마다 되풀이되는 집안 박해로 견딜 수 없게 된 (李)承薰은 마침내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그의 종교 서적을 불태우고 자기가 천주교인이었음을 일반 앞에 변명하는 글을 썼다. … 이듬해 丁未(1787)년에는 천주교를 반대하던 소리가 차차 가라앉고 반대도 덜 심해져서 폭풍우에 쓰러졌던 많은 이가 그들의 뉘우침을 나타냈다. 그 중에도 마음이 약하여 굴복하였던 (李)承薰 베드로가 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丁若鏞, 丁若銓 형제를 다시 만나러 왔다. … 이 무렵에 복음의 전파를 더 쉽게 하고 新入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하여, 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李)承薰 베드로, 丁若鏞 형제 및 다른 유력한 신자들이 자기들끼리 敎階制度를 세우기로 계획하였다. … 그 지위와 학식과 덕망으로 가장 뛰어난 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주교로 지명되고, (李)承薰 베드로, …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 교회는 북경 주교의 입을 통하여 조상숭배는 하느님 崇拜에 반대되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 몇몇 마음약한 천주교인은 그것이 몹시 두려워서 그날부터 천주교 信奉하는 것을 그쳤다. 그들 중에 이미 무서움 때문에 몇 해 전에 그렇게도 통탄스럽게 넘어진 일이 있는 李承薰 베드로가 끼여 있음을 우리는 마음 아파한다. 그는 집으로 물러가 천주교인들과는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달레는 모친상을 당한 尹持忠 바오로가 유교식 제사를 거부한 소위 ‘진산(珍山)사건’을 빌미로 1791년에 벌어진 신해(辛亥) 박해 기간 중에 보여준 이승훈의 처신에 관하여도 부정적으로 기술한다.
“… 싸움도 하기 전에 그렇게도 부끄럽게 물러난 李承薰 베드로는 그때 平澤 縣監으 로 있었다. 그가 배교한 것은 일반이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洪樂安과 그 일당 은 李承薰을 천주교인들의 두목으로 지적하는 上疏를 조정에 냈는데, 그가 관사에서 그 종파의 서적을 읽는 것을 보았다고 덧 부쳤다. 그들은 李承薰을 법정에 출두시켜 법대로 재판을 받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그가 鄕校에 가서 관례적인 拜禮를 하지 않 는다고도 고발하였다. 그 사실들이 증명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공공연하게 증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무함이라고 부르는 그것에 대하여 자기변호 를 하기 위한 글을 발표하였다.”
달레는 정조 승하에 이어 즉위한 순조 뒤에서 수렴 청정한 영조의 계비 대왕대비 김씨가 1801년에 벌린 신유(辛酉)박해 시기에 이승훈이 다른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고 참수형에 처해지지만 배교자로서 죽음을 맞았다고 규정하였다.
“다른 6인의 사형수, 즉 李承薰 베드로, 崔必恭 토마스, 崔昌顯 요한, 洪敎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洪樂敏 루가 및 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2월 26일(1801년 4월 8일) 西小門 밖에서 斬首刑을 당하였다. 그 때 李承薰의 나이는 45세였다. … 천주교인이건 아니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배교로도 그의 목숨은 구할 수 없었는데, … 맨 먼저 영세한 그가, 자기 동료들에게 聖洗와 복음을 가져왔던 그가 순교자들과 함께 죽음을 향하여 나아갔으되, 순교자는 아니었다. 그는 천주교인이라고 斬首당하였으나, 배교자로 죽었다.”
2) 성 다블뤼(St. A. Daveluy, 1818-1866) 주교는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의 고본(稿本)인「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1860) 필사본에도 이승훈의 사인에 관하여 달레 저서와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다블뤼 주교는 이승훈이 ‘을사추조적발’ 사건 당시에 신앙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파악하였다. “여론은 특히 천주교의 선동자요 두목으로서 이승훈 베드로, 이벽, 정약전․약용 형제를 지목하였으며 사방에서 협박하는 말들이 울려 퍼졌다. 대다수가 신자가 아니었던 이들 세 가족은 겁이 나서 이 천주교인들의 열성을 막고 그들의 신봉을 중지시키고자 모든 수단을 사용하였는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너무나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승훈이 1790년 이후 북경 주교로부터 ‘제사 금지’를 통고받은 이후에 또 다시 신앙을 버린 것으로 본다. 다블뤼 주교는 이승훈 자신이 천주교를 떠났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는 자기 변호문을 써서 배포한 데에서 천주교 지도자로서의 ‘깃발을 내리고’ 영적 싸움터에서 물러난 인물을 본다. 그러면서도 이 주교는 남인 시파의 지도자들로 이가환, 정약종, 이승훈과 홍낙민 등을 꼽으면서 이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외면적으로 교회에 적대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아직도 하느님을 믿고 있다’고 적고 있다.
다블뤼 주교는 신유(辛酉) 박해시 이승훈을 포함한 고관 신자들의 체포와 죽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월 9일 반대당의 주요 고위 관직자에 대한, 모든 형식을 갖춘 체포령이 내렸다. 정2품의 이가환, 대신에 필적하는 4품관의 정 요한 약용, 현감을 지낸 이 베드로 승훈, 역시 높은 관직에 있던 홍 루가 낙민 등이 붙잡혀 금부에 갇혔다.”
이 주교는 이승훈의 사형선고문도 기록하면서 그가 순교자로서 참수당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우리는 이승훈이 이 나라에 천주교를 들여와 열성적으로 신앙을 전파하였음을 알고 있다. 그는 대중의 눈에 결백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 수차례 배반의 글을 써 이미 우리의 마음을 여러 번 아프게 하였다. 지금 우리가 그의 목이 처형대 위에 떨어져 있음을 알지만, 배교하고 나서 어떤 철회의 표시, 하느님을 향한, 어떤 회개의 흔적이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그는 퇴색되어만 간다.”
다블뤼 주교는 표현에서 달레의 기술 양식과는 다소간 차이를 보여주면서도 이승훈이 순교자로 죽음에 처해지지 않았다는 견해를 분명히 피력하고 있다.
3) 최근 선종한 한국 교회 사학계의 태두 최석우(崔奭祐, 1922-2009) 몬시뇰이 이승훈의 순교자 죽음을 부인하는 교회 사학자들 중 대표적 인사로 꼽힌다. 최 몬시뇰은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수편의 논문들에서, 그리고 인천교구 측의 요청을 받아 진행한 이승훈에 관한 종합적 연구를 기획하여 <李承薰(베드로) 硏究 特輯號>로 1992년에 간행된 ⌜敎會史 硏究⌟에서 “李承薰 관계 書翰 자료”를 번역한 외에도 “한국 교회의 창설과 초창기 李承薰의 교회 활동” 주제로 작성한 연구 논문에서 이승훈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을 들여오고 가성직제도를 조직하여 스스로 신부가 되어 구도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천주교를 전파하는 등 한국에 천주교를 창설한 ‘원공’을 쌓은 인물이기는 하지만 배교와 회개를 수차례 반복하다가 결국은 ‘순교자가 될 수 없는’ 배교자로 사망한 개연성(蓋然性)이 크다고 보고 있다.
최 몬시뇰은 한국 교회가 창설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승훈이 차지하는 의미가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온 것으로 세 가지 점을 들고 있다.
첫째, 이승훈이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라는 주장은 이미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영세한 한국 사람들이 많았으며, 중국 북경에서 영세 받은 사람도 없지 않았기에 전혀 근거가 없다고 본다.
둘째, 이승훈의 영세 자체를 곧 교회 창설로 보는 견해는, 영세는 한 사람이 보편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자격을 부여하는데 머물 뿐이고, 교회란 영세자가 다른 영세자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야만 비로소 창설되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로, 본고에서 관건이 되는 사안, 곧 이승훈이 순교자라는 주장은 증언의 신빙성이 박약하기에 근거가 없다고 단정하는 주장을 피력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정부의 재판 기록이나 기타 국내외의 문헌 사료들을 검토할 때 그가 순교자가 될 수 없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선, 최 몬시뇰은 이승훈이 1785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 사건 이후 그의 부친이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교회 서적들을 불사르고 교회 활동을 금하자 일시적으로 배교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가정 내에서의 박해로 李承薰 ․ 李檗 ․ 丁若銓 등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잇따라 배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때 이승훈이 신앙을 배척하는 글을 발표하고 자신을 변명한 사실도 언급하였다. “李承薰도 그의 부친 東郁이 엄히 금하고 또 동생 致薰의 끈질긴 설득으로 굴복하였다. 더 나아가서 承薰은 천주교 서적을 모두 불사르는 동시에 闢異文을 지어 西學을 배척하고 자신을 변명하였다.” 그러나 최 몬시뇰은 1992년에 발표된 다른 논문에서는 을사추조적발 사건 이후에 교회 서적을 불사른 사람은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李東郁)이고 ‘이승훈은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글과 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고 상기 내용과는 달리 기술하기도 하였다.
최 몬시뇰은 이승훈이 배교 후 1787년(丁未)에 다시 교회로 돌아와 권일신과 최창현(崔昌顯)을 위시한 10인과 함께 가성직제도를 구성하고 주도적으로 성직을 수행하던 중 성사집행을 중단하고 1789년에 윤유일(尹有一)을 밀사로 북경에 파견하면서 한국 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가성직제도에 의한 성사 집행 문제 해결책을 문의하는 서한을 작성하였으며, 다음 해 1790년에 윤유일을 재차 북경으로 파견하면서 1790년 7월 11일자로 두 번째 서한을 대동케 하여 조선 교회가 선교사 파견을 약속받고 교황청과도 간접적으로라도 유대 관계를 맺게 되는 획기적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최 몬시뇰은, 이승훈이 신해(辛亥, 1791) 박해가 일어나 평택(平澤) 현감의 관직을 수행하던 중에 체포되고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게 되는 처지에 이르자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고발 내용을 모함이라고 변명함으로써 ‘다시금 背敎하는 허약성을 드러냈다’고 규정한다. 이승훈은 심문 과정에서 을사년 뒤에 즉시 천주교를 끊지 못하였더라도 이번 사건 이후에 유교 경전 이외에 책상 위에 놓아두지 않고 주자의 ‘백록동연의’를 저술하여 친척 친지들에게 알렸다고 진술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현감으로 부임하던 때에 천주교가 금지하는 성묘(聖廟)에 분향제례를 뜻하는 ‘拜孔祭禮’를 행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또 다시 그가 背敎했음을’ 드러냈다고 보고 있다.
마침내, 최 몬시뇰은 순조 원년 1801년에 벌어진 신유(辛酉) 박해시기에 李承薰이 권철신, 정약종 등과 함께 체포되어 조정에서 국문을 받고 참수형에 처해지지만 배교했을 것으로 본다.
“이승훈은 처음에 乙巳년 이후로는 天主敎를 물리쳤다고 했다가 증거가 드러나자 과연 乙巳년 이후에도 단념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辛亥년 뒤에는 영영 끊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承薰이 北京에서 領洗하고 天主敎 서적을 갖고 와서 그것을 처음으로 전파한 것이 原罪처럼 되어서 비록 그가 背敎했다 하더라도 사형을 면할 수가 없었다. 鞫廳에서의 그의 招辭를 전체적으로 볼 때 그가 殉敎했다기 보다는 背敎했을 蓋然性이 훨씬 크다.”
그렇기는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 몬시뇰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교회 서적을 국내로 반입하여 가성직제도를 조직하고 교회활동을 주도하다가 멀어지게 된 사태 발단은 조선 사회의 지배적 이념 체계였던 유교 이념과 당대 교회 당국의 조상제사 금지 문제로 불거진 서구 전래의 천주교 사이에서 벌어진 간극으로부터 보아야 한다는 문제 제기를 하면서 한국에 그리스도 신앙을 심고 뿌리내리게 한 ‘원공’(原功)은 그대로 남는다고 보고 있다.
또한, 최석우 몬시뇰이 편찬 책임을 맡았던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년도 간행 『한국가톨릭대사전』의 “이승훈” 항목에서 집필자가 명기되지 않은 가운데, 이승훈이 수차에 걸쳐 배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유박해 때에 참수되어 사망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승훈은 …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하자 친척과 집안 식구들의 탄압으로 배교,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벽이문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했고, … 1790년 북경에 파견되었던 조선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를 금지한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1808)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조상제사 문제로 교회를 떠났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 현감 재직시 향교(鄕校)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787년 반촌에서 서학서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문제되자 다시 배교, 관직을 삭탈당하고 석방되었다. … 1801년 신유(辛酉) 박해가 일어나 이해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등과 함께 체포되어 배교했으나 4월 8일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2. 기교자(棄敎者) 죽음설
중견 국사학자 조광(趙珖) 교수는 연구논문 “辛酉敎難과 李承薰”을 통하여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 기간 중에 드러난 이승훈의 사상과 행동의 특성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나 ⌜일성론(日省錄)⌟, 그리고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등 조정의 연대기 사료와 함께 <신유사옥죄인 이가환등추안(辛酉邪獄罪人李家煥等推案)>이며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과 <신유국안(辛酉鞫案)> 등 당대 조정 당국의 심문 기록, 이승훈의 결안(結案)이 수록된 이기경(李基慶) 편 <벽위편(闢衛編)> 등 여러 사료들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하여 신유박해의 배경 조명, 초기 박해 과정에서 드러난 이승훈의 행적 추적, 그리고 신유박해 당시 이승훈에게 부과되었던 혐의 내용, 그리고 이 무렵에 드러난 이승훈의 교리와 교회에 대한 입장을 통하여 밝히면서 배교자로서는 아니지만 순교자도 아닌 기교자(棄敎者)로 죽음을 맞았다고 주장하였다.
조광 교수는 ‘을사추조적발’ 사태 이후 이승훈을 포함하여 교회 창설에 관련된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고 혹독한 형벌에 처했던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 당시 조정은 이승훈을 사문난적의 원흉으로 지목하고는 하였다고 지적한다. “즉 이승훈은 서학서를 전래하여 천주교를 전파시켰고[購書傳法], 스스로 교주가 되었으며[自爲敎主], 서양인과 비밀히 교통을 했고[密通洋人], 이가환과 은밀히 모의하고 있었다[潛謀家煥]는 혐의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러한 사건에 있어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할 인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조 교수는, 이승훈이 서학서를 자신이 직접 구입하지 않고 부친이 북경 천주당을 유람하던 때에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예물로 기증받은 것이며, 을사추조적발 시기에 책을 소각하고 난 뒤에는 다시 보지 않았다고 주장하거나, 서학서 전래는 금령이 선포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하였다고 지적한다.
이어서 조 교수는 이승훈이 1795년(乙卯, 正祖19) 주문모(周文謨) 신부 체포 실패사건 때에 천주교 서적을 구매하고 전파하며 스스로 교주가 되어 활동하였다는 규탄을 받고 있었으며, 1801년에는 ‘자시사괴(自是食魁)’라는 비난과 함께 신부로 활동했다는 혐의도 받았음을 적시한다. 그리고 이승훈 자신이 1791년(辛亥) 이후에는 천주교를 떠났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조정 당국자들은 그를 용서할 수 없는 인물로 간주하였으며, 이승훈이 북경에서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인 선교사들과 교류하기에 이르고, 귀국 후에 1790년 북경 주교에서 보낸 서한을 통해 선교사 파견을 요청함으로써 1794년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던 당시에 이미 반교(叛敎) 상태에 있었지만,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사실이 문제시되고 있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조 교수는 이승훈이 1801년 체포되어 의금부 국청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강생구속론(降生救贖論)이나 천당지옥설(天堂地獄說) 등 천주교 기본교리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척사(斥邪) 행위를 강조하고 정학(正學) 곧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였음을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서전법’(購書傳法)을 추궁당하고, ‘자위교주’(自爲敎主)를 비난받으며, ‘밀통양인’(密通洋人)하고, ‘잠모가환’(潛謀家煥)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규정한다.
조 교수는 이승훈이 자기 나름으로 변호를 시도하였음에도 천주교를 전파시킨 ‘원흉’으로 사형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순교자로서가 아니라 신앙을 부인하고 포기한 ‘기교자’(棄敎者)로 사망하였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조 교수는 이승훈이 1801년 2월 10일자 심문 과정에서 1795년 예산에 유배되었을 때 백성들의 미혹함을 일깨우기 위해 삼단(三段)으로 작성한 ‘유혹문(牖惑文)’에서 강생구속(降生救贖)과 천당지옥설 배격을 통한 상선벌악설(賞善罰惡說)을 부인하였으며, 1791년 신해(辛亥) 박해 시에 형조판서 김화진에게 보낸 ‘벽이문(闢異文)’에서 천당지옥설과 ‘위천주 횡행설(爲天主橫行說)’을 배격한 점을 들어, 그가 천주교의 핵심 교리를 부정하고 그 모순점을 격파하려는 시도를 하였던 것으로 파악한다. “이렇듯 그(이승훈)는 1801년 신유교난 당시에 이르러서 천주교 교리에 대한 영세 초기의 긍정적 입장에서 거의 이탈되어 있었고 천주교 교리의 주요 부분을 부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 교수는 이승훈이 1801년 심문과정에서 신해(辛亥) 1791년 이후 국은에 보답하고 부친의 말을 어기지 않기 위해 정학(正學), 즉 주자성리학에 전념하였음을 자신이 ⌜주자백록동연의(朱子白鹿洞衍義)⌟을 지은 사실을 들어 제시하고자 시도하였으며, 당시 대표적인 척사인(斥邪人)이었던 이기경(李基慶)이 자신의 천주교 배척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정학인(正學人)이었던 심철(沈浟)와 교유 관계를 맺는 등 천주교를 배척하였다고 진술한 점을 들어 1801년 당시에 천주교와 무관한 존재임을 밝히려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보고 있다.
또한 조 교수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정약종이나 주문모 신부와 같은 당대 교회 지도자들이 그가 ‘기교(棄敎)’하고 있었다고 증언한 사실, 그리고 조선 측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이승훈이 배교자로 죽었다고 기술한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내용 등을 근거로 들어 이승훈이 순교자가 아닌 기교자로서 죽음을 맞았다고 규정한 것이다.
3. 죽음의 배교/순교 판정 유보설
이승훈의 죽음을 배교자나 순교자 죽음으로 단정하기를 유보하는 황사영(黃嗣永, 1775-1801)과 일부 소장 사학자들의 견해를 일별하기로 한다.
1) 이승훈의 죽음에 대하여 교회 내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가까운 시점에서 언급한 황사영은 자신도 같은 해에 순교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백서(帛書)에서 이승훈 죽음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실 확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고 신중한 유보 입장을 표명하였다.
황사영은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의 일원으로서 정조 임금의 서거 후 즉위한 순조의 대왕대비에 의해 1801년에 주도된 신유박해의 실상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교회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방도를 논의하려고 비단 천에 작성했던 백서에서 이승훈의 죽음의 경위와 아울러 첫 영세자로서의 교회 활동과 배교에 관하여서도 기록하면서도 죽음과 관련하여서는 진실을 마땅히 더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적고 있다.
