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경종 연간의 《열성어제》 간행
경종의 명에 따라 송상기(宋相琦)와 이관명(李觀命)이 단종과 숙종의 어제를 추록(追錄)하여 1720년(경종 즉위년)에 간행하였다.
열성어제(列聖御製) 제2권 / 단종대왕(端宗大王)○시(詩) / 영월군의 누각에서 지음〔寧越郡樓作〕
《노릉지(魯陵志)》에 나온다. 《노릉지》에 이르기를, “상왕(上王)이 객사(客舍)인 동헌(東軒)에 머물러 있을 때 매번 관풍매죽루(觀風梅竹樓)에 올랐는데, 밤이면 그곳에 앉아서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였으므로 그 소리가 멀리 있는 마을에까지 들렸다. 또한 누각에서 근심스럽고 적막하여 짧은 시구를 읊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우는데 / 月白夜蜀魄啾1)
시름겨워 누각에 기대었네 / 含愁情倚樓頭2)
네 울음소리 슬퍼 나 듣기 괴롭구나 / 爾啼悲我聞苦3)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 無爾聲無我愁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전하니 / 寄語世上苦勞人4)
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소 / 愼莫登春三月子䂓樓5)
1) 혹은 ‘달은 지려하고 두견새 우는데〔月欲低蜀魄啼〕’라고 되어 있다.
2) 혹은 ‘시름겨워〔含愁情〕’가 ‘슬픈 생각에〔相思憶〕’라고 되어 있다.
3) 혹은 ‘네 울음소리 괴로워 내 마음 슬프구나〔爾聲苦我心哀〕’라고 되어 있다.
4) 혹은 ‘이 세상에 말을 전하니〔寄語世上〕’가 ‘천하에 알리니〔爲報天下〕’라고 되어 있다. ‘로(勞)’ 자는 ‘뇌(惱)’ 자로 되어 있다.
5) ‘자규(子䂓)’ 아래에 혹은 ‘체명월(啼明月)’ 세 글자가 있다.
또
원통한 새 한 마리 궁궐에서 나온 뒤로 /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외딴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 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길 없고 / 假眠夜夜眠無假
해마다 한을 끝내려 하나 끝없는 한이네 / 窮恨年年恨不窮
산봉우리에 울음소리 끊어지니 새벽달이 비추고 / 聲斷曉岑殘月白
봄 골짜기에 피 흐르니 붉은 꽃이 떨어진다 /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 먹어서 하소연 못 듣는데 / 天聾尙未聞哀訴
서러운 몸 어쩌다 귀만 홀로 밝은가 / 何奈愁人耳獨聰
경자년(庚子年, 1720, 경종 즉위년) 11월에 교정청(校正廳)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간행된 《열성어제(列聖御製)》를 상고해보니, 어제(御製) 시(詩)와 문(文)이 사가(私家)에 소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수합해서 기록해 넣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단종대왕(端宗大王)의 시 2편이 고(故) 장령(掌令) 신 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노릉지(魯陵志)》에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위호(位號)가 이미 회복되었으므로 《열성어제》 가운데 일체 추가하여 넣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므로 원래의 시 2편을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입니다만, 아래에서는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어서 이와 같이 여쭙니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강진숙 (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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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어제(列聖御製) 제10권 / 숙종대왕(肅宗大王)○시(詩) / 노산군의 일에 느낌이 있어 네 수를 짓다〔魯山事有感四首〕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주고 / 遜位冲齡日
멀리 외진 고을에 갔었네 / 遙臨僻邑時
우연히 비운을 만났지만 / 適然丁否運
임금의 덕은 이지러짐 없었네 / 君德曾無虧
또〔又〕
승하한 일들을 거론하려 하니 / 欲提乘化事
목이 메어 눈물이 마르지 않네 / 哽咽淚難乾
우레와 바람이 시월에 진동하니 / 雷風十月動
하늘이 어찌 까닭 없이 했겠는가 / 天意豈無端
또〔又〕
천추에 무한한 원망 있고 / 千秋無限寃
만고에 외로운 넋이 되었네 / 萬古一孤魂
쓸쓸히 황량한 산속에 / 寂寂荒山裏
푸른 솔이 옛 무덤을 두르고 있네 / 蒼松繞舊園
또〔又〕
고공한 채 명부에 앉았는데 / 高拱坐冥府
엄숙하게 곤룡포를 입고 계시네 / 儼然襲衮龍
사육신의 충성은 해를 뚫으니 / 六臣忠貫日
혼백 또한 임금을 따르리라 / 魂魄亦相從
[주-D001] 노산군(魯山君) : 1441~1457.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아들인 단종으로 이름은 홍위(弘暐)이다. 왕비는 돈녕부판사 송현수(宋玹壽)의 딸인 정순왕후(定順王后)이다. 1448년(세종30)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14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실권을 빼앗겼고, 1455년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56년에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모의가 실패하자 1457년에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복위 도모가 실패하자 노산군에서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1457년(세조3) 10월에 영월에서 죽었다. 1681년(숙종7) 신원되어 대군(大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1698년(숙종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장릉(莊陵)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다.[주-D002] 승하(昇遐) : 원문의 ‘승화(乘化)’는 승화귀전(乘化歸全)의 줄임말로, 자연에 순응하여 궂은일을 당하지 않고 수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을 말한다. 