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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산과 맑은 물이 생각나는 계절. 산 높고 골 깊은 땅이 그립다. 매년 이즈음이 되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런 땅으로 찾아갈 꿈에 젖어든다. 여름에 더욱 소중해지는 그런 땅은 어디일까. 아마도 대부분 강원도를 제일 먼저 떠올리리라.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장쾌한 산줄기에 등 기댄 고을들도 제각기 아름다운 자태로 여름 나그네들에게 손짓하겠지. 또 백두대간에서 가지쳐 흐르는 여러 정맥들은 어떤가. 반으로 동강 난 이 땅에 그나마 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 한북정맥과 북한강이 어우러진 곳에 자리잡은 가평은 산천이 맑고 깨끗해 수도권 주민들의 휴식처로 애용되고 있는 고을이다.
▲ 가평천은 조종천과 더불어 가평 주민들의 젖줄 역할을 하면서 수도권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도 한다
지방 출신인 나그네는 학창시절 각종 매체에서 소개하는 경춘가도의 명성을 귀따갑게 들었다. 그래서 내심 ‘언젠가 한번 꼭 가봐야지’ 하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다 서울에 직장을 잡은 후 부푼 가슴으로 경춘가도를 달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 경춘가도라는 게 대전서 공주 가는 길에 있는 금강변 도로에 비해 그다지 돋보이는 것도 없었고, 낭만을 가득 싣고 달린다는 경춘선 열차는 서대전에서 강경으로 이어지는 호남선 비둘기호보다 크게 낭만적이지도 않아 서울 사람들의 허풍에 웃음이 다 나왔다.
그러나, 서울서 10여 년의 세월을 지낸 지금 가끔 경춘가도를 달리거나 경춘선을 타고 가다 가평 고을에서 북한강을 만나게 되면 가슴이 탁 트이며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그렇게 시원하고 후련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텐트 둘러매고 대성리 간이역에서 내린 적도 있고, 북한강변 민박집에서 두꺼비 쓰러트려 가며 밤새도록 노래를 부른 적도 있으니 이만하면 10년 세월에 ‘서울깍쟁이’가 다 된 것인가.
경춘가도를 달리다 청평에 도달하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신청평대교를 건너면 가평의 6개 읍면 중에서 유일하게 ‘강남’에 있는 설악면(雪岳面)이다. 고을 이름이 남한 최고의 명산으로 꼽히는 강원도 설악산(雪嶽山·1,708m)과 한자도 똑같은 이 고을은 화야산(755m)과 유명산(864m)을 잇는 산줄기를 경계로 경기도 양평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원래는 양평에 속해 있던 고을인데, 1942년 청평수력발전소가 준공될 당시 옥토를 이루었던 북한강변의 남면이 물에 잠기자 이를 폐지하면서 가평에 편입시킨 것이다.
▲ 1.청평호반에 자리한 번지점프장도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곳으로 꼽힌다. 2.청평호는 온갖 수상레포츠의 천국이다. 수상스키어가 청평호반의 맑은 물을 가르고 있다.
후세에 증보될 <가평군지>엔 ‘21세기의 설악은 레포츠의 천국이었다’는 사실이 첨부될 테지만, 이렇게 노는 데만 정신 팔아버리면 설악의 진면목을 놓치기 쉽다. 지난 세기에 발간된 <가평군지> 같은 자료를 보면 설악은 옛부터 문향(文鄕)으로 이름 높은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선촌리 장돌 마을에 있는 경현단(景賢壇)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로서 이름 높았던 12유현(조광조 김식 남경언 김육 김창흡 이제신 박세호 이원충 남도진 이항로 김평묵 유중교)을 모신 제단이다. 1661년(조선 현종 2년)에 조광조와 김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창건된 미원서원이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자, 나중에 지방 유림들이 서원터에 단을 설치하고 돌로 만든 신주를 12개 세워 놓았다. 그리고 1895년 을미의병 당시엔 이 지역 출신인 이범구 김춘수 등의 의병장이 나라를 위해 일어섰고, 1919년 가평의 만세운동을 이끈 사람 중 하나인 이규봉도 홍천과의 경계인 위곡리 출신이다.