“…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 홍낙민(洪樂敏) 등… 모두 전에는 주님을 믿었으나 구차하게 목숨을 아까워하여 성교(聖敎)를 배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성교를 해쳤지마는 마음속에는 아직도 신앙을 위해 죽을 생각이 있었는데, 그 당파의 사람은 수가 아주 적어서 세력이 몹시 외롭고 위태로웠습니다. … 2월 초아흐렛날,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 홍낙민(洪樂敏)을 금부(禁府)에 하옥시키고, … 이에 조정[公卿會議]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판결하여 26일에 아우구스티노(奧斯定)와 최요안(若望), 최토마스(多黙), 홍프란치스코사베리오(洪方濟各沙勿略), 홍낙민(洪樂敏), 이승훈(李承薰) 여섯 사람을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였습니다. … 이승훈 베드로는 이가환의 생질이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매형입니다 . … 계묘년(癸卯年, 1783)에 이승훈이 그 아버지를 따라 북경을 가게 되자 이벽이 은밀히 부탁하여 말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천주당에 서양 사람인 선교사가 있으니 자네가 가서 찾아보고 신경 한부만 구해달라고 하며, 아울러 영세(領洗) 받기를 청한다면 그 서양 선교사는 반드시 크게 사랑할 것일세. …’ 하였습니다. 승훈이 그의 말대로 천주당에 가서 영세를 청하니까 여러 신부들은 영세에 필요한 성교(聖敎)의 요점과 이치에 밝지 못하다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오직 양 신부(梁棟材, De Grammont)만이 힘써 주장하여 세례를 주고 더불어 성교(聖敎)에 대한 책을 많이 주었습니다. 승훈이 집으로 돌아와 이벽 등과 함께 마음을 차분하게 하며 그 책을 읽어보고 비로소 진리를 터득하였습니다. … 뒤에 그의 아버지가 성교(聖敎)를 엄중히 금하고 나쁜 친구들은 마구 그를 비난하였지만 승훈은 오히려 참아 견디며 성교(聖敎)를 받들었습니다. 선왕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경술년(庚戌年, 1790) 가을에 음직(蔭職)에 임명하여 벼슬이 평택 현령에 이르렀습니다. 신해년(辛亥年)에 체포되어 배교하고 여러 번 성교(聖敎)를 헐뜯는 글을 썼으나 다 자기의 본심(本心)은 아니었습니다. 을묘년(乙卯年, 1795)에 신부가 이 나라에 온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고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박해가 일어나 승훈은 두려워서 다시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성교(聖敎)에 대한 책을 전하였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의 성교(聖敎)에 대한 공박과 배척은 반드시 그 죄가 승훈에게로 돌아오기 마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왕은 매번 그를 두둔하고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승훈은 겉으로는 비록 세속을 따랐지마는, 혹시 옛날에 함께 신앙을 지키던 벗을 만나면 간절한 정을 못 잊어 항상 다시 떨치고 일어나려고 생각하다가 이에 이르러 화를 당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성교(聖敎)에 관한 서적을 전한 죄가 있어서 비록 다시 배교한다 하더라도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성교(聖敎)를 위한 죽음인지 아닌지는 마땅히 앞으로 사실을 더 조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2002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된『한국 가톨릭 대사전』판은 1985년 판과는 달리 “이승훈” 항목에서 그가 배교자로서 죽었다는 단정을 유보하고 있다. 여기서 기고자 차기진 박사는 이승훈의 저술 <벽이문(1795)>과 <유혹문(1795)> 등에서 천주교 주요 교리를 비판하는 척사론에 해당하는 내용들과 함께 여전히 신앙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기술하는 한편, 이승훈이 신앙을 분명하게 증거 한 적도 없지만, 1801년 교회 지도층의 밀고를 강요당하면서도 어느 누구의 이름도 발설치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이승훈의 죽음과 관련한 사료들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사실로 미루어 순교 여부 문제는 면밀한 검토가 앞으로 이루어져 한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이만채(李晩采)가 지적한 것과 같이 1785년에 지음 <벽이시> 중의 일부는 그가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다. 반면에 천당 지옥설을 비판하고 위천주횡행설을 거론한 1785년의 <벽이문>,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비판한 <유혹문>은 척사론에 해당한다. 이승훈은 1801년의 문초과정에서 천주교의 지도층을 밀고하도록 강요받았지만, 결코 누구의 이름도 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신앙을 분명하게 증거 한 적도 없다. 한편 주문모 신부는 문초 과정에서 1794-1795년 당시의 이승훈에 대해 ‘반교(叛敎)’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이는 신앙을 버렸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은 이와 관련하여 ‘이승훈은 1791년 이후 신앙에 전심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은 이승훈의 순교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였다. 따라서 그의 순교 여부는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여 앞으로 더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3)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 역시 2002년 2월 16일에 개최된 <한국 순교자 시복 시성을 위한 1차 세미나>에서 “이벽 ‧ 이승훈 ‧ 권철신의 순교 여부에 대한 검토” 주제로 발표한 연구 논문에서 이승훈의 순교 여부와 관련하여 유보에 가까운 견해를 표명하였다. 서 박사는 이승훈의 죽음을 둘러싸고 순교자와 배교자의 죽음으로 규정하는 상반된 견해들의 근거를 약술한 뒤에 자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이승훈이 1801년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국문(鞫問)을 당하면서 진술한 내용들은 그가 배교하는 자세를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일단 규정한다. 서 박사는 이승훈이 을사추조적발 사건 후에 서학을 배척하는 글과 시를 지었으며, 서학을 배척하였다고 진술하였으며, 이 진술이 거짓으로 드러나자 뜻으로는 사학을 척절하고 신해년(1791) 이후에는 영원히 단절하였다고 진술하면서 천주교가 아버지와 임금을 몰라보고 예의와 도덕을 유리하는 사설이라고 비판하였으며, 1795년에는 강생구속론이나 천당지옥설과 같은 주요 교리를 배척하는 유혹문을 작성하여 귀양지인 예산 일대에 효유하도록 진술한 사실에서 그의 배교 자세를 읽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서 박사는, 이승훈의 진술 중에 진실이라고 볼 수 없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배교를 드러내는 진술들이 ‘진실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규명 작업이 요청된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이승훈이 국문을 받으면서 을사박해 이후 사학을 하지 않았다는 진술이 거짓으로 판명되면서 신문관은 그의 진술에 대해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었으며, 그가 경술(1790) 연간에 북경 선교사들에게 밀사를 파견하는 일을 직접 주관하였음이 선교사들에게 전달된 서한들을 통하여 사실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정약용과 권일신, 그리고 윤유일이 자신의 이름을 빌려 북경을 왕복하였다는 진술이 허위이며, 이 일들을 관청에 고하려고 하였지만, 정약용의 청원을 받아들여 이를 행치 않았다는 진술 또한 거짓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 박사는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이승훈의 배교 진술들이 박해를 모면하기 위하여 꾸며낸 진술로 보아야 할 것이지 천주교 신앙을 진심으로 배척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라고 본다.
특히, 서 박사는 참수당하기에 앞서 심문관이 고문을 가하며 살고 싶다면 신자들을 고발하고 정법에 따라 살고 싶다면 사학 괴수들을 고발하라고 엄중히 추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른다고 대답하고 끝내 아무도 고발하지 않은 사실을 들어 이승훈이 천주교 신앙을 진실하게 배척하지는 않은 것으로 본다. 그리고 서 박사는 1790년 7월 11일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둘째 서한에서 당시 그의 집안이 박해를 받고 있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들을 계속 돌볼 수 없게 된 사정을 알리고 책임을 면제해 달라고 청하면서도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에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한 사실을 들어 이승훈의 외적 처신이 천주교 신앙을 진실로 배척하는 배교 행위로서가 아니라 박해를 모면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 것이다.
4. 배교 후 순교설
국내 저명 사학자 류홍렬 교수와 이원순 교수들이 이승훈이 배교 후 순교자로서의 죽음을 맞았다고 보는 견해를 피력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1) 류홍렬(柳洪烈) 교수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현대적 선도자로서 이승훈이 순교자의 죽음을 맞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을 위시한 직계 후손들이 4대에 걸쳐 순교한 사실을 밝혀 그의 집안이 순교자 가정임을 역설하였다.
류홍렬 교수는 역저『한국천주교회사』(1962년)에서 이승훈이 한국인 첫 영세자로서 교회 창설에 주요 역할을 수행하였으면서도 배교를 선언한 인물이지만, 결국은 첫 전교자라는 죄명으로 순교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1783년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과 힘을 합하여 조선 교회를 창설하였다. 아버지가 교를 못 믿게 하고, 친구들이 사나운 말로 공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었다. 그러나 1789년에 평택(平澤) 현감이 되고, 1791년 교난 때에는 교회를 공격하는 글을 지어서 배교를 선언하였다. 1795년에 주 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크게 감동되어 다시 성사를 받을 준비를 하던 중, 또 교난을 만나 예산으로 귀양 갔다. 그러나 조선에 교회를 이끌어 들인 사람은 승훈이었으므로, 악당들이 교회를 공격할 때에는 반드시 그 죄를 승훈에게 돌리었다. 따라서 겉으로 완전히 교회를 떠난 것과 같은 행동을 하던 그는, 다시 잡히어 배교를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교하였다는 죄목으로 목을 잘리어 죽었다. 때에 그의 나이는 45세이었다. … 그의 후손들도 거의 교우가 되었다.”
이 저서에서 류 교수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에 조정의 실권자였던 김 대왕대비가 교회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의도에서 청나라 황제 인종(仁宗)에게 바치도록 작성한 진정서 ⌜토사주문(討邪奏文)⌟에서 ‘국가는 이(사학)를 금지하고, 그 주동이 되는 이 승훈, 황 사영 등을 극형에 처하였다는 것을 아뢰었다’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류 박사는 이승훈이 당대 국가 공식 기록물에 천주교 주동 인물로 지목되어 죽음에 처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신앙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교회 지도자로서 순교하였음을 시사한 것으로 본다.
또한 류홍렬 교수는 논문 “李承薰과 그 後孫들의 殉敎”(1964년)에서 이승훈의 집안에서 4대에 걸쳐 7명의 순교자가 나오게 된 사실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류 교수는 남인(南人) 족보 남보(南譜) 자료와 후손들의 진술을 자료로 하여 그의 조상들의 역사를 조망하고 친가와 외가 가족들의 관계를 기술하는 가운데 그가 고려 시대에 이어 문무(文武)양반의 상당한 벼슬을 계속 이어오던 명문 가문 출신임을 밝히면서 그와 후손들의 순교 경위를 기술한다.
“李承薰 베드루는 朝鮮天主敎會를 창설한 이래 殉敎할 때까지 前後 16년 동안에 있어서 多少 信仰이 흔들린 때도 있었으나 곧 마음을 돌려 이 땅의 敎會를 그 敎名대로 盤石(베드루) 위에 올려놓는데 힘쓰다가 거룩한 피를 흘림으로써 그리스도敎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 … 李承薰의 直系後孫들 가운데서 만도 세 째 아들인 身逵(76歲)를 포함하여 孫인 在誼(61歲), 在謙(40歲), 在謙의 妻 鄭씨와 曾孫인 蓮龜 ‧ 筠龜兄弟가 1801년부터 1871년까지 이르는 70年 사이에 殉敎하였으니 그 집안에서는 4代에 걸쳐 7명의 殉敎者를 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2) 교회사학계의 원로 이원순(李元淳) 교수 역시 이승훈이 배교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결국은 순교자로 사망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원순 교수는 저서『韓國天主敎會史硏究』에서 1801년 순교한 여러 순교자들 명단에 주문모 신부 다음으로 이승훈을 거명함으로써 그가 순교자로서 죽음을 맞았음을 진술하고 있다. “1801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辛酉迫害로 조선교회는 周文謀 神父와 李承薰, 崔昌顯, 丁若鍾, 李存昌, 柳恒儉, 黃沁, 黃嗣永 등의 순교로 聖務擔當者와 指導的 平信徒를 모두 잃었다.” 그리고 이 교수는 논문 “동방의 베드로 이승훈”에서는 스승께 세 번이나 배신행위를 하였으면서도 결국은 반석 위에 교회를 올려놓은 베드로 사도에 비견하여 순교하기까지의 이승훈의 역정을 추앙하기도 하였다.
“… 주문모 신부의 입국은 드디어 이승훈의 귀에 들어왔다. 그 소식은 배교의 고민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는 곧 회두를 결심하였다. 그는 주 신부를 만나 다시 성사를 받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은 당국에 밀고 되었고, 당국은 즉시 체포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승훈은 또다시 투옥, 취조를 받았다. 그는 박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곤욕을 받아야만 했다. 이 때 그는 직접 관련은 없었으나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하여 드디어 충청도 예산(禮山)으로 유배당하였다. … 그에게는 조선천주교회가 반석 위에 놓여지는 날까지 그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시련이 부여되어 있었다.… 벌어진 사건이 신유박해이다. …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이승훈은 유배지인 예산에서 서울로 불러 올려와 1801년 2월 9일에 이가환, 홍낙민과 더불어 의금부에 투옥하였다. 그가 투옥되자 9일 후에는 권엄(權欕) 등 63명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사학의 괴수 이승훈을 극형에 처하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이승훈은 가장 증오를 받는 대상이었다. 이승훈은 9일, 11일, 18일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취조하는 마당에 끌려나와 곤욕을 겪으며 악형을 받았으나 모진 고문에도 그의 심정은 오히려 담담하였다. … 지난날의 회의와 주저, 냉담과 배교, 이 모든 시련은 지났다. 이제 그의 앞에는 순교의 영광만이 남았던 것이다. 2월 26일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날 그의 동지이던 권철신은 옥중에서 타살 당하였고, 이승훈은 최창현, 최필공, 홍낙민과 더불어 형 집행 장소인 서울의 서소문 밖 네거리(지금의 西大門區 蛤洞 入口)에 끌려 나왔다. 내리치는 칼날 아래 그의 목은 잘라졌고, 순교자들의 선혈은 서소문 밖 네거리의 흙을 붉게 물들였다. 그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자요, 초기 조선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이승훈은 죽음으로 신앙을 지켜 천주의 품에 안겼다. 세 차례나 배교했다는 씻을 길 없는 죄과를 순교(殉敎)로 갚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 교수는, 자신이 이승훈의 공로를 추앙하는 것은 그가 배교를 하는 중에도 천주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마침내 순교자의 죽음을 맞았기 때문만이 아니고 그의 집안이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유를 들기도 하였다. 그는 앵베르(Imbert, L. -J. -M, 范世亨, 1796-1839) 주교가 김대건 등 세 사람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에 파견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성직자로 양성하기 위하여 1838년 정하상 성인과 함께 선발한 네 명 중 이승훈의 막내아들 신규(身逵)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1839년 발생한 기해박해 때에 앵베르 주교가 순교함으로써 양성 과정이 중단된 뒤에도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1868년 병인박해 때에 76세를 일기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으며, 이승훈의 또 다른 아들 택규(宅逵)의 아들 재의(在誼)도 숙부 신규와 함께 선교사 영입에 헌신하였고, 그의 세 아들 중 연구(蓮龜)와 균구(筠龜) 등도 1871년 박해자에 의해 순교한 사실을 들어 이승훈의 공로를 기린다.
“이와 같이 이승훈의 집안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 그 아버지에 그 아들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승훈과 그 일가가 걸어간 피어린 자국은 오래오래 한국의 천주교회사를 찬란하게 누벼갈 것이다.”
5. 신앙증거자로서의 순교자설
고(故) 주재용(朱在用, 1894-1975) 신부나 변기영 몬시뇰 등은 이승훈이 진실로 배교한 일이 없고 신앙을 시종 간직하며 생활하다가 순교자로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보고 있다.
1) 주재용 신부는 동양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교회사 관련 주요 논저를 발표하여 기존 교회 서적의 착인(錯認) 오류를 교정하고자 진력한 분이다. 주 신부는 사제서품 50주년을 맞아 간행한『韓國가톨릭史의 擁衛』(1970년)에 수록된 논문 “한민족의 신앙 비조 이승훈(李承薰)의 일생”과 “이승훈 순교의 진위(眞僞) 비판”에서 이승훈이 배교자로서 참형을 당하였다는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서 저간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주장과 달리, ‘그분은 한번도 정식 배교를 한 일이 없고 도리어 떳떳한 순교자로서 성스럽게 참수당하셨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우선, 주재용 신부는 을사추조적발시에 ‘이승훈이 가지고 있던 교회 서적을 모조리 친히 불태우고 만인 앞에서 신앙을 배교하는 글을 써서 공개하였다’는 달레 등의 견해는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신해(1791)년 11월 6일 조정 의금부가 작성하여 나라에 적어 올린 신문조서에서 수록된 이승훈의 공술(供述)에서, “계묘(癸卯=1783)년 겨울에 그 부친을 따라 연경(즉 북경)에 갔을 때 서양인이 선물로 주는 책, 즉 ⌜천주실의⌟등 몇 질을 받아 가지고 돌아 왔는데, 그 후 을사(1785)년 봄에 제 부친이 종족을 모아놓고 그 책 전부를 불태워 버렸는데, 그때 저는 드디어 벽이문 ‧ 시를 지어 남김없이 통척했다”(乙巳春矣父聚會宗族悉焚其書… 渠遂作闢異之文痛斥無餘)고 진술했음을 제시한다. 주 신부는 이승훈이 을사년에 작성했다는 ⌜벽이문⌟이 신해 박해 당시 그의 벽이(闢異)를 드러낸 명증으로 간주되어 있지만 원문은 남아 전해지지 않으며, 당시 교회 적대자 이기경(李基慶)이 신해년 11월 13일자로 임금께 올린 상소문에서 벽이문이 천주교를 배교하지 않고 오히려 변호하는 내용이었다고 갈파한 사실을 적시한다. 이기경은 ⌜벽이시⌟에 대한 주석문에서 “이 세 구절은 바로 서사(西士 = 천주교 선교사)를 첨앙하고 간절히 생각하는 뜻이다(按此三句 卽 瞻想西士之意也)”라고 갈파하면서 이 시가 천주교를 벽파하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사모하고 못 잊어 생각하는 글이라고 지적한 점에 동의하면서 주 신부는 이 시를 이승훈이 천주교를 동경하고 교회 서적을 불태운 것을 마음 아파하는 뜻에서 작성한 글이라고 보기까지 한다. 그리고 당시 또 다른 반대자 홍낙안(洪樂安)의 상소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지의 글들이 자주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적대자들이 배교의 뜻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주 신부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후 이승훈이 배교하지 않았음을 1785년에 발생한 소위 ⌜丁未拌會事⌟ 사건을 들어 제시하기도 하였다. 즉, 그가 진사급 이상의 신진 관리들이 모여 사는 반촌(拌村)에 들어가 그들을 모아놓고 천주교 도리 강습을 하는 것을 발견한 이기경은 이를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굽히지 않았기에 임금께 ‘이승훈은 신이 사교(천주교)를 아무리 반복 논척하여도 끝끝내 회개치 않더이다(臣 反復論斥而終 不回悟)’라고 1791년 11월 13일자로 임금께 올린 상소한 사실을 들고 있으며, 홍낙안 역시 ‘승훈 등이 끝끝내 회개치 않했음은 세상이 다 아는바다(人紙承薰輩之終不)改悔)’라고 증언한 사실을 들어 이승훈이 배교는 커녕 전교에 열중하였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주 신부는 이승훈이 북경 선교사들에게 보낸 세 차례에 걸친 서한 중 두 번째 서한 내용에 의거하여 1785년에 그가 배교하지 않고 신생 교회의 관리중임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서한에서 1786년부터 시작한 가성직 활동을 선교사들의 충고를 받고 1787년에 즉각 중단한 점에 미루어 배교자일 수 없었음을 역설하며, 그가 1790년 4월에 받은 ⌜제사금지 교서⌟ 내용으로 한국교회 신자들이 충격을 받고 황망해 있음을 기술한 세 번째로 북경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교회 당국의 지시에 따라 처신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내가 가능한 한 천주 봉사에 전력을 다함은 내게 지워진 정의(正義)의 의무요 책임임을 잘 알고 있지마는, 지금 나의 현실적 환경 때문에 이 교회의 중임(重任)을 도저히 계속 맡아보기가 허락되지 않으니, 이 ⌜중임⌟에서 나를 벗겨주시기를 간곡히 원합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영신 아버지 당신들의 지시와 명령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주 신부는 이승훈이 평택 현감으로 재직 시에 국법에 따라 공자묘(孔子廟)에 배알함으로써 배교를 드러냈다는 주장이 사실과 다름을 강조한다. 실제로는 이승훈이 평택 현감으로 부임하여 국법에 따라 3일 안에 공자묘에 배알해야 하는 데, 제례를 하지 않았다고 고발당한 내용을 명기한다. “보름이 지나도 배알하러 가지 않다가, 때마침 성전에 비새는 데가 있어서 비로소 살피러(奉審) 가기는 했으나 ‘봉심에는 배례가 없다’(奉審無拜禮)고 칭탁하고서 또 절하지 않고 나왔으니(不拜而出), 대게 서법(西法 = 天主敎法)에는 오직 천주만 섬기고 다른 신은 섬기지 못하는 까닭일러라(他紳不事)” 주 신부는 이것이 소위 ⌜평택안핵사(平澤按覈事⌟ 사건의 진상임에도 불구하고 달레 등은 사실을 그릇 파악하고 이승훈이 배교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통박한 것이다.
