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금와왕설화
동부여 금와왕에 관한 설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제1 시조동명성왕조(始祖東明聖王條)와 ≪삼국사기≫ 권1 기이(紀異) 제1, 동부여 고구려조에 나타나 있는 금와왕의 탄생에 얽힌 문헌설화이다. 위의 두 책에 실려 있는 설화 내용은 거의 일치한다.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하고 왕위를 이을 아들〔嗣子〕을 구하였는데, 하루는 왕이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를 보고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들추어 보니 그 밑에 한 어린 아기가 있는데, 빛은 금빛 같고 모습은 개구리와 같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것은 하늘이 대를 이을 아들을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거두어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금와가 장성하자 태자를 삼고 해부루가 죽은 뒤 왕위를 잇게 하였다.
금와왕탄생설화는 인간 생명의 용출(湧出)로서의 지생관(地生觀)을 바탕으로 하여 천생관(天生觀)과 대립된다. 이는 또한 자연 발생적 인간 기원을 이야기하여 견훤설화(甄萱說話)류의 인위토생적(人爲土生的) 기원론과 대립된다. 한편, 금와왕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신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금와왕은 즉위한 뒤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그 여자는 본시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인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사통(私通)하여 부모에게 내쫓기어 우발수에 살고 있었다. 금와가 유화를 데려왔는데, 햇빛이 유화의 몸을 따라다니며 비추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더니 마침내 닷 되들이만 한 알을 하나 낳으니, 금와는 이를 내다 버리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개·돼지·소·말 들이 이 알을 피하여 먹지 않으며, 새들이 보호하려 들자 왕 자신이 알을 깨뜨리려 해도 깨뜨리지 못하게 되니 왕은 알을 어미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알에서 태어난 아기가 바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說話文學硏究(張德順, 서울大學校出版部, 197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와
생몰년 미상. 동부여의 왕. 금와(金蝸)라고도 표기함. 서기전 1세기에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행적은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의 신화를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삼국유사≫, 그리고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 東明王篇〉에 전해지고 있다.
부여왕 해부루(解夫婁)는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후사를 구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 곤연(鯤淵)이라는 연못가의 이상한 돌 밑에서 금빛나는 개구리(또는 달팽이) 모양의 아이를 발견하고 그를 하늘이 준 자식이라 생각하여 데리고 가서 키웠다.
금와라는 이름은 바로 금빛나는 개구리 모양을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뒤 태자로 책봉되어 해부루를 이어서 부여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태백산 남쪽의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에게서 쫓겨난 하백의 딸 유화(柳花)를 발견하고 궁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유화가 이상하게도 알을 낳자 이를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곧 알의 신비함을 인정하고 유화에게 돌려주었는데, 이 알에서 주몽이 탄생하였다. 그의 일곱 아들들이 주몽을 시기하여 그를 처치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금와는 듣지 않고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기르게 하여 그 뜻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그 뒤 주몽이 달아나자 그를 추격하는 군대를 파견하였지만 잡지는 못하였다. 주몽이 고구려 건국을 위하여 남쪽으로 떠난 후에 유화가 24년에 죽자 태후(太后)의 예로서 장사를 치러주었다. 그의 사후 왕위는 아들인 대소(帶素)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國李相國集, 廣開土王碑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