그리고, 종교인으로서 참사랑을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최일도 목사의 다일공동체 본원(설곡리)과 수련원(묵안리)이 이곳 설악에 있으니 가슴이 더욱 찡하다. 최 목사가 아름다운 사랑을 펼치는 계기가 된 다일공동체의 첫번째 자리는 경춘선 열차가 떠나는 청량리역. 그곳서 헐벗고 힘없는 노숙자들을 온몸으로 돌보며 ‘밥 퍼주는 아저씨’로 더 잘 알려진 그는 그 따뜻한 사랑을 경춘선에 싣고 이곳 설곡천 골짜기로 들어와 두번째 자리로 삼았다.
1995년에 펴낸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그는 당시 인세 3억 중 절반을 다일공동체에, 나머지를 북한 동포 돕기에 희사했다고 한다. 또 1998년엔 천사헌금 30억 원을 모금해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다일천사병원도 건립했다.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만 위하는 그의 사랑이 가없이 높기만 하다. 그래서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설악이다.
▲ 논일을 하고 있는 주민. 가평천이든 조종천이든 물가에 자리한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민박을 치지, 주말이 지나고 나면 이들도 평범한 농촌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게다가 이곳은 웬만한 수목원에선 명함을 내밀기 쑥스러울 정도의 규모를 갖춘 식물원도 품고 있다. 다른 지역의 휴양림들과 달리 오토캠핑장을 이용할 때 입장료·주차료·데크 사용료·야영장 사용료 등 모든 항목을 지불해야 하지만, 식물원 구경만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절대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뭇가지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껴드는 숲, 새소리에 깨어나는 아침은 참 행복하다. 고양이 세수를 한 다음 맑은 계류에 발도 담가보고, 수목원에서 큰원추리 물봉선 같은 야생화를 구경하며 본전을 충분히 뽑는다.
유명산 자연휴양림에서 청평으로 가려면 온 길을 되짚어 나가서 다시 북한강을 건너야 한다. 청평에서 가평 읍내까지 경춘국도 구간은 아쉽게도 강변도로가 아니다. 청평은 행정단위가 비록 리(里)지만, 청평댐과 일찍이 국민관광지로 지정된 청평유원지로 인해 외지 사람들에겐 군청이 있는 가평읍보다 더 익숙한 고을이다.
▲ 1.잠곡서원지 부근의 조종천 하류 물가에서 한 낚시꾼이 피라미를 잡고 있다. 2.수도권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학창생활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경춘선 열차가 가평천에 걸린 철교를 지나고 있다. 3.유명산 자연휴양림 오토캠핑장. 1989년 들어선 이 휴양림은 수도권 가족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림 중 하나로 꼽힌다.
잠곡서원터는 안전유원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가평의 여느 유적지처럼 잠곡서원터는 사실 그다지 볼 건 없다. 안전유원지를 찾는 이들도 서원터 비석 따위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잠곡서원에 배향되었던 잠곡 김육(金堉·1580-165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동법(大同法) 시행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조선 중후기에 만들어진 대동법은 각지의 특산물로 거두던 세금을 쌀·베·돈으로 대신하게 하되,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내게 하는 조세제도라는 사실을 학창시절의 기억에서 끄집어낸다.
▲ 연인산 동남쪽으로 흐르는 계곡에 자리한 용추구곡은 어디에 나놓아도 빠지지 않을 경관을 자랑한다.
어쨌든 이 일로 1611년 성균관에서 쫓겨난 그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10여 년간 이 곳 청평에서 은거하며 스스로 농사 짓고 숯을 구워 팔며 백성들의 애환을 몸소 체험했다. 후에 대동법 시행을 줄기차게 주장한 민본사상의 밑거름이 여기서 싹텄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잠곡은 대동법의 효과를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호서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자 마을 백성들은 밭에서 춤추고 삽살개도 아전을 향해 짓지 않았다.”
국민 생활은 나 몰라라 하고 권력을 잡고 누리려는 데만 정신 팔린 요즘의 정치판을 보면 비록 잡초 무성한 서원터지만 그 가치가 더 소중해진다. 서원터를 살피던 대학생 연인이 한 마디 한다.
“오빠, 정치인들 여름 휴가를 안전유원지로 오라고 건의해봐야겠네.”
