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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 특집②]
김남준의 관상기도 견해 비판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
이 글은 2011년 김남준이 발표한 “합동측 96회 총회 관상기도 운동 연구 논문”에 대한 비판이다. 그의 모든 글에 대한 비판 보다는 주된 논거에 대해서만 비판한다.
“첫째로, (관상기도는) 신비주의를 지지하는 뉴에이지(New Age) 사상이다” (김남준).
관상기도는 물론 외양적으로는 뉴에이지와 같은 범신론적 형태를 지닌다.
뉴에이지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 속에 내재하는 신성을 깨닫고 자아의 고양을 체험하면서 우주와 하나가 되려 시도이다. 필자 또한 청년부를 섬기면서 뉴에이지 운동에 대해 상당한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매일 누리는 관상기도가 뉴에이지적 명상기도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다.
필자는 ‘관상기도’란 단어가 천주교적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임재기도’란 단어를 선호해 왔고, 이제는 문화개혁의 차원에서 ‘명상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참고 meditation. 명상, 묵상
contemplation. 관상. 명상
그러나 외양이 비슷하거나 같기 때문에 기독교의 관상기도를 뉴에이지나 범신론적 명상기도와 동일시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필자는 존 맥아더, 행크 해네그라프를 위시한 수많은 성령운동 대적자들의 신학적, 논리적 오류를 밝힌 바 있다.
김남준도 예외가 아니다. 건전한 체험의 결핍으로 인한 ‘일반은혜의 혜택에 대한 오해’, ‘잘못된 유추의 오류’로 인해 이런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다. 기독교적 체험이든 이교적 체험이든 대부분의 경우 외양적 모습이나 현상은 비슷하거나 동일하기 마련이다.
불교 신자도 감동 받으면 울고 웃듯이 기독교 신자도 울고 웃는다. 뉴에이지적 명상을 통해 자아의 고양, 황홀 체험, 우주와 하나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상기도를 통해서도 성령의 도우심과 중보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체험을 충분히 할 수 있다. 만일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폄하한다면 기독교식 예배의 요소인 찬양, 기도, 말씀선포, 헌금 또한 이교적 예배에서 동일하게 사용되는 방법이므로 폄하되어야 할 것이다.
마귀나 세상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먼저 알고 먼저 행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뉴에이지 운동이 성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베푸실 것을 마귀가 먼저 알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미리 재를 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 찬양과 경배가 회복되기 전에 마귀는 록앤롤을 통해 젊은이들의 영혼을 도적질했다. 이때 하나님은 교회에 찬양과 경배를 회복시키셔서 젊은이들을 교회로 인도하셨다.
사실 필자도 하나님의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영 분별이 잘 되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런데 기도 중이나 꿈에 유난히 마귀의 공격이 심하면, “아, 이것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일이구나,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왜 이렇게 기를 쓰고 공격할까?”.
그러면 기 죽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을 내어 그 일을 추진한다. 오늘날 뉴에이지 운동, 불교나 범신론의 명상운동이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양의 선진제국은 물론 한국에도 붐을 이루는 것은 마귀가 하나님이 하실 좋은 일을 미리 알고 광분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할 일은 막무가내로 반대하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장·단점을 따져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한국은 불교 천지가 되어가고 있다. 매스컴은 연일 마음공부하고 명상하고 도 닦는 중들을 치켜세우는 한편 기독교 지도자들의 추문은 사소한 것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때 기독교가 할 일은 “아, 관상기도는 범신론적이거나 뉴에이지적이다”면서 배척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무슨 좋은 것이 그 안에 있나 보나”(사실 그렇다!)는 겸허한 자세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마귀는 창조 능력이 없다.
마귀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적 축복을 오용, 남용, 왜곡하는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희한하게도,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베푸시는 것은 잘 모르면서 마귀가 하는 좋은 일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안다. 어떻게 해서 이들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관상기도를 통해 내적 평강, 위기 대처 능력, 자아의 고양, 하나님과의 만남이 주는 기쁨과 황홀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 마귀가 주는 좋은 것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정통한가?
“관상기도는 성경의 진리와 교리의 체계들을 아는 지식 안에서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지성적인 교통으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김남준)
기도를 어떻게 지성만으로 하는가?
