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7월 2일(화) 아가 5:2-8 찬송 390장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5. 일어나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 빗장에 떨어지는구나
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7.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겉옷을 벗겨 가졌도다
8. 예루살렘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개역 개정)
- 결혼 초기에 임한 사랑의 갈등 -
오늘 말씀을 포함한 아가서 제 3부(5:2-8:14)에서는 혼인 예식 및 초야를 통하여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경험한 사랑의 기쁨을 묘사한
본서 제 2부(3:6-5:1)에 이어 신혼 초의 일시적 갈등의 발생과
이를 극복하고 더욱 더 성숙한 사랑으로 승화해가는 과정,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의 기쁨이
술람미 여인 혈육들에게까지 확장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3부의 첫 단락인 오늘 말씀에서는
먼저 신부가 자신을 찾아온 신랑을 박대하여 돌아가게 하는 장면을 노래하여
두 사람의 갈등이 초래된 근본 원인을 명백하게 밝히고(2-3절)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그녀가 신랑을 찾아나섰다가 당하는 봉변을
노래함으로써 일시적 방심이 초래한 결과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4-8절)
한편 본문은 술람미 여인이 직접 경험했던 일을 기록한 것이라기 보다는
상징성이 강한 극적 허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랑이 떠난 후 그녀가 실제로 솔로몬을 찾아나서고
그의 곁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을 볼 때.
본문은 결혼 이후 신랑에게 무관심해지고
처음의 열정적인 사랑이 식어져 갔던 그녀의 심적인 상태의 변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의미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인격적으로 결코 완전한 존재일 수 없는 인간 남녀의
사랑의 과정 속에서는 갈등과 오해가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마19:8)
②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며
상대방에게 자신을 이해할 것만을 요구할 때에는
심각한 갈등과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실로 진실한 사랑은 상대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희생적인 배려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고전7:3-4)
③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모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신랑의 신실한 사랑안에 거하려 하지 않고
나태함에 빠져 일시적인 안일을 추구했던 술람미 여인이 고통받는 모습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의 여정에서 벗어나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에 합당한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렘2:19; 호7;12)
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술람미 여인은 그토록 기다리던 님이 찾아왔는데도 맨발로 뛰어나가 맞기는커녕
오히려 ‘어찌 다시’라는 말을 반복하며 우물쭈물하였다.
이는 왕이 인도하시면 따라 달려가겠다고 했고(1:4),
또 날이 어둡기 전에 어서 돌아오라고 했던 처음의 모습(2:17)과 비교하면
너무나 달라진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어째서 이렇게 술람미 여인이 달라졌을까를 생각해 보면
이는 아마 결혼식을 통해 솔로몬의 정식 아내가 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점차 시간이 지나며 처음의 뜨거웠던 사랑이
자신도 모르게 어느 정도 식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현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표현을 빌면
술람미 여인에게 결혼에 대한 권태기의 초기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5절 이하는 그러한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지 못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땅의 결혼에 있어 권태(倦怠)기도 위험하지만
이 보다 더 위험한 것은 사실 영적인 권태기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우리들 간의 연합을 결혼에 비유한다면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이러한 영적 나태함이야말로 훨씬 위험하고 치명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육신의 결혼에 있어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할 경우
극단적인 경우에는 결혼 관계의 파경으로 끝나는 정도겠지만
영적으로 이러한 문제가 악화되면 신앙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영원한 구원마저 흔들리거나 상실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성도들의 영적 권태기의 증상을 몇 가지 소개하며
스스로 진단해 볼 것을 권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처음 예수 믿을 때에는 그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뛰고 뜨거웠는데
지금은 아무리 불러도 그저 덤덤할 뿐이다.
둘째, 초신자 때에는 교회에 나오면 모든 것이 신선했는데
지금은 때때로 지루하게 느껴진다.
셋째, 구역예배와 같은 모임 역시 처음에는 새로운 분들을
만나는 기쁨으로 가득했는데 이 역시 덤덤하거나 지루하다.
넷째, 처음에는 직분을 맡겨주면 기쁘고 영광스럽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귀찮은 생각이 먼저 든다.
다섯째, 교회의 모든 행사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여섯째, 기도나 말씀 공부가 싫어지고 예배시간에도 자꾸 시계를 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처음에 헌금 드릴 때는 너무 적은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은 아까운 생각이 슬며시 들곤 한다.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어떠한가? 사랑의 온도는 몇 도인가?
주님께서는 초대 교회 가운데 그래도 안정되고 성장했다고 자부했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씀하셨다.(계3:16)
이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임과 동시에
특히 신앙의 연륜이 오래고 직분이 높은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육신의 결혼이 그러하듯 신앙에 있어서도 그 연륜이 오랠수록
자칫하면 처음의 뜨거움을 잃고 미지근하게 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님을 보내고 말았던 술람미 여인을 통해,
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을 거울로 삼아
지금 자신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지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첫사랑이 식었으면 과거부터 지금까지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첫사랑을 회복하도록 힘쓰고(계2:4-5)
마음이 돌처럼 딱딱해졌다면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며(겔36:26)
세상의 염려나 탐심 등으로 믿음에 때가 끼었으면
이를 제거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한다.(마13:22)
그래서 처음 믿을 때의 감격과 신선한 기쁨을 회복하여 신혼부부처럼
뜨겁고 감미로운 사랑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천국 길을 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