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2. 마가복음 [Mark] 3장 29절
[개역]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인간의 성정으로 오신 주님의 신성을 반대해서 저지르는 잘못과 말씀의 신성함을 반대하는 악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런 참람한 악보다 다소 가벼운 신성 모독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오용하는 것 특히 불필요한 맹세나 내용 없는 잡담, 거짓된 주장, 남을 저주하거나 악의적인 것에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들이 포함됩니다. 그 까닭은 이것들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며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은 교회에서 거룩한 말씀으로 가르쳐지며 예배드리는 모든 것들 즉 말씀에 의해 기도하고 예배드려지는 모든 것들을 집합적으로 의미합니다.
신성 모독에는 경우에 따라서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는데 이중 가장 악한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행위로써 말씀에서 나온 신앙의 진리와 인애의 선을 알며 어느 정도 그것을 시인하는 사람이 행하는 모독을 뜻합니다.(아래의 6번과 7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을 알지도 못하고 접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경건함을 잃고 그것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모독 등은 그런 정도에까지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신성모독을 다 합하면 다음의 일곱 가지에 해당됩니다.
1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것을 뜻한다. 말씀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요 거룩한 것이기에 그 안에 있는 모든 표현은 밑바탕에 신적인 것을 내포하고 천국과의 교감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말씀 속에 있는 이름이나 표현들을 들추어내어 부적당하고 더러운 언사와 뒤섞는 언행은 신성모독에 해당한다.
2 신적 진리를 아는 것 뿐 아니라 시인까지 하면서도 이를 거슬려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범한다. 지식으로 알기만 하는 사람이 범하는 신성모독은 가벼우나 이를 시인까지 한 사람이 돌이켜 그것을 범하는 모독은 더욱 가혹하다. 이해하는 상태에만 머무르는 것은 의지 자체와는 결합되지 않아 가볍지만 시인하는 것은 의지와 결합된 것이기에 더욱 중한데 이는 일단 시인한 진리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 정도만큼의 모독이 가해지는 것이다. 이를 주님은 이렇게 표현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눅 12:47) 또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그러나 피상적 진리를 시인하는 상태와 순수 진리를 시인하는 상태에서 범하는 신성모독은 다르다. 순수 진리를 시인하고도 그대로 살지 아니한 사람은 영계에서는 그 목소리며 언어에 생명의 빛과 볕이 아주 없는 듯 보인다.
3 말씀의 글자의 뜻을 악과 그릇된 원리를 굳히는데 사용한 사람들이 범한다. 말씀으로 악한 애정을 부채질하는 사람은 신적 선에 횡포를 가하는 것이며(선의 섞음질) 말씀으로 거짓 원리를 굳히는 사람은 신적 진리에 폭거를 가하는 것이 됨으로(진리의 위화) 이들 역시 신성모독에 해당된다.
4 입술로는 경건하고 거룩한 것을 말하고 음성과 몸짓으로는 이것을 아쉬워하는 척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를 믿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범한다. 이들은 위선자요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에게서는 사후 모든 진리와 선을 거두어가고 밖의 어두운 곳에 유배시킨다.
5 신성을 그들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들이 범한다. 즉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과 진리를 인간 고유의 총명으로 돌리는 자들이 범한다, 이사야 14장에 있는 계명성과 계시록 17장의 붉은 빛 짐승을 탄 음녀는 이들을 뜻한다. 바빌론과 갈데아 또한 이와 같이 거룩한 것을 그들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바빌론은 선을 모독하는 것이고 갈데아는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다.