기도는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교제이다. 우리가 인격체인 사람과 교제할 때 지성만으로만 하는가? 지성과 감성과 의지와 같은 인간의 전인격체를 통해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교제인 기도도 마찬가지다. 말씀의 바탕 위에서 지성적으로도 해야 하지만 사모하는 감정적 마음, 믿음에 굳게 서겠다는 의지적 결단을 통해서도 하는 것이다.
“내적 관조(觀照)에 의하여 신적 본질과 접촉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접 상태에 들어간 자아를 관상기도 운동가들은 ‘고양된 자아’(higher self)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과의 일체를 가리키기도 한다”(김남준).
제대로 된 기독교인이라면 관상기도를 이렇게 해석하는 신자는 없다.
김남준은 범신론적 관상기도의 개념을 끌어와서 모든 기독교적 관상기도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다. 신자는 기독교적 관상기도를 통해,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인격적인 주님과 교제할 때, 죄와 세상을 따른 겉사람의 활동이 약화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속사람이 활성화 되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적 기쁨을 체험하면서 예수님과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의 교제를 누린다.
필자는 기도 중에 거의 매일 이런 체험을 누린다.
호흡기도, 치유기도, 회개기도, 명상기도 등 각종 기도 방법을 사용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린다. 그렇다고 필자는 한 번도 필자가 뉴에이지나 범신론적 명상기도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관상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더 철저하게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씻고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거룩하게 한 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필자가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주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때-이것이 접신이라고?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이나.
성령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어떻게 ‘접신’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한번도 주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신앙생활 하나? 죄를 따르는 나의 육신적 겉사람이 죽고 성령을 따르는 속사람이 살아나서 한없이 정화되고 고양된 자아의 기쁨을 누린다.
그렇다고 자아를 잃고 무뇌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더 없이 또렷하지만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령의 영향을 받는 정화된 자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영적 상태를 체험한다. 이런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가벼워지고, 막혔던 문제의 실마리들이 너무나 쉽게 풀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많이 떠오른다.
조나선 에드워즈는 ‘이런 체험이 망상이라면 자기는 매일 이런 망상에 사로잡히고 싶다’고 했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한두 번만 이런 체험을 해보면 뉴에이지니, 범신론적 명상이니 하는 헛 소리가 쑥 들어갈 것이다.
물론 사람의 자연발생설을 믿는 범신론자들은 명상-관상-을 통해 자연이나 우주와 본질적으로 하나됨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됨’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본질적 하나됨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됨’을 말한다.
고전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But anyone who is joined to the Lord is one in spirit with him.)
“한국 교회, 하나 되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싸우고 분열하는가?”
“부부는 하나 되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다투는가?”
여기서 말하는 ‘하나됨’을 본질적 하나됨으로 이해하는 멍청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왜 기독교 관상기도를 할 때, 신자가 예수님을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에 대해 그렇게 트집을 잡는가? 그러면 반대자는 기도할 때, 주님과 하나됨의 체험을 한 적이 없는가? 만일 그렇다면 기도의 ABC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5:20).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둘째로, 중세의 신비주의(神秘主義)이다. 많은 학자들은, 관상기도의 뿌리가 중세 초기 중동 지역의 광야에서 생활하던 사막 교부들에게서 기원한다는 판단에 일치를 보고 있다”(김남준).
당연하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중세의 신비주의를 일격에 배격했다.
필자가 보기에 칼뱅과 개혁주의자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신비주의를 버리면서 ‘구정물과 함께 어린아이도 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신학적 오류는 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모르고, 회개를 등한 시하고, 예수의 피 공로와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금욕과 스스로의 힘으로 깨우침을 얻으려 하고, 몰현세적이고(그 당시는 그것이 유일한 소극적인 저항의 방법이기도 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된다는 신화(神化. deification)을 강조한 것 등.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려는 노력과 방법은 오늘날의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다.
신비와 외경이 빠지면 종교는 교조주의, 율법주의에 빠지기 마련이다.
개신교 신학 특히 개혁신학은 너무나 오랫동안 서구의 이성주의와 계몽주의의 지배를 받아왔다. 필자는 로스쿨을 다닌 후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개혁주의 조직신학은 종교개혁가들이 버린 아리스토텔레스식 법정변론법에 기초한 변증 신학임을 발견했다.
