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 College General in Penang
위치 Jalan Cengai, Tanjung Tokong, 11200
Tanjong Bungah, Plau Penang, Malaysia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1808년 페낭에 세운 신학교로 박해받는 동양 10여 개 국에서 온 학생들이 신학 교육을 받은 곳이다. 김대건 신부 이후 조선 신학생 24명도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폐교한 지 25년 만인 1808년에 부활된 페낭신학교는 페낭의 풀라우 티쿠스(Pulau Tikus)에 정착하게 되었다. 현재의 페낭신학교(College General)는 페낭 섬의 북쪽 해안 언덕에 새 교사를 신축하고 1984년에 이전한 마리오필(Mariophile)의 신학교다. 탄중 붕가(Tanjung Bungah) 지역의 잘란 센가이(Jalan Cengai) 골목에 있다.
1665년 샴에 세워진 신학교의 후신으로. 박해 때문에 지역 내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었던 중국과 조선 등 동양 10여 개국에서 온 학생들이 신학 교육을 받은 곳이다. 개교 당시 20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페낭신학교는 점차 학생 수가 증가하여 1855년에는 128명이 될 정도였다. 점차 각 교구에 신학교들이 설립되면서 페낭신학교의 학생 수는 감소하게 되었고, 1892년에는 67명으로 줄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페낭 신학교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즉 영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로마에서 공부한 말레이시아와 태국인 교수들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1970년에는 운영권도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현지 교구로 이관되었다.
● 페낭 신학교와 한국 신학생
■ 1기 신학생 3명 유학
페낭 신학교가 한국 교회의 성직자 양성과 관련을 맺은 것은 1855년 6월 이만돌(바울리 노) , 김 요한, 임 빈첸시오 등 3명의 신학생이 페낭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1854년 3월 조선을 출발, 5월 19일에 파리외방전교회의 홍콩경리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1년 정도 머문 후 이듬해 6월 12일 페낭신학교에 도착하여 신학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이만돌은 1년 만인 1856년 10월에 페낭을 떠나 홍콩으로 왔다가 1861년 4월7일에 랑드르(Landre), 조안느(Joanno), 리델(Ridel), 칼레(Calais)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귀국하였고, 나머지 2명은 신학교의 전 과정을 마치고 1862년 2월에 페낭을 떠나 1863년 6월 23일에 오메트르( Aumaître) 신부와 함께 귀국하였다.
■ 2기 신학생들의 유학
페낭신학교에 다시 조선 학생들이 파견된 것은 1882년의 일이었다. 1876년 블랑(Blanc) 주교는 신학생 파견을 재개하기로 하고, 7명을 페낭신학교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1881년에 일본의 나가사키로 보내져 그곳에서 코스트 신부로부터 1년간 지도를 받은 후 페낭신학교를 향해 떠났다. 이를 시작으로 188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모두 21명의 신학생들이 페낭신학교에 입학 하였다.
■ 2기 신학생들의 귀국
그로 인해 1884년 12월 한기근(바오로) , 이내수, 전 안드레아가 2년 만에 페낭 신학교를 떠나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 블랑 주교는 1884년을 끝으로 페낭으로의 신학생 파견을 중지하고 국내에서의 신학생 양성을 계획하였다.
●말레이시아의 이해
초기 한국 신학생들의 성소의 여정인 페낭 섬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에 있는 입헌 군주제를 택한 연방제 국가로, 말레이 반도 남부와 보르네오 섬 북안(北岸)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레이시아는 입지 조건상 해로가 넓게 개방되어 있어 서쪽에서는 힌두교와 불교의 인도, 이슬람교의 중동, 그리스도교의 유럽, 동쪽과 북쪽에서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이웃 국가들, 중국, 일본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 다층적인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 말레이시아의 종교
말레이시아의 국교는 이슬람교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종교가 혼재하는 다종교 국가이다. 일반적인 종교는 이슬람교, 불교, 도교, 힌두교, 그리고 그리스도교 등이 있다.
전체 국민의 60.4%가 무슬림(수니파, 시아파 전부)이며, 불교 신자가 19.2%, 힌두교 신자가 6.3%, 그리스도교인이 9.1%(이 가운데 대부분은 동 말레이시아에 거주를 차지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종교의 자유는 허용되지만 국민, 특히 이슬람교도에 대한 선교활동은 할 수 없다.
■ 페낭
초기 한국 신학생들의 성소의 여정인 페낭 섬(Penang Island)은 페낭 주의 일부이다. 말레이 반도의 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이 섬은 18세기 말까지는 반도 쪽 케냐의 술탄 영이었는데, 말라카 해협의 북쪽 입구를 제한하는 전략적 요지를 위해 1786년 영국 동인도회사 선장 프란시스 라이트에 의해 점거되어 영국의 식민지로 되었다. ‘동양의 진주’로 불리며,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특히 동서 문화의 합류 지점이었던 지역적 특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식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다.
■ 페낭의 천주교의 전래
천주교는 포르투갈의 식민지 때 전래되었는데, 이때는 이미 이슬람교가 정착한 후였다. 1557년에 말라카는 포르투갈의 보호권 아래 있는 교구가 되었지만, 1641년에 말라카를 점령한 네덜란드에 의해 70년 동안 반가톨릭 법규가 시행됨으로써 교회는 침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1702년에 인도 고아(Goa)에서 온 사제에 의해 성당이 건축되고 신앙생활이 계속 유지되던 중, 태국에서 발생한 박해로 방콕에서 쫓겨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 두 명이 이곳에 와서 1782년부터 설교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1807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르통달(Letonda1) 신부가 페낭에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페낭신학교는 수차례 이전과 폐교 과정을 거쳐 1808년 페낭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조선의 신학생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던 곳도 바로 이 신학교이다. 1855년 이만돌을 비롯한 조선 신학생 3명이 입학하였고, 1882~1884년 몇 차례에 걸쳐 조선 신학생 21명(또는 22명)이 입학하였다.
■ 한국 선교사와 페낭 신학교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들도 페낭신학교와 관계가 있다. 즉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Imbert. 范世 亨) 주교는 1821년 3월 페낭에 도착한 후 신학교에서 몇 달 동안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고,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 는 1828년부터 4년 동안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후에 초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브뤼 기에르(Bruguière, 蘚) 주교는 1829년 주교로 축성된 뒤 페낭 섬에서 1831년까지 사목을 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 중 빌렘(N.Wilhelm. 洪錫九) 신부는 1883~1888년 까지 페낭 신학교 교수로 활동하였고, 우도(Oudot. 吳保祿) 신부는 1888~1890년까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 쳤다.
그리고 뮈텔 주교는 1890년 말 제8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오던 중 며칠 동안 페낭 신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따라서 빌렘 신부와 우도 신부는 페낭에서 조선 신학생들을 직접 가르쳤고, 뮈텔 주교도 그곳에서 유학 중이던 조선 신학생들을 만나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 폴리(Polly) 신부, 조제( Jaugey, 楊秀春) 신부는 1907년에 페낭신학교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조선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이다.
신학교 교정에는 페낭 신학교의 교수를 역임한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동상이 반갑게 한국 순례자들을 맞아 준다. 페낭 신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한 한국의 성인들이다.
그 앞 성인·순교자 정원에는 페낭 신학교 출신 베트남 사제 성인 5명의 동상, 46명의 베트남·캄보디아·버마(미얀마) 순교자 명패석이 안치되어 있다.
작은 신학교 성당, 성인의 유해가 담겨 있는 여러 성광과 성합 가운데는 한국 성인들인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모신 성합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