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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인가?
강의: 이근호 목사
"인간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 자체가 얼마나 생뚱맞고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인간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립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돌맹이가 "돌맹이는 무엇인가?" 라고,
개가 "개는 무엇인가?" 라고
스스로에게 묻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이렇게,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은,
이미 나름대로 "인간은 이러이러하다" 라고 정립한
인간관이 다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화하고 다져주기 위해서
이렇게 질문을 하는데,
즉 "아하, 내가 생각한 것이 맞는구나.
남들도 나와 같이 생각을 하는구나.
저 사람은 좀 다르지만, 그래도 교체해서 수정하고..."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보충하고 하는 식으로,
아무튼 자기가 생각했던
그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틀은 유지하면서
내용물을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에서도 유효한가?
그런데 문제는
과연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에서도
그런 틀을 유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향해서도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질문자체가
과연 성립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 이렇게 십자가가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은
상당히 건방진 태도라는 것입니다.
마치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서
"진리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성립이 안 되고,
어떤 질문이 가능하겠습니까?
"당신은 왜 피를 흘리십니까?" 라는 질문만
허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다른 질문이라도
일체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궁금하고 의구심이 들어도 말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이렇게 피를 흘리고 있는데,
만약에 축구국가대표 감독이 말하기를,
"예수님, 차두리를 어디에 집어넣을까요?
이영표를 빼고 넣을까요,
아니면 그 앞에 있는 김두현이를 빼고 넣을까요?" 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축구구경을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피 흘리시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 앞에서 말입니다.
제가 너무 엉뚱한 예를 들었습니까?
너무 조용한 것을 보니,
예를 든 이유도 별로 생각하기 싫다는 그런 표정인데,
어떤 청년이 자동차에 부딪쳐서 피를 흘리고 누워있는데,
"청년아, 내가 누구지?" 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함부로 질문을 마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질문이 성립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계시니 말입니다.
마치 청년이 지금 피를 흘리고서 누워있는데,
수학노트를 들고 와서는,
"이것의 코사인 값이 도대체 얼마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얼마나 그 청년을 시시하고 건방지게 여기는 일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묻는 것은 자기의 자유겠지만,
"당신 어떻게 다쳤어요?" 라고 묻는 것이
그런 상황에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 십자가 - 우리의 입을 순식간에 다물게 !!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그렇게 알고 싶은 것도 많고,
자기 미래도 예측해보고 싶고,
자기가 산 로또복권, 주식 등등
궁금한 것이 제 아무리 많아도,
그러나 그런 궁금증을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그러한 사태와 이 세상을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즉 자기 중심으로 교만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일시에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 앞에서 "당신은 왜 피를 흘리십니까?" 라는 질문 외에 그 어떤 질문이라도,
즉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의 10년 뒤의 모습은 어떠할까?" 등등의 질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앞에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는 질문도 조절되어야할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동이나 태도는 물론이고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생각조차도
고무줄로 꽁꽁 묶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은 허용이 안 돼" 라고 확 묶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꽁꽁 묶여진 상태를 두고서
'예수 안'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 '예수 안'과 '아담 안' !!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 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성경에서 '예수 안' 이라고 나오니,
"아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 들어가야 되는가 보다" 라고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안' 이라고 하면
자기 집 안이나, 화장실 안 등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면 이렇게 예수 안에 있기 전에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습니까?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것은 바로 '예수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밖에 있으면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면 예수님에게 묶이는 상황이지만,
그 이전에는 자기 팔 자기 마음대로 흔들고,
하고 싶은 질문 마음대로 하는 그러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아담 안' 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 안이니,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도 우리는 어딘가 안에 갇혀서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묶여있었고, 소속되어 있었고, 어떤 통치권 속에 존재해있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말입니다.
그것을 다름 아닌 성경을 통해서만 파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꼼짝도 못하고 묶여있던 상태에서,
그렇게 사로잡혀 있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말미암아,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탈피해서,
따로 독자적으로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나라를 구축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 구원 - 그 전제가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음 !!