시조인 칼뱅과 그 추종자들의 주장에 합당한 성경구절이 나오면 확대해석하고, 그렇지 않은 구절은 축소해석하거나 무시하는 변증 신학을 확립해 왔다. 더구다나 개혁신학은 서구에서 이성주의와 계몽주의가 꽃을 피울 때 정립된 신학인데 데카르트의 ‘명확하고 판명한 이성’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중산층 백인 남성신학’이란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세의 신비주의에 오류가 있다면 개혁신학은 지나치게 좌뇌중심적, 변증중심적, 교리중심으로 치달은 오류가 있다.
오늘날 신자들의 신앙이 왜 이렇게 냉랭하고 무기력한가?
머리로 아는 것은 많지만 현실과 세상의 유혹을 이길만한 강력한 신비적 체험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는 지양되어야 하지만 성경적 신비는 지속되어야 하는데 서구 이성주의 신학은 신비주의라는 구정물과 함께 '성경적 신비체험'이라는 어린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이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 수도사들의 명상법과 생활의 규칙은 고대 힌두교와 불교의 수행자들의 기법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김남준).
당연하다.
모든 종교적 체험과 수생 방법은 외양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이성주의는 세계 제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몰락했다. 자연히 그런 바탕 위에 형성된 서구 신학도 그 수명을 다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대안은 무엇인가?
서구적 논리성을 유지하되 동양적 직관으로 보완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좌뇌에 치우친 우리의 신앙을 우뇌로 보완하는 좋은 방법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교리적으로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백성, 아버지와 자녀, 목자와 양, 신부와 신랑처럼 경험적 관계적 하나님이기도 하시다.
관상기도는 성경과 하나님을 우뇌로 보는 것을 도와준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좌뇌적 지식이 주지 못하는 것을 직관과 관계적인 우뇌적 지식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우뇌적인 지식은 논증과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논증과 교리가 세운 뼈대 위에서 명상과 사색을 통해 주어진다.
이런 지식을 얻는 방법은 기독교나 이교도가 차이가 없다. 하나님이 지식 얻는 방법을 두 통로를 통해서 주신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관상을 통해 자신 안에 내재하는 신(?)을 발견하거나 마귀의 종이 된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는 명상을 통해 자신 안에 존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이고 체험적으로 만난다.
현대인들은 이런 지식, 이런 체험에 목 말라 있다.
교회가 이런 것을 제대로 채워주지 못하니까 사람들은 영분별력이 없이 세상에서 잘못 채우다가 마귀의 밥이 되고 있다. 교회는 이런 것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수정한 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셋째로, 유대주의 안에 있던 까발리즘(Kabbalism)의 영향이다. 까발리즘은 스페인과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시작된 중세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의미한다” (김남준).
신비주의 현상은 유대주의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종교가 있는 곳에는 모두 있다. 필자가 연구한 신비체험에 의하면 신비주의 체험이 주는 외양은 모두 비슷하다.
다만 (1) 하나님을 만나서 누리는 체험이냐, (2) 인간 속에 내재한 초능력을 통한 체험이냐, (3) 마약 등 환각제를 통한 체험이냐, (4) 마귀가 주는 체험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필자는 이것도 일반은혜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즉 하나님은 사람에게 쾌락과 기쁨을 추구하고 누리려는 본성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이 게임에 빠지는 것,
-어른이 도박에 빠지는 것,
-학문과 연구에 빠지는 것,
-돈 벌이나 사업에 빠지는 것,
-친구나 연애에 빠지는 것,
-목회나 사역에 빠지는 것.
-범신론적 명상에 빠지는 것
-하나님과의 교제에 빠지는 것
세상에서는 이것을 ‘몰입’(Flow)이라고 한다.
기쁨과 보람이 있는 일에 사람들은 몰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세상과 물질이 주는 기쁨은 금방 싫증을 느끼고 보다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기쁨을 추구한다.
그런데 교회는 차원 높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보다는 헌신, 충성, 축복, 섬김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 결과 이런 것에 휘둘린 신자는 영적으로 냉랭하거나 세상적이 된다. 세상 사람들은 아예 교회를 등 지고 뉴에이지나 범신론적 명상을 통해 초월적 체험을 추구하고 또한 누린다.
필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 체험을 누구보다 많이 누리는 사람이다.
이러한 강력한 체험이 있었기에 오랜 세월의 연단과 고난도 능히 감당해 왔다.
경제적 궁핍, 미래와 노후에 대한 불안, 스트레스의 가중으로 짓눌릴 대로 짓눌린 현대인들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초월적 영적 돌파를 추구한다.
