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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친구가 아니면 적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던 순천진인이 막 지상에 내려서려는 찰나, 다시 청색혈마의 장풍이 몰려오자 그는 더 이상 고려할 여지가 없어 신속하게 일장을 내뻗쳐 상대방의 공세에 마주쳐 갔다. 펑! 쌍방 간의 장풍이 맞부딪치는 순간 순천진인의 안색이 창백하게 돌변하더니, 그는 매우 고통스러운 듯 몇 차례 비틀거리다가 한 걸음 후퇴하고 말았다. 청색혈마는 강맹한 장풍을 내뻗친 여세 때문에 몸을 비틀거리더니 번개같이 신속하게 비류신이 가버린 방향으로 질풍같이 쫓아갔다. 남의소녀는 아까 비류신이 사라져버린 직후부터 계속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무엇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청색혈마가 순천진인과 청풍명사를 격파시킨 일조차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땅이 꺼질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서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바보 같은 사나이… …” 이때 백미소녀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하였다. “호호호… 소저가 그처럼 무섭게 굴기 때문에 그가 놀라서 도망친 게 아닙니까.… …” 남의소녀는 그녀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앙칼지게 외쳤다. “나는 기어이 그가 처참하게 죽은 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말 테다… …” 백살소녀도 돌연 살기가 등등해지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따위 인간은 일찌감치 죽는 게 났다.” 남의소녀는 곧 백살소녀를 바라보며 탄식어린 소리로 물었다. “백살 언니가 말한 그는 누구를 가리키는 거지요?” “그야 물론 비류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언니는 내가 그를 도와 중원 무림을 온통 뒤집어 놓기를 바라는 거예요?” 일순 백살소녀의 눈언저리에 원망과 저주의 싸늘한 살기가 가득 어렸다. “물론이다. 나는 중원 무림이 쑥밭으로 변하여 시체가 산을 이루고 산야를 온통 피바다로 이루게 하고 말 테다.” 남의소녀는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파란 망사로 얼굴을 가린 채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어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처량해 보였다. 그녀는 원한 맺힌 소리로 중얼거렸다. “음… 나도 반드시 그렇게 되는 꼴을 보고야 말겠다.… …” 그녀는 백살소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갑시다.” 이때 적귀노파 청백구가 돌연 앙칼지게 외쳤다. “잠깐 멈춰라! 이 애가 깨어나기 전에 너희들은 꼼작도 해서는 안 된다.” 백살소녀가 청백구를 노려보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이곳에 남은 사람은 오직 당신 혼자 뿐 이거늘 감히 우리를 머무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알고 본 즉 장중의 군웅들은 모두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버리고 청백구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청백구는 상대방 세 사람 중 누구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이 그녀들의 손에 의해 죽게 된 마당에 아무리 상대방의 능력이 월등하다 한들 유유히 떠나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청백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 애가 소생할 수 있는지 솔직히 말해라.” 남의소녀가 냉랭하게 잘라 말했다. “안심해도 좋아요. 그녀는 결코 죽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들은 곧 총총히 걸음을 옮겨 청백구의 곁을 떠나갔다. 적귀노파 청백구는 흑백사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하며 울먹이는 소리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가련한 애야… 네가 그를 사모하고 있음을 이 어미는 다 안다.이 가련한 것아! 그런 애정이 바로 인생의 묘지라는 사실을 너는 왜 모르느냐?” 그녀는 이내 흑백사를 들어 안고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였다. 청백구의 슬픈 심정은 도저히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현재 그녀에게 가장 절실한 소원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하는 딸을 회생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한편 질풍처럼 내달려 소대천을 쫓고 있는 비류신. 