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챙겨서 잔지바르 공항을 향해서 이동했다. 잔지바르 공항에서 아디스 아바바를 경유하여 이집트 카이로로 가기 위해서다. 합리적인 일정은 아니지만 이것 또한 여행이니까 마주치는 대로 맞이하기로 했다. 아디스 아바바행 기내가 소란스럽다. 국적은 모르지만 백인들이 떼를 지어 소란을 피운다. 그렇다고 승무원 누구하나 제지하지 않는다. 많은 지식과 재주를 가진들, 백인우월 주의에 빠져 본들 교양이 없는 사람을 누가 인정해 주겠는가? 무지랭이들의 군중심리가 발동한 것으로 이해했다.
늦은 시간에 아디스 아바바 공항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한다. 깊은 밤에 곧게 뻗은 대로를 달리는 기분도 괜찮다. 상호는 호텔로 되어 있지만 단층집으로 잘 꾸며진 가정집 같은 아늑함을 느낌이다. 여주인은 유난히 뚱뚱한데도 뒤뚱거리면서 친절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좋은 환경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햇살 좋은 아침을 맞이한다. 창문을 여니 고양이가 재롱을 부리고 있다. 일하는 흑인 인부는 숙소주위를 비질하고 있다. 재롱부리는 동물과 일하는 인간. 고양이는 주인 잘 만나 여유를 즐기고, 일하는 인부는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남의 집을 청소해야만 먹고 사는 현실. 어쩜 태어날 때부터 운명을 쥐고 나는 것이 아닐까? 개척한 삶을 살려고 해도 그 의식을 깨우치려면 조건이 만들어져야 하고 환경도 바뀌어야 한다. 오지랖 넓게 바깥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싶은 생각도 해본다.
아침식사는 망고 쥬스와 과일, 샌드위치에 계란 후라이 그리고 판케익이다. 닭울음소리와 새소리가 퍼지는 숙소에서 평온의 여유를 부리며 이곳에서 한 달 살이라도 하고 싶다.
모쉬 시내를 목적 없이 걸었다. 17~8세 정도 되는 아가씨 2명이 과일을 팔고 있다. 젊은 부부는 판케익을 들고 다니며 판매를 하는데 여자는 숫기가 없다. 세 개를 달라고 해서 50실링을 주니 잔돈을 바꾸기 위해 저 만치 있는 가게로 달려간다. 힘들게 일을 시킨다는 생각에 거스름돈 없이 그냥 가져라 고 했다. 돈이 뭔지, 국력이 뭔지 그런 환경을 받아들이는 그들이 순박하기만 해서 좋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버스정류장이 있고 장터가 크게 열렸다. 가게에 들어가 밀크 티와 빵만두를 시켜 먹었다. 낌새를 보니 현지인들이 지불하는 금액과 우리가 지불하는 가격에 차이를 두는 듯했다. 장터에는 옥수수, 고구마, 야채, 열대과일부터 생활필수품과 목공예품은 물론이고 닭, 개 등 동물까지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다. 푸줏간에는 손님이 고기를 주문한다. 푸줏간 주인은 현란한 솜씨를 손동작을 펼친 후 자를 준비를 한다. 살결을 따라 자를 것인가? 뼈의 간극을 따라 자를 것일까? 스승한테 배운 기술을 활용하여 재주를 뽐내고 있다.
도는 무엇에 가려져서 참된 것과 거짓이 있는 것일까? 말은 무엇에 가려져서 시비가 있는 것일까? 도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말은 어디에 있든 옳지 않음이 없다. 하지만 도는 인위적인 잔꾀에 가려지고 말은 화려한 것에 가려진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있게 되는데 그들은 상대방이 ‘그러다’한 것을 ‘옳다’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한 것을 ‘그러다’고 한다. 상대방이 ‘그러다’고 한 것을 ‘옳다’하고 ‘옳다’고 한 것을 ‘그러다’고 하는 것은 밝은 지혜로 비춰보느니만 못하다.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故有儒 墨之是非 以是其所非 而非其所是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則莫若以明
도오호은이유진위 언오호은이유시비 도오호왕이부존 언오호존이불가 도은어소성 언은어영화
고유유 묵지시비 이시기소비 이비기소시 욕시기소비이비기소시 즉막약이명<제물론1>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한계 내에서 갇혀 산다. 그리고는 모두를 아는 것처럼 설명하고 상대를 설득하려 든다. 푸줏간 주인은 현란한 손동작으로 내가 최고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웃집 주인의 기술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밝은 지혜는 옆집 부뚜막에 있을 지도 모른다. 소성小成은 자그마한 성과를 이룬 것이다. 그런 사람의 인식은 단순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그는 그 안의 세계에서 만족한다. 성심成心(선입견, 편견, 굳혀진 마음)에 갇히면 안 된다. 밝은 지혜란 소성 小成 과시비의 대립을 넘어선 단계다.
완벽한 앎이라도 그것으로 세상을 바로잡거나 상대를 설득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지식의 함정에서 빠져나와 밝은 지혜의 문으로 들어서려면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과 세상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 기준이란 가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의 기준을 눈으로 살피고, 귀 닮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밝은 지혜란 고요하고 마음을 텅 비운 상태에서 성심을 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