불행하게도 불교와 같은 범신론이나 뉴에이지 운동이 발 빠르게 이들의 니즈(needs)를 채워주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들의 니즈에 무관심하신가?
아니다. 필자의 하나님, 기독교의 하나님도 우리가 사람들에게 이런 영적 축복을 베풀기를 원하신다. 동양적 신비주의든, 뉴에이지적 신비주의든, 유대적 까발리즘이든, 이슬람의 수피적 신비주의든 이들은 영적으로 목마른 현대인들의 목을 추겨주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는 목 마른 현대인들에게 무엇을 주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개혁주의 신학을 다시 공부하라고 할 것인가?
필자는 오강남의 자유주의적 신학 입장에는 비판적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마음에 든다.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입술의 표층종교에서 벗어나 마음의 심층종교로 가야 한다.”
한국 교회가 필자의 이런 주장을 수용한다면 다시 한 번 재도약할 것으로 필자는 확신한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해-
“다섯째로, 르네상스 시대 이후 범신론(pantheism)과 내재신론(panentheism)의 확산이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일자가 어떻게 세계와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 범신론적이고 내재신론적인 주장들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관상기도운동은 이러한 신관들의 지지를 받는 신비사상(神秘思想)에 의하여 촉진되었다. …………….
더욱이 19세기 이후 확산된 내재신론의 부흥의 물결을 타고 이러한 관상기도에 대한 강조는 기독교 안에서 상당한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19세기에 와서 고전적 유신론은 훨씬 더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만드셨으나 본질적으로 창조세계와는 다른 분이시며 전적인 타자로서 영원하고 불변하며 초월적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 유신론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집요한 이론적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고전적 유신론이 가진 한계 곧, 악의 원인에 대한 미흡한 설명,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대한 극도의 제약, 그리고 영원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성 같은 논제들 때문이었다.
고전적 유신론(有神論)을 공격하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내재신론(內在神論. panentheism)을 따랐다.
이들의 내재신론은 하나님을 초월적 존재로 보는 대신 존재론적으로는 구별되지만 동시에 모든 세계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사상이다.” ( 김남준).
필자는 초신자일 때 냉랭한 장로교회를 다녔다.
처음에는 멋 모르고 다녔지만 다니는 동안 은혜를 받았는지 주일이 기다려졌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교회에 다녀오면 마음이 더 심란하고 짜증이 났다. 그 교회는 예배도 조용조용, 찬송도 조용조용 드려야 하고, 좋은 일이 있어도 사회자나 목사님 외에는 ‘아멘’하는 것은 물론 끽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한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합 2:20).
-주일예배는 엄숙하고 거룩하게 드려야 한다.
그 교회는 이 두 가지 원칙에 충실한 교회였다.
그러다가 이사를 가는 바람에 다른 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새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중에 어느 정도 마음에 감동이 왔고 갈급한 심령도 어느 정도 채워졌다. 이때에 와서야 이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오히려 짜증이 더 난 이유는 갈급한 심령을 영적으로 채워주지 못하고 살짝 건드려 놓기만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 교회도 오래 다니지 못했다. 어느 정도 은혜는 있었지만 예배가 끝나면 세상적인 친교 모임 위주의 교회였다. 친교 하기 위해 교회 다닌 것이 아니라 뭔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성령 체험 하고 방언하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눌려 있던 내 영혼, 시들은 내 영혼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은 은혜와 신선함이 있었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였는데 그때 오순절 교회에 대한 핍박이 미국 이민교회에도 심할 때라, 내가 다닌 오순절 교단의 대표 목사는 가능하면 오순절 냄새를 풍기지 않고 장로교처럼 조용하고 고상하게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하던 분이었다.
필자의 담임목사도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말씀 중심을 강조했지만 오순절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성령 체험, 방언, 신유, 축사 정도는 허용하는 교회였다. 필자는 이 교회를 다니면서 방언도 받고 성령 체험도 하면서 예배에서 은혜 받고 또한 교회에서 실시한 제자훈련도 참석하여 말씀의 은혜도 받았다.