그는 조금 전 청풍명사로부터 잔금섭혼신편의 채찍집을 소대천이 거대한 괴인으로 변장하여 탈취해 갔으리라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소대천을 뒤쫓아 순식간에 이십 리 길을 내달렸으나, 소대천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어서 내심 소대천의 절세적인 무공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비류신은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수중의 잔금섭혼신편을 내려다보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야월광명지신도 소대호가 이 신비한 채찍과 채찍집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절대로 남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말을 상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채찍집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싸늘한 광채가 폭사되었다. ‘나는 기어코 지령보에 가서 채찍집을 찾아내고 말겠다. 소대호 노 선배님이 잔금섭혼신편을 내게 줄 때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채찍 하나에 그분의 처절한 원한이 얽혀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안다.’ 비류신이 이처럼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적막한 황야에서 돌연 음산한 말소리가 들려 왔다. “비류신, 이번에야말로 너의 목숨은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일순 비류신의 안색이 돌변하더니,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쏜살같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말소리가 들려온 숲 쪽을 향해 비호같이 덮쳐가면서 강맹한 기세로 일장을 후려쳤다. 휙! 노도와 같은 장풍이 발출되어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우거진 숲을 갈라놓았다. 비류신은 자기의 일장으로 충분히 상대방을 격파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상대방이 나타나기만 하면 단번에 요절내버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강맹한 장풍에 의하여 두 갈래로 갈라진 수풀이 다시 원상태로 되었건만 숲속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지면 위에 내려선 비류신은 조심조심 풀 더미를 헤집고 들어가면서 수색을 하였다. 수풀은 매우 울창할 뿐 아니라 초목은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아 헤치고 나가기 매우 힘들었다. 비류신은 발소리를 죽여 가며 가만가만 숲을 헤치고 삼 장 정도 깊숙이 들어갔으나 여전히 사람의 종적이 보이지 않자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말소리는 분명히 이 숲속에서 들려 왔는데, 설마 내가 잘못 들어왔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또 이 수풀은 이렇게 울창하기 때문에 아무리 경공이 뛰어난 자라 해도 움직이기만 하면 소리가 날 것인 즉, 상대방이 어디 숨어있는지 도저히 알아낼 재간이 없으니 이거 난처하기 짝이 없구나.’ 바로 이때 별로 멀지 않은 좌측 수풀 속에서 미미한 인기척이 들려 왔다. 비류신은 지체 없이 허공으로 훌쩍 치솟아 오르더니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하여 비호같이 덮쳐갔다. 그러나 비류신은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사납게 외쳤다. “누군지 몰라도 떳떳하게 나타나라! 사내대장부가 비겁하게 숨어서 행동하다니, 수치스럽지도 않느냐?” 이어서 그는 흉맹한 기세로 쌍장을 휘둘러 노도와 같은 장풍을 계속 발출하였다. 비류신의 공력은 이미 최절정의 경지에 달한 터라 심후한 정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한차례씩 장을 휘두를 때마다 나뭇가지가 툭툭 분질러졌고 박살이 난 나뭇가지와 뿌리째 뽑힌 풀포기는 미친 듯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렇게 연속 이십여 장을 후려치자 방원 일 장 이내에 있는 나뭇가지와 풀포기가 모두 뽑혀 나가 넓은 공터로 변했다. 그리하여 시야가 확 트이기는 하였지만 적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비류신은 더욱 이상하고 어리둥절한 생각이 들어서 주위를 샅샅이 살피던 중 멀지 않은 곳에서 외마디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귀를 쫑긋하고 동정을 살폈다. 