그리고 주 신부는 이승훈이 주문모 신부의 체포 실패 사건의 여파로 1791년 7월 26일에 예산(禮山)으로 유배당하였을 때에 “베드로 이승훈이 예산 고을로 귀양가게 되어 1년간 살았는데, 거기서도 신자들과는 인연을 아주 끊고 제가 분명히 배교했다는 ⌜변명서⌟를 공개했지마는, 그의 비겁한 행동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신용하지 않했다.”라는 달레 교회사의 기술에서 나오는 ‘이승훈의 비겁’은 정미반회사건이나 평택 안핵사 사건에서 보여준 이승훈의 초인적인 용기에 비추어 볼 때에 부당한 비난이고, ⌜변명서⌟가 만일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반대자들의 논척에서 언급되기 마련인데, 그러한 논척이 전연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변명서⌟ 자체가 가공의 문서일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이어서 주 신부는 ⌜황사영 백서⌟와 ⌜달레사⌟에서 언급된 ⌜신유년 배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다.
주 신부는 ⌜달레사⌟에 인용된 이승훈의 ⌜결안문⌟이 전(A) 후반부(B)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아야 하는데 전반부는 천주교를 혹독하게 후욕(詬辱)하는 내용으로, 후반부는 이승훈의 고백으로 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파악하면서, 주 신부 자신에게 전해진 또 다른 대동소이한 세 개의 ⌜결안문⌟이 있는데, 이들이 모두 후반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 전반부 내용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고 지적한다. 고백문이란 으레 ‘矣身(의신)’, 즉 ‘나, 나의’로 시작되기 마련임에 비해, 전반부에는 이 표현이 나오지 않고 후반부에만 이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전반부는 결코 본인의 말이 될 수 없고 제3자의 서술체로 꾸며진 것이라고 규정한다. 주 신부는 달레사에 수록된 결안문을 대략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A: ‘서학서(西學書)란 고금에 없는 추루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다. 이러한 요서, 요언(妖書, 妖言)으로써 어떤 ⌜예수⌟라는 것을 선전하여 세상을 속이고 있다. 저놈들의 소위 천당, 지옥이란 불가(佛家)의 졸렬한 모방에 불과하다. 저놈들이 ⌜신부⌟라 부르는 것은 인륜(人倫)을 파멸하는 것에 불과하다. 저놈들은 재산과 계집은 공유물이라 하며, 형사(刑死)는 두려워 할 바 없다 한다. 그러니 저놈들의 말은 모두 다 거짓말이요 파렴치한 것뿐으로서, 성인은 이를 타매하고 백성은 응당 이를 배척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 ‘나(矣身)는 친히 영세하고 만리 밖에서 책을 사들여 인아척당들에게 전파하고, 이것이 오히려 부족다 하여 양인(洋人)들과 상통하고 사귀어 흉측, 비밀한 계획을 꾸미고 유일(尹有一을 말함)과 부동하여 흉한 음모를 꾀한 흔적이 뚜렷하고, 약종(정 아우구스띠노를 말함)과 더불어 흉모를 연결하였다. 왕이 법을 내리매 내가(矣身) 주관하는 일이 모두 잘못임이 거울에 비침같이 환하거늘 나는 밖으로는 회개하는 척하고 속으론 소경 같은 마음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요당 추류(妖黨醜類)들은 나를 교주(敎主)로 대부(代父)로 받들지 않는 자 하나도 없다. 이러한 죄인이 어찌 천지간에 용납할 수 있으랴? 모든 증거가 환하게 드러나고 모든 죄상이 백주에 소연하니 천법(天法)이 뚜렷하고 왕법(王法)이 엄정하다. 지만(遲晩)”
주 신부는 그 문장 구조로 보아 A는 결코 이승훈이 말이 아니고 B만은 말투가 어느 정도 그의 말이 분명한데, 여기에는 배교하는 말은 전연 없다고 단정한다. 끝에 붙은 ‘지만(遲晩)’(즉 자백한다는 말)은 ⌜결안문⌟에 으레 붙는 상투어로서 모두 강제로 하는 말이어서 ⌜자유고백⌟으로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A에는 ‘矣身’이란 말이 전혀 없이 타인의 서술체임이 명백하기에 A에 해당하는 ⌜결안문⌟을 이승훈이 스스로 작성하고 서명한 배교 문서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주 신부는 이기경의 기록을 받아 후손 이만채(李晩采 )가 편찬한 ⌜벽위편⌟(旣刊未刊 두가지) 및 이능화(李能和)의 ⌜조선 기독교 급 외교사⌟ 기록에 의거하여 이승훈의 구속부터 참수에 이르는 15일 동안에 발생한 사건들을 일지별로 작성하였다. 여기서 주 신부는 이승훈이 2월 9일에 체포되어 의금부에 구속된 후 11일에 30도에 달하는 형문(刑問)을 받고 18일에는 갱초(更抄)와 함께 15도의 형문을 받는 가운데, 권엄 등 63인으로부터 ‘이 승훈은 사학 괴수이니 꼭 죽여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받았으며, 21일에는 그가 정약종의 일을 고백치 않음이 오로지 행연(行椼)을 자원함이라는 상소를 받는 한편, 절친한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으로부터도 ‘천금(千金)으로 책을 사들여 경외(京外)에 광포했다’라는 상소를 받은 뒤에 26일에 정약종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 신부는 이승훈이 이미 배교했다면, 무엇 때문에 거의 매일 형문을 받으며 55도에 이르는 혹형을 가했는지, 그리고 참수일 전 8일에 같은 남인(南人) 죽마고우 같았던 권엄 등이 ‘오늘의 난본으로 말하면 1즉 승훈이요, 2즉 승훈이니 그 죄는 만 번 육시해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누구보다도 먼저 죽여 달라고 63인의 연소로 상소하였으며, 5일 전에 역시 같은 남인으로 절친한 친구였던 이익운이 천금구서(千金購書) 사건을 고발하였는가라고 물으면서 배교설이 사실무근임을 제시한 것이다.
주 신부는 대사간 신봉조(申鳳朝)의 상소문과 ⌜헌부 신계(憲府新啓⌟의 기록에 의거하여 이승훈이 초인적 용맹으로 혹형에도 불구하고 형벌을 이겨내고 순교하였다고 역설한다. 신봉조의 상소문은 이승훈 등이 의연하게 혹형을 받았음을 증언하고 있다. “신이 추국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친히 눈으로 보오니 승훈 등 3인은 똑같이 완악한 패기가 서로 서려 있고, 마수(魔祟)로써 이용하기를 상습으로 삼고, ⌜차꼬⌟(形具) 보기를 초개같이 하고, 형륙에 나아가기를 낙지에 나감같이 하고, 그 단서가 이미 드러났건만 죽자하고 실토치 않으니, 고금 천하에 이같이 모질고 흉측한 유가 어디 또 있으리까?” ⌜헌부 신계⌟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어허, 통탄할 노릇이로다! 가환, 승훈, 약용의 죄여! 칼과 톱 보기를 낙지로 삼고, 이미 대각의 성토가 극률을 청하는데 이르렀건만, 모질게도 움직이지 않고 끝끝내 고치지 않는도다! 지금 이 3인을 치죄하지 않고는 비록 날마다 백 명씩을 베어도 종당 금할 길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이 3인을 먼저 엄히 추국하여 그 정상을 얻어 쾌히 나라의 형법을 바로잡아야 하겠나이다.”
주 신부는 이승훈이 마침내 참수 순교로 죽음을 맞았다고 규정한다. 그는 1965년 11월 4일에 묘소를 참배갔을 때 문헌상으로는 아니지만 가문에서 구두로 전승되어온 최종시(最終詩), “月落在天 水上池盡(월락재천 수상지진)”의 내용을 이승훈의 6대 종손 이병규(李炳奎) 옹(翁)으로부터 직접 접하고 무한한 감회를 일으켰다고 회고하면서 이 시를 통하여 이승훈이 성스러운 참수 순교를 하였다고 결론짓는다.
“이 시는 말하자면 ‘달이 비록 서산에 지더라도 하늘에 그저 있음’ 같이, 남이 비록 나를 아무리 떨어졌다(배교) 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저 남아 있고, ‘물이 비록 물 위를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 같이 ‘내 목숨을 아무리 앗아 가도(죽여도) 내 신앙은 내 속에 변함없이 온전하다’라는 뜻이 아닐까? ⌜水上⌟이란 ⌜上⌟자를 ⌜죽음⌟으로 새겨 봄은 선생이 잘 알던 ‘혼승백강(魂昇魄降) 즉 죽음’이란 말에서 ⌜혼승⌟만을 따서 죽음에 비유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움 시귀인가? 여기서도 선생의 성스러운 참수 순교를 볼 수 있지 않는가?”
2) 변기영 몬시뇰은 이승훈의 죽음과 관련하여 주재용 신부와 견해를 전적으로 같이하면서 그가 시종 신앙을 결코 저버리지 않고 초연한 자세로 순교하였다고 주장한다.
변 몬시뇰은 기본적으로 순교는 당사자가 신문자의 문초에 대한 답변 진술이나, 강요된 행동이나, 강압에 의해 작성된 문서에 의거하지 않고 ‘신앙 때문에 당하는 죽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입장을 개진한다. 천주교 신앙인이 아니었으면, 죽을 이유가 없는 신앙인이, 신앙에 대한 미움 속에서 그 증오심 때문에(in odio fidei) 죽음을 당할 때에 순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변 몬시뇰은 배교란 신앙 자체를 아주 부정하고 거부하면서, 남은 삶을 꾸준히 비신앙인으로 사는 것을 뜻한다. “결국 배교란 마음과 몸으로 꾸준히 계속하여(contumaciter) 신앙을 거부하는 생활과 활동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변 몬시뇰은 이승훈의 경우 부모께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제1 덕행으로 삼던 당시 사회기강과 분위기와 상식하에서, 또 가정과 가문의 평화를 덜 깨트리기 위해서, 천주교 신앙을 법정에서 신앙포기 선언과 관련한 박해자들의 말 강력하게 주장하며 고백하지 않았는데, 그의 문초기록이 담긴 법정 기록, 보고서 등이 허위날조나 조작이 드물지 않아서 진실을 액면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보는 데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승훈이 배교하지 않고 의심의 여지없는 순교자로서 죽음을 맞았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우리는 당시 박해자들의 말과 기록, 보고서, 또는 박해자들이 퍼뜨린 갖가지 헛소문 등을 그대로 너무 믿을 의무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형벌과 고문으로 수사하는 이들이 퍼뜨리는 소문이나, 작성 보고서치고 허위날조나 조작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불굴의 의지로 신앙을 증언하는 이들에게서 억지로라도 심지어 조작된 굴복이라도 받아내야만 하고, 이겼다고 해야만 했던 박해자들은 허위 보고서나 날조된 소문을 흘리는데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박해자들은 종종 용감한 신앙의 증인들 중 신도들의 중심적인 지도자들을 거짓으로라도 신앙포기선언자(信仰抛棄宣言者)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허위조작이 탄로되는 것을 더욱 우려했기 때문에, 바로 살해하였다.… 이승훈 성현의 경우 신앙을 포기했다고 하면서(사실 이 자체도 허위조작이었지만) 바로 참수하였으니, 우리는 그 이유를 중시해야 한다.… 칼과 죽음을 우습게 여기던 이승훈 성현의 경우 박해자들은 허위배교 조작의 탄로가 새로운 불씨가 되는 것이 두려워 바로 참수해야만 했다.”
변 몬시뇰은 문초 과정 중 박해자들이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나 교회 활동에 대한 질문에 대해 가급적 피해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한 대답이 외형상 거짓말이거나, 교회 부정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해서 내면적 배교 진술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래서 답변 내용 중 한 구절이나 한두 마디 단어에 치중하여 응답자의 내적 자세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종합적으로, 결론적으로, 특히 박해자들의 搜査 結論이나 問招 結案을 重要視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런데, 이승훈을 위시한 다른 창설 주역들의 수사를 담당했던 관리들이 이들을 배교자로 간주하는 결론을 내린바 없으며, 오히려 한결같이 신앙을 고수하였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음을 중시한다. “끝끝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木石처럼 搖之不動의 자세로 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이었다.”고 수사관들이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이승훈의 심문관들은 이승훈이 끝내 배교하지 않았음을 결어로 명확히 기록하였다고 기록한 ⌜推案及鞫案⌟을 인용한다. “이승훈은 사나울만큼 搖之不動하며, 끝끝내 뉘우치지 않고 있도다(悍然不動 終不悛改).”
그리고 변 몬시뇰은 관청 기록에 이어서 문중이나 가정의 문헌과 구전(口傳) 역시 당대에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일임에 주목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한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여 남긴 기록이나 어록(語錄)이 있을 경우에는 제삼자의 기록, 전언, 또는 추정이나 설명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기에 죽음 그 자체 다음으로 순교 여부를 가늠하는 근거 자료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웅열사들이 죽음 전에 남긴 말이나 글에서 그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와 가치와 교훈을 알게 된다. 이러한 기록이나 어록은 그분들의 죽음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중요시해야 할 것으로, 죽음이라는 사실 다음으로 최우선적인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4분들의 순교사실 규명(糾明)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죽음을 의식한 당사자들의 표현은 가장 순수하고 진솔한 심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음을 당하는 당사자 본인의 것이며, 남들은 외부에서 피상적으로 볼 뿐이다.”
변 몬시뇰은 주재용 신부와 같이 이승훈의 참수 직전 읊어지고 그의 집안에 대대로 전승되어 오다가 6대 종손으로 전달받았다는 운명시(殞命詩)의 내용, ‘月落在天 水上池盡(월락재천 수상지진)’을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아도 못 속에 있느니라’고 번역하면서 그가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확고한 신앙인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주장한다.
“이 시는 이승훈 선생의 집안에 대대로 전승되어 내려오는 것으로서, 이승훈 선생이 서소문(西小門) 형장에서 칼을 받기 직전에 동생 이치훈(李致薰)이 따라가서, ‘형님, 천주학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말씀만 하시면 상감께서 살려주신답니다.’하며 소매 자락을 잡고 애원하였으나, 이승훈 선생은 동생의 손을 뿌리치며, ‘무슨 소리냐: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이니라.’하시고 칼을 받고 참수되셨다는 것이다. 이는 이승훈 선생의 6대 종손 이병규(李炳奎) 옹(翁) 고(故) 주재용 신부, 오기선 신부, 류홍렬 박사 및 필자에게 전해준 것이다.”
변 몬시뇰은 이승훈의 이 시를 가리켜 죽음에 직면하여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하거나 신앙을 후회하고 탓하는 것이 아니고 확고하고 진솔한 신앙인이 아니고서는 읊을 수 없는 거룩한 순교자의 시라고 보아 그의 죽음 다음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한, 변 몬시뇰은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李在誼)가 정하상 성인과 함께 김대건(1821-1846)과 최양업(1821-1861)들 보다 앞서 신학생으로 양성되었으며 부제품까지 받았었다고 주장한다.
“이승훈 성현의 손자 이재의 토마스(1807-1868)도 정하상 회장보다 비록 10살 아래지만, 국내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고, 부제품까지 받았었다. 이재의 토마스가 부제품을 범주교(Mgr. Imbert)에게서 받았는지, 아니면 마카오나 북경에서 어느 주교한테 받았는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능숙한 필체로 쓴 5통의 라틴어 보고서 맨 끝에는 번번이, ‘부제 토마스 이재의’라는 서명이 있음은 필자 자신이 확인 사실이다.”
변 몬시뇰은 이재의의 라틴어 친필 문헌이 5편이나 파리 외방 전교회 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6. 제3차 세미나 발제자의 소견
이번 제3차 세미나에서 이승훈의 죽음과 관련된 연구를 담당한 소장 사학자 원제연 박사와 류한영 신부, 그리고 교회법 관계자로 참가한 최인각 신부의 소견 요지도 소개하기로 한다.
1) 원제연 박사는 그동안 한국교회 사학계 안에서 이승훈의 죽음과 순교 문제에 관하여 이루어진 선행 연구 결과들과 관찬 기록 연구에 의거하여 상반되다시피 하는 평판을 받고 있는 이승훈의 죽음의 성격에 관하여 나름대로의 입장을 개진한다.