그러던 중, 신앙생활을 같이 하던 집사 부부가 색다른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내 생각이 났다면서 그 집사는 나를 그 교회의 주중 예배에 초청했다. 일반적인 교회에서 예배 중에 찬송가는 순서 사이에 한두 곡 부르는 것이 보통인데 이 교회에서는 한 시간을 내리 달아 불러댔다. 언제 찬양이 끝나나 하면서 시계를 흘깃 훔쳐보았지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을 재어 보았더니 한 시간 가량 불러대었다. 그리고 이 교회에서는 오르간과 피아노는 물론 기타 치고 북을 쳤고 예배자들은 손뼉 치고 손을 들면서 요란스럽게 찬양을 해대었다.
“못 올 교회를 왔구나. 다시는 오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 주에도 친구가 같이 가자고 전화했다.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같이 가자는 권유에 마지 못해 따라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한 시간 가량 부르는 찬양이 하나도 지겹지 않은 게 아닌가! 지겹기는커녕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찬양을 한 시간 정도 신나게 부르고 나니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내 영혼이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것 같았다.
이때만 해도 한국 교회에 요즈음과 같은 찬양과 경배가 보편적으로 소개 되기 전의 일이었다. 이 찬양과 다른 영적 현상으로 인해 이 교회는 얼마 후 주변 교회협의회로부터 ‘무당굿 하는 교회’ ‘광란의 집단’이라는 심각한 비난에 직면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이런 무당굿 하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 교회는 거의 없다. 격세지감이 있다. 관상기도에 대해서도 이런 날이 곧 오리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이런 찬양을 통해, 필자는 하나님은 거룩하고 무섭기만 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즐거움과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조들이 버린 변증과 논증을 도입한 종교개혁자의 후계자들(구요한 목사)
필자는 신학교에 가기 전에 로스쿨을 다니는 동안 논증과 변증에 대해 신물 나게 공부했다. 그리고 난 후 신학교에 갔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개혁신학의 우수성(?)을 전하기 위해 각종 논증과 변증과 무리한 이론화를 하는 모습이, 마치 자기 고객을 위해 온갖 수사학과 변증과 궤변을 늘어놓는 변호사 못지 않는 논증법을 사용하는 것과 같아서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다.
종교 개혁가인 칼뱅이나 루터는 인문주의의 영향과 아리스토텔레스식 논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후기에 와서 후계자들은 가장 저급한 법정변론적 논증법으로 시조들의 주장을 옹호, 변증, 신학화 하여 개신교 조직신학은 논증신학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따라서 필자는 신학자의 전제와 편견에 의해 심하게 좌우되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성서신학, 주경신학(Biblical theology)에 의해 끊임없이 견제와 균형을 받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방향을 논리가 전개되는 위험성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개혁신학이 말로는 성경 중심이라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개혁신학이야 말로 상당부분 플라톤과 아리스텔레스의 철학적 개념, 뉴톤의 고전적 물리학의 닫힌 세계, 법정과 정치판에서나 있을법한 법정변론적 논증신학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것이 기적중지론, 성경의 신비와 신비주의를 동일시 하는 것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살펴볼 ‘고전적 유신론’ 또한 철학적 신관 위에 형성된 주장이다.
지금은 박사가 된 필자의 신학교 스타디 그룹의 한 멤버는 신학교 과정이 지나치게 변증적이라는 필자의 지적에 대해, ‘마귀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신학적으로 피 터지게 싸우게 하여 교회로 하여금 생기를 잃게 했다’고 하는데 옳은 지적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후 필자는 다양한 영적 체험을 하면서 나름대로 신학적 소양을 쌓는 일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늘 바라는 것은 신학적 소양과 영적 체험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사람의 출현을 기다렸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학자적 소양과 지식이 있으면 체험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마귀의 사역으로 간주해 버리고, 영적 체험이 있으면 학자적 소양이 부족하여 성경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여 곤욕을 치르는 경우를 많이 목격해 왔다.
관상기도에 대한 오해와 갈등도 이런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반대하는 자들은 본인의 직접적 체험이 없으니까 쉽게 접하는 자료들을 통해 부정적으로 비판한다. 체험이 있는 자들은 그런 체험을 개신교 개혁주의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는 능력과 시간이 결핍되어 있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그런 자료가 있을 리 만무하고 설령 있다고 해도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자료들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주제넘게도 이 둘 사이의 간격을 해결해 보고자 함이다.