그러니 구원을 말할 때는 그 전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세계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온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그냥 장소이동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빠져 나올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구출)이라고 하면,
그 전제가 외부에서 끄집어내어 주었기에,
그래서 결과적으로 생성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위치가 변하는 것을 말하는데,
즉 신분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 아담 안에는 무엇이 작용하는고 하니,
죄가 작용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악마가 지배하고,
또 다른 말로 율법이 지배하고,
또 다른 말로 죽음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이 4가지 요소가 같은 개념 속에 들어있으면서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 아담 안의 특징 - '못 벗어남'이 우글거리는 세계 !!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아담 안의 특징이 '죄에서 못 벗어남' 이라는 것입니다.
'악마의 세력에서 못 벗어남', '율법으로부터 못 벗어남',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못 벗어남' 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못 벗어남'이 우글거리는 세계가
바로 '아담 안'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숨을 골라야 하는데,
벌써 머리가 복잡해지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볼 것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왜 당신이 해되느냐?" 라는 것입니다.
소위 '6하 원칙' 이라는 것이 있는데,
즉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라는 것인데,
어떤 사태나 사고를 규정할 때
6가지의 원칙을 가지고 표기해서 규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하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에 써먹으려고 말입니다.
그 답변이 무엇인고 하니,
'죄에 대해서 벗어나고 싶어서'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에 대해서 벗어나고 싶어서',
'율법에 대해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벗어나고 싶어서' 말입니다.
◈ 도대체 왜 질문을 던지는가?
1학년 짜리 초등학생이 자기 어머니에게 "7×7은 얼마예요?" 라고 물었더니,
이 어머니가 뭐라고 대답하는고 하니까,
"예야, 7×7은 왜 묻지?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묻는 것이지?"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가 얼마나 어리둥절하겠습니까?
그냥 자기는 '7×6=42'는 겨우 알았는데,
그 다음이 몰라서 궁금해서 질문을 했는데 말입니다.
자기는 별 특별한 생각도 없이 물었는데,
어머니는 아주 심각하게 "그것을 왜 묻지.
네가 살고 싶어서 그렇지"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는 속으로
"요즘 날씨가 더워서 우리 엄마 정신이 좀..."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나중에 인생을 다 살고 나서 92살이 되어서야,
그제야 비로소 어머니의 그런 답변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하, 그때 우리 어머니가 그래서 그렇게 대답을 했구나" 라고 말입니다.
머리가 허옇고 이가 다 빠진 다음에야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질문은 그냥 별로 생각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서 남에게 자랑하고,
그렇게 함으로 자기의 어두운 분위기에서 자기도 인간임을 과시하고,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법적으로 자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마귀가 자기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그리고 자기는 죄로부터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즉 죄와는 상관없이 정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남에게 폼 내기 위한,
남에게 자기는 이렇게 많이
아니 실수가 적은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 속에 그렇게 갇혀 있는데,
그런데 1학년 때는 어려서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엄마, 7×7은 얼마예요?" 라고 해서 '49' 라는 답을 얻어서,
그것을 친구에게 자랑하고,
그렇게 그렇게 계속해서 행동이 연결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고,
또 청년이 되어 동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가져다 장사를 하면서,
"아주머니, 요즘은 티셔츠가 얼마에 나옵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데,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살아도 정당하게 살고,
살 만한 가치가 있어서 산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것으로서,
그래서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탈피하겠다는
일종의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 나는 누구인가? → 내가 어떻게 살아남지?
인생을 짧게 살면 자기 정당화하는데 신경을 많이 쓰다가,
그렇게 하다가 이제 인생을 좀 경험하고 나면,
인생이 자기 중심이 아닌, 누구 중심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자기 중심은 아니고, 이 세상은 오로지 생존경쟁이고,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되는,
즉 도태되고 탈락되는 냉혹한 정글의 법칙이 통하는
사생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세상이 무엇이며,
자기는 누구인가를,
그런 것은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자본주의사회 - 드디어 소유가 인간을 결정 !!