원 박사는,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할 때 다양한 분야의 교회서적들을 갖고 와서 자신과 지인들에게 보급함으로써 천주교회 창설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1785년과 1791년 박해시기에 비록 외형적 배교를 한 것 같았지만, 당시 작성한 '벽이시'와 '벽이문'은 모두 이중적 의미를 지닌 글로써 사실상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을 표현한 시와 문장에 불과했으며, 이 기간에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례성사와 가성직제도 하의 여러 성사집전 및 반촌에서의 천주교 서적 강독회 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의 외형적 배교 행위에 대한 회개의 과정을 대신했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원 박사는 1795년 천주교 괴수로 지목을 받고 예산으로 귀양 간 이후에는 이전까지와 달리 천주교 믿을 교리 중에서도 중요한 "강생구속(降生救贖)"의 교리를 이론적으로 부정하여 교리에 의문이 들도록 함으로써 신앙을 포기토록 하는 적극적 배교(背敎) 내지 해교(害敎) 행위를 하였으며, 척사론자들과 적극 교제하면서 교회활동을 완전히 중단해버렸다고 본다. 그리고 이승훈 이러한 상태에서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그동안의 배교 행위에 따른 죄를 보속할 기회를 맞았지만, 어떠한 회개의 표시나 그리스도께 대한 직접적인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기록을 남기지 못한 상태에서, 박해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원 박사는, 달레와 다블뤼가 이승훈의 죽음을 배교한 상태에서 맞이한 죽음으로 간주했으나, 박해자와 척사론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이승훈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음을 외형적으로 입증해주는 '결안'들을 남긴 사실에 주목한다. 아울러 원 박사는 1801년 신유박해 시기나 그로부터 불과 1세대 정도 뒤의 신자들 사이에는 초기교회의 창설과정에서 열심히 활동한 이승훈이 신앙 때문에 또는 신앙을 위하여 죽었다는 '죽음에 대한 평판'을 남겨주었고, 후손들은 대대로 구전해오던 '순교시'를 남기고 있는 점에도 주목한다. 그래서 원 박사는 죽음에 임하면서 이승훈이 그의 배교 행위에 대한 회개나 이를 대신할 천주께 바치는 신앙고백을 직접적으로 관찬 또는 교회측 기록에 남기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순교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해버릴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원 박사는 이승훈의 회개와 순교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는 관찬기록에도 보이지 않고 교회 측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기에 그를 순교자라고 쉽사리 단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원 박사는 당대에 이승훈 베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신중한 태도로 순교자들의 기록을 정리했던 황사영의 자세를 적합하였다고 보면서 이승훈이 "배교자로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단정하기 보다는 신앙고백의 형태는 다양하기 때문에, 그가 순교했을 가능성은 언제라도 열어두고 최후 신앙고백과 관련된 기록들을 좀더 재검토하고 음미해야 한다는 소견을 피력하기에 이른다.
2) 류한영 신부는 2002년 2월에 개최된 제1차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 세미나에 이어서 이번 발표된 논문에서도 이승훈의 죽음과 관련된 달레와 다블뤼 주교의 자료를 상세히 비교 검토하면서 이들의 소견은 조정에서의 이승훈의 문초기록,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을 위시한 다른 자료들과 그의 순교 사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건인 그의 ‘사형선고문’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고 내린 결론이라고 간주하면서 이들과는 구별되는 견해를 개진하고 있다.
류 신부는 제1차 순교자 시복시성 세미나에서 발표한 발제문에서 이승훈이 신유박해로 참수되기 전 체포되어 국청에서 문초받는 내용 중에서 이승훈의 순교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소견을 이미 피력한 바 있다. 류 신부는, 심문관이 이승훈의 예산 귀양 시기인 을묘(乙卯)년에 발표한 ‘유혹문’(牖惑文)으로는 배교의 증거가 되지 못하니 사학의 교주와 무리들을 직고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위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문모 신부를 위시한 다른 신자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은 사실에서 신앙인의 자세를 보고 있다.
“이승훈은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저희 집이 가지고 온 서책이 퍼져서 지금의 사특한 부류들이 미혹당한 단서가 된다면 저는 죽어도 한이 없다.’ 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교회 지도자를 일러주지 않고 천주교를 전한 것에 대해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어느 정도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류 신부는 이승훈이 조정에서 2월 11일, 13일 그리고 14일에 걸쳐 계속되는 심문에서도 천주교도들의 신원에 대해 한결같은 자세로 함구하고 최창현에게 영세를 베풀고 스스로 신부가 된 것은 죽을죄라고 자인하면서도 주문모 신부의 행적에 대해 침묵하였음을 ⌜추안급국안⌟ 기록에 의거하여 부각시키고 있다.
류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이승훈의 문초기록을 전반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그의 삶과 죽음에 관하여 기록한 것으로 파악하면서 그의 사형선고문은 그가 천주교를 믿고 실천하고 전파한 삶이 적대자들의 증오를 자아내게 하여 초래된 죽음으로 수용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류 신부도 다른 연구자들처럼 이승훈이 한국의 첫 영세자로서 오랫동안 보여준 비굴함과 우유부단함은 그의 순교 평판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간주하면서도 박해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내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려 노력하다가 끝내 자신의 목숨을 바쳤기에, ‘이승훈의 죽음은 순교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류한영 신부는 이번 제3차 세미나에서는 이승훈의 죽음에서 순교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서 가족의 전승을 들면서 이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했던 파리외방전교회 피숑(1893-1945) 신부가 1930년 8월에 수집한 것으로 보이는 가족의 구전 내용을 메모한 사실을 소개하기도 한다.
“1930년 8월 23일. 그런데 집안사람들이 전하기를 처형되던 날 베드로는 서소문으로 끌려가던 우마차 안에서 졸고 있다가, ‘수확의 때가 왔다. 잘 깨어 있어야 할 때이다’라고 마지막 반성의 말을 남겼다. 그 때 ‘수확이 무슨 뜻인지’ 둘러있던 이교인들이 물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 이상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류 신부는 피숑 신부가 전하는 이승훈 집안의 전승 기록에는 이승훈의 회개와 신앙고백의 말마디와 흔적이 발견된다고 본다. “마태오 복음 13장 39절에는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또한 26장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베대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하고 말씀하신다. 이승훈의 마지막 남긴 반성의 말은 성서적인 배경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류 신부는 주재용 신부가 이승훈의 마지막 신앙고백으로 처음으로 전한 이승훈 집안의 다른 구전인 유시인 ‘월락재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도 언급하면서 다블뤼 주교가 조사한 순교조사 기록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교회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다’라고 보면서 ‘그가 검토하지 못한 다른 기록이나 전승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그는 피숑 신부의 메모를 통하여 그 신부의 활동 시기에 이승훈의 순교를 주장하는 의견과 구전이 있었음도 알게 되었다고 기술한 것이다.
아울러, 류한영 신부는 이승훈의 막내아들로서 문재(文才)와 의술로 유명한 이신규 마티아에 대해서 김대건 신부가 1846년 8월 26일자 서한에서 ‘1839년 불행하게도 배교하였던 이 마티아는 지금은 용기가 넘치며 순교로 죽기를 원한다’고 기록한 내용과 ‘1868년 4월 7일에 권 복초 프란치스코와 조 도사와 함께 참수 순교하였다고 기술한 ⌜치명일기⌟의 내용을 소개하며, 아울러 이승훈의 손자 이 토마스가 아내와의 사별 후에 앵베르 주교를 따랐으며, 이 주교는 그를 신학생으로 발탁하여 사제직에 올리기 위해 신학을 가르쳤다는 달레의 기록과 함께 이 토마스가 자신의 편지 말미에 ‘부제 토마스 이재의’라고 서명한 것을 파리외방선교회 고문서고에서 보았다고 적은 변기영 몬시뇰의 증언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처럼 류 신부는 이승훈의 후손들이 인간적 나약성을 보이면서도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기에 그들의 공로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3) 제3차 세미나에 교회법 전문가로 참여하고 있는 최인각 신부는 의정부 국청 심문과정에서 이루어진 이승훈의 공초 진술에 대해 지금까지 연구에 관여한 사학자들과는 다른 재해석을 시도한다.
최 신부는 심문관의 질문에 대한 결안에 담긴 이승훈의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가 천주학을 믿지 않고 배척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조광 교수가 바로 그러한 주장을 편다고 본다. 하지만 그는 이승훈의 진술의 진정성을 달리 파악한다. 그는 박해자들이 천주학을 더 이상 신봉하지 않는다는 이승훈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신할 뿐만 아니라, 그가 천주학을 앞장서서 전했고 또한 우두머리로 알고 있던 사실을 중시한다. 최 신부는 당시 신자들이 ‘천주학을 믿지 않는다’고 진술한다고 해서 천주학을 믿지 않거나 배척한 것은 아니며, 신앙인의 입장으로 보면, 박해를 받는 이들은 슬기롭고 지혜롭게 피하고자 하는 신자들의 피치 못할 상황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이승훈도 박해를 피하기 위해 여러 방법 중의 하나로서, ‘이제는 믿지 않는다. 이미 배척하였다’라는 말을 표현했을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최 신부는 이승훈이 1785년 을사박해 때 부친 이동욱이 집안사람들을 모아 놓고 책을 불태우고 이에 대하여 천주교를 배척하는 내용이 담긴 칠언율시를, 자신은 벽위문과 벽위시를 지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진술하였지만, 이러한 그의 행동이 온전한 자유의사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 신문관이 의심을 갖는 사실도 주목한다. 벽위시의 진정성을 부인하는 홍낙안의 상소문에서도 시사되어 있는 벽위시가 작성되던 정황, 곧 이승훈의 행위가 가족들의 강요에 의한 행위, 구체적으로 말하면 평소 존경하고 공경하는 아버지의 강요와 동생의 강한 요구는 이승훈에게는, 저항 할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힘으로 보아야 하는데 강요에 의한 행위로서 ‘아니한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최 신부는 이승훈이 을묘년(1795년)에 예산에서 귀양살이 할 때 작성한 것으로 저너해지는 유혹문의 내용을 조광 교수가 ‘강생구속’ 교리부정, ‘천당지옥설’ 배격, ‘상선벌악설’을 부인하는 의미로 파악하고 있는데, 주재용 신부처럼 이승훈의 적대 관계에 있던 홍낙안이 상소문을 통해 이승훈의 유혹문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심문관은 ‘이승훈이 쓴 유혹문으로는 배교의 증거가 되지 않으며 사학 무리들을 직고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선언’하는데, 현재의 우리가 그 진정성을 확신하고 이승훈을 배교자로 간주하는 것은 섣부른 처사라고 본다.
최 신부는 박해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사실인 이승훈의 거짓말 내지 허위진술은 ‘의지의 결여나 위장’으로서 무효이거나 유효하되 취소될 수 있다고 파악한다.
“이승훈이 심문을 받을 때는,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상항, 즉 박해 상황이었다. 박해라 는 절대적인 폭력의 상황이었고, 현재와 미래에 공포를 일으킬 만한 중대한 협박이었 다. 그리고 부모와 임금에 대한 공경심에 의한 협박도 있었다. … 교회법적으로 볼 때, 이승훈의 전체적인 심문 내용과 박해 중에 있었던 행위들은 비진의(非眞意) 의사표시라 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는 온전한 법률 의사표시라고 할 수 없다.”
최 신부는 박해자가 ‘천주학과 관련된 심문에 대한 진술’에서 이승훈이 지속적으로 허위진술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천주학 배척행위를 일관적으로 거짓으로 여기고 있다고 파악한. 즉, 이승훈이 가혹한 매질과 함께 사형이란 협박을 당하면서도 ‘천주학과 관련된 이들을 보호하고 지키고 있다는 것’은 ‘천주학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는 것’으로 박해자는 판단한 것이라고 본다. 박해자가 이러한 이유에서 이승훈의 거짓된 배척행위와 허위진술을 근거로 신앙의 증거자로 간주하여 사형을 집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 신부는, 이승훈이 부친을 박해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던 사실에서도 신앙의 의미를 부여한다. 아버지가 천주학과 관계없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배척하였음을 주장하는 진술을 계속하고 있으며, 아버지에 대한 공경과 사랑이 가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최 신부는 이승훈의 결안에서 드러난 그의 진술을 통해서 그가 ‘모두를 살리는 상생의 삶’을 추구하였다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린다.
“이승훈의 외적인 인정은 정순왕후의 엄명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과거의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철저히 인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 후에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진술한다. 본인의 판단으로는 이승훈이 선택한 길은 ‘모두를 살리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자신이 가장(假裝)하여 천주학을 배척했던 벽위시와 유혹문을 반복해서 언급함으로써 자신도 살 수 있고(자신의 탈출구를 찾을 수 있고), 천주학을 믿는 이들에 대해 함구함으로써 그들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되면 이승훈이 그토록 염려했던 아버지에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 충성의 문제도 해결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이승훈이야 말로 ‘상생의 삶’을 추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II. 권철신의 죽음과 순교 문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은 아우 녹암 권일신과 함께 당대 ‘학문과 아름다운 행실로 고명한’ 인물로서 이벽의 권유를 받고 그리스도 신앙에 입교하여 지도적 위치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죽음에 관하여 한국 교회 안에는 세 가지 구별되는 견해들이 공존하고 있다. 먼저, 권철신이 순교자로서 죽음을 맞았다고 보는 입장과 그 반대로 배교자로 죽음을 맞았다고 보는 주장, 그리고 그의 죽음을 순교나 배교로 단정하기를 유보하는 입장 등으로 갈려져 있다. 서로 구별되는 이 견해들의 주요 논거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순교자 죽음설
권철신이 순교자로서 죽음을 맞았다는 견해는 황사영 백서와 달레와 다블뤼 저작물 등 여러 문헌에서 개진되고 있다.
1) 황사영은 ⌜백서⌟에서 권철신을 유교 경학과 예학에 정통한 유학자로 이 땅에서 신앙 공동체가 생겨나면서 입교한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권철신(權哲身)은 남인<南人, 곧 東人> 대가의 후손으로, 경기도 양근군(陽根郡)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으로 세상에서 이름난 유학자(儒學者)가 되었는데, 성교(聖敎)가 우리나라에 이르자 온 가족이 다 믿고 따랐습니다. 본래가 이름 있는 집안인 만큼, 성교(聖敎)를 믿자 남들의 비난도 역시 심하였습니다. 그의 아우 일신(日身)이 신해(辛亥, 1791) 박해 때 죽자, 그 뒤부터는 감히 드러내 놓고 신앙을 지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기미년(己未年, 1799) 여름, 그의 고향의 귀신같이 고약한 무리들이 사실과 어긋나는 일을 꾸며 관가(官家)에 고발하였습니다. 철신은 나이가 많고 체포 후의 일을 두려워하여 서울로 올라가 잠시 몸을 피하였습니다.”
황사영은 정조 사후 대를 이은 나이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 김씨(金氏)가 주도한 신유박해가 벌어지는 가운데 권철신도 정약종과 함께 체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월 초아흐렛날,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 홍낙민(洪樂敏)을 금부(禁府)에 하옥시키고, 11일에는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鍾)을 체포하였으며, 이가환은 혹독한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던 중 그만 목숨이 끊어졌는데 이 때 나이 60세였습니다. 여섯 사람이 순교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권철신(權哲身)도 역시 매를 맞고 죽었는데 그가 성교(聖敎)를 위해 순교하였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알 수는 없습니다. 널리 탐지하여 알아낼 때까지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2) 달레는 신유(辛酉, 1801) 박해가 벌어지면서 2월 9일에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과 홍낙안이 체포된 데 이어 16일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정약종 아우구스띠노가 체포되었다고 기술하면서 권철신은 권일신 프란치스코의 가형으로서 한국 천주교회를 공고히 세우기 위하여 이벽으로부터 특별히 간택된 인물이었다고 명기하였다. 권철신은 입교 권유를 받고난 뒤 신중한 교리 연구 끝에 신앙을 받아들이고 나서 부모에게는 효도를 다하고 사회 안에서 관대함과 헌신성으로 인하여 주위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끌어 들였으며, 직접적인 전도 활동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집에서 학문과 종교 생활에 전념하였다는 것이다. 달레는 권철신이 관헌에게 체포당하고 형벌을 받고 재판정에 나서게 된 뒤에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고 신앙생활의 정당성을 정연하게 토로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그런데 의금부에서 이루어진 국청(鞫廳) 신문 조서 내용에 따르면 권철신이 시종 배교하는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달레는 권철신이 재판 변론이 끝나기 전 66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는데, 사인을 둘러싸고 고문을 받고 사망하였거나 상처가 덧낫거나 굶어서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기술하는 한편 각주에서 관청 기록인 순조(純祖) 원년에 작성된 ⌜추국일기(推鞫日記)⌟에 따르면 권철신의 사망일이 2월 22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반하여 훗날 정약용이 작성한 ⌜녹암권철신묘지명(鹿菴權哲身墓誌銘)⌟에 따르면 매를 맞고 2월 25일에 운명하였다는 내용을 추기하고 있다.
3) 다불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Choix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1858)⌟ 필사본에서 권철신을 당대 조선 사회에서 학문과 덕행의 출중함에서 명성을 떨치던 인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름이 철신이고 별호가 녹암인 권 암브로시오는 조선에서 천주교의 위대한 전파자이고, 형벌의 결과로 1791년에 사망한 권 사베리오의 형이었다. 그의 집안은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집안 중의 하나였다. 이미 전 고려 왕조 때 높은 벼슬에 올랐고, 현 왕조에서는 그 시조를 보좌하였으므로 대대로 그 후손들이 항상 나라 일에 크게 참여하였는데, 그중 여럿은 그들이 행한 주요한 공헌과 그들의 빛나는 학문을 통하여 큰 명성을 획득하였다. 암브로시오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높은 벼슬을 위해 경쟁을 하지 않을 결심을 하고, 시골의 양근 고을의 감산이라는 곳으로 내려왔고 거기서 암브로시오가 태어났다. 그때 그의 모습은 좀 특별하였고, 그의 성격도 곧 비범해졌다. 8세에서 9세 때부터 그는 학문에 뛰어났고, 18세가 되었을 때에는 가장 유명한 학자들이 그를 칭찬하였고, 그래서 그의 학식의 명성이 온 나라에 퍼졌다. 집에서는 효도의 본분을 다하는 데 전심하였고, 사회에서는 너그럽고 헌신적이어서 그는 예외 없이 모두의 신뢰를 얻었다.”
다블뤼 주교는 이어서 권철신이 이벽의 권유를 받고 잠시 주저하고 나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한 뒤에는 이 진리를 주위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전교하였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1784년에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을 때, 암브로시오의 집은 모든 학자들의 모임 장소였다. 그의 형제들도 (지능에서) 매우 훌륭했으나 특히 그때 50세 가량이었던 암브로시오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신의 뜻처럼 받아들일 만큼 명성이 높았다. 이벽이 이 가정을 개종시켜 천주교의 토대로 만들기 위해 그들을 찾아왔다. 권 사베리오는 즉시 승복하고 믿기 시작하였다. 암브로시오는 새 교리를 조금 의심하였고, 게다가 그것으로 그의 명성을 얻게 한 모든 업적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 그에게는 괴로웠다. 그는 얼마동안 주저한 끝에 마침내 천주교의 진리에 대한 진지한 연구로 깊이 깨닫고, 진심으로 믿고 또 온 가족을 믿게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번 깨달은 진리를 전파하고자 많은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전교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이 그것을 참 종교라고 하니 우리가 그것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천주교를 믿었는데, 그때 천주교에 대한 활기의 일부는 암브로시오의 이름에서 왔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는 정조 승하 후 등극한 순조의 대왕대비에 의해 주도된 1801년 신유 박해가 벌어지던 2월 9일부터 다른 주요 신자들의 체포와 죽음에 관련된 기록에 권철신의 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2월 9일 반대당의 주요 고위 관직자에 대한, 모든 형식을 갖춘 체포령이 내렸다. 정2품의 이가환, 대신에 필적하는 4품관의 정 요한 약용, 현감을 지낸 이 베드로 승훈, 역시 높은 관직에 있던 홍 루가 낙민 등이 붙잡혀 금부에 갇혔다. 같은 달 11일에는 권 암브로시오 철신과 정 아우구스띠노 약종도 잡혔고 동시에 최근에 석방되었던 모든 신자들을 다시 잡아 오라는 명령이 포청에 내렸다.”
