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래십대발원문 & [ 원아영리삼악도 ] : 축생, 아귀, 지옥도를 여영 끊기 원하오며, [ 원아속단탐진치 ] : 탐냄, 성냄, 어리석음을 속히 끊이 원하오며, [ 원아상문불법승 ] : 불법승 삼보이름 항상 듣기 원하오며, [ 원아근수계정혜 ] : 계와 정과 지혜를 힘써 닦기 원하오며, [ 원하항수제불학 ] : 부처님법 항상 배워 따르기를 원하오며, [ 원아불퇴보리심 ] : 보리마음 물러나지 않기 원하오며, [ 원아결정생안양 ] : 결정코 극락세계 태어나기 원하오며, [ 원아속견아미타 ] : 하루속히 아미타불 뵈옵기를 원하오며, [ 원아분신변진찰 ] : 분신되어 온 세계 나투기를 원하오며, [ 원아광도제중생 ] : 중생을 남김없이 건지를 원합니다, &축생, 아귀, 지옥은 삼악도입니다, 삼악도는 탐진치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이 가는 세상입니다, 삼악도를 면하려면은 삼독심을 버리고, 공덕을 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베풀며 살면 베푼 만큼 내 마음이 열립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내 마음이 열린 만큼 건강해 집니다, 우리가 쌓은 공덕장엄만큼 신중님들이 옹호해 주시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건강한 만큼 우리가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우연이란 절대 없습니다, 진정 우리가 마음 가운데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을 버려야만 합니다, 대신에 공덕을 쌓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육바라밀행을 닦고 기도하고 살면, 모든 것이 서서히 마음먹은 대로 전개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군아 모든 것이 베푸는 만큼, 기도하는 만큼 되는구나,모든 것이 그렇게 되게 되어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은 어디 먼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온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십니다, 깨달음이란 바로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발견하여 그 부처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속에 계시는 부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탐진치의 삼독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한 소식,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소식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보내주신 이 소식을 듣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래십대발원문은 첫 구절부터 이렇게 심오한 가르침을 담ㄷ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수경] 을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나 외우는 경전이라고 깔보기도 합니다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천수경] 처럼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밀첩한 가르침을 담고 있으면서도 심오한 경전은 없습니다, 불법승 항상 듣기를 원하다고 하여 듣는 것만을 말했지만, [천수경]을 신행하며 사는 길은 3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전통적으로 , [문], [사], [수],라고 했습니다, 이는 ,먼저 법문을 잘 듣고, 깊이 생각해 깨우처서, 철저하게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천수경]을 신행하려면 [천수경]에 관한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것을 마음속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그 뜻을 새겨야 합니다, 그저 건성건성 듣고 술술 흘러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법문을 많이 들어도 그것을 자신이 깊이 생각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많이 듣고 생각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요, 절에 아주 오랫동안 다니신 분에게 , 무슨 종교를 믿으세요? 하고 물으면 자신있게 대답을 잘 못합니다, 이는 오래 다니면서 들은 것이 많아도 깊이 생각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 ]가 부족한 탓이지요, 실천인 [ 수 ]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자기 나름대로 불교관이 서 있지 못한 사람은 행동도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합니다, 절에 오래 다녀도 남들이 하는대로 흉내나 내면서 엉털리로 복이나 빌로 다닌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한 두번 하고 마는 법문이 아니라 이렇게 줄거리를 가지고 꾸준하게 계속되는 법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누가 물으면 한 마디라도 일러주는 공덕을 지을 것 아닙니까? 불교는 듣고 믿고 끝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불교가 타종교와 다른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천수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실천은 [ 계 ], [정 ],[ 혜 ], 삼학입니다, 우선 첫째 계를 지키는 실천을 통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는 선정을 얻을 수 있고 선정을 통해지혜의 눈이 열립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평정은 자신감에서 오는 것입니다, 계를 지키는 마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가운데 강한 힘이 배양됩니다, 어떠한 충격에도 흔들림이 없는 경계가 열립니다, 이른바 정의 경계라 하겠습니다, 혜는 무명을 깨뜨리고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는 경계를 의미합니다, 지혜는 모든 어둠을 걷어내고 우리들을 광명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계,정,혜, 삼학은 불교의 모든 실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자신들이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믿는다 