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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 세 번째 시간이자 이 주제에 대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비결을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이 정체성에 대한 설교를 들으시면서 느끼셨겠지만, 이 말씀을 마음속에 되새기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이 달라지고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첫째 시간, 둘째 시간을 지나며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부어주셨구나" 하고 고백하고 결단했음에도, 그런 삶과 결단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지, 하나님의 자녀이지, 빛과 소금이지, 그리스도의 대사이고, 나그네이고” 이렇게 정체성을 고백하고 알고 있음에도, 때로는 바르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내가 이렇게 살았는데, 정말 내가 위대한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고백해도 되는 걸까?” 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환경 속에서, 스스로에 대해 자괴감이 들 때도 정체성을 흔들리지 않고 유지하며 바른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정체성의 근거
어떤 사람들은 정체성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둡니다. “내가 이렇게 노력했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사는 것이다”하고, 자신의 노력·업적·평판 위에 정체성을 세우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비록 잘 살지 못한다고 해도, 내 정체성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 은혜로 부어주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생각은 후자입니다.
자기 안에서 정체성의 근거를 찾고, 자신의 노력과 공로 위에 세우면 삶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삶은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상황도 바뀌며 능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착한 사람이야,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사는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이 정체성의 근거가 된다면, 마음이 약해지고 미운 마음이 들 때 그때부터 정체성은 우리를 지켜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체성의 근거를 여러분의 삶에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다, 거룩한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사람이고 중보 기도자다” 이렇게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에베소서 1:5~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예정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는 표현은 단순한 법적 관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입양하사 자녀로서의 온전하고 영원한 신분과 권리를 주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아들됨(sonship)’은 당시 사회에서 아들이 받는 법적·영원한 지위, 상속권, 가족으로서의 소속감까지 포함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정체성을 고백할 때 마음에 품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아들이 되는 것은 그에 맞는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부어주신 것이다.”라고 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로 자녀가 되었고, 자녀의 권세를 받았고, 거룩한 제사장이요 중보 기도자이며, 거룩한 사람이요 택하신 족속이고, 그리스도의 대사이며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되새긴다면, 온전하게 또는 바르게 살지 못할 때라도 우리는 당당히 나의 됨됨이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라도 이 진리로 스스로를 일깨우고, 이 특권과 은혜와 권세가 주어졌음을 주장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의의 원천
내가 지켜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의를 입혀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우리는 “내가 의롭다”고 고백할 때 더 큰 힘과 원동력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의로움이 흔들리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용기도, 기도할 용기도, 떳떳함도 사라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조차 자연스럽지 못하게 됩니다. 의로움이 결박당할 때 신앙생활이라는 삶의 발에 족쇄가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의가 어디서 오는지 다시 한번 선명히 기억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내 의는 율법에서도 행위에서도 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의롭습니까?”라는 질문에 마음속에 두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최근 잘 못 살았으니 나는 의롭지 못하다”라는 생각과, 비록 “내 모습은 그렇지 못하지만 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개정)
“내가 의롭다”는 것은 내 행실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의롭기에 나는 의로운 자녀다” 이것이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죄 가운데 태어나 살았음에도 예수님께서 내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나의 연약한 것을 짊어지셨고 내가 예수님께서 나의 연약함과 나의 죄를 나를 대신하여 짊어지신 것을 믿기 때문에”, 나는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의를 입혀주셨다.”고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의 원천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정체성에 부끄럽지 않고 당당히 고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셋째, 힘의 원천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정체성들을 우리가 고백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그 힘이 어디에서 옵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노력하고 참고 수고했기 때문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었는데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살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힘의 근거는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삼손의 예를 보시기 바랍니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삿 16:17, 개정)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삿 16:19, 개정)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 16:20, 개정)
머리가 길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큰 힘을 쓸 수 있었지만, 머리가 잘리자 아무 힘도 쓸 수 없었습니다. 삼손의 힘의 원천은 그의 머리에도 그 자신에게도 아니었고,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힘의 원천입니다.
이런 삼손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흔히 보는 전구를 생각나게 합니다.
전구가 스스로 "나는 빛날 수 있다"고 자랑합니까? 아닙니다. 전기가 연결될 때 빛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록 나의 힘은 약해도 그분의 능력이 흘러나옵니다. 정체성을 지키는 힘은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주님께서 내 손에 쥐여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이 바닥나는 그 순간이 바로 그분의 능력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넷째, 변화의 방식
변화는 나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변화시키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을 의지하는 노력은 한계에 다다를 뿐 완전히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3:18의 말씀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봄에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변화의 근거는 오직 주의 영, 성령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제 늦은 시간, 할 일이 많고 마음이 복잡했지만 모든 일을 제쳐두고 강단에 나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 시간을 보냈습니다.
초대교회 제자들도 예수님을 참된 구세주로 고백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했지만, 힘이 다하고 위협이 느껴지며 마음이 약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모여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4:29~31
(행 4:29, 개정)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행 4:30, 개정)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행 4:31, 개정)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주님께서 그들의 위협을 보아주시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결과로 모인 곳이 진동하고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져서 두려움 없이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사랑받는 이유
우리가 이런 특권과 사랑을 받는 이유는 내가 잘나서, 지혜로워서,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못나고 바르게 살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개정)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받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거룩한 제사장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때로는 행실이 우리를 공격하고, 마귀가 채찍질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럽게 만들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붙잡아야 할 진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내가 받은 은혜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그저 퍼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비록 온전하지 못해도 예수님은 나의 임금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대사이고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못났지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여섯째, 삶의 목적과 방향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진 이유는 내가 정한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개정)
새로운 피조물답지 않은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답지 않은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그 정체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거룩한 것을 주장하는 것은, 내 본분이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자리로, 의로운 자녀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제사장으로 부르신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중보하고,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구약 시대 레위인이 되는 것이 큰 특권이었듯, 이제 우리는 더욱 높은 직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이 정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마음의 결단과 각오가 여러분 안에 새겨져 있습니까? 비록 아직 온전히 체험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기록된 말씀을 믿으며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하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3주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입니다.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내 노력이 아닙니다. 내 잘 살았기 때문이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고, 돌보심이었고, 축복이었으며, 하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분과 권세를 주장할 때 여러분 자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삶과 특권과 권세를 주셨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맞다. 새로운 피조물이 맞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그 근거를 하나님께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권세와 신분을 주장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은 점점 무르익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진리를 늘 되새기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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