다불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권철신이 자신을 시기하는 자들과 적들로부터 적개심에서 발해지는 격렬한 비난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보여주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 하나가 그의 경쟁자들의 눈에는 너무나 커서 많은 시기하는 사람들을 불러일으켰고 또 그의 행동의 원칙이 속세의 것과는 정반대여서 그의 원수들의 수를 날로 증가시켰다. 저서와 통문에서 여러 번 욕설을 몹시 당하였으나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조용히 자기 식대로의 삶을 계속하였다. 고문으로 천주교 신자들에게서 빼앗은 배반에 대한 말을 들으면 그는, ‘불쌍한 사람들! 정말 유감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의 반생의 업적을 무익하게 하고 또 형벌을 아무 보수 없이 받고 있는 것이다’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그리고 다불뤼 주교는 권철신의 의연한 자세는 혹독한 고문이 따른 자신의 신문 과정에서도 여전하였으며 고문으로 순교자로서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신도 잡히자 그는 즉시 신문 장소로 인도되었고, 거기서 천주교 전체와 그것을 실천하는 데 대해 자세하게 변호하였다. 그는 여러 번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 하였으나, 그의 얼굴빛은 변하지 않았고, 줄곧 침착하고 조용하게 대답하였기 때문에, 직책상 그의 신문에 참석하였던 반대파의 한 사람은 나오면서 거기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에게, 신문 때 다른 죄인들을 보니 그들은 몹시 흥분되어 있는 것 같았으나, 이 권으로 말하면 고문 가운데서도 잔치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처럼 대답하더라고 말하였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음력 2월 4일에 체포되어 같은 달 21일에 매 맞아 죽었다. 66세였다. 대단히 훌륭한 순교자이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는 권철신의 죽음을 둘러싸고 대두된 의혹들은 명백한 문헌 기록에 의거하지 않는 한 정당하지 않다는 견해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변론이 끝나기 전 음력 2월 21일에 권 암브로시오는 66세로 그의 생애를 마쳤다. 매 맞아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다만 상처의 결과로 죽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옥 밖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게 그의 항구심에 대하여 의심을 일으키게 한 정황은 그 자체로서 본래 그렇게 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문헌에도 근거하지 않은 단순한 의혹은, 그 마음과 행동이 오랜 세월 동안 또 형벌에서까지 그렇게 꿋꿋하였던 이 신자에 대한 추억을 더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처럼 다블뤼 주교는 권철신이 배교자로 사망하였다는 구체적 정확성이 결여된 일부 주장에 대해서 그다지 신뢰를 보이지 않고 그를 대단히 훌륭했던 신자로서 순교를 맞은 것으로 보고 있다.
4) 변기영 몬시뇰은 권철신이 이승훈의 경우처럼 관변 기록물에 수록되어 있는 판결안 내용에 의거하여 배교하지 않고 순교하였음을 역설한다.
변 몬시뇰은 권철신이 천주교에 입교하고 나서 동생 일신이 1791년에 타살된 후에도, 개전하지 않고 계속 천주교에 빠지다시피 하여 거주지 양근(陽根) 일대 사람들을 입교시킨 사실을 자백하였기에 천주교의 수령으로 지목받고 고발당한 뒤 의정부 국청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자신의 처신에 대해 개전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장형을 받고 사망하였음을 강조한다. 권철신의 신문관들이 내린 수사 결론이,
“사나울 만큼 요지부동하며 끝끝내 뉘우치지 않아서(悍然不動 終不悛改), 3차 례나 태형을 가해도 목석처럼 꾿꾿하게 신앙을 지키며, 고통스러워하는 기색 조차 없어, 할 수 없이 마침내 죽였다는 것이다(自本曺捕來訊而終不悔悟加刑三次殆同 木石少無苦楚之色辛酉二月自鞫廳收去正法).”
아울러 변 몬시뇰은 1807년 안동 권씨 족보 목판본에도 같은 사실이 명기되어 있음도 지적한다. “권철신과 권일신은 천주교 신앙 때문에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以邪學杖斃).” 그리고 변 몬시뇰은 권철신의 6대손 권오규 변호사(1900-1995)와 동생 권오집 회장이 전하는 가내 구전(口傳)에서도 권철신과 일신 형제들이 천주교 신앙 때문에 타살당하여 사망한 사실이 전해지며 이 사실이 당시 편찬된 족보에서도 확인된다고 기술한다.
변 몬시뇰은 권철신에게 내려진 판결문 어디에도 그가 배교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가 배교하지 않고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음을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다. 변 몬시뇰에게는 권철신이
“체포되어 형벌을 받고 죽임을 당한 것은 천주교 신앙 때문이었음을 부정하 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형벌을 가하고 죽인 박해자들도, 죽어가던 당사자들 도, 가족들도, 모두 그분들 죽음의 이유와 원인이 천주교 신앙이었음은 잘 알 고 믿고 있던 사실로써, 천주님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한마디로 신앙 때문에 처형되었다(mortem autem in odio fidei).”
2. 배교자 죽음설
오늘날 많은 교회 사학자 내지 관계자들은 권철신이 체포되고 관청에서 박해자들로부터 신문을 받을 때에 배교로 일관하는 진술을 한 인물로 파악하고 있어 그를 신앙인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귀감으로 모범을 보이고 순교의 죽음을 맞은 인물로 보는 다블뤼 주교의 견해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1) 중견 사학자 조광 교수는 ⌜신유사옥죄인이가환등추안(辛酉邪獄罪人李家煥等推案)⌟이나 ⌜사학징의(邪學懲義⌟와 같은 신유박해 당시 작성된 조정의 문헌 연구를 통하여 권철신이 신해박해가 일던 1791년 이후에 신앙생활로부터 벗어나서 생활하던 인물이었다고 보고 있다. 조 교수는 권철신이 이벽으로부터 권유를 받고 암브로시오로 세례명을 받고 입교한 뒤에 동생 권일신(權一身, 1751~1792)이 진산(珍山) 사건의 여파로 발발한 신해사옥(辛亥邪獄, 1791년)에 연루되고 살아온 뒤 관련 서적 50여 권을 광주(廣州)관아에 보내 불태워 집에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아 다시는 보지 않았으며, 그 이후 6년간 경성(京城) 출입을 일체 하지 않고 시골에서 허물을 자책하며 지나면서 제사도 폐하지 않았기에 자신을 사학의 괴수로 지목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진술한 사실이며, 심문관이 사학을 금단하는 방법을 한 마디 말로 진술하라고 하자 정학(正學)을 밝히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 답변하였으며, ‘사학에는 오륜이 없다’고 진술한 점에 미루어 권철신이 1791년 이후 천주교 신앙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기에 신유박해 발발 당시에 활동했던 교회의 지도적 인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2)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985년에 편찬한『한국가톨릭대사전』에 수록된 “권철신” 항은 그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국문을 받는 과정에서 신앙을 거부하는 진술을 한 것을 근거로 순교한 데 대해 부정적 입장을 토로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권철신은 학문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제자들이 많았으며 1777년 고향 양근 인근 주어사에서 이벽, 정약전 등과 함께 강학회를 주도하고 천주교에 대한 연구를 하고 교리를 깨닫고 계명을 실천하다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이벽의 권유를 받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교한 후 외부에서 전교활동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고 집에서 학문과 종교생활에 전념하였는데, 천주교 반대파들이 그를 천주교 두목으로 지목하고 처벌을 요청하였지만 정조의 보호로 화를 면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그는 정조 사후에 벌어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국문을 받다가 신앙을 거부하는 진술을 하고 매를 맞아 옥사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고 이어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권철신도 이가환(李家煥), 이승훈, 정약용 등 저명한 남인 학자들과 같이 잡혀 국문(鞫問)을 받았다. 그는 국문에서 천주교 신앙을 거부했고 마침내는 매를 맞아 2월 22일(음) 66세로 옥사하였다. 달레(Dallet)는 그를 순교자로 보고 있으나, 그것은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를 근거로 한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황사영 자신의 말과 같이 2월 15일(음) 이전 사건에 관한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3) 차기진 박사는 1999년도판『한국가톨릭대사전』제2권에 수록된 “권철신” 항목 집필자로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과 이병휴(李秉休, 1710-1776)의 대를 잇는 성호학파의 거유로 인정받으며 자신의 호를 딴 녹암계(鹿菴系)가 형성될 정도로 상당한 경지에 오른 유학자로서 이벽의 권유를 받아들여 1784년 9월경(음)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밖으로 드러나게 활동하지는 않았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그가 아우 권일신이 신앙생활에 헌신하다가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때 탄압을 받고 유배형을 받고 길을 가던 중 사망한 뒤에 계속 은거하던 중 신유박해가 일면서 1801년 3월 24일(음 2월 11일) 양근에서 체포되고 국청에서 추국당하면서 배교로 일관하였다고 단정적으로 기술한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그(권철신)에 대한 비판이 비등하게 되었고, 마침내 1801년 3월 24일(음 2월 11일) 양근에서 체포되어 이가환‧정약용‧이승훈‧홍낙민‧정약종 등과 함께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국청의 추국에서 배교로 일관하였으며, 4월 4일(음 2월 22일 혹은 25일) 매를 맞아 옥사하였다.”
3. 배교/순교 판정 유보설
2002년 2월 16일에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과 천주 신앙” 주제로 개최된 제1차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에서 권철신의 순교 여부를 검토하는 주제 발표를 맡았던 서종태 박사는 발제문 “이벽 ‧ 이승훈 ‧ 권철신의 순교 여부에 대한 검토”에서 류한영 신부는 “이승훈 ‧ 권철신의 삶과 신앙 고백에 대한 신학적 견해”에서 그동안 교회 사학계 안에서 이루어진 연구 결과들에 의거하여 권철신의 순교가 논란이 되는 쟁점임을 적시하였다.
1) 서종태 박사나 류한영 신부는 신유박해 관련자들의 심문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신유사옥죄인이가환등추안(辛酉邪獄罪人李家煥等推案)⌟에 수록되어 있는 권철신의 심문 진술에 의거하여 권철신이 훌륭한 순교자의 고백과는 거리가 먼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보고 있다. 심문관련 자료에 의하면 권철신은 1801년 2월 11일에 체포되어 당일 2회, 18 ‧ 19 ‧ 20일에 각각 1회, 도합 5회 조사를 받은 뒤 22일에 물고(物故)되었다. 그런데 이 심문과정에서 발해진 권철신의 진술 내용은 조광 교수의 연구에서 드러난 것처럼 순교자의 고백과는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천주교인 이중배(李中培, ?~1801)가 그의 집에 드나든 것을 추궁하자 그가 20리쯤 되는 곳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자신의 손자가 마마에 걸려 한 두 차례 찾아 왔으며, 마을에 혼례를 치르는 집에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에, 지나다가 자신의 집을 들른 것이지 사학의 일로 찾았던 것은 아니었으며, 신해년 이후에는 사학과 인연을 끊고 그 무리들과도 왕래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이러한 진술에 의거하여 서종태 박사도 ‘다블뤼 주교의 기록이나 달레의 기록에서 밝힌 것과 달리 권철신은 신유박해 때 배교로 일관하였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고 본다.
그렇기는 하지만 서종태 박사는 신해년 이후에 사학과 인연을 끊고 지냈다는 권철신의 진술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가 전교 활동을 포함한 그의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음이 사실이라도 보고 있다. 곧, 권철신의 양자 권상문(權相問, 1768~1802)을 위시하여 노비녀 순덕(順德), 며느리 숙혜(淑惠), 윤지겸(尹持謙), 조응대(趙應大) 등과 같은 인물들이 그에게서 천주교를 알고 믿게 되어 유배된 사실, 그리고 1794년(정조 18) 말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권철신과 교제하였다고 진술한 사실과 1797년(정조 21)에 입교한 김건순(金健淳, 1776~1801)이 여러 차례 권철신을 방문하여 천주교 주요 교리를 듣고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권철신이 신해박해 이후에도 당시 교회 주요 인물로 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 박사는 황사영이 신유박해 때 교우 중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쓸만한 인사로 자신과 권철신, 그리고 정약종 등을 꼽은 사실에서도 이 점은 분명하다고 본다. 그리고 권철신이 심문관으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고발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끝내 누구도 발설하지 않은 사실로 미루어 천주교와 인연을 끊고 살았다는 진술이 진심으로 발해지지 않고 박해를 피하려는 동기에서 발해진 처신으로 본다.
2) 류한영 신부는 권철신의 훌륭한 도덕적 생활과 모범을 다블뤼 주교나 달레가 인정할 정도였으며, 그를 순교자로 여길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지만, 조정 관청 문초 기록에 이 부분이 감추어져 있어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4. 제3차 세미나 발제자의 소견
제3차 세미나에 참여한 박광용 교수와 최인각 신부가 권철신의 죽음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1) 제3차 세미나 발제자로 참여한 박광용 교수는 교회 사학계 안에서 1801년 신유박해 기간에 장형을 받는 가운데 닥친 권철신의 죽음을 순교와 배교로 보는 입장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고려하면서 그의 생애 전체를 복원하는 가운데 여러 견해들을 재조명할 필요성에 의거하여 중심 사료에 대한 보다 엄밀한 파악 노력을 보여준다.
박 교수는 권철신이 성호 이익(李瀷)과 순암 안정복(安鼎福), 정산 이병휴(李秉休) 등의 제자이면서 천주교 입교 후 학자이면서, 누구나 한 가족으로 대하는 백성과 나와 한 핏줄(民吾同胞)’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살았음을 정약용의 기록에 의거하여 적시한다. “정약용은 이 서명 정신의 실천을 권철신 학문의 기본이라고 지적하면서, 집안(공동체) 내에서는, 누구든 ‘한 몸처럼 양육하며 동포-형제로 대하고, 곡식이나 재물도 균등하게 나누어 먹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는 유교적 정신으로 읽으면, ‘백성은 나와 한핏줄(民吾同胞)’의 정신을 집안에서 실사구시적으로 독실하게 실천했다(篤行)는 뜻이다.” 그리고 박 교수는 1791년 신해 박해로 아우 권일신이 사망한 뒤 명문가문 출신으로서 10년 이상 외부활동을 하지 않는 은수(隱修) 생활을 하였기에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정약용이 정확히 파악하였듯이 ‘가족과 벗들 향한 독실한 삶(孝友篤行)’을 학문과 삶의 근본으로 대하고 살았음을 언급하면서, 그와 아우 권일신의 제자들이 이후 교회의 기둥이었다는 사실, 아들들을 포함한 가족들의 계속적인 신앙생활을 한 사실을 들어 교회와 직간접으로 연계된 가운데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 교수는 권철신이 1801년 신유박해기에 사학금지령으로 체포되어 ‘무부무군(無父無君)’ 죄에 적용되는 ‘모반(謀叛)’ 조로 참수형에 처해지는 죄명으로 1월 11일부터 21일까지 5차에 걸친 심문을 받으면서, 앞에서 언급한 다른 연구자들은 권철신이 심문을 당하면서 교회를 멀리하고 교리를 부정하는 등 배교 진술을 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자신은 주문모 신부 영입에 관련한 신자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하며 답변하지 않은 사실에 의거하여 그가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리고 아들 권상문의 입교와 순교 사실과 주문모 신부의 입국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제자 윤유일과의 관계로 미루어 보아 ‘드러나게 신봉하지는 못했다’라고 볼 수는 있더라도 드러나지 않게 신앙생활을 실천하다고 죽음에 이른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는 소견을 피력한다.
2) 최인각 신부는 권철신이 조정의 회유정책에 따른 준 연금 상태에서 생활하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고 받게 된 심문 과정을 분석하면서 법률가로서의 소견을 피력한다.
최 신부는 권철신이 보유론의 관점에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였기에, 유교의 충효사상을 견지하면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신주와 제사행위가 천주의 뜻에 크게 어긋나지 않다고 간주하여서, 이에 대해 양해를 얻고자 권일신은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하기도 하였기에, 제사를 지내고 신주를 불사르지 않은 것이 천주교 배척의 증거라고 볼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최 신부는 국청 심문관이 권철신의 문초 진술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한 사실을 주목한다. 심문관은 권철신이 두문불출하였지만, 주변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그를 추종한 사실을 미심쩍게 여겼으며, 권철신이 대부분의 심문에서 교묘하게 모른다고 진술함으로써 정순왕후의 엄명을 피하려는 듯한 의심을 갖게 하였고, 아니면 거짓 진술을 하거나 신자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최 신부는 신학적으로 허위진술은 제8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인정이나 칭찬의 대상이 되지 않으나 신앙을 옹위하고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적극적 신앙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소견을 피력한다.
“다른 사람(사학의 괴수)을 지키기 위하여 묵비권을 행사하고, 박해를 모면하 기 위하여 꾸며낸 허위진술을 하였다면, 적극적인 신앙행위라 할 수 있다.”
최 신부는 무엇보다 심문관이 고문을 가하며 천주교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엄하게 추궁함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고발하지 않은 사실과 그로부터 5대의 후손, 권상문, 권검(황), 권복, 권승렬 등이 모두 순교한 사실에 의거하여 순교하였다고 결론짓는다.
“심문관이 고문을 가하며 천주교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엄하게 추궁함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고발하지 않는다. 이렇게 신자들의 신원과 소재를 밝히지 않은 것은 신자들을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권철신이 신앙을 고백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로부터 5대의 후손이 모두 순교했다는 사실이다.”
III. 권일신 죽음과 순교 문제
권일신(權日身, ? ~1792)은 권철신의 아우로서 이벽과 이승훈과 함께 초기 한국교회 3대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데, 그 역시 죽음을 둘러싸고 교회 사학계 안에서 배교자로 보기도 힘들지만 순교자일 수도 없다는 설과 순교자설로 갈려 있는 처지를 겪고 있다. 이렇게 미묘한 관점을 나타내는 입장들의 주요 논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순교 직전의 굴복설
다수 연구자들이 권일신의 죽음 직전에 이루어진 흔들린 모습을 두고 안타까워 하면서 순교로 규정하지 못하는 입장을 표명해 오고 있다.
1) 달레는 권일신의 죽음의 경위에 관해서도 다블뤼 주교의 기록물을 고본으로 하여 순교 직전에 안타깝게 나약한 모습을 보인 것을 아쉬워하며 기술한다.