하면서 부처님을 잊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저 한 달에 한 번, 일 년에 한번 절에 나올 때만 부처님을 생각합니다, 단 한순간도 부처님을 잊어서는 참된 불자라 할 수 없습니다, 절에 와서 법당안에 부처님 앞에서만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 일상 생활의 모든 순간순간에 늘 부처님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불자들은 물론, 스님들도 참으로 부처님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힘듭니다, 우리가 늘 부처님을 잊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인생은 행복으로 가득차 넘칠겁입니다, 진정 우리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 마음 가운데 놓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참불자의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 길 가운데 영원한 행복의 길, 성불의 길이 열려옵니다, 부처님께서 그 업을 두고 닦아 오시면서 물러남이 없는 마음을 견지하셨기에 결국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물러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라, 고 하셨습니다, ,가시밭길은 있으리라,아픔과 쓰라림의 고비도 있스리라, 그러나 결코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엄경]에서도 수행자들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으로 불퇴전의 경계, 물러남이 없는 경계를 참으로 중요시 하였습니다, 작은 고통은 작은 즐거움을 가져오고, 큰 고통은 큰 즐거움을 가져오는 법입니다, 다만 물어남이 없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고통은 모두 즐거움과 낙으로 변하는 법입니다, 성불의 의지를 돈독히 세우고, 보리도를 증득하려는 마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부처님의 세계는 열려옵니다, 보리심이란 문자 그대로 깨달음의 마음이요, 성불의 마음입니다, 끊임없이 갈고 닦아가는 불퇴전의 수행은 결국 영원환 안락의 세계를 약속합니다, 무한한 즐거움의 세계를 열반의 세계라 부릅니다, 모든 고통과 번뇌가 녹아진 자리는 진실로 무한한 즐거움의 자리이고 열반의 경계입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면 결국 그와 같은 경계에 나아갑니다, 안양이란 말은 극락국토의 다른 이름입니다, 경기도 안양시는 불교의 극락이라는 말에서 생긴 지명입니다, 우리가 극락세계에 나아가려면 우리의 마음은 극락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극한 수행을 하는 이유는 마음 가운데 무한 번뇌와 고통을 녹여 내려 마음에 한없는 복락의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서 입니다, 수행을 거듭하면 할수록 , 번뇌를 극복하려면 할수록 , 우리들의 마음속에 한없는 평화와 안락의 경계가 열리게 됩니다, 마음이 극락이 되지 않으면 갈수 없듯이, 우리들의 마음을 극락으로 만들어 가는 비결은 한없는 수행입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귾임없는 수행을 계속하면 받드시 극락에 나게 될 것입니다, 극락에 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수행의 과보로 받아들입니다, 극락에 나게 될 경우 부처를 보장받게 된다는 가르침이 경전에 나옵니다, 극락에는 언제나 부처님께서 직접 법문을 해주시기 때문에 그 법문을 듣고 성불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극락세계에 나서 아미타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무량한 복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부처님 법 만나기가 대단히 어렵다고 하는데, 부처님 시대에 태어나 부처님께 직접 법문을 듣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량복덕입니다, 부처님을 만난다는 것은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한 복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족집게 선생이라 부르는 선생님들을 많은 액수의 강의료를 드려야만 하듯이, 휼륭한 스승을 만나려면 그만한 공덕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을 만나면 우리는 성불의 대도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수행의 단계를 거치고 그를 통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극락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극락세계에서 성불해서 부처가 된 다음에는 아미타부처님의 분신이 되어 이 세상에 다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삶입니다, 자기만 성불해서 부처가 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두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서 보살의 몸으로 다시 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의 불쌍한 중생들을 남김없이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 보살들이 이 땅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참으로 20세기 말 현대, 이 땅 이 시대에 어렵고 힘겨운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물들어 있고, 이 세대 이 땅 위에 부처님의 마르씀을 펼쳐야만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고치고 치료해 주는 것이 이 세대를 사는 우리 불자들의 책임이요, 사명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원대한 뜻이요 우리 불자들 모두의 삶의 지표이어야만 합니다, 진리에 미혹하고 깊은 어둠속에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제도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하는 일이 우리 불자들에게 주어진 거대한 과제입니다, 이것이 여래십대발원문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 2024년, 2월 14일 오후 5시 59분,경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