6 말씀은 시인하지만 인간 성정으로 오신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범한다. 이 세상에서는 이들을 소시니안과 아리안으로 불려진다. 그들은 아버지께는 간구하지만 신적 인성을 입으신 주님께는 간구하지 않으며 더러는 아버지께 그의 아들의 공로를 보아 자신들을 천국에 들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그들은 구원의 모든 소망이 없어질 때까지 이런 식으로 구해보지만 효과는 얻지 못하고 마침내 지옥으로 내려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이게 된다. 주님은 이들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셨다. "누구든지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용서를 얻지 못하리라"(마 12:32)
7 처음에는 신적 진리를 시인하고 그대로 살다가 나중에는 돌이켜 이를 정반대로 부인하는 사람들이 범한다. 이는 신성 모독 중에서 제일 악한 것이다. 이들은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을 함께 섞어버려 가려낼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른 사람들이다. 말씀과 교회의 거룩한 것을 진정으로 시인하면서도 모든 것을 자신 아래 두고 지배하려는 자아 사랑의 악에 젖어있는 경우도 이와 거의 같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사후에 영인이 되면 주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이 그들 자신으로 행하려들며 또 억압이 풀려 그들의 악한 정욕에 자유가 주어지면 천국은 물론 주님까지 지배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지옥으로 내려가 거기서 악마가 되어 다른 악한 자들을 지배하려 든다.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지배욕은 지독하여 모든 사람의 사후까지 이어지며 뽑아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신성모독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서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12:43-45)
이상으로 일곱 가지 형태의 신성 모독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자비의 주님은 마지막 일곱 번째의 신성 모독을 사람들이 범하지 않도록 배려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 그 자체의 완전한 파멸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요 12:4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곧 진리를 시인하다가 물러나지 않도록 곧 더럽히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또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한번 뉘우친 사람은 일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 선과 진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을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막 13:13)
그러므로 신성 모독을 방지하기 위해 주님은 사람이 일생을 마칠 때까지 그 안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 한에서만 속 사람이 지혜의 진리와 동시에 사랑의 선 안에 들도록 섭리하십니다. 이번에는 이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것에 대한 지혜 안으로 또 그것에 대한 사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그렇다고 다시 난 상태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서 물러나 이전의 악한 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으며 이는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가장 악한 상태에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이는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 중 가장 극악무도한 죄를 뜻합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외적 기억과 내적(혹은 영적)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선악간에 그의 의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한 모든 것은 내적 기억 속에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집니다. 이 기억이 사람의 생명책인데 이것이 사후에 열리고 이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사람은 모두 그 스스로로는 악 안에 있지만 주님에 인도 받아 선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 안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내적(속)으로는 주님 안에 있을지언정 외적(겉)으로 보기에는 그 자신의 악 안에 있는 듯 보일 수 있고 반면 악 안에 있는 사람은 내적으로는 그 자신의 악 안에 있고 외적으로는 주님 안에 있는 듯 보일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겉과 속은 이렇게 선과 악이 뒤섞이지 않고 서로 분리되어 있도록 주님은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런 식으로 있지 못하면 그는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보면 모든 사람에게는 합리성으로 말미암아 만일 그가 원하면 참되고 선한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힘과 또 자유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뜻하고 생각하고 행할 수 있는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있는데 이것이 그 사람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 안에서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한편은 선으로 다른 한편은 악으로 분리되어있지 않고 어느 한편에 선과 악이 동시에 공존하면 이 합리성과 자유성이 파괴되어 생명 그 자체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은 속에 선과 악이 함께 뒤섞여있기 때문에 속에 있는 선으로 겉에 드러나는 악을 분별하여 고침을 받으려 할 수 없고 반대로 속에 있는 악으로 인해 겉에 있는 선을 더욱 부각시킬 수도 없기에 합리성과 자유성이 능력을 잃어 사람으로써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과 악이 뒤섞여 분리가 되지 않는 경우가 바로 사람이 처음에는 신적인 것을 시인하고 믿다가 나중에 거기서 떠나 이를 부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을 섞으며 일단 섞어진 것은 그 모두를 깨뜨려버리지 않고는 이와 저를 가려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거룩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차라리 신성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것을 시인할 수도 없고 따라서 나중에 이것을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래부터 이것을 받으려 하지도 않았고 시인도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일단 받아 시인해놓고 다시 이를 부정하면 사정은 달라져 지독한 신성 모독에 들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신성 모독은 주님의 보호에 의해 거의 일어나지 않고 다만 이보다 가벼운 정도의 신성 모독만이 행해질 따름입니다.
보다 가벼운 신성 모독은 위선자들이 행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겉으로는 거룩한 것을 시인하지만 속으로는 부인하고 있는 처지이기에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을 함께 뒤섞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지독한 신성 모독을 행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주님은 그로 하여금 아예 그의 내면으로 선과 진리 안에 들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악과 거짓이 버려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정한 선과 진리가 그에게 유입되는 것을 주님은 차단하시는데 이는 만일 악이 있는 상태에서 선과 진리가 유입되면 그 악은 선과 진리를 더럽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그가 악을 옮기는 정도만큼만 선의 유입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