드디어 질문이 바뀌는데,
"어떻게 하면 나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즉 자기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하는지,
그런 질문들은 점차 없어지고,
이젠 얼마나 자기가 소유할 수 있는지,
자기 것으로 얼마나 않은 것을 소유할 수 있는지,
오로지 그것으로 관심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그야말로 한가할 때 하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드디어 소유가 인간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모든 신에게 묻는 것인데,
이것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감상적이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지만,
그런데 생존사회에 나가보면 신의 자리는 지워지고
그 자리에 소유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런 소유가 있으니,
자기는 이런 소유를 가질 정당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런 월급을 많이 주는 좋은 직장이 있으니,
자기는 그것을 가질만한 정당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유가 신의 자리에 앉아서,
소유가 인간됨됨이를 결정하는 그러한 사회를 두고서
'자본주의 사회'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다 의미가 없고,
즉 그 사람이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로 따지면, 교인이 몇 명이고
헌금이 얼마나 나오고 건물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이 그 교회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교회가 되었던,
병원이 되었던, 행정기관이 되었던,
농사를 짓던 그 어떤 직업을 종사하던 간에,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런 것을 다 녹여버려서,
그 어떤 직장에 있던지 간에
자기가 돈을 얼마나 받은 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즉 소유를 얼마나 가지는 것으로 인간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그런 후기 자본주의사회에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오직 돈이 될 수 있는 그런 기술을
얼마나 개발하고 획득하느냐에 따라서 평가를 받으니,
그래서 대학에 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물론 진리의 탐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회사에 가더라도
그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용접을 하든 말입니다.
그 공장에 합당한 소유가 있어야 하는데,
즉 그 회사의 소유를 키워주는데 공헌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
그 회사에 취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모든 사회는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인간의 가치와 본질과 궁극적인 것을 묻지 않는데,
그것은 그런 질문 자체가
자기의 소유를 증가시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사회는
소유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은 서로 하지 않기로
묵시적으로 다짐을 하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이고 할 때 보통 무슨 질문들이 오고갑니까?
"외삼촌, 인생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그냥 웃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번에 과장되었다.
그런데 너는 아직 취직을 못했니? 그리고 너는 언제 시집가?"
라고 하는 말들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이러한 자본주의사회 체제 속에서
"너는 어느 정도 소유를 확보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
관심사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것을 바둑판에 비유하면,
이렇게 서로가 교체되는 지점들인데,
각자의 소유물을 껴 앉고서
이렇게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 존재하게 되는데,
공무원을 하든지 공장에 취직을 하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소유공간에서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고 한다는 것입니다.
'들뢰즈' 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하나의 '고원'으로 보았는데,
사실 말이 좋아 고원이지
각자의 무덤이겠지만 말입니다.
각자가 이렇게 자기의 고유한 영역(영토)을
다들 나름대로 꿰차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교체되는 연결지점을 '테트리스' 라고,
아니 '매트릭스' 라고 하는데,
모든 정보가 교체되는 정보화시대에 있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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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렬(行列, matrix) - 숫자나 문자를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으로 배열하여
그 양끝을 괄호로서 묶은 것. 가로의 배열을 <행>, 세로의 배열을 <열>이라 한다.
- 야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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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매트릭스는 인간을 통제하고 있는가
매트릭스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는가?
- 모피어스는 매트릭스 안에 있는 인간을 노예라고 불렀다.
또한 밤중에 네오와 의원이 하는 대화 중에서도,
의원은 매트릭스에 있던 시간을 잠이라고 불렀다.
스미스 요원과의 100:1 격투 장면에서, 지나가다가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요원으로 변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요원은 아직 귀에 통신 장비를 달고 있는 상태이다.
이는 아직 매트릭스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해방된 스미스 요원은 귀에 아무것도 달지 않고 있다.
이는 매트릭스로부터 해방된 상태라는 것을 암시한다.
스미스 요원도 역시 매트릭스에서 해방된 상태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매트릭스 2까지는, 표면적으로 매트릭스에서 벗어나
자신을 인식하게 된 사람들과 그를 추격하는 매트릭스의 양자 대결 구도를 보인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매트릭스가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인간들을 가지고 인간 사회를 시뮬레이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에서도 가장 많이 들어본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목적'이다.)