달레는 권일신이 입교 후부터 1791년 귀양가던 도중 병사하기까지 학덕이 출중한 인물로서 모범적 신앙생활을 하고 교리를 전파한 훌륭한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양근을 찾아온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익힌 뒤 입교 권유를 받고 잠시 주저하던 형 철신과는 달리 즉시 신앙을 받아들이고 입교하여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을 주보로 세례를 받았으며, 가족과 친척, 그리고 친구들에게 전교하여 이존창(李存昌) 루도비꼬 곤자가와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띠노 등 여러 사람을 입교시킨 인물로 기술하였다. “그들(이승훈, 이벽, 권일신)은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신앙은 크게 전파되어 나갔다. 특히 權(日身) 사베리오는 직접으로도, 또는 제자들을 통하여도 그렇고,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권일신은 1785년에 일어난 ‘을사추조적발’ 사건으로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 토마스가 체포된 뒤 형조판서를 찾아가 성화상(聖畵像) 반환을 요청하고 자신도 처벌할 것을 요구할 정도로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편, 고요한 곳에서 피정할 필요를 느끼고 용문산(龍門山)에 위치한 적막한 절에서 8일간 침묵 속에서 피정도 하였으며, 1787년 이승훈의 주도로 결성된 가성직제도 안에서 ‘그 지위와 학식과 덕망으로 가장 뛰어난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미사드릴 권한을 부여받은 10인의 신부 중 한명이기도 하였는데, 달레는 그가 ‘주교’로 지명되었다고 기술하기도 한다.
권일신은 신해년(辛亥年, 1791)에 사망한 진산 거주 윤지충의 조상제사 거부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해박해(辛亥迫害) 때에 뛰어난 학식과 열성으로 천주교의 두령으로 적대자들로부터 고발당하고 11월에 체포되어 형조에 넘겨진 뒤 온갖 고문과 협박, 그리고 회유를 당하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고 고백하였으며, 그의 훌륭한 인품을 잘 알던 정조 임금이 그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제주도 귀양 판결을 내렸다고 기술한다. 유배 처벌을 당하고 귀향지로 떠나기 전 상처를 치료하고 유배로 떠날 준비를 하던 차 임금의 지시로 형조 관리들이 그를 찾아와 곧 세상을 떠나게 될 80노모의 임종 시에 올 수 없는 데 대한 가책과 비통한 광경을 강조하면서 배교는 아니더라도 감형(減刑)을 얻어 좀 더 가까운 곳으로 귀양지가 바뀔 수 있도록 그의 마음을 동요케 하였다는 거서이다. 달레는 권일신 자신의 기록인지, 다른 사람에 의한 가필인지 불분명한 진술 내용을 적고 있다, “서양인들의 道理는 孔子와 孟子의 道理와 대단히 달라서 나쁘고 거짓되다.” 달레는 이 글귀가 권일신의 굴복 표시로 보고되어 귀양지가 제주도로부터 감형을 받아 충청 예산으로 바뀌어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병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아, 그는 거기에 다다를 시간조차 없었다. 그가 길을 떠나자마자 상처로 인하여 생긴 병 때문에 도중에 멈출 수밖에 없었고, 어떤 주막에서 죽고 말았다.” 달레는 권일신의 결정적 최후 순간을 배교로 규정지을 수 없지만 안타깝게 나약한 처신으로 보았다.
“그의 생애 중에 그렇게도 위대하였고, 형벌 중에서 그렇게도 위대한 것을 보아 온 사람이 이렇게 그의 최후 순간을 비겁한 나약으로 흐리게 하는 것을 보게 되니 이 무슨 광경인가. 그러나 또 얼마만한 교훈인가. 물론 기록들이 별로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굴복 행위의 정도를 정확히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을 공공연한 배교로 규정지을 수도 없지만, 하나의 승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이 풀 수 없는 의문 앞에서 우리는 마음에 슬픔을 안은 채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달레는 입교 후 그토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편, 열성적으로 신앙을 전파하여 혁혁한 공을 이룩하였으며, 체포 되어도 형조에서 고문과 배교 위협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던 권일신이 최후 순간에 신성한 효도보다 더 신성한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까닭에 순교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여 안타까워 한 것이다.
2) 류홍렬 교수도 초기 교회 안에서 훌륭한 지도자로 수년간 활동하던 권일신의 ‘비겁한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기술한다.
류 교수는 권일신의 교회 활동을 높게 평가한다. 그가 이벽과 이승훈이 떠난 자리에서 홀로 ‘교회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어 밤낮으로 동분서주하면서 교우들에게 용기를 넣어주고, 아직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산 사건 이후 고발당해 체포되고 난 뒤에 혹독한 형벌을 감내하다가 사형언도를 받고 감형되어 죽음에 이르는 안타까운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도 잡힌 후 처음에는 혹독한 형벌을 달게 참으면서 신앙을 굳게 고백하였으므로 한때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왕은 그의 학덕(學德)과 인재를 아끼어 죽음에 한등을 감하여 제주도로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 그 후 형관(刑官)은 다시 그가 80세 되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약점을 잡아가지고,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것을 권하며 감언이설로 그를 꾄 결과, 같은 해 11월 16일에 드디어 개심서(改心書) 지어 바치며 왕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약속하였다. … 왕은 다시 귀양 사는 곳을 고쳐서, 충청도 예산(禮山) 지방으로 옮기어 그곳 교우들의 마음을 고치는데 이용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도중에서 일찍이 매를 맞아 다친 곳의 병으로 말미암아 죽고 말았다. 천주교에 들어온 후 5,6년간 한결같이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몸을 바쳐 애써 오던 그가, 비록 그의 본심에서는 아니었을지라도, 이와 같이 비겁한 죽음을 하고 말았으니, 매우 섭섭한 일이다.”
3) 최석우 몬시뇰은 권일신의 죽음의 경위에 관한 달레의 기록은 당대 조정 관변측 기록으로도 대부분 방증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최 몬시뇰은 정조 15년 1791년에 권일신이 목만중 부자와 홍낙안으로부터 천주교 교주로 지목되어 고발당하고 체포된 뒤 형조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교주임은 부인하고 천주교 교리가 정학(正學) 공맹(孔孟)의 학과는 다르다고 시인하면서도 예수의 사망(詐妄)만은 결코 인정하지 않기에 엄형을 내릴 것을 청하였다고 보고 있다. “刑曹는 議啓에서, 권일신은 ⌜그 學說이 대저 孔孟의 學과 다르다. 五倫을 그르치고 祭祀를 폐하여 인간을 不正하게 만든다면 이는 邪學이다⌟고 말하였으나, 유독 예수에 대해서는 끝까지 詐妄하다고 斥言하지 않으니 嚴刑을 가하여 取服하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최 몬시뇰은 형조(刑曹)에서의 관변 기록에 의거하여 권일신이 제주 유배로 판결을 받고 난 후 굴복하게 되는 굴복 경위를 달레보다 소상히 서술하기도 한다.
“刑曹의 啓言을 보니, 日身이 일전 口招에서 이미 耶蘇의 學이 妖邪不正하다고 納供하였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老母가 놀라움과 겁으로 병이 나서 氣息이 끊어질 형편이므로 不孝함이 이에서 더 심함이 없으니, 人子의 情理의 원한이 극도에 달하여 이에 처분을 바란다며 마침내 굴복했다는 것이다. 권일신의 罪案에 대한 최종 판결문이 내렸다. 즉 임금은 말하기를, ⌜權日身이 일전에 悔悟 自新함으로써 納供하였고, 또한 獄中에서 刑官에게 所志를 바쳐 한 말이 마디마디가 悔過 自責하였으니 이것으로써 가히 그가 각오하였음을 알 수 있다. 罪人 權日身을 前律보다 1等 減하여 湖西地方에 邪學이 있다는 곳에 開惑할 기한을 限定하여 定配所로 下送하라⌟고 하였다.”
최 몬시뇰은 이러한 경위를 거쳐 권일신이 제주도가 아닌 예산으로 유배 길을 떠나기 전 집에 들러 노모를 만난 후 유배지로 떠났지만, 도상에서 사망했다고 기술하였다.
최 몬시뇰은 권일신의 죽음의 경위에 관하여 권철신의 묘지명(墓誌銘)에서 대동소이하게 기록한 정약용의 기록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즉 辛亥년 겨울에 湖南에 獄事가 일어나니 睦萬中과 洪樂安이 日身을 脂告하였으되 日身은 죽기를 무릅쓰고 굴복하지 않았다. 우선 濟州로 流配가기로 되었는데 임금이 曉諭하고 뉘우치게 하매 日身이 獄中으로부터 悔悟文을 작성하여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용서하여 流配地가 禮山으로 減刑되었는데 出獄한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4)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985년판으로 간행한『한국가톨릭대사전』의 “권일신” 항목에서 그가 체포되고 형조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고도 배교하지 않아 사형받아야 한다는 상소가 이루어졌으나 정조의 배려로 제주도 귀양으로 정해진 뒤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형조의 지향대로 그가 굴복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권일신)는 심한 고문에도 배교치 않아 사형시킬 것을 상소하였지만 정조(正祖)는 사형을 허락지 않고 제주도로 유배시킬 것을 명하였다. 옥에서 나와 유배지로 떠나기에 앞서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형조에서는 그에게 팔순 노모에 대한 불효를 구실로 유혹하였으므로 이에 굴복하였다. 그리하여 감형(減刑)되어 예산(禮山)에 유배키로 되었다. 그는 노모를 만나본 뒤 유배지로 가는 도중 옥에서 받은 상처로 객사(客死)하였다. 때는 1792년 봄이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999년판으로 간행한『한국가톨릭대사전』제2권에 편찬실이 담당한 “권일신” 항목에는 권일신의 굴복 경위가 1985년판보다는 조금 더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는 형조에서 여러 차례 형벌과 신문을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12월 3일 위리안치(圍籬安置) 판결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는 몸이 되었다. 제주 목사는 그를 매월 두 번씩 신문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권일신이 사형을 받지 않은 것은 남인들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정조(正祖) 덕택이었는데, 정조는 이에 앞서 그를 회유해 보도록 유시한 적이 있었다. 유배지로 떠나기에 앞서 그가 10일 동안 말미를 얻어 노모인 풍산 홍씨(豊山洪氏)를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이 회유책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일신은 노모를 만나본 뒤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바치면서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칭하였고, 그 결과 유배지가 제주도에서 예산(禮山)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예산으로 가던 도중 형벌로 얻은 상처로 인해 1792년 봄에 사망하였다.”
2. 순교자설과 제3차 세미나 발제자의 소견
변기영 몬시뇰과 이번 제3차 세미나 발제자로 참여한 방광용 교수와 최인각 신부 등의 견해는 권일신의 순교설을 개진하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드러난다.
1) 변기영 몬시뇰은 권일신의 죽음과 관련하여서 이승훈과 권철신의 죽음에 대해 피력하였던 소견과 같은 입장을 표명한다.
변 몬시뇰은 권일신이 이승훈이나 백형 권철신의 경우처럼 매우 박식하고 유덕하며 과묵한 대학자들로서 체포되어 형벌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 천주교 신앙 때문이었기에,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순교자로서 죽음을 맞은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는 견해를 시종일관 피력한다. 그는 권일신의 죽음의 경위를 투옥 중 문초 과정에서 받은 장형으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이 아니라 자객에 의한 타살로 규정하는 점에서 독특한 입장을 표명한다. 변 몬시뇰은 권철신의 6대손이 전하는 가내 구전에 의거 권철신 형제가 천주교 신앙 때문에 타살을 당하였으며, 권일신은 자객에 의하여 타살되었다는 내용이 당시 편찬된 족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고 기술하기도 한다.
“권일신은 1792년 초 流配 길의 첫 주막 용인현(현재의 駒城面 소재지)까지 뒤따라간 刺客이
打殺하였다고 口傳으로도 전해지고 있음이 당시 편찬된 族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변 몬시뇰은 권일신이 신문 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으로 기록된 문초록 문장 ‘대저기학이어공맹지학요탄부정(大抵其學異於孔孟之學妖誕不正)’에서 ‘요탄부정(妖誕不正)’이라는 단어는 문장의 문리에 맞지 않아 제3자에 의한 삽입으로 파악하고 나서 그 의미는 비슷한 진술을 한 이승훈의 경우처럼, 배교와는 무관하게 천주교가 유교와 다른 도임을 시사하는 문학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하고 배교선언으로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791년 신해년 박해 때 권일신 직암 공의 진술에서 거론되는, 大抵其學異於孔孟之 學이란 표현은, 1785년 을사년 박해 때 이승훈 진사의 天彛地紀限西東이라는 표현과 같은 내용으로서, 背敎와는 상관없는 文學的이며, 哲學的인 표현일 뿐이다. 즉, 天主敎는 儒敎와 다른 道임을 文學的으로 力說하는 詩文이다.”
2) 박광용 교수는 주로 이기경의 ⌜벽위편⌟에 수록되어 있는 권일신의 추안을 핵심 사료로 대하면서 이에 의거하여 그의 생애, 가계와 주요 행적을 추적하는 가운데 그의 죽음의 경위를 기술하면서 신앙을 의연하게 지켜내던 그가 3일 동안에 보여준 ‘배교’ 모습에 담긴 의미를 구명하고자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다.
박 교수는 권일신이 1791 신해년 11월 3일에 이승훈과 체포령이 발해진 뒤에 8일 경 형조에 투옥되고 홍낙안, 목만중으로부터 교형(絞刑)에 해당하는 사교 ‘교주’로 고발당한 상태에서 7차에 걸친 심문을 받았다는 기록을 분석하면서, 권일신이 일단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심문에 답하려 애쓴 노력들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박 교수는 그가 심문이 끝나는 마지막 날인 11월 13일까지 자신이 사교 교주임을 극구 부인하는 가운데에서도 엄형, 아마 장 100도를 당하면서도 오로지 ‘예수’ 두 글자는 최후까지 사망(詐妄)이라고 배척하는 말을 발하지 않았음을 부각시키고 “3초 후에야 사학 운운하나, 마음과 입이 상응하지 않는다. 사람을 사람되게 해야 하므로, 사형을 감하여 제주목에 가시나무 둘러 유배”시키기로 한 판결 내용을 기술한다. 박 교수는 전반적으로 볼 때에 권일신이 ‘교주’ 죄목은 뜬소문임을 내세워 부인하면서도 예수 추종자로서의 형벌까지는 감수하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7초에서 그에게 해당되는 형벌이 먼저 집행되고, 그에게서 사실 학인을 받고 “금지시무사술(禁止師巫邪術” 조의 ‘따르는 자 從者’에 적용되는 판결이 내려진 것으로 판단한다. 그는 권일신의 제주도 유배가 권일신의 신앙 고수 자세에 따른 형벌임을 기록한 정약용의 권철신 묘비명의 일부를 소개하기도 한다. “일신은 처음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굴하지 않아서 제주도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권일신은 13일까지 권일신이 회유하고 물어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14일 회오했다는 형조의 보고가 있고 15일에 그가 올렸다는 ‘회오문’(悔悟文) 상소가 이루어진 뒤에 다시 한번 감형조치를 받아 충청 예산으로 유배지가 바뀌어졌다고 기술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 변화가 임금 정조의 개입으로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정약용의 권철신 묘지명을 인용한다. “임금께서 깨우치고 훈계하시니, 일신이 옥중에서 회오문을 작성하여 바쳐서, 예산으로 배소가 감면되었다.”
박 교수는 ⌜승정원일기⌟ 정조 15년 11월 116일자와 ⌜벽위편⌟ 16일 형조 계문에 수록되어 있는 ‘회오문’ 내용을 소개한다. 회오문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부분은 이전까지의 권일신의 언행을 고려할 때에, 사실상 정답으로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은 듯한 내용으로, 서학을 이단(異端), 멸륜난상(滅倫亂常), 이적금수(夷狄禽獸)라는 등 적대자들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음 부분이 이전 잘못을 뉘우치는 이유를 적는 부분이다.
“다만 이전의 잘못됨을 고치고 뉘우침으로써, 사랑하여 살리려는 (하늘의) 지극한 뜻 과, 사람을 사람 되게 하려는 (임금의) 성스러운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80세 노모께 서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시고, 형제들은 무고하게 잡혀들어 오니…”
박 교수는 권일신이 이 부분에서 위 부분처럼 천리의 공(公)과 인욕(人慾)의 사(私)를 2조목 들면서 ‘배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주자의 천리인욕론에 입각하여 체계적으로 작성된 글로 본다. 박 교수는 그가 하늘의 보편적 이치에 해당하는 천리로서 사람을 살리려는 하늘의 공과 사람을 사람되게 키우려는 임금의 공을 짝으로 거론하고 80노모에 대한 효성과 무고하게 체포당하는 형제들에 대한 자애를 짝으로 내걸고 이유를 설명하며, ‘사랑하여 살리려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사람되게 하려는 임금의 성스러운 뜻’ 앞에 서술되어 있는 것이 특별하다고 본다. 대체적으로 임금께 올리는 개심 상소문에는 ‘임금의 뜻’을 앞세우는 통례와는 달라서 이해하기에 난감하다고 본다. 이 글귀는 임금이 특별히 강조하였거나, 임금이 직접 써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고, 아니면 여기에 권일신이 말하고자 했던 깊은 뜻이 숨어있을 수도 있겠다고 추측한다. 마지막 부분은, 함께 투옥되었던 최필공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사실 보고와, 이후 자신의 집단도 실제 행동으로 회오시키도록 노력하겠다는 실천 의지들과 함께 80노모에 대한 효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11월 16일 제주도에서 호서 예산으로 유배지 변경의 감형을 선고받고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어 노모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는데, 직후 서울에서 유숙하던 집에서나 길 가던 도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면서, 7차 심문 때 받은 엄형, 아마도 장 100도로 일한 후유증일 것으로 추정한다.
박 교수는 이 회오문을 권일신의 친필 기록으로 보게 된다면, 회유가 단기간에 대단히 집중적이고 집요했지만, 권일신 자신이 무엇보다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공과 사를 구분해 놓고서, 사적인 뜻으로는 노모의 임종까지를 지켜야 한다는 효성을 강조하였지만, 공적인 뜻으로는 하늘이 사랑하여 살리려고 한다는 점을 특별하게 지적하고도 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권일신이 사적으로는 노모의 임종을 지켜보고자 하고, 공적으로는 성직자 영입 실패 후 성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 최인각 신부는 조선왕조실록의 권일신 관련 기록을 주로 참고하면서 그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피력한다.
최 신부는 권일신을 순교자로 보기 힘들게 한 ‘회오문’이 법률행위로서의 가치가 없고 무효인 행위로 간주하여서 무효인 행위를 논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보고 있다.
“회오문은 비진의 의사표시, 통정한 허위 의사 표시, 폭력과 공포에 의한 의사 표시, 경외심에 의한 의사표시로, 법률행위로서의 가치가 없고 무효인 행위가 된다. 무효인 행위를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최 신부는, 권일신의 진의에 의한 의사표시는 고문을 동반한 가운데 이루어진 7차 심문까지만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왜냐하면 7차 심문(1월 8일)까지는 정조의 교화주의의 완치정책이 주효적인 상황이었던데 비해, 회오문이 나오기 바로 직전은, 엄형주의의 엄치정책이 주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일신은 엄혹한 고문으로 인해 육적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상황에서도 7차의 심문을 통해 예수께 대한 신앙 의지를 이미 확고히 밝힌 뒤였기에 회오문 내용은 박해자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왕의 지시를 따르기 위한 목적으로 정리하였기에 그의 진정한 영적 의지 상태의 표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최 신부는 권일신이 유배가는 도중에 장독(엄형의 고문에 의한 독)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실에 의거하여 순교자로 대하는 견해를 피력한다.