-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이 필요
- (구요한 목사)
다른 주제들도 많지만 여기서는 관상기도와 관련된 하나님의 2가지 대조되는 중요한 속성인 ‘초월성’(Transference)과 ‘내재성’(Immanence) 및 거룩과 사랑에 대해 간단하게 다루고자 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보유하신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격이 다르고 존재가 다르신 초월적인 분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피조물과 함께 하시는 내재적인 분이시다. 그러나 유사 종교는 어느 한 가지 속성만을 강조한다. 이슬람교는 초월성을 강조하고 불교, 힌두교 같은 범신론적 종교는 내재성을 강조한다.
범신론(Pantheism)은 말 그대로 All is god 즉 ‘만물이 신이다’는 주장이다.
범신론의 불교는 인간 속에 불성(신성)이 내재하고 있는데 탐(탐욕)•진(분노)•치(무지)가 가려서 번뇌에 휩싸여있기 때문에, 수덕과 명상을 통해 탐진치에서 벗어나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무지를 깨달으면, 각성한 부처-범신론적 신(神)-가 되거나 인간의 근원인 우주-모든 것이 신이므로 자연도 신이고 우주도 신이다-와 합일하여 지고의 행복을 누린다고 가르친다.
힌두교와 이의 영향을 받은 뉴에이지운동, 마음수련, 단월드 등이 이런 주장과 가르침으로 현대인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고 있다.
기독교의 신(神)은 유사종교의 신과는 달리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초월성, 주권성, 거룩성을 강조하고, 내재성, 사랑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특히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여 신자들의 접근 가능성을 일찌감치 차단해 버렸다. 종교 개혁가들도 이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개혁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주권성, 거룩성은 탁월하게 다루지만 내재성에 대해서는 소홀하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신자들과 하나님 사이가 유리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회개기도가 하나님의 초월성, 거룩성을 바탕으로 한 기도라면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내재성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기도이다. 기독교 관상기도는 범신론의 명상기도와 외양은 비슷하지만 ‘내용’이나 ‘의도’는 이들과 다르다. 크리스천은 관상기도를 통해, 중보자 예수님의 이름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면서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누린다.
이때 누리는 영적 황홀, 속사람의 강건함, 죄악된 세상을 초월하는 신비적 능력의 유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런 영적 체험을 누리고 나면, 나와 세상은 간 곳 없고 주님만 바라보게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나’는 죄로 물든 나, ‘겉사람’의 나를 말하는 것이지 ‘속사람’의 나가 아니다. 비판자들은 신비체험을 하면 무아지경에 빠진다는 단어를 이성과 감성과 의지도 없는 무뇌자로 오해하지만 무아라는 말은 겉사람의 내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속사람은 오히려 더 말똥말똥해 진다. 오해하기 말기를!
필자가 생각하기에 범신론의 가르침은 한편으로는 금지된 열매를 따먹으면 마귀의 가르침에 놀아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된 영원을 사모하는 신심(信心)이 이런 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즉, 인간에 내재한 신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표출된 것이지 신심 그 자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말이다.
세상 ‘재미’에 빠졌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 믿는 ‘재미’에 빠지고, ‘세상 노래’ 잘 하던 사람이 예수 믿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을 하듯, 범신론적 영성에 빠져있던 사람은 하나님의 섬기는 영성으로 꼭지만 돌리게 하면 된다는 말이다.
영성과 초월적 체험에 목 말라 하는 현대인들에게 범신론적 불교나 뉴에이지운동이 명상기도를 통해 내재된 신성이나 불성(부처의 성품)을 활성화하고 우주와 합일하는 체험을 추구하여 자아실현과 영적각성의 기회를 제공하듯, 하나님의 교회에서 관상기도란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을 활성화하고 창조주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되는 체험을 준다면 그들이야 말로 ‘준비된 물 좋은 어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고전적 유신론(Classical theism)의 결함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삼위이지만 한 분이신 하나님, 100%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100% 사람이신 예수님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듯, 100%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100% 내재적인 하나님을 성경적으로 제대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보니 신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철학자들이 말하는 신관(神觀)을 도입하기 마련이다. 개혁전통이 받아들이는 고전적 유신론도 김남준의 이해와는 달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 어거스틴, 안셀름,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거치면서 정립된 개념이지 어느 날 갑자기 칼뱅이나 개혁주의자들이 창출한 개념이 아니다.
개혁전통에서 받아들이는 고전적 유신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존, 불변, 영원하신 분이시다.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피조물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후회하시고, 모세의 중보기도를 통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취소하신 일 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전적 유신론은 신인동형동성론으로 설명한다.