특히, 100:1 격투신 전에 요원들이 나오면서
차례로 말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매트릭스 2 대사중 스미스 요원의 말 인용>
『 다시 여기 온 목적을 말하자면.
우리가 자유로워서 여기 있는 게 아니라
자유롭지 못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 둘 다 알다시피, 목적이 없이는
도주할 이유도 없고
목적을 부정할 수도 없지
우린 존재할 수도 없었을 거야
우리가 생긴 목적이 있고
우리가 연결된 목적이 있고
우리를 있게 하는 목적이 있어
- 우리를 인도하고
- 우리를 조종하고
- 우리를 정의하고
- 우리를 결속하는 목적이 있지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너 때문이야,
앤더슨, 네가 우리의 목적을 뺏은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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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피아노학원으로부터, 이런 모든 우리가 성장하면서 받은 환경들이,
이렇게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정밀한 조직인,
즉 매트릭스에 봉사하라는 명령은 받은 요원으로서 살고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스미스 요원처럼 말입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사회는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자체를
지우개로 지워버리는, 그런 질문을 용서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삽니까?" 라는 질문자체를
아예 정당한 질문으로 여기지 않는 사회,
바로 그런 사회에
지금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소유사회,
즉 자본주의사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지금 제가 왜 굳이 자본주의라고 하는고 하니까,
지금 우리가 태어난 자체가 바로 자본주의가 양산한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생지가 산부인과가 아니라 자본주의사회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속한 산부인과 병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유가 모든 것을 다 결정하는 사회에서는
옳고 그름, 선과 악, 이런 것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고,
아니 사실 용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본주의사회에서 용납되는 것은 오로지 '생산력' 인데,
있는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생산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서 '잉여생산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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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의 축적
-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양식들로부터 구분하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자본의 축적이다.
노예제나 봉건제 사회에서는 착취자는
그가 직접생산자로부터 빼앗은 잉여생산물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생산은 여전히 사용가치가 지배하고 있었다.
생산의 목적은 소비였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일단 지배하게 되면 사태는 변한다.
노동자들로부터 쥐어 짜낸 잉여가치의 대부분은 소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의 증대를 위해 재투자된다.
이러한 과정, 즉 잉여가치가 더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항상 재투입되는 과정을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이라고 불렀다.
『자본론』제1권의 유명한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자본축적이 어떻게 자본가계급에게
'절욕'(節欲)의 이데올로기를 낳으며,
그 속에서 부르주아지가 어떻게 자기 자신의 소비조차 부정하고,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를 저축하여 재투자하도록
고무되는지 보여 주고 있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이며 예언자이다.
'근면은 재료를 제공하고, 절약은 그것을 축적한다'고 [아담 스미스는 말했다.]
따라서 절약하고 또 절약하라. 즉 잉여가치 혹 잉여생산물 가운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
- http://reltih.cafe24.com/reading/marx_ideas/chapter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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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보험회사에 찾아와서
보험에 들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보험에 들 마음이 없는 사람을 꼬드겨서
기어이 생명보험에 들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소유사회에서는 용납이 된다는 것입니다.
없는 데서 만든 생산력이고,
그런 능력이 없으면
보험회사의 직원으로서 자격이 없고 탈락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탈락하면 수입이 없고,
수입이 없으면 굶어죽게 되는데,
그게 바로 '매트릭스'에서
깜빡 깜빡거리다가 사라지는 불빛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배우 이은주 씨가
화장터에서 자기 몸을 태운 불꽃이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이런 생산력이 없으면 알아서 은퇴해야 하는데,
이렇게 스스로 알아서 은퇴를 하는 것을 두고서
'자살'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제가 한 이런 이야기가 과연 옳은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옳다고 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틀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놈의 더러운 사회' 라고 하면서도
점점 더 빠져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고 싶고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 현실이니,
만약 다른 현실을 꿈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노란색과 빨간색만 가지고 놀면서 자란 아이에게
파란색을 크레용을 주면서 색칠하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색칠을 하고 가지고 놀아도
노란색과 빨간색만 가지고 하지 말입니다.