숨을 죽인 채 사방을 둘러보던 비류신은 애당초 자기가 들어섰던 풀 더미에서 한줄기 불꽃이 번쩍 치솟았다가 금방 꺼져버림을 발견하였다. 비류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적이 불을 질러 자기를 태워 죽이리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방의 그처럼 악랄한 수법은 비류신으로 하여금 크게 분노케 하였다. 그는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여 대갈일성하며 발끝으로 땅을 박차고 잽싸게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비호같이 날쌘 동작으로 덮쳐가면서 쌍장을 휘둘러 강맹하기 짝이 없는 장풍을 내뿜었다. 이때 싸늘한 비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바보 같은 녀석… 네놈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면 진작 불에 타죽게 해버릴 것을… …” 일순 비류신은 자신이 내뿜은 장풍이 일진의 부드러우면서도 반격의 탄력이 강한 경력에 부딪힌 것을 느끼고 섬뜩 놀랐다. 그는 맹렬하게 덮쳐 가던 기세를 늦추고 비스듬히 옆으로 내려섰다. 일순 그의 시야에 반백의 중년 부인 한 사람이 나타났다. 희끄무레한 별빛을 받아 한결 신비스러워 보이는 여인의 자태는 어딘지 모를 위엄이 서려 있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감히 범접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비류신의 장력이 의외로 강맹한 사실을 깨닫고 주름살 없는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놀라는 기색을 나타냈다. 홍의(紅衣)를 입은 중년부인 앞에서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군가 엎어져 있었는데 비류신은 그자가 바로 자기를 불러 태워 죽이려 하였으며, 홍의여인이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직감하였다. 홍의여인은 비류신을 유심히 바라본 다음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는 혹시 소대호의 제자가 아닌가?” 비류신은 섬뜩 놀랐다. 자기가 바로 소대호의 제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단번에 알아맞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류신이 입을 다문 채 일언반구도 대꾸하지 않자 더욱 싸늘하게 말하였다. “지금 자네 수중에 있는 잔금섭혼신편은 십팔 년 전 소대호의 손에 들어갔던 것인데 자네가 소대호의 제자가 아니라면 어찌 그 채찍을 가지고 있겠는가?” “그런 줄 알고 있다면 무엇 때문에 새삼스럽게 캐묻는 거요?” 홍의여민은 돌연 요염한 웃음을 지었다. 사람의 혼을 빼앗아 갈 정도로 요염한 웃음에는 사람의 혼을 빼앗아 갈 정도의 마력이 서려 있었다. 비류신은 그녀의 요염한 웃음 앞에서 심장의 피가 격렬히 뛰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홍의여인은 돌연 웃음을 멈추고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일진의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며 서서히 몸을 날려 비류신 곁으로 접근하였다. 비류신은 그녀의 신법이 어찌나 경쾌하고 절묘하던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므로 비류신은 재빨리 진기를 끌어올려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잔금섭혼신편을 움켜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홍의여인은 비류신의 정면 일 장쯤 떨어진 곳에 서서 청아하면서도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비류신, 그대는 어서 항복하여 순순히 죽음을 맞이할 각오나 하는 게 어떻겠는가?” 이처럼 안하무인격으로 오만불손한 말을 거침없이 하는 홍의여인 앞에서 순순히 명령대로 움직일 비류신이 아니었다. 그는 불쾌하기 짝이 없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날카롭게 외쳤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마치 왕후라도 된 기분으로 오만불손한 소리를 거침없이 지껄이는구려. 하나 내 앞에서 그런 허장성세는 절대로 통하지 않을 거요. 나는 아무리 잘난 인물 앞에서라도 지금껏 한 번도 굴복해 본 적 없소.” 홍의여인의 입언저리에 신비롭기 짝이 없는 요염한 웃음이 번졌다. “아주 박력이 있는 젊은이로군. 음… 내 제자가 그대에게 홀딱 반할만도 하군… …” 홍의여인이 이렇게 혼잣말처럼 뇌까리는 소리를 들은 비류신은 섬뜩 놀라며 재빨리 캐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소?” “무슨 말을 하든 상관할 바는 없어. 잔말 말고 어서 잔금섭혼신편이나 이리 주게.” 비류신은 냉소를 지은 채 눈썹을 치켜세우고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능력이 있다면 어디 한번 빼앗아 보시오. 