세조의 왕통을 적법하게 여겼기 때문에 승화라고 한 것이다.[주-D003] 우레와 …… 진동하니 : 단종이 1457년 10월 24일(갑인)에 승하한 일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는 10월에 들어서서 일식(日蝕)과 천둥 번개가 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은 군신(君臣) 상하가 정치를 잘못한 탓으로서 결국 백성만 피해를 보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주-D004] 고공(高拱) : 왼손을 오른손 위에 포개어 잡아 가슴 앞까지 올리는 것을 말한다.[주-D005] 사육신(死六臣) : 1456년에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된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를 가리킨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김남기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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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단종(端宗)의 "어제시(御製詩)와 자규시(子規詩)"
김정웅 2023. 2. 19. 00:29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
조선왕조 500년 사직(社稷) 중 가장 슬픈 역사(歷史)의 주인공(主人公)인
6대 임금 단종(端宗), 아명 홍위(弘暐), 1441~1457년 일찍 세상을 떠난
부왕(父王) 문종(文宗)이 1414~1432년 38세 붕어 뒤를 이어
1452년 5월 만 11세의 어린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1453년 10월에 어린왕을 보좌하는 고명대신(顧命大臣) 김종서를
제일먼저 수양대군이 제거한다. 그리고 황보인을 비롯하여
여러 대신들을 제거한다.
그 이유는 신권이 왕권을 침해했다는 이유와 둘째인 수양대군을 멀리하고
셋째 안평대군과 정사를 논의하며 역모를 꾀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니까 표면상의 이유는 정사를 돌볼 능력이 없는 조카 단종의 왕권을
회복 시켜야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빌미 였다. 속으론 왕위를 노린
것이다. 불행히도 단종에게는 섭정할 사람이 없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죽었다.
단종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정사(政事)를 돌볼 수 없으므로 특히 인사(人事)에
있어서 왕에게 명단을 올리면서 고명 대신이 노란색으로 표시를 해서 올리면
왕은 그 노란 표시가 되어 있는 인물을 낙점하는 그런 방법 이었다.
이를 소위 황표정사(黃標政事)라 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코 대신들이 왕을 업고 권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어린 왕을 보필 하려는 우국 충정의 발로였다.
하지만 수양 대군은 이를 빌미로 일으킨 것이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그러나 숙부 수양의 속셈은 왕위(王位)를 노린 것이었다.
많은 대신들이 목숨을 잃었다.
"어제시(御製詩)"
千秋無限寃(천추무한원) : 천추에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寂寧荒山裡(적령황산리) :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萬古一孤魂(만고일고혼) : 만고에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蒼松繞舊園(창송요구원) : 푸른 솔은 옛동산을 감싸고 있네
嶺樹三天老(영수삼천로) : 고개 위 소나무는 하늘 높이 우거졌고
溪流得石喧(계류득석훤) :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구나
山深多虎豹(산심다호표) :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려
不夕掩柴門(불석엄시문) :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아 거노라
단종(端宗)이 유배지(流配地)에서 처음으로 지은
시(詩)가 바로 어제시(御製詩)이다.
어제시(御製詩)에는 청령포와 주변의 모습과 단종의
마음 상태가 잘 표현되어 있다.
1457년 유배되던 해의 여름 홍수로 청령포(淸冷浦)가 범람하자
단종(端宗)은 영월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관풍헌 바로 옆에 위치한 매죽루(梅竹樓)에 올라 단종(端宗)은 소쩍새의
구슬픈 울음 소리에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자규사(子規詞)와
자규시(子規詩)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자규시(子規詩)"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 원한 맺힌 새 한 마리가 궁중 떠난 뒤로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쌍영벽산중) :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假面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 해가 가고 해가 와도 恨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 자규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혈루춘곡낙화홍) :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 하늘은 귀먹었나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고
何奈愁人耳獨聽 (하내수인이독총) : 어찌하여 슬픔 많은 이내 몸의 귀만 홀로 밝은고
단종(端宗)이 밤이면 이 누각에 올라 읊조리는 자규시(子規詩)가 너무
애절하여 이곳을 지나며 들은 사람들이 이 누각 이름을
자규루(子規樓)라 하였다고 한다.
- 만 16세에 이런 시를 쓴 단종의 애끓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
(출처:네이브에서 모셔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