물론 다른 제3의 요소가 있을 때는 몰라도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크레용들은
이러한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림을 그려도
주어진 것만 가지고 그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착해야돼. 이 세상이 더러워도 나만큼은 순수해야돼.
나는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야만 돼" 라고 말입니다.
◈ 결국에는 돈, 돈, 돈 !!
하지만 그렇게 착하게 살려고 마음을 먹고 그림을 그려도
결국에는, "이렇게 착하게 살면 잘되겠지" 라고 하는
자본주의식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저놈들은 나쁜 짓을 해서 돈을 벌었지만,
나는 착하게 돈을 벌 거야" 라고 하는
결국은 마지막에는 '돈'이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무리 착하게 살고 어쩌고 해도
결국은 돈을 버는 것이,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쳐준, 그런 사고방식을 배태하게 된
못자리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못자리 역시 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고 말입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애굽나라가 힘들고 못 살겠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애굽나라에서 지향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애굽에서 살면서 비록 노예는 노예이지만
그래도 좀 더 노동시간도 불고
집도 조금 괜찮은 그런 애굽생활을 원하는 것이지,
그곳에서 나가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모세 아이디어고 하나님의 아이디어지 말입니다.
자기들 생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목적이,
물론 나이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자기들이 교회에 나왔다는 그 선한 노동으로 인한 반대급부를 기대하는데,
이것은 바로 남들이 가지고 있던 좋아 보이고 풍부해 보였던 것들을,
세상 사람들처럼 짓을 통해 가지지 않고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 선한 것으로 쟁취하겠다는
동일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잘먹고 잘살려는
또 다른 아이디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열내어 강의를 하다보니,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여러분들이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에게 던져놓고는
또 제가 여러분이 그런 질문을 한 것처럼
그렇게 몰아 부쳐서 야단치고 했는데,
절망이지 죄송스럽습니다.
이거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이
현실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느끼는 방향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둘러싼 현실과 거기에 소속된 '나' 라는 존재는
얼마나 그 현실에 물들어있는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교회에 와야 하는데,
자꾸 세상을 잊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 교회 - 세상을 잊는 장소가 아니라 보다 더 똑똑하게 바라보는 !!
아니 잊어버리려고 한다고 어디 교회에서 생활을 할 것입니까?
박태선처럼 신앙촌을 만들겠습니까?
재산을 다 팔아서 새로운 빌리지를 만들어서 공동체 생활을 할 것입니까?
교회에서 기거하는 것이 일주일에 불과 몇 시간밖에 안 되는데,
그런데도 "잊어버리자" 라고 한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아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소속된 세상을 정확히 제대로 파악을 하는 것은,
교회에 와서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으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탓할 것 없이
우리가 바로 이 세상의 산물이며,
우리도 이 세상과 한 통속이 되어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좀 알자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상과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 교회 - 세상 냄새 그대로 간직하고 나올 것 !!
그러니 세상에서 도망쳐서 교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짊어지고 썩어진 냄새를 그대로 풍기면서 교회에 와서,
동일하게 썩은 냄새를 풍기는 이웃들과 만나서
상호기만과 상호위선으로 상호인정 받기를 원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라는 것입니다.
◈ 교회 - 피의 십자가 마중으로 !!
그렇다면, 교회를 이렇게 보아야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는 우리를 마중 나가는 게 누구인고 하니까,
목사가 아니라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마중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질이면서도 아닌 척하면서 교회에 나왔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를 마중 나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고 하니,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것을 가득 담아서 교회에 나오는데,
앞으로 어디에 어떻게 취직을 해야하며,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 등등, 그런 문제를 가지고 오는데,
사실 그런 것은 부채도사에게 물어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런 우리를 마중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피가 우리의 호기심과 우리의 미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자기고 있는 공포심과 초조감과 이 피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의 공포심과 예수님의 피를 연결해주는 자가
목회자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무슨 재주가 이런 역할을 하겠습니까?
피와 인생의 불안감, 즉 망할까 싶어서 벌벌 떨고,
죽을까 싶어서 벌벌 떠는 그런 불안감을 미리 이야기한 분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사도'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 자기들은 뭐가 그렇게 똑똑해서 알겠습니까?