내가 스스로 넘겨줄 수는 없소!” “뭐라고? 날더러 손을 쓰라니, 자네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은가?” 비류신은 상대방이 쟁쟁한 명성을 떨친 무림의 일류고수로서 모든 면에 있어 자기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토록 자기를 경멸하는 바람에 노발대발하여 버럭 언성을 높였다. “너무 사람을 얕보지 마시오! 나는 서슴지 않고 당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소!” 이렇게 외치며 그는 신속히 몸을 솟구쳐 앞으로 덮쳐 갔다. 그리고 왼손을 내뻗쳐 상대방의 가슴팍 현기요혈(玄機要穴)을 찔러갔다. 홍의여인은 어깨를 오싹 움츠리며 날렵하게 옆으로 석 자 가량 비켜났다. 비류신은 일 초가 실패로 돌아가자 더욱 더 노발대발하여 대갈일성하며 왼손을 휙 휘둘러 강맹한 장풍을 뿜어냄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잔금섭혼신편을 휘둘러 빈틈없는 속공을 가했다. 홍의여민은 날카로운 휘파람소리를 내면서 훌쩍 뛰어오르더니 넉 자 뒤로 물러섬으로써 비류신의 강맹한 장풍과 절묘한 편초(鞭招)를 피해냈다. 그녀는 돌연 싸늘한 어조로 말하였다. “그대가 만약 백 초 이내에 내게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나는 금후로 십팔 년 동안 폐관 (閉關)하여 강호의 일에 일체 참견하지 않겠네.” 너무도 자신만만한 그녀의 이 한마디에 비류신은 더 이상 공세를 취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기고 나서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사이이거늘 구태여 무공을 겨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내가 만일 백 초 이내에 당신에게 상해를 입힌다면 우리 사이에는 한 가지 원한이 생기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비류신은 상대방이 십팔 넌 동안 폐관생활을 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우자, 순간적으로 소대호가 십팔 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밀실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는 사실을 연상하고서 이렇게 너그럽게 말하였던 것이다. 한 여자에게 있어서 세월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만일 그 여자에게 상해를 입힘으로써 그녀가 약속대로 장장 십팔 년 동안을 고통 속에서 보내게 된다면 얼마나 처절한 원한이 뼈에 사무칠 것인가? 물론 세월의 중요성에 남녀의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가 남을 저주하게 되면 남자보다도 훨씬 처절한 것이다. 비류신은 그런 점을 감안하여 더 이상 공세를 취하지 않았는데 홍의여인은 돌연 가가일소 하였다. “호호홋… 다시 한 번 명백히 못을 박아 얘기하겠네. 자네가 만약 백 초 이내에 나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다면,자네를 도와 자네의 소원을 성취시켜준 다음 곧 폐관생활로 들어가겠네. 비류신은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자신만만한 말을 하자 새삼스럽게 경탄해마지 않으며 점잖게 물었다. “귀하의 존성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자네는 당분간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아 주게. 다만 자네가 백 초 이내에 나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다면 나는 하늘에 맹세코 약속을 이행하겠네.” “그럼 당신은 꼭 나와 일전을 벌여야겠다는 겁니까?” “물론이지. 나는 자네같이 새파란 젊은이를 데리고 필요 없는 말이나 늘어놓는 그런 시시한 사람이 아니야.” 비류신은 점점 더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정말 괴상하여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겠다. 진정으로 나의 일신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으면 같이 손을 써서 한바탕 겨루든지 아니면 양보를 하더라고 불과 이삼십 초 정도에 그쳐야 할 텐데,무려 백 초나 양보를 하겠다니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여자의 무공이 아무리 절대적이라 한들 나 혼자서 일방적으로 십성의 공력으로 속공을 퍼붓는다면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텐데도 내가 상해를 입히기만 하면 오히려 나를 도와주고 나서 십팔 년 간 폐관생활을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니, 나로서는 무한한 이익이지만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 음… …’ 비류신은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 밑져봐야 본전이니 굳이 사양할 필요 없다는 생각에 그녀의 조건대로 승낙하려다 말고 순간적으로 딴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나 비류신은 당당한 사나이 대장부로서 그따위 일방적인 이득을 가지고 무공을 펼칠 수는 없다. 