“소용없어. 아마 밤새도록 술만 먹고 서로 싸움질만 할걸?”
수백 년 전, 평생 백성을 위해 애쓴 정치가를 잠곡서원터에서 만났으면, 이젠 아흔아홉 번의 손길로 천 년의 전통을 이어가는 장인(匠人)을 뵐 차례다. 우리나라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수많은 문화유산이 있지만, 그중 한지(韓紙)는 전설처럼 통한다. 종이를 여러 겹 붙이면 화살도 못 뚫어 군사들 갑옷으로도 사용했으며, 천 년 세월에도 삭지 않고 썩지도 않은 뛰어난 지질의 종이다.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 불국사 석가탑에서 1300여 년의 잠에서 깨어나 문득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600여 년만에 프랑스에서 세계에 명함을 내밀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모두 한지의 힘이다. 예로부터 한지를 일컬어 이렇게 표현했다.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 한지는 천 년이요, 비단은 오백 년이라.
한지의 독특한 내음이 은은하게 번져오는 ‘장지방(張紙房)’은 장용훈(70·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6호) 장인의 공방이다. 전남 장성과 전북 전주·임실 등지에서 조부 장경순씨, 부친 장세권씨에 이어 3대에 걸쳐 한지를 만들던 장인의 일가가 가평으로 옮겨와 자리를 잡은 건 1977년.
“옛날부터 전국의 내로라하는 지장(紙匠)들도 가평 닥을 으뜸으로 여겼지요.”
장용훈 장인은 가평에서 나는 닥나무 자랑부터 한다. 우수한 품질의 고려지를 만들어 멀리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전주의 지장들도 이곳 가평 닥으로 한지를 만들었다고 덧붙인다. 장인이 가평으로 처음 왔을 땐 수십 농가에서 가내수공업으로 한지를 뜨고 있었다. 대부분 개울가에 지통을 놓고 창호지 만드는 수준이었지만, 닥나무 질이 워낙 좋아 수도권에서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개량주택이 늘어나면서 한지 수요가 줄어들자 그들은 하나둘 가평을 떠나갔다.
▲ 1.아흔아홉 번의 손길로 태어난 한지에 천연 염색을 하고 있는 장용훈 장인. 2.장지방 한쪽에서 한지를 말리고 있다. 3.한지의 원료인 닥나무 껍질. 가평에서 나는 닥나무가 가장 질이 좋다고 한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한지의 우수함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고, 장인이 만든 한지도 품질이 좋다고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화가들의 작품지나 고서(古書)를 보수하는 데 쓰이는 용도로 비싸게 팔려나갔다. 또 현해탄 건너 일본에서도 주문이 들어왔으며, 미국 유럽 등에도 수출하고 있다. 현재 연간 매출액이 1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요즘 장인은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한지가 대우를 받아서가 아니다. 큰아들 성우씨(37)는 한지로 만든 지승공예가로도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지난해 제대한 작은아들도 가업을 잇기 위해 장지방에 붙어살며 밤낮으로 열심히 뛰고 있으니 뒤가 든든한 것이다. 장인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게 남길 것은 종이밖에 없다. 너도 종이만은 남겨라.” 가업을 이어가는 장인의 집안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
장인의 안주인께서 집에 갔다 심으라며 건네주는 꽈리 몇 포기를 받아들고 다시 경춘가도로 붙는다. 가평천을 보기 위해서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로 이름 높은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는 가평 군수를 지냈던 인연이 있다. 가평의 안산으로서 읍내 전망이 뛰어난 보납산(寶納山·330m)은 한석봉이 기우제를 지낼 때 쓴 축문이 산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다 해서 지어진 이름. 가평의 유구한 역사를 모두 지켜본 보납산에서 가평을 굽어본 뒤 가평천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여러 개의 기념비가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모두 6·25전쟁이 남긴 흔적이다.
춘계공세! 전쟁사에 관심이 없는 이라도 6·25전쟁 관련 기록물이나 영화 등에서 들어봤을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시킨 곳이 바로 가평천이다. 한국전쟁사는, 태평양을 건너온 이국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중공군의 거센 춘계공세를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라 적고 있다.