이러한 사도들로 하여금
올바른 말씀에 대한 해석과 취지를 이야기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사도들의 주가 되시는 분,
바로 '주 예수' 라는 것입니다.
즉 주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사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의미를,
즉 생명과 죽음을 연결하도록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 성령 받은 사람 - 성경말씀에 대한 사도들의 해석이 수긍됨 !!
그렇게 되니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성령을 받은 사람에 한해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러한 초조감과 불안감과 공포심에서 벗어나서
항상 순교하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만든 생산물이기에 불신자와 동일한데,
다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경말씀에 대한 사도들의 해석에 대해서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고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판단력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 속에다 담아내는 능력은 성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성도에게 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마치 사도가 같은 인간이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서
사도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늘 넘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동일하게 들어가서,
우리를 말씀으로 움직여나가는 그런 탱크가 된다는 것입니다.
탱크 스스로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탱크를 운전하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말입니다.
운전하시는 분이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고 하니까,
피에서 나온 능력인데,
그러면 이 피에서 무슨 능력이 나오는고 하니까,
이 피는 보통 피가 아니라
'언약의 피' 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義 -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말씀의 성취 !!
이 언약의 피는 둘로 나누어지는데,
한쪽에는 은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은혜를 받아야 할 대상자인 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언약의 피를 완성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인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이런 언약의 완성을
자기백성에게 실시한다는 것입니다.
그 실시하는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죄인 됨과 은혜 됨,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실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약의 성취라고 하는데,
이것을 바로 '의(義)'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곧 말씀의 성취인데,
이것이 바로 '의'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의' 라고 할 때, 이 세상에는 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인간의 죄라고 하는 것은 죄에 물든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데,
'아담 안'에서는 그 자체가 모두 죄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나오는 것 자체가 다 죄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가 되었던, 설교가 되었던, 헌금이 되었던, 찬양이 되었던,
그 무엇이 되었던 간에 모두가 다 죄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죄이기에 의는 없는데,
그런데 다만 의가 은혜로 죄인에게 주어질 때
비로소 의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지금 제 안경을 이렇게 누구에게 주면
이 안경이 누구의 것이 됩니까?
그 사람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제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 것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것을 우리에게 주었으니
여전히 주님의 소유라는 말입니다.
◈ 왜 義를 주시는가? - 우리 속에는 전혀 義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
그러면 왜 우리에게 주었습니까?
구원시키기 위해서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는 전혀 의가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즉 죄인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너 속에는 의가 없고 죄만 있다" 라고 알려주는 관계를 두고
"의인이 되었다" 라고 하는,
'의인관계'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가 포함된 사람만이 의인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의는 전혀 우리가 만든 우리의 작품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그런 의라는 것입니다.
마치 전자제품 속에 들어있는 '칩'처럼
그렇게 집어 넣어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속에 예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은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의 의가 들어있는 사람만이 천국에 가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기 것이 있느냐로 판단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것이 얼마나 잘났느냐를 보시는 분이 아니기에 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거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마치 낚시바늘에 제대로 걸린 물고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못 빠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천국에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있고 말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교과서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우리가 배우던 배우지 않던지 간에
우리 바깥 세상이 이미 그렇게 짜여져 있고,
이미 결론이 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 저는 교회에 나오기 싫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면,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정 나오기 싫으면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교회에 오고 싶어서 나왔다고 하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자기가 싫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러한 사람이 주님이 주신 칩이 없는 사람이고,
그런데 "내가 이 교회에 나온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좀 바빠서 몇 주를 안 나오더라도,
아니 몇 년을 안 나오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로 반드시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인간이란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하나님께서 만든 노리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속성을 담아내기 위한 일종의 '주머니' 라고 할까요?
성경에는 이것을 '그릇' 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 이미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사상과 주어진 사고방식에 완전히 포위가 되어서
그 주어진 사고방식의 생산물로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분위기와 모든 것이 다 말입니다.