더욱이 상대방은 여자가 아닌가.… …’ 비류신은 단단히 결심을 굳히고 낭랑한 어조로 자신의 태도를 밝혔다. “귀하가 꼭 나와 겨루기를 원한다면 각자 무공을 펼쳐 우열을 가리기로 합시다. 나는 일방적으로 유리한 양보를 받고 싶지 않소.” “물론 자네의 생각도 훌륭하네. 하나 일단 내가 제안한 대로 시험해 본 다음 다시 얘기하세. 자네의 실력이 인정되었을 때는 나도 적극적으로 같이 싸울 용의가 있으니까… …”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린 각자의 진공실학(眞功實學)으로써 우열을 가려 패배한 자는 정식으로 패배를 시인하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좋아, 만일 자네가 패배할 경우 잔금섭혼신편은 내 것이 될 줄 알게.” 비류신은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당신은 애당초 우리가 무공을 겨룸에 있어서 잔금섭혼신편을 걸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홍의여인은 살포시 웃어 보이며 냉랭하게 말하였다. “물론 일백 초를 시험하는 결과에 대하여 잔금섭혼신편을 걸지는 않겠지. 그러나 자네가 백 초 이내에 나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자네의 손에서 채찍을 빼앗는 것쯤은 무척 간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 당신은 백 초를 겨룬 뒤 이 채찍을 빼앗아 갈 생각을 했단 말이오?” “꼭 그렇다는 건 아니네. 그 문제는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세.” “좋소! 나는 이 채찍을 땅 위에 꽂아 두었다가 내가 백 초가 지난 후에도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지 못한다면 당신이 요구할 경우 두 말 않고 채찍을 바치겠소.” 비류신이 이렇게 말하면서 잔금섭혼신편을 땅바닥에 꽂자 홍의여인은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자네가 무궁무진한 잔금섭혼신편의 위력에 의지하지 않고 맨손으로 덤비겠다니,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백 초 이내에 나에게 상해를 입히지 못할지라도 다만 내 옷자락을 한 번 스치기만 해도 자네가 승리한 것으로 간주하겠네.” “아무렇게나 당신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럼 공격을 개시할 테니 조심하시오.” 비류신은 그녀가 무슨 까닭에 백 초나 양보를 하는지 이해를 못한 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잔금섭혼신편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일념 하에 더 이상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서뢰섬전(西雷閃電) 초식을 펼쳐 상대방의 가슴팍 요혈을 향해 강맹하기 짝이 없는 기세로 일장을 내뻗쳤다. 그 일 초는 소대호가 짧은 시일 동안 전수해 준 절기로써, 그는 순간적으로 그 일 초를 머리에 떠올려 오묘한 수법으로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홍의여인은 비류신의 공세가 의외로 매서운 것을 보고 흠칫 놀랐으나 결코 피하려 들지 않았다. 비류신은 상대방이 자신의 일장을 피하려 들지 않자 내심 무척 이상하게 여겼다. ‘아마도 이 여자는 상승(上乘)의 내공강기(內功?氣)를 연마한 것을 믿고 나의 장세가 미치게 되면 고의로 내가(內家)의 반동을 일으켜 나를 상하게 할 생각인 모양이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자 장세를 약간 늦추었으나 홍의여인은 여전히 꼼짝 않고 버티고 서서 상대방 장력이 미치기만 기다린 듯했다. 그러다 비류신의 짐작을 눈치를 챘음인지 돌연 가볍게 몸을 날려 한 자 밖으로 물러서서 비류신의 공격을 피해 냈다. 비류신은 일장이 실패로 돌아가자 왼발을 반 보 앞으로 내딛더니 아까 내뻗친 오른손을 거두어들이지 않은 채 왼손을 아래서부터 위로 쳐올리면서 노해박룡(怒海博龍) 초식을 뻗쳐 상대방 팔목 맥혈을 낚아채려고 매서운 공세를 퍼부었다. 홍의여인은 비류신의 제 일 초를 무난히 피하기는 하였지만 내심 크게 의아하였다. 비류신이 펼친 초식이 그토록 괴이할 줄 상상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소대호의 무공에 대하여 훤히 알고 있었으므로 비류신의 일신 무공도 당연히 소대호의 아류이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비류신이 펼친 두 초식은 그녀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괴초였다. 홍의여인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돌연 일진의 암경이 질풍처럼 덮침을 느낌과 동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춤 뒷걸음질 쳤다. 