불변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후회하고 생각을 바꾸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 실제로 후회하시고 생각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준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의인화한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해석이다.
문제는 왜 이런 식으로 해석하게 되었을까 이다.
신학자들은 헬라 철학의 신관(神觀)을 도입하여 이 문제를 설명했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사람과 만물은 변하는데 궁극적인 존재인 ‘신은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신이 변한다면 열등하게 변할 것인데 그렇다면 그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만물을 변하게 하는 존재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라고 불렀는데 신학자들이 이 개념을 성경의 하나님의 불변성에 도입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후회하시고(창 6:6), 신자가 기도하고 회개하면 생각을 바꾸시는 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헬라 철학의 신관에 경도된 신학자들은 ‘그것은 불변의 하나님이 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철학적 신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전형적 사례이다.
고전적 유신론의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혁주의자들은 언약신학을 통해 유리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이 또한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율법주의로 전락하고 말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신학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회복해야 한다’고 번 포이트레스 교수는 주장했다.
또한, 초월적이고 불변하시고 완벽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수준 낮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악을 허용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고, 고난에 동참하시는가? 고전적 유신론은 이 분야의 설명에 대해 상당히 취약하다. 그래서 반기를 들고 나온 주장이 내재신론(Panentheism)이다. 필자는 범신론과의 용어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범재신론이란 단어 보다는 내재신론이라 단어를 선호한다.
All is in God(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한다).
내재신론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시간 속에서 인간과 협력하면서 반응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주로 자유주의신학자들에게서 나온 주장인데 이 주장은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 것까지는 좋은데, 설명하는 과정에서 ‘피조물이 하나님 안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하나님도 부족하시다’, ‘하나님도 완전을 위해 나아가신다’는 등의 주장을 하여 고전적 유신론자들의 비판을 받는다. 이처럼 고전적 유신론이 완벽하지 못한 것 이상으로 내재신론에도 단점이 있다.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분은 존 쿠퍼, 『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을 참조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두 페이지 읽다가 골치가 아파서 책을 덮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지만 글을 써야겠다는 사명감에서 몇 번 읽어보았지만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어떻든 고전적 유신론자들은 내재신론자들의 비판을 일부 수용하여,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는 불변하시지만 시간 속에서는 인간의 행동에 반응하시고, 인간과 함께 하시고, 인간의 요구에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즉 필자가 보기에 고전적 유신론과 내재신론 간의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학의 결함-‘거룩’은 강조하고 ‘사랑’은 무시
(구요한목사)
성경의 2대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하나님의 속성에서 사랑이 차지 하는 비중은 빈약하다.
아래의 예를 살펴보자.
벌콥 조직신학이나 일반적인 개혁신학의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 분류법이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1. 독립성, 2. 불변성, 3. 무한성, 4. 유일성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1. 영적 속성, 2. 지성적 속성 3. 도덕적 속성, (1) 하나님의 거룩하심 (2) 하나님의 의 (3) 하나님의 선 (a) 자선 (b) 은혜 (c) 긍휼 (d) 오래참으심 4. 주권적 속성 (1) 주권적 의지 (2) 주권적 능력 (5) 유복적 속성.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사랑’이 ‘도덕적 속성’ 중 ‘하나님의 선’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주권적 속성’은 훨씬 큰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그 만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관심이 소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인 ‘사랑’을 무시한 것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런 인식은 신학교의 분위기에서도 드러난다.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교수나 학생들은 표정이 밝고 사랑이 넘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표정이 어둡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쌀쌀하다.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타락한 죄인’이라는 인식에 사로잡혀서 그런지 교수든 학생이든 쌀쌀맞고 인정머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두렵고 떨리게 하시는 하나님’과 이끌리고 ‘매혹되게 하시는 하나님’
이런 인식이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영 죽을 죄인인 인간이 감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때에 경거망동할 수 있는가? 그래서 아직도 예배 시간에 ‘아멘’ 하거나 웃으면 엄숙하고 거룩하게 드려야 하는 예배를 망친다고 가르치는 신학자자 목사가 많고 그렇게 수용하는 신자들도 많다.
필자 또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 냉랭한 예배를 드리고 나면 내면에서 솟구치는 답답함과 영적 갈등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기타 치고 북 치면서 한 시간 가량 찐하게 찬양하고 나면 마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확신과 담대함이 넘친다.