그것을 두고 '아담 안'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담 안'에는
4가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권력(힘)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① 죄에 대해서
② 악마에 대해서
③ 죽음에 대해서
④ 율법에 대해서
인간은 이러한 4가지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3살, 4살 때는 생명이 무궁무진해 보여도,
결국은 나이가 들면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자기는 법 없이도 산다고 하지만,
항상 그 속에는 법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자책한다는 것입니다.
자책, 자기반성, 회개 등등
이런 것들이 다 법이 있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정말로 법 없이도 산다면
사실 "나는 법 없이도 산다" 라는,
그러한 말조차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법 없이도 산다고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법을 의식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라캉은 이것을 두고 '실재계' 라고 했는데,
그리고 이러한 완벽한 법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 내부에서 자기를 조절하게 되는데,
그것을 '상징계'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현실에서 내 양심으로는
이 정도로 착한 것도 대단하니, 좀 봐달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통신호를 지켜야 하는데,
지금 너무 바빠서 그러니 사정을 봐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 속에는 법의식이 있어서,
그 법의식을 인간 자체욕망과
스스로 흥정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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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캉 (Lacan, Jacques) 프랑스의 정신 의학자이며 정신 분석학자인 라캉(1901-1981)은
1932년 파라노이아(편집증)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으며,
1936년에 유명한 '거울상 단계' 이론을 제시했다.
국제 정신 분석학 협회에서 제명당한 뒤,
자신의 학파인 파리 프로이트 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는 책을 많이 내지는 않았지만 방대한 세미나가 편찬되어 나오고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표어를 내걸고,
정신 분석학을 '생물학화하는' 미국 학자들의 경향을 비판했다.
정신 분석학의 핵심은 '말'에 있으며
무의식은 언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사상이다.
라캉은 정신 분석학을 통해 주체의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투명한 자아 의식으로서의 주체,
데카르트의 '코지토'는 거부되며,
무의식의 존재가 강조된다.
라캉은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그곳에 존재하며,
내가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생각한다"는 말로 데카르트의 말을 뒤집는다.
대표작 『선집』(1966),『세미나』(1953-1980)
- 엘리자베스 클레망 외 3인, 이정우 역, '철학사전', 동녘출판사, 1996.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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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악마라는 것은
영적인 것으로 인간이 느끼지 못하기에 빼버리고,
그 다음 죄에 관한 것인데,
이 죄는 율법이 쏘는 것이 바로 죄이고,
율법은 인간을 더욱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니,
율법에 합류하게 되면 그 결과가 곧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 이미 인간내부에는 법적인 틀이 !!
이렇게 4가지를 합치면 결국 '법' 이란 것인데,
법 때문에 다 이렇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 안에서는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고 하니,
법이 인간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헌법을 만들고 법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법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내부에 어떤 법적인 틀,
즉 법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법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법이 전혀 나오지 않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실증법을 만들게 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법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법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는 법이 내장되어 있는데,
이방인들은 이것을 '양심' 이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이 법을 '율법' 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 율법 - 에이, 죽어라 이놈아 !!
그런데 이 율법이 인간에게 언제 들어왔는고 하니,
물론 죄는 처음부터 들어왔지만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이 죄에 의해서 통치를 받을 때,
바로 그럴 때에 율법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즉 죄에서 빼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이 아니라,
아예 "죽어라. 이놈아" 라고 하면서
더욱 더 죄에 깊이 빠지도록,
죄에 짓눌려있음을 분명하게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고 난 뒤에,
정말 구원을 위한 자비를 베푼다고 한다면,
"내가 좀 심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나의 자비로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의 문을 활짝 다 열어놓았으니
누구든지 다 와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어라.
어서 오너라.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모두 다 들어올 때까지도 문을 닫지 않을 것이야" 라고 하시지,
율법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키지도 못하는 법을 주었다는 것은,
고생하는 놈은 고생 좀 더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게 하고 헉헉거리게 만드는데,
이렇게 왜 하나님이 인간들을 고생하도록 하는고 하면,
하나님의 정당성을 더욱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고,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법을 줘버린다는 것입니다.