▲ 1.호주 참전 기념비. 2.뉴질랜드 기념비. 3.캐나다 참전 기념비. 6·25전쟁 중 가평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캐나다 참전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 4.아침고요원예수목원 원장인 한상경교수. 가평의 산수가 수도권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예찬한다. 5.조종천 맑은 물에서 노니는 마을 아이들의 미소가 해맑다. 6.조선시대 숭명배청 사상의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조종암. 7.무우폭포 상단 바위엔 한자로 민영환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사람들은 흔히 '민영환 바위'라 한다.
이런 사연을 안고 있는 가평천의 북면 지역은 산도 높고 골도 깊다. 특히 중상류 지역의 산하는 강원도의 그것과 너무 흡사하다.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화악산(1,468m)이 여기에 있고, 궁예가 말년에 도망 다니다 이 산에 이르러 잃어버린 나라를 망연히 바라보았다는 전설이 서린 한북정맥의 국망봉(1,168m), 그리고 명지산(1,250m) 촉대봉(1,125m) 등 가평천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산들이 모두 1,000m를 훌쩍 넘는다. 영월이나 정선, 평창 같은 강원도 깊은 산골에 견주어도 결코 빠지지 않는 오지인 것이다.
이 골짜기에 묻혀 사는 이들은 산에 불 놓아 밭을 일궈 옥수수와 감자 부쳐먹고, 약초 캐고, 나물을 뜯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강원도 화전민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1973년 무렵 정부가 화전정리사업을 시작하면서 하나둘 다른 곳으로 떠나기 시작했고, 이후 이곳은 더욱 인적 드문 산골이 되었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물 맑고 공기 깨끗한 이곳이 피서지로 이름 날리며 사람들의 발길이 다시 늘어났다. 수십 년간 적목리에서 살았다는 한 주민은 괜히 땅값이 오르고 동네가 어수선해진 게 못마땅한지 언성을 높인다.
“길가 웬만한 데는 보통 평당 50만 원을 호가하는데, 이게 다 서울 사람들이 몰려들어와 땅값을 올려놓았기 때문이죠.”
하긴 서울서 2시간 거리에 이렇게 산수 좋은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외지인들이 많이 드나들며 마을 분위기가 조금 흐려지긴 했어도 이곳에선 아직 산골의 순박한 인심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맛 좋은 송이버섯 자라는 깊은 산속엔 독버섯도 피어나는 법. 이 깊은 산골은 한때 좋지 않은 일로 전 국민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바로 일제시대 사이비종교의 대명사요, 연쇄살인의 악명을 떨쳤던 백백교(白白敎)가 가평천 최상류의 깊고 깊은 조무락골을 근거 삼아 활동했던 것이다. 적목리 토박이 노인들은 당시 얘기를 꺼리면서도 말문이 트이면 백백교에 얽힌 이런저런 일화를 들려준다.
자료는 백백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선 후기 철종 때 최제우(崔濟愚)가 유불선 삼도(三道)의 교리를 골고루 받아들여 창시한 동학에서 많은 유사종교가 파생되었다. 1923년 차병간이 가평에서 광명세계를 실현한다면서 포교를 시작한 백백교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뚜렷한 교의(敎義)나 깊은 사상적 근거를 갖지 못한 백백교는 사이비종교로서 타락의 길을 걸었다.
나중에 전해룡(全海龍)이 교주가 되면서 백백교는 범죄단체가 되었다. 그는 우매한 민중을 현혹하여 그들의 재물을 빼앗고, 다른 여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여신도와 성행위를 하면서도 신(神)이 하는 일이라 속이는 변태성욕자였다. 게다가 자신의 범죄행위가 드러나자 비밀누설을 막기 위해 의심스런 자들을 계곡 깊숙이 끌고 들어가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이런 악행은 자신의 재산과 딸까지 바쳤던 신자의 아들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1937년 당시 백백교 간부 150여 명이 검거되었고, 경찰에 쫓긴 전해룡은 양평의 도일봉에서 자살함으로써 끝장이 났다. 당시 살해된 신도의 숫자는 무려 300여 명이라 한다. 전해룡의 두개골은 현재 범죄과학연구소에 범죄형 두개골의 표본으로 보관되어 있다.