IV. 이승훈 ‧ 권철신 ‧ 권일신 죽음과 순교 문제의 신학적 재조명
위에서 이승훈 ‧ 권철신 ‧ 권일신 죽음의 경위와 성격에 관하여 한국 교회 안에서 오늘날까지 이루어진 제 사학자와 연구자들의 견해와 논거의 요지를 일별하였다. 논자는 한국교회 창설 주역이었던 이들의 삶과 죽음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려는 이들 연구자들의 노고를 통하여 드러난 국내외의 사료, 이를테면 황사영의 ⌜백서⌟나, 다블뤼 주교의「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나 , 그리고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등과 관변 측 기록물들과 함께 여러 사학자와 연구자들의 입장 표명들에 의거하여 이들의 죽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1. 이승훈
논자는 그동안 한국 교회사학계 안에서 이승훈의 죽음을 둘러싸고 표명된 다섯 구별되는 입장 논거의 요지를 파악하고 비교 검토하면서 이승훈이 배교하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다블뤼 주교-달레-최석우 신부들과 관점을 같이 하면서도 죽음에 즈음하여 순교자의 최후를 맞았다고 보는 류홍렬-이원순 교수들의 입장이나 이승훈은 배교자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시종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자의 죽음을 맞았다고 보는 주재용-변기영 신부의 입장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편으로 보고 있다.
1) 논자는 우선, 이승훈과 그의 아들이며 손자 등 직계 후손들이 4대에 걸쳐 1801년부터 1871년까지 70년 동안에 7명의 순교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이승훈이 배교자일 수 없는 순교자의 죽음을 맞았다는 견해를 공통적으로 펴온 위 몇 연구자들의 논거가 타당성을 지닌다고 본다.
이승훈은, 류홍렬 교수가 밝힌 바처럼,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서 대대로 문무 양반의 여러 고관직을 맡았으며, 이승훈 자신도 당대 명필가로 명성을 날리고 참판직(參判職)에 올랐던 부친의 뒤를 이어 24세에 진사가 되고 재능의 출중함으로 하여 이가환, 정약용과 함께 당시 정조 임금의 오랜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각별한 총애를 받게 되는 등 유수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승훈이 조정의 박해와 주위의 반대 위협에 직면하게 되자 자발적으로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까지 하던 천주교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앙 자체가 오류임을 갈파하면서 일반 백성이 현혹되지 않도록 배척하는 글들을 발표하는 등의 배교 활동을 펼친 바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들어와 널리 전파하고 지도자로 활동하고 서양인들과 밀통하였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에 처해지기는 하였지만, 그의 죽음은 순교와는 거리가 멀다고 보는 주장은 그의 후손들이 천주교 신앙을 믿는 유혈 순교의 길을 택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을가 하는 물음을 자아낸다.
당대 조정이 그리스도 신앙을 국법을 거스르는 중죄로 엄벌에 처함은 물론, 애당초 집안 어른 조부(李東郁)가 엄금하고 삼촌(李致薰) 등이 극열 반대하며, 정치적 적대 세력들이 일가를 궁지에 몰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살벌한 상황 속에서 부친이 한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지도자로 활동까지 하였지만, 더 이상 기대했던 진교(眞敎)가 아니라 사교(邪敎)에 불과하다고 판정하고 멀리하도록 언행으로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이 부친과 가문의 뜻을 거슬러 천주교 신앙을 계속 간직하면서 유혈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도시 가능할 것인가? 논자는 이상 여러 연구자들과 함께 사실이 반대일 경우에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무릇, 한 인간의 인품, 됨됨이와 속마음을 본인 말고 가장 정확하고 많이 아는 이들은 바로 가족들이다. 외부인들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일상을 늘 함께 생활하는 가족처럼 당사자를 속 깊이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후손들은 집안 어른들을 통하여 선대의 행적들을 지근거리에서 가장 정확히 전해 듣고 영향을 받으며 생활하기 마련이다. 이승훈의 가족들은 그의 입교 후에 일어난 대소사와 행적들을 외부인 그 누구 보다 더 정확히 아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은 1801년 이승훈의 체포 후 벌어진 의금부 국청에서의 문초과정과 참수형에 처해지기까지의 최후 처신에 대해서도 온갖 노력을 다해 여러 경위를 통하여, 이를테면 직간접으로 알던 지인들을 통하여 은밀하게나, 다른 구속자들의 가족 및 친인척들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을 접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고 정확하게 실상을 파악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이승훈의 막내아들 신규(身逵)는 뮈텔(Gustav Mutel) 주교가 1895년에 발간한 ⌜치명일기⌟에 ‘문장과 의술이 현달함으로 유명한’ 인물로 묘사되는데, 앵베르 주교가 직접 성직자로 양성하기 위하여 1838년 정하상 성인과 함께 선발한 네 후보자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1839년 발생한 기해박해 때에 앵베르 주교가 순교함으로써 양성 과정이 중단된 뒤에도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1868년 병인박해 때에 76세를 일기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였으며, 또 다른 아들 택규(宅逵)의 아들 재의(在誼)도 숙부 신규와 함께 선교사 영입에 헌신하였고, 그의 세 아들 중 연구(蓮龜)와 균구(筠龜) 등도 1871년 박해자에 의해 순교하기에 이른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부친과 조부이자 이승훈이 천주교 신앙을 부인하거나 저버리지 않고 끝내 신앙을 간직하고 증거자의 자세로 죽음에 임했던 사실이 외부인 그 누구에게 보다도 가족들에게 더 정확히 전해져 모두 알고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논자에게는, 반대일 경우에는 4대를 이은 후손들의 신앙생활과 유혈 순교란 이치에 맞게 설명하기 불가능한 일로 다가온다.
2) 일찍이 황사영이 이승훈의 서소문 참수형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사(善死) 여부는 더 밝혀질 필요가 있다고 보면서 순교 판정을 유보하였듯이, 2002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수원교구 주최 <한국 순교자 시복 시성을 위한 세미나>에서 한국교회 창설 주역들의 삶과 죽음을 다시 조명하는 일련의 연구 작업에 참가하고 있는 소장 학자들인 류한영 신부, 차기진, 서종태, 원제연 박사 등은 달레 신부나 다블뤼 주교, 그리고 최석우 몬시뇰과 조광 교수와 같이 ‘이승훈이 배교자로서 죽음을 맞았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앞에서 언급한 류홍렬, 이원순 교수들이나 주재용 신부와 변기영 몬시뇰처럼 ‘이승훈이 순교로 죽음을 맞았다’라는 단정적 진술을 유보하는 자세를 표명하고 있다.
이들 소장 학자들은 조광 교수가 <신유사옥죄인 이가환등추안(辛酉邪獄罪人李家煥等推案)>을 위시하여 여러 사료들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거쳐 이승훈이 1801년 2월 10일 체포되어 투옥된 후 의금부에서 여섯 차레 심문을 받은 뒤 2월 26일 대역부도죄로 참수형에 처해지기까지 문초에 대한 이승훈의 공술 내용을 들어 그가 시종 천주교 교리를 부인한 사실을 들어 순교자가 아니라 기교자로 규정한 주장에 대해 주재용 신부나 변기영 몬시뇰처럼 다른 사료에 의거하여 상반된 해석을 내놓으며 반대 주장을 펴지는 않는다. 그들도 이승훈이 국청에서 문초를 받을 때에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후에 서학을 배척하는 글과 시를 짓고, 천주교가 아버지와 임금을 몰라보고 예의와 도덕을 유린하는 사설이라고 비판하면서 서학을 배척하였으며, 1795년에는 주요 교리를 배척하는 유혹문(牖惑文)을 작성하여 귀양지인 예산 일대에 효유하도록 진술하는 등 천주교를 사교시(邪敎視)하는 진술 내용이 공초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들어 ‘배교로 일관하였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불신자의 면모를 드러냈다고 본다. 하지만, 이들 소장 학자들은 이승훈의 공초에 수록되어 있는 그의 진술들 중에서 진실이 아니고 꾸며댄 내용이 많이 있으며, 심문관으로부터 천주교에 빠진 자들과 수괴를 고발하지 않으면 정법을 면하지 못하여 사형에 처해진다는 고문이 따르는 협박을 당하면서도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누구의 이름도 발설치 않은 사실에서 이승훈이 진정으로 배교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정약용과는 달리 천주교를 진실하게 배척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최인각 신부는 이번 3차 세미나에서 이승훈의 순죽음과 관련하여 판단을 유보하지 않고 그가 신앙의 증거자로 사망하였다는 견해를 분명히 표명한다. 논자 역시 이승훈이 문초를 받으면서 보여준 처신, 특히 천주교도들을 고발하라는 강요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스스로 가성직제도를 구성하고 실질적 교회 지도자로서 자신이 신앙에로 이끌고 영세를 베풀거나 북경 주교에게 서한을 작성하며, 밀사를 파견하면서 함께 활동했던 신자 그 누구의 이름도 시종 발설하지 않고 가혹한 매질과 함께 사형 협박을 당하면서도 ‘천주학과 관련된 이들을 보호하고 지키고 있다는 것’은 ‘천주학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는 것’으로 박해자는 판단한 것으로 보아 이승훈의 거짓된 배척행위와 허위진술을 근거로 신앙의 증거자로 간주하여 사형을 집행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성을 지닌다고 본다. 사실, 이승훈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생활한 참 신앙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아울러 논자는, 신유박해가 진행되는 시기에 순조의 김 대왕대비 측이 중국인 사제 주문모의 처형으로 말미암아 청국으로부터 가해질 수 있는 추궁에 대비하여 천주교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의도로 청나라 황제 인종(仁宗)에게 바치도록 작성한 진정서 ⌜토사주문(討邪奏文)⌟에서 ‘국가는 이(사학)를 금지하고, 그 주동이 되는 이 승훈, 황 사영 등을 극형에 처하였다는 것을 아뢰었다’는 기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논자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여섯 차례 문초 과정을 거친 뒤 대역부도죄인으로 판결 받고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서소문 형장에서 같은 날 참수된 이승훈이 당대 국가 공식 기록물에 천주교 주동 인물로 기록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보아서도 결코 배교자일 수 없는 신앙의 증거자이자 교회 지도자로서 순교하였다고 본다.
3) 논자는, 이승훈의 삶과 죽음의 성격을 둘러싸고 그동안 교회 사학계에서 벌어진 쟁점 중 이른바 ⌜벽이시⌟ 내지 ⌜벽이문⌟과 ⌜유혹문⌟, 그리고 ⌜최종시⌟(最終詩) 내지는 ⌜운명시⌟(殞命詩)에 담긴 의미와 관련된 문제는 현 시점에서는 입장 표명을 일단 유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현재 교회 사학계 분위기는 ⌜벽이시⌟ 내지 ⌜벽이문⌟과 ⌜유혹문⌟의 의미와 관련해서는 상반된 해석들이 평행선을 긋다시피 팽팽히 맞서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한편에서는, 이 글들이 이승훈의 배교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해석하는데 비해 다른 편에서는 오히려 이승훈의 신앙을 고차원에서 표현하는 내용이라고 보는 해석 입장이 양보 없이 대치하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에서 최인각 신부는 이상 두 글들에서 이승훈이 천주교 신앙 진리를 사설(邪說)로 비판하면서 부인하는 의미를 담고 있어 배교 행위로 간주될 수 있음은 사실인데, 실은 이승훈이 자신과 자신의 부친, 그리고 교회 신자 가족 누구도 상하지 않고 ‘모두를 살리려는 상생의 삶’을 추구하는 취지에서 이룬 작업의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제3의 해석을 매놓고 있다. 그런데 논자로서는 이 두 글의 본문 원본이 아직까지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정확한 의미를 구명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아 입장 표명을 유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이승훈이 사형장에서 운명하면서 읊은 시라고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다가 6대 종손으로부터 전해 받았다고 주재용 신부와 변기영 몬시뇰이 밝힌 최종시 내지 운명시, “月落在天 水上池盡(월락재천 수상지진)”의 의미를 둘러싸고도 상반된 입장이 평행선을 그으며 마주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두 분들은 이 짧은 시문의 역사적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고 죽음에 직면하면서 장엄하게 떠올랐던 이승훈의 상념의 표현으로 그의 순교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파악하고 그 중요성을 역설하는 데 비해, 최석우 몬시뇰 측은 이승훈의 순교를 증언하는 구전(口傳)이 전해지고 있다면 마땅히 참고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오늘날까지 사계에서 신빙성을 인정받는 그러한 경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냉담한 자세를 시종 견지하는 것이다.
논자로서는 여기서 관건이 되고 있는 사안들의 역사적 사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자료내지 증언들이 더 많이 확보되기까지는 단정적 의견 개진을 일단 유보하지만, 자못 작지 않은 중요성을 지닌 이 사안에 대한 논의가 그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승훈의 ⌜벽이시⌟나 ⌜유혹문⌟을 이승훈의 배교를 보여주는 근거로 제시하는 입장을 반박하는 주재용 신부의 주장이 1970년에 간행된 그의 저서『韓國가톨릭史의 擁衛』에 수록된 논문 “한민족의 신앙 비조 이승훈(李承薰)의 일생”과 “이승훈 순교의 진위(眞僞) 비판”을 통해서 사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터임에도 불구하고 햇수로 40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진위를 가리기 위한 진지한 학문적 논의가 사학자들 사이에서 전개되지 않았음은 이해하기 힘들다. 논자는 주 신부가 펼친 주장의 진위를 규명하는 학문적 토론의 장이 여기서 관건이 되는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도정의 시발점으로 작용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사계 관계자들이 쟁점 사안에 대한 지속적 연구와 학문적 논의를 진전시켜 교회 구성원 모두가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역사적 진실들이 가급적 조속히 밝혀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아직 이 사안의 최종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지만, 논자는 앞에서 표명한 입장, 곧 이승훈의 아들을 위시한 후손들이 4대에 걸쳐 7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사실과 당시 조정이 이승훈을 천주학의 수령으로 판결하고 대역부도죄로 참수형에 처한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그가 배교자로서가 아니라 신앙을 장렬하게 증거하고 순교자로서 삶을 마무리하였다는 견해는 별 영향을 받지 않고 타당성을 그대로 지닌다고 생각한다.
2. 권철신
논자는 그동안 한국 교회사학계 안에서 권철신의 죽음을 둘러싸고 표명된 거의 상반되는 입장들의 논거 요지를 수회에 걸쳐 파악하고 비교하는 동안에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기 힘들다는 견해들을 대하면서 나름대로 알려진 그의 주요 족적을 밟으는 가운데 다른 견해를 갖기에 이르렀다.
1) 오늘날 여러 교회 사학자들은, 권철신이 신유박해 때 문초 과정에서 가해진 고문 때문에 사망하게 되었지만, 문초받으며 발한 천주교 신앙 거부 진술 때문에 순교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권철신이 천주교 신앙을 부인하며 사교(邪敎)로 대한다고 진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심문관들은 66세의 노인을 혹독하게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였는가라는 질문은 남는다.
논자는, 권철신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더라도, 이를 ‘신앙 고백이나 부인 내지 배교’ 차원에서가 아니라, ‘교리 논쟁’(controversia doctrinalis)이나 ‘신학 논쟁’(controversia theologica)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진술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 안에는 신앙의 진리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수많은 교리 논쟁이며, 신학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예수의 신원을 둘러싼 논쟁, 하느님 은총과 인간 자유 논쟁, 의화 논쟁, 예정설 논쟁, 충족 은총(gratia sufficiens)과 효능 은총(gratia efficax) 논쟁 등등 수많은 크고 작은 논쟁들이 도처에서 벌어져 왔다.
논자는, 문제시 되고 있는 권철신의 핵심 진술은 내용상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구 선교사들 사이에서 조상제사와 공자공경을 효도와 존경의 표현으로 허용하는 측과 미신행위로서 우상숭배로 규정하는 측으로 갈려 1634년부터 1742년까지 격렬하게 벌어졌던 ‘의례 논쟁’(Controversia de ritibus)의 쟁점과 직간접으로 상관한다고 보고 있다. 1582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마카오에 도착하면서 시작된 예수회원들의 중국 선교 활동은 그리스도 신앙에 배치되지 않는 한에서 중국 고유문화 자산을 수용하는 적응 입장을 채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가리키는 용어로 ‘천주’와 함께 ‘천’과 ‘상제’(上帝) 명칭을 사용하는 것과 공자(孔子)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 의식, 곧 ‘제공사조’(祭孔祀祠祖)를 용인하였다. 하지만 반세기 늦게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기 시작한 도미니코회(1632), 프란치스코회(1633),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1684) 등은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이 미신적 우상 숭배 행위로서 천주교 신앙 교리에 어긋나며, 하느님은 ‘천’과 ‘상제’ 이름으로 불려질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회원들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식을 반대하였다.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은 100여 년 동안 지속된 후 1742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도 14세의 칙서 ⌜엑스 쿼 신굴라리⌟(Ex quo singulari, 1742.7.5) 반포를 통하여 예수회의 주장이 금지되면서 논란이 종식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200년이 경과한 뒤인 1939년에 교황 비오 12세의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Plane compertum est, 1939.12.8)을 통하여 공자 공경과 조상제사가 다시 허용됨으로써 예수회원들의 견해가 복권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 논자는 권철신의 죽음의 성격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첫 단계로, 다블뤼 주교와 달레 신부에게 비쳐진 그의 인물됨과 행적을 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그들에게 권철신은 중국 경서의 철학과 윤리에 정통한 당대 가장 유명한 학자 중 한 명인 50대 인물로서 조용히 깊은 학문을 연구하고자 외딴 절에 모인 일군의 유학자 강학회를 이끌면서 하늘과 세상, 그리고 인성 등 가장 주요 사안에 관해 거유들의 통찰과 성현들의 교훈을 탐구하며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한편, 전해진 서양 과학과 종교에 관한 한역 서학서들의 내용도 검토하던 중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과 불멸성 및 수행 방법 등을 다룬 천주교 서적들이 일행의 탐구욕을 진정시키기에는 설명이 부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서 후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는지 새 종교에 대하여 아는 것을 전부 실천하기 시작하여, 실제로는 천주교 신자로서의 본분을 매일 다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양평 자택으로 찾아온 이벽으로부터 입교를 권유받고 잠시 주저하면서 심사숙고 시간을 가진 끝에 일단 세례를 받기로 하고 입교한 뒤에는 항구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효도를 위시하여 온갖 사회적 덕목을 쌓음으로써 주위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정도로 ‘거룩하기까지 한 삶’을 살았기에 이름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킬 정도였던 인물이었다. 권철신이 신유박해 때 국청에서 고문을 받으며 심판관 앞에 설 때에도 침착하기 그지없는 의연한 자세로 천주교와 그 실천을 변호하였던 인물이라고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다블뤼 주교는 그를 정약종과 함께 천주교의 ‘두 기둥’으로 대하고 ‘숭고한 순교자’라고 기록을 남기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 고결한 인품과 치열한 구도자의 면모를 지니는 권철신이 어떻게 신앙을 부인하고 ‘사교시’(邪敎視)했다는 진술 기록이 전해지는가? 그는 일가를 이룬 대학자이자 구도자로서 입교 전후로 하늘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대한 교리서 설명을 대하고 의당 더 깊이 알고자하는 원의와 함께 여러 의문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수준 높은 물음에 걸 맞는 해답을 줄 수 있는 아우구스띠노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교회 학자들이 당시 주위에 있었더라면, 그들 사이에 질의응답이 오가고 토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교리 내지 신학 논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명의 성직자나 신학자 없이 세례를 받게 된 이 신참 신자는 품게 된 물음들에 대해 교회 측으로부터는 어떠한 해답도 듣지 못하는 처지였기에 유학자 신분으로 스스로 대답을 찾는 외에 다른 길을 알지 못한 것이다.