나중에야 전통적인 장로교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오해로 인해 그렇게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전에 나올 때는 회개를 통해 자신을 정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회개한 후에는 마치 친구나 연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기뻐 뛰어 놀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 1:11).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합 2:20).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 32:11).
신자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죄를 지었을 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두려워하며 회개해야 하지만 회개한 후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찬양하고 예배 드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루돌프 오토는 하나님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동시에 이끌리는 매혹되는 마음”을 가지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기도 중에 신자가 하나님께 나갈 때 두 가지 마음 즉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이끌리고 매혹되는 마음’으로 나간다. 이 때문에 필자는 관상기도를 하기 전에 나름대로 철저하게 치유하고 회개한다.
물론 전통적인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교제는 강조하지만 회개가 약하므로 이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 요즈음의 CCM도 하나님의 사랑과 교제는 강조하지만 십자가와 보혈의 회개는 약한 단점이 있다. 전통적인 교회처럼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만 강조하면 신자가 주눅이 들어 예배가 장례식처럼 냉랭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만 강조하면 예배가 활발한 것은 좋은데 거룩과 성숙이 결여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관상기도가 모든 것의 대안은 아니고 보완이라 생각한다.
신앙생활에서 묵상기도, 통성기도, 임재기도 모두 필요하다. 묵상기도를 통해 말씀의 깊이를 깨닫고, 통성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고,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누린다.
관상기도는 신자에게 익숙한 간구기도와도 다르다.
간구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에게로 끌어들여 소원하는 것을 이루고 응답 받는 기도이므로 많은 경우, 기도자의 내면의 상태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기도자가 거룩하고 진리이시고 사랑이신 하나님께 나가는 기도이다. 자신을 정화하지 않고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제대로 나갈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영적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신자들이 관상기도를 하기 어려워하는 이유이다.
기도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면이 제대로 정화되지 않으면 내면의 상처와 잡 생각과 영적 공격으로 인해 주님께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어렵다.
멀리서 보면 얼굴의 티가 잘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서 보면 잘 보인다. 그래서 간구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잘 변하지 않지만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관상기도를 제대로 조금만 하면 사람이 변하기 시작한다.
관상기도를 즐기면서 필자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초월성, 거룩성에 치중한 나머지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엄한 아버지 아래 자란 자녀는 활기가 없고 주눅이 잘 든다. 엄한 아버지의 훈육에 자상한 어머니의 사랑이 더해질 때 자녀는 당당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안정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보다는 거룩과 공의에 의해 주눅 들면서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하나님 아래서의 신앙생활이 요구하는 것은 충성, 헌신, 희생, 고난, 봉사이다. 자기도 모르게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다 보면 사랑, 기쁨, 감사, 열정이 넘친다. 신자는 이 두 가지의 규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는 전자에 치중해왔다.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뭐라고 평가하실까?
바로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이다.
에베소 교회는 선하게 행동하고, 인내하고, 교리에 굳건하고, 악을 미워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다. 예수님은 어디서 떨어진 것을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책망하신다(계 2:1-7).
오늘날 대부분의 전통적인 교회는 에베소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행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능케 하는 명상기도를 통해서이다.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린 교회는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눈에 보이는 건물, 손에 잡히는 성도 수와 예산은 많지만 영적으로는 헐벗고 가난한 교회, 차지고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교회이다(계 3:14-22).
이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지만 행위는 죽은 사데 교회이다(계 3:16).
이런 교회를 신학적으로는 어떤 교회라고 하는가?
죽은 정통(Dead Orthodoxy)의 교회라고 부른다. 교리와 전통은 바르지만 주님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고 영적으로 가난하고 바른 행위가 없는 교회가 바로 죽은 정통의 교회이다.
말씀 중심의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말씀 말씀만 강조하면 말씀 중심의 교회인가?
교리 바르고 전통 바르면 말씀 중심의 교회인가?
이런 교회 중에 에베소교회, 라오디게아교회, 사데교회가 너무 많다.
말씀 중심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성경말씀을 제대로 적용하는 교회가 말씀 중심의 교회이다.
지금까지의 교회가 하나님의 초월성에 치중하여 거룩과 공의를 강조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내재성에 관심을 가져 하나님의 사랑과 교제를 회복할 때이다.
관상기도는 이전의 신학적 오류를 조금만 손질하면 ‘죽은 정통’을 치유하여 교회에 능력과 생기를 불어넣는 강력한 처방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