깊은 산골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사연을 새기며 가평천 상류의 적목용소를 감상하고 도마치 고갯길을 오른다. 가평군 북면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을 잇는 이 고갯길은 ‘도와 도를 넘나드는 높은 고개’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예전 이곳 적목리 주민들은 먼 가평장보다는 가까운 사내면의 사창리로 장을 보러 다녔다. 혼사도 이 고갯길을 따라 더 많이 이루어졌던 건 당연지사. 맛 좋은 약수가 샘솟는 도마치 고갯마루엔 잣막걸리, 산채 등 산골 정취의 맛을 볼 수 있는 간이식당이 너댓 군데 자리하고 있다.
잣먹걸리 대신 아쉬우나마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이고 오던 길을 부지런히 되짚어 내려간다. 가평천과 헤어지는 게 아쉽지만, 그에 뒤지지 않는 조종천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니 가슴이 뛴다. 가평천과 더불어 가평의 양대 젖줄로 꼽히는 조종천 줄기엔 유적들이 많다. 우선 조종천 중류의 현리는 옛날 현(縣)이 있던 고을답게, 그 둘레로 ‘경기의 금강’이라는 운악산에 기댄 현등사, 숭명배청의 시대사를 살필 수 있는 조종암, 조선 4대 문장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월사 이정구의 묘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 1.축령산 기삵에 자리한 아침고요원예수목원의 여름 풍경. 2.가평천 최상류의 적목용소는 가평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 절경지. 용소폭포 부근의 계곡은 자연보호구역에 속해 출입을 막고 있다. 3.가평은 밤 농장도 많은 고을이다. 밤이 익어가는 가을이 되면 많은 농장들이 일정액의 입장료를 받고 밥을 따가게 하는 행사를 벌인다. 4.가평의 잣 생산량은 전국 생산량의 40%를 차지한다. 5.조종천에 걸린 돌다리. 6.현리에서 포천으로 넘어가는 37번 국도변엔 포도밭이 즐비하다. 초가을에 이 도로를 달리면 달짝지근한 포도 내음이 발길을 붙든다.
▲ 축령산 기슭의 잣나무숲. '축령백림'이라 해서 가평팔경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축령백림을 보기 위해 골짜기를 오르다 갈림길에서 마을 노인에게 묻는다.
“잣나무 많은 데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됩니까?”
“여긴 사방천지가 다 잣나문데, 가긴 어딜 가.”
둘러보니 앞산도 뒷산도 뜰 앞도 모두 잣나무다.
“잣나문 뭐 하러 찾아?”
“예? 저, 그게 아니라, 가평엔 언제부터 잣나무가 많았나요.”
“아주 옛날부터지. 그런데, 박대통령 시절에 조림사업을 할 때 잣나무를 많이 심으면서 가평이 잣으로 아주 유명한 고장이 됐어.”
가평의 전체 조림지 70% 이상이 잣나무숲이라는 통계가 있다. 조금 멋있게 보일 뿐 별 쓸모 없는 수종으로 알려진 낙엽송을 많이 심은 다른 고을보다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래도 걱정은 있는 모양이다.
“요즘은 별 재미없어. 중국산 잣 때문에….”
중국산 농산물 때문에 밭 갈아엎는다는 뉴스들이 생각나 묻는다.
“그럼 잣을 안 따나요?”
“아니, 팔구월 이면 수확을 하지. 왜? 잣 따러 오려고?”
싱긋 웃으며 잣나무를 올려다본다. 키가 크기도 크다. ‘설악산 화채릉 잣나무는 키가 작아 따기도 쉽던데….’
노인이 말을 잇는다.
“일손도 부족한데 그 때 와서 잣 좀 따지 그래.”
나그네는 하루 품삯이 얼마쯤 되냐고 묻지도 못한 채 “예-” 하는 대답을 뒤로하고 서둘러 축령백림을 빠져나온다.
조종천 상류의 운악산(雲岳山·936m)은 ‘경기의 소금강’이라는 별칭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암봉들의 기세가 제법이다. 입구에 도착해 먼저 삼충단(三忠壇)에 들른다. 을사조약 파기를 외치며 순절한 조병세·민영환·최익현 세 분을 모신 이곳에서 나라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최근 일본은 상대방의 나라에서 공격 징후가 포착되면 선제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유사법제안’을 통과시켰으니,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용히 있는데 괜히 길 빌려달라며 총칼 들이밀던 나라가 일본 아닌가.