홍의여인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비류신이 이미 상승의 경지에 도달한 무형의 경기를 터득했다고 느꼈다. 비류신은 홍의여인이 후퇴하자 더욱 맹렬한 기세로 덮쳐가면서 계속해서 그녀의 맥문을 움켜쥐려고 일장을 내뻗쳤다. 홍의여인은 울컥 분노가 치밀었으나 상대방의 절세적인 무공을 얕볼 수 없는 터라 감히 경거망동을 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비류신의 무공이 무림칠절에 비하여 추호도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그녀는 몸을 엇비슷하게 진격하는 것도 같고 후퇴하는 듯한 묘한 신법을 펼치더니 갑자기 비류신에게 와락 덤벼드는 자세를 취하다 말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걸음이나 후퇴하였다. 비류신은 내심 무척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신법일까? 내가 만약 초식을 변화시켜 곧장 진격한다면 나는 상대방의 수법에 말려 들어가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 이런 생각 때문에 비류신은 단전의 진기를 하체로 집중시켜 몸을 저지하고 옆으로 홱 돌아섰다. 그는 재빨리 이 보 물러서서 포권을 한 채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노 선배님의 무공이 고강하여 후배는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였습니다. 더욱이 우리 사이엔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격투를 계속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홍의여인은 그의 말소리가 떨어지기 바쁘게 내쏘았다. “여러 소리할 필요 없어! 평범한 무림 인물들은 나와 겨루고 싶어도 내가 상대해주지 않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 실정인데, 내가 자네의 실력을 시험해 보고자 함은 그만큼 자네를 높이 평가한 까닭일세. 그러니 잔금섭혼신편을 고이 보존하고 싶다면 다시 공격을 계속하여 백 초를 채우게.” 비류신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섬칫 놀랐다. ‘이 여자가 정말로 잔금섭혼신편을 탈취하려 한다면 나는 도저히 보전할 재간이 없겠구나.… …’ 비류신은 속으로 은근히 이런 걱정을 하며 불안하게 여기면서 정색을 하고 말문을 열었다. “노 선배님께서 불초가 소대호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분이 이 채찍을 물려줄 때 어떤 당부를 했으리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채찍만은 여한한 일이 있더라도 타인에게 빼앗길 수 없습니다.” 홍의여인의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물론 빼앗기고 싶지 않은 심정은 잘 이해하네. 하나 자네의 일신 무공은 그처럼 자신만만한 소리를 할 처지가 못돼. 설사 내가 그 채찍을 빼앗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이렇게 비아냥거리듯 말하더니 갑자기 엉뚱한 질문을 했다. “자네는 소대호 밑에서 얼마 동안이나 무예를 익혔는가?” 비류신은 여전히 정색을 했다. “불과 삼 일 뿐이었지만, 나는 그분과 몇 십 년을 같이 지낸 것 이상으로 정이 들었습니다.” “그럼 자네는 소대호를 우연히 만나기 전에는 무공을 지니지 않았었나?” “무공의 초식은 약간 터득하고 있었지만 내공은 전혀 없었습니다.” 홍의여인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확실히 평범한 인물이 아니군. 자,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나머지 구십칠 초를 마저 공격하게. 어쩌면 훗날 우리는 뜻을 같이 하는 친구가 될 지도 모를 일이네.” “저따위 부족한 인간이 어찌 감히 노 선배님과 친구로 사귈 수 있겠습니까?” 홍의여인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친구가 아니라면 바로 적이 되는 법, 어쨌든 우리는 양자 중 어느 한 가지를 택해야 할 처지이거늘, 어서 공격을 하게!” “일단 격투를 벌이게 되면 쌍방 간에 어느 한쪽은 반드시 사상을 당하게 됩니다. 노 선배님 아니면 불초는 반드시 죽거나 부상을 당하게 될 거요.” “뭐라고? 자네 지금 나와 사생결단을 낼 작정인가?” “노 선배님의 무공은 고강하고 내력은 심후하기 때문에 불초는 사생결단의 각오를 가지고 격투에 임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더욱이 불초는 여한한 일이 있더라도 채찍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만약 채찍을 빼앗긴다면 깨끗이 죽어 버릴 각오 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는 소대호로부터 잔금섭혼신편을 물려받을 때 신묘한 보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되, 만약 잃어버릴 경우 자결을 하겠노라고 맹세한 바 있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