1784년 이승훈의 북경 방문 이후, 이벽과 권철신 형제 등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서학, 곧 천주교 진리가 조선 사회의 기본 이념이었던 유학 사상과 상반되지 않고 부합하고 보완하는 구원(久遠)의 진리라고 믿어 흔쾌히 수용하고 이를 다른 이들에게 적극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1790년 북경에 밀사로 파견했던 윤유일을 통하여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조상제사 금지 훈령’을 북경 구베아 주교를 통하여 전달받게 된 것이다. ‘충효’(忠孝)는 인륜과 천륜이 정한 인간의 기본 도리이자 조선 사회를 지탱하는 양대 지주 가치이기도 하고 조상제사는 충효 정신의 보본과 보은의 발로이자 표상으로 간주되어 마치 국교처럼 간주되어 준행되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금지 훈령을 전해 받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이 받은 충격이 어떠했는지를 후손들로서 깊이 헤아릴 필요가 있다. 1791년에 일어난 ‘진산 사건’의 여파로 이어진 ‘신해박해’ 이래, 이 훈령은 조선 사회 기반을 흔들어 ‘무부무군’(無父無君)을 조장하는 패륜적 사술(邪術)로 낙인찍히면서 교황 비오 12세의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이 1939년에 반포되어 조상 제사가 실질적으로 허용되기까지 150년 동안 이 땅의 천주교인들을 혹독하게 시달리게 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주재용 신부는 ‘조상제사 금지 훈령’이 200년 동안 동 아시아 전교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고 적절히 지적한다. “조상 제사에 대해 로마 교황청은 1939년 12월 8일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렸다. 배공 제조(拜孔祭祖)는 ‘시대가 변천하고 민간의 풍속과 정신이 바뀐 현 시대에 와서는 한갓 조상에게 효성을 나타내는 데 불과한 예식이다.’ 이로써 조상 제사가 허용되었음을 말해 둔다.… 따라서 과거에 중국의 유럽 선교사들 사이에 공연한 논박으로 거의 1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불미스런 분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면서도 교의적(Doctrinale)이 아닌 한갓 기율적(紀律的 Discipliné)인 잠정적 변법(辨法)으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내려졌던 금령(禁令) 때문에 200년 동안이나 가톨릭의 동양 전교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던 ‘중국 전례 문제’도 이로써 그 종막을 고하게 된 것이다.”
3) 권철신이, 사학을 금단하는 방법을 한 마디 말로 진술하라는 심문관의 다그침을 받고 정학(正學)을 밝히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 답변하며, ‘사학에는 오륜이 없다’고 진술했다는 기록은, 신앙 교리들에 대해 갖게 된 물음에 대한 마땅한 해답을 교회 안에서 찾을 수 없던 한국의 신입 신자가, 한국 사회 지식인층의 철학과 도덕 수준과 경지에 대해 알리 없던 로마 지도층의 ‘조상제사 금지 훈령’을 전달받게 되자, 유학자 신분의 신자로서 내놓을 수밖에 없던 답변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논자는, 그의 답변을 ‘신앙을 부인하는 배교행위’로 간주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느끼며, 조상제사를, 중국에서 활동한 마테오 리치를 위시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인정했던 것처럼, 인륜과 천륜으로 정해진 도리로서 보본(報本)과 보은(報恩)의 자세로 이루어지는 효도의 한 양식으로 믿고 실천해 온 유가 출신의 신참 신자가 가졌던 신앙 이해의 한 진술로 대할 필요를 보고 있다.
권철신이 ‘충효를 금지시키는 종교는 정교(正敎) 아닌 사교(邪敎)로서 오륜이 없다’라고 한 진술은 당대 ‘정학’(正學)으로서의 유가적 신앙인의 입장을 개진한 것이고, 멀리한 것이 있다면, ‘무부무군’을 조장하는 사교였을 뿐이었고, 예수님의 참된 복음 진리와 신앙공동체를 멀리하였음을 진술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변 몬시뇰이, 권철신이 국청에서 진정으로 신앙을 부인하고 배교하는 진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권층이 증오감에서 그에게 혹형을 가해 숨지게 하면서도 외부로는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고결한 인품과 출중한 학식으로 신망을 한 몸에 받던 그의 한결같은 천주교 신앙 고백이 알려질 경우에 따를 수 있을 민심 동요를 차단하기 위해 배교로 날조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추정하는데 아무 근거 없는 상상이라고만 치부하기 힘든 것이다.
66세의 노인이었던 권철신이 장형(杖刑)에 처해져 물고된 엄연한 사실은, 그가 ‘천주교 창시자 예수가 부모께 대한 효도와 나라에 대한 충성을 금지하는 사교 지도자이다.’라는 배교 진술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은 데 대한 보복으로 가해진 형벌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다른 사교 추종자들을 밝히라는 집요한 추궁을 당하면서도 신자 누구의 이름도 발설하지 않은 것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신앙진리와 교회 공동체를 진실로 믿고 따른 때문이었다. 그가 고령임에도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문을 받은 것은 그가 일단 진리로 받아드린 예수의 진리를 신실하게 고수한 때문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논자는 권철신을 막상 죽음에 직면해서는 예수의 신앙진리를 부인한 ‘부끄러운 배교자’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유가적 신자로 밖에 달리 생활할 수 없던 처지에서 나름으로 신앙을 의연하게 증거한 ‘숭고한 순교자’로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3. 권일신
권일신이 한국 교회 창설을 주도한 3대 인물 중 한 지도자로 꼽히면서도 1791년 발발한 신해박해(辛亥迫害) 당시 천주교 ‘교주’로 고발당하고 체포되어 형조에서 심문을 받고 제주도 귀양 판결을 받고 떠나기 전 갑작스레 진행된 회유에 굴복하는 뜻이 담긴 ‘회오문’을 제출함으로써 배교하였다고 간주되어 순교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머물러 있다. 권일신의 죽음에 대한 교계 연구자들은 그의 순교 죽음 직전에 일어난 ‘비겁한 죽음’ 앞에서 한결같이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는데 머물러 있다.
1) 논자는 권일신의 회오문(悔悟文) 작성을 몇 연구자들이 대하듯 ‘비겁한 배교’ 행위로 간주해야 하는지를 두고 주저하게 되면서 그의 마지막 처신을 가까이 대하면서, 그는 신앙인의 자세를 명시적 차원에서와 함축적 차원에서 견지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연구자들은 모두 권일신이 6차 심문 후 7차 심문 때 100도 정도의 장형을 받으면서도 죽기를 무릅쓰고 ‘예수를 사망(詐妄)하다’는 배교 진술을 하지 않았다고 거의 이구동성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이 사실은 관변 심문 기록에도 확인된다. 학자들의 연구에서 판명되듯이, 그의 순교 평판에서 오늘날 결정적 관건이 되고 있는 ‘회오문’ 작성은 정조 임금의 개입 결실이었다. 논자는 ‘박해자는 악의 화신이고 피 박해자는 선의 화신이다’라고 대하는 일반 통념을 적어도 이 경우에 한해서는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정조 재위 중에 발생한 신해박해의 발발 원인은 ‘조상제사’를 금지시킨 교회 훈령이 제공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천주교 박해에 임했던 정조의 입장을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대할 필요를 느낀다.
2) 정조는 유학 이념에 의거하여 천륜과 인륜에 부응하는 왕도(王道)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려던 군주로 알려지고 있으며, ‘조상제사’를 금지하는 훈령을 시달한 서양 천주교 당국의 입장을 천륜과 인륜의 기본 도리를 훼손시키는 극히 ‘사망(詐妄)한 패악 행태’로 파악하였을 것이다. 이 임금은 개국 공신의 후손이면서 아울러 비범한 인품과 특출한 재능을 지녔던 권일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사람으로서의 도리, 곧 노모께 대한 효도와 나라에 대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려는 ‘선의’(善意)를 가지고 개입한 것이지, 인륜과 천륜의 뜻을 따르고자하는 ‘진교’(眞敎)로부터 그를 회유하여 배교자로 만들어 오명을 씌우게 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접근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권일신은 목만중과 홍낙안으로부터 교형에 해당되는 사교 교주로 고발당하고 고문과 함께 수차례에 걸친 심문을 받고난 뒤 제주도 귀양 판결을 받게 되었을 때, 임금의 뜻이 자신을 사형으로 엄벌하지 않고 살리려는데 있음을 아마 어렴풋하게라도 감지하게 되었을 터에 새로 전해진 임금의 ‘후의’를 느끼고 감복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관변 기록에 수록되어 전해지는 ‘회오문’ 전문이 권일신의 친필 작성문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사계 일각의 회의적 견해가 나와 있고 논자도 이에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 회오문의 일부 내용, ‘다만 이전의 잘못됨을 고치고 뉘우침으로써, 사랑하여 살리려는 (하늘의) 지극한 뜻과, 사람을 사람 되게 하려는 (임금의) 성스러운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80세 노모께서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시고, 형제들은 무고하게 잡혀들어 오니…’라는 기록 부분에서는 작성자의 진의가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랑하여 살리려는 하늘의 뜻’은 현실적으로 그에게는 ‘사람을 사람되게 하려는 임금의 뜻’을 통하여 전해졌을 것이기에, 그가 이를 보은의 자세로 받아드려 따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논자는, 여기서 드러난 권일신의 처신을 수치스러운 ‘배교행위’로 볼 것이 아니라, 그때 거기서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생활하라는 예수님의 진리를 따르는 익명적 형식으로 이룩한 ‘신앙행위’라고 볼 수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개진하고 싶다. 그리고 부모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 공경을 양자택일 양식으로 대치시켜서 하느님 공경을 위해 부모 공경을 희생해야 한다는 관점은 정작 효도를 다할 것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는 입장이라는 점도 역시 강조하고 싶다.
이벽의 죽음을 재조명하는 연구물에서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구원에 필요한 신앙은 ‘신앙대상’(fides quae creditur)과 ‘신앙행위’(fides qua creditur)의 두 차원에서 논의될 사안인데, ‘신앙대상’은 ‘범주적 신앙’ 차원으로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이나, 교리나 성사생활 등 다른 사회집단 내지 종교들과 구별되어 드러나는 ‘명시적 차원의 신앙’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서 ‘신앙행위’는 ‘초월적 신앙’ 차원으로서 신앙인이 현실 안에서 살아가면서 내면 심층에서 들리거나 발해지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일상적으로 성취하는 윤리 도덕적 생활로 구현되는 신앙’을 가리킨다. 그런데, 배교나 순교를 가리는 사안에서 일차적으로 관건이 되는 신앙은 ‘범주적 신앙’보다 ‘초월적 신앙’이다. 예수의 다음 말씀은 이 사실을 확인하여 준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범주적 신앙’!]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초월적 신앙’!]”(마태 7, 21). 특정 종교의 교리를 명시적으로 신봉하지는 않으면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익명적 양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로 간주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논자는 그를 죽음에로 이끈 엄형이 가혹하게 가해지는 가운데 이루어진 7차 심문 과정까지 예수님께 대한 명시적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권일신은 ‘범주적 양식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을 간직하면서 받게 된 제주 귀양 판결 후 하늘의 뜻에 따라 80노모께 대한 효도를 다하여 인간답게 살 것을 종용한 정조의 뜻에 순응함으로써 익명의 양식으로 이루어진 ‘초월적 신앙’도 성취한 뒤에 예산 귀양으로 감형 받고 나서 즉시 닥친 죽음을 맞았다고 보기에 순교로 신앙적 삶을 마쳤다고 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믿는다.
V. 맺는 글
한국 교회 창설 주역들이었던 이승훈‧권철신‧권일신의 죽음과 순교 문제에 관하여 국내외 사료 연구를 통하여 그동안 한국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사계 학자들과 교회 관계자들의 견해 내지 주장을 검토하면서 신학적으로 재조명하려고 시도하였다.
1. 오늘날까지 이승훈의 경우 그가 ‘순교자가 될 수 없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주장과 그는 ‘신앙을 부인한 일이 없고 신앙을 증거하면서 순교자의 죽음을 장렬하게 맞았다’라는 상반된 주장이 평행선을 긋는 듯이 팽팽히 맞서 있다. 권철신의 경우에도 그는 ‘숭고한 순교자’로 죽음을 맞았다는 주장과 구속 후 심문 과정에서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멀리하는 ‘부끄러운 배교’를 하였다는 주장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권일신의 경우 혹형이 가해지는 가운데 이루어진 7차까지의 심문을 ‘죽음을 무릅쓰고’ 견디어 냈지만, 죽음 직전에 신앙을 부인하는 ‘회오문’을 작성하여 제출함으로써 ‘부끄러운 죽음’을 맞았다는 주장이 그의 순교를 내세우는 주장 못지않게 대두되어 있는 실정이다.
논자는, 그들이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멀리하였다라고 전하는 관변 기록의 내용이 그들의 진의를 정확히 표현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일부 학자들과 교계 인사들의 관점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한편, 설령 그 기록 내용(적어도 일부 내용)이 당사자들의 진의가 담긴 것이 사실이라도 하더라도, 이를 근거로 해서 ‘단칼에 무 베듯이’ 그들의 처신을 나약하고 부끄러운 ‘배교’로 규정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3인 모두 당대 사회 안에서 유수한 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천지인(天地人)과 관련된 궁극적 진리를 치열하게 탐구하고 일상 속에서 인륜과 천륜의 도리들을 지키려 진력했던 군자 내지 구도자의 면모를 보여주던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들이 심문 과정에서 보여준 언행을 개인적인 나약함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반드시 정확치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고자 하였다.
논자는 이들 3인이 1791년 이래 처하게 된 상황의 심각성에 주목할 것을 언급하였다.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여 한국교회 사정을 보고하고 성직자 파견을 간청하여 낭보를 기대하던 그들에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미는 격’으로 ‘조상제사 금지 훈령’이 시달된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망연자실해 있었을 지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가 그들이 속해 있고 알고 있던 유가의 진리를 폐기하지 않고 보완하여 완성하는 진리로 여기로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생활하며,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는데, 그들이 인륜과 천륜의 기본 도리로 알고 일상 속에서 지키려 노력해 온 ‘충효’의 가치를 송두리째 폐기시키는 듯한 금령을 시달 받고 깊은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여기서 관건이 되는 쟁점을 둘러싸고 서양인 선교사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한 세기 넘게 벌어졌지만 어느 편도 ‘배교자 집단’으로 매도되지는 않았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을 강타한 비상 상황 안에서 제기되는 물음들에 대해 어떠한 해명이나 해답도 교회 당국으로부터 들을 수 없는 처지에서 자신들이 이미 숙지하고 있던 유가적 입장에서 심문관들의 질문에 답할 수밖에 없었음을 후손들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들 경우에는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사태를 파악하여 드러난 발언을 중국에서의 ‘의례 논쟁’에서 예수회원들이 정당하다고 인정했던, 유가적 신자들이 가졌던 나름대로의 신앙 표명으로 대하고 평가하는 자세가 요청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논자는, 그들이 평소에 보여준 것으로 알려진, 고결한 인품과 치열한 진리 탐구, 그리고 비범한 덕성 함양 노력들을 염두에 둘 때에, 심문관들의 협박과 함께 가해지는 질문을 받고나서 고립무원의 처절한 상태에서 발해진 그들의 진술들이 당시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들려진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보여준, 익명의 양식으로 드러낸 신앙의 진술일 것으로 이해한다는 입장을 개진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대역부도죄인으로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지거나, 66세의 고령에 장형(杖刑)에 처해져 매 맞다가 운명하거나, 50세에 받은 장100도에 해당하는 엄형을 받은 끝에 삶을 마쳐야 했다. 모두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한 일들이었다. 일부 연구자들이 강조하듯, 이들은 모두 숭고한 순교자들로 인정받아 마땅한 분들이었다.
2. 1940년대 이래 70~80여년이 지나는 세월동안 초기 한국교회 주역들의 신앙적 삶과 순교적 죽음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연구 작업에 참여했던 여러 연구자들의 노고를 대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줄곧 떠나지를 않았다. 이들이 오랜 세월동안 교회 안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교회사 관련 저술들과 주류 교회 사학계 인사들에게서 배교자 내지 기교자로 규정되는 분위기 속에서 신앙 증거자로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입장을 개진하면서 입증 자료를 찾아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던 고 주재용 신부를 위시하여 변기영 몬시뇰과 제3차에 걸쳐 진행되는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 세미나 차원에 참가해 온 여러 소장 학자들의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특히, 1970년에 자신의 사제서품50주년을 기념하는 시기에 신앙 증거자로서의 이승훈의 삶과 죽음의 경위에 대해 처절하리만큼 철저한 사료 검증을 통하여 기존 교계 통설의 문제점들을 일일이 지적하고 사실은 전혀 달랐음을 제시하고자 실로 헌신적 노력을 기울였던 고 주재용 신부의 선각자적 자세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생전의 노고가 지하에 헛되이 파묻히지 않고 밝은 세상에서 알찬 결실을 맺게 되는 날이 조속히 도래하기를 기원한다.
3.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 안에서 이례적으로 이룩한 괄목할만한 외적 성장과 역동적 활동에 힘입어 시작된 새 천년기에 민족 복음화와 세계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여건을 지닌 지역 교회로 국내외적인 기대를 모으고 있다. 1984년에 한국교회는 첫 방문 교황이셨던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03위 순교선열들이 성인으로 추대되는 영광을 맛본 바 있고 다시 125위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작업이 공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래 선교사들의 활동 없이 앞서 교회를 창설했던 주역들은 이러한 영광으로부터 제외되어 있다. 치열하기 그지없는 구도적 삶을 영위하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고 증거 했던 교회 선조들의 위대한 삶을 올바로 구명하고 검토하면서 보편 교회 안에서 그분들의 삶에 부합하는 자리를 마련해 드리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는 일은 후손들로서 등한히 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될 과업이라고 믿는다. 한국 교회 창설 주역들인 이승훈‧권철신‧권일신 세분들의 치열했던 구도적 도정을 뒤 밟아 따르면서 가혹하기 그지없던 박해의 역경을 겪으면서 지키려 했던 신앙 때문에 끝냈던 삶이 미처 이룩하지 못한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의미에서 그분들의 고결한 삶과 장렬한 죽음에 부합하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 우리 후손 모두 적극 동참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마지않는다.
심상태 (수원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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