그래도, 사하촌의 시원한 잣막걸리 한 잔 쭉 들이켜고 현등사계곡을 걸어 오르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참나무 그늘 나오면 땀 식히고, 계류 만나면 두 손 담그니 세상에 무엇이 부러울까. 무우폭포 물길은 예와 다름없이 시원한데, 민영환이 시름에 잠겨 썼다는 바위의 글씨는 100년 후손을 다시 긴장하게 만든다.
청아한 독경소리에 끌려 발품을 팔며 녹음의 굽잇길을 돌면 높다란 축대 위에 터를 잡은 현등사(懸燈寺)가 문득 눈앞에 나타난다. 아담하되 가평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절집이다. 신라 법흥왕 때, 불법의 진수를 전하기 위해 해 뜨는 동쪽으로 목숨 걸고 찾아온 인도승 마라하미(摩羅訶彌)를 위해 왕이 지어주었다. 마라하미는 여기서 부처의 말씀을 전하고 제자를 길러내었을 터인데, 그 후 어쩐 일인지 폐사가 되고 말았다.
신라 말엔 도선국사가 이곳을 찾는다. 개경이 새 나라의 도읍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개경에 세 곳에 절집을 지었으나, 풍수상 동쪽의 기가 부족해 이를 보완할 곳을 찾다가 현등사를 중창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폐사가 된 이 곳으로 들어온 이는 고려 때의 보조국사. 산중턱에서 빛이 나오는 석등을 발견해 다시 절을 지었는데, 그 때 절집에 현등사라는 현판을 달았다. 현등(懸燈)은 ‘부처의 가르침을 드러낸다’는 뜻도 담고 있다.
현등사 석탑은 본래 오층석탑이었지만 2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없어져 마치 ‘사층석탑’처럼 보인다. 현등사가 결코 순탄치 않은 내력을 간직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석탑 앞에서 보면 용문산에서 유명산으로 이어지는 ‘한중기맥’이 한눈에 들고, 그 사이로 아름다운 가평 산하가 펼쳐진다. 운악산 정수리에 올라 운악망경(雲岳望景)의 정취를 한껏 누리고 싶지만, 가평서 ‘山 욕심’ 부리면 한이 없다. 다시 계곡 물길을 따라 내려가 물 맑은 조종천으로 흘러든다.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이 단 한 점도 없는 가평. 허나 반딧불이가 춤추는 조종천과 열목어 노니는 가평천은 자연환경 자체가 국보급이다. 그래서 각각 두 물줄기의 상류를 이루는 청계산과 명지산 부근은 수도권 유일의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나그네가 며칠 동안 돌아 다녀본 결과로는 실망이 더 컸다. 수해복구작업을 하면서 무조건 콘크리트로 벽을 쌓는 것도 문제였고, 물고기의 무자비한 남획은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였다. 조종천이나 가평천에서 만난 천렵꾼들은 견지낚시인 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투망질을 하고 있었다. 지난 여름에 이곳을 환경탐사한 한 단체는 배터리로 물고기를 잡은 흔적도 상류에서 찾아냈다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아름다운 산수와 깨끗한 환경을 지닌 가평이 후세까지도 진정으로 사랑 받고 아름다운 고을로 남아 있으려면, 국도변에서 지나가는 차 세워놓고 돈 받을 궁리나 할 게 아니라, 하루 빨리 유원지마다 ‘투망금지’ ‘배터리사용 금지’ 팻말을 붙이고, 마을청년회도 손수 모범을 보임과 동시에 자체 감시에 나서야 한다. 투망질이나 배터리 사용 같은 야만적인 천렵 행태가 남아있는 한 “가평의 자연이 먼 훗날 우리 후손들에게도 최대의 자산이 될 것을 확신한다”는 가평군수의 인사말도 한낱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청정 자연의 상징인 반딧불이는 결코 아무 데서나 깜빡이지 않기 때문이다.
글·사진 민병준 mbjbu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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