◈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 !!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이렇게 못난 놈임에도 불구하고 편하게 살기를 바라나?
이 나쁜 놈들아" 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한 그 추방을 더 정당화시키고,
마지막에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의 조치가 그러한 얼마나 합당한 것인가를
인간들에게 보다 더 확실하게 해주기 위해서 율
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이렇게 '아담 안' 이라고 했는데,
요약한다 해놓고 더 깊이 들어가고 말았는데,
사실은 이런 '아담 안'이라는 인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 안'에 놓여있는 자들만이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놓여있지 않는 사람은 '아담 안'이라는 말도
성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쪽에 있기에 저쪽이 보이는 것이지,
같은 쪽에 있다면 어떻게 같은 그 쪽이 보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같으면,
"죄, 율법, 악마, 죽음" 이라는 것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는 것은
오로지 '나' 라는 것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까?" 라는 것만,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떻게 이 고통에서 해방될까?",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을까?" 라는 것만 남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오직 자기만 남아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불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고통으로부터 출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죄로부터 출발하게 되는데,
서로 이렇게 출발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으로부터 출발하는 대표적인 종교가 바로 '불교' 라는 것인데,
이 불교는 바로 이방종교의 대표라고 할 수 있고 말입니다.
철저히 땅의 종교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우상의 특징이 땅에 있다고 했고 말입니다.
"이 땅에서 인간은 살면서 고통이 주어졌다.
이 고통을 신과 타협해서 어떻게 면할 수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가인이 제사를 드리는데,
그리고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는데,
그 결과가 바로 '방랑자'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제사를 드리고 방랑자가 되고 하는 것이
철저하게 땅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 불신자 - 고통으로부터 출발 !!
그래서 불신자들은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자기 인생이 왜 이리 풀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독하게 꼬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이 있다면
자기가 그 신에게 뭔가를 잘못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불교에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로 보는데,
이런 고통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 신자 - 죄로부터 출발 !!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항상 '피'로서 시작하기 때문에,
"왜 저분이 이렇게 피를 흘려야 하는가?" 라고 하면서,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즉 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아니라 말입니다.
일단 성경을 덮어놓고서,
그러면 고통이 들어왔는데
이런 고통을 면할 수 있는 최고의 아이디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욕망을 줄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아이디어인데,
이것을 만드는데 약 3000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욕망을 줄인다는 것은 자기 욕심을 버린다는 것인데,
욕심이 증가하면 원하는 것이 많으니
현실과 간격이 점점 더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결핍' 이라고 하는데,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치려고 하다가
두 번 떨어지고 포기하고 난 다음에,
이젠 마음을 낮추어서 공무원 시험을 치는데,
7급을 치려고 하다가 그것도 어려워서 9급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4번 정도 떨어지고 나면,
그러다가 결국은 집에서 논다는 것입니다.
이게 뭔고 하니,
자기 욕심을 줄여감으로 말미암아
자기 욕망이 이루지 못하는 그만한 결핍에서 오는 그 고통을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이
바로 눈 높이를 낮추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곧 불교이며,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다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에서는 사실 불자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인간들이 다 불자이고 부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절에서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불자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교회를 나가던 어디를 나가던 말입니다.
대승적인 관점에서 말입니다.
백 날을 교회에 가고 해도
그것은 바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그런 고통을 낮추는 술책에 불과하다고 놀리면서,
그 정도는 우리도 다 알고 있으니,
"축하한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그만큼 마음을 낮추었다는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이제부터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살지 말고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자기 마음가짐을 바꾸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야기한 이웃사랑이고 참된 행복이라고,
그들은 십자가를 그렇게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 불교 이야기를 여기서 왜 합니까?
첫 시간에 여러분이 주무시는 것을 깨워가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이런 불교적인 사고방식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그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들을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설령 여러분이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도
24시간 가운데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은 5초 정도이고
나머지 23시간 59분 55초는 다, "하나님, 제가 지금 교회에 왔습니다.
복 주이소" 라고 하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령에게 얻어터져서 정신 차려서,
"내가 왜 이럴까? 이게 아닌데..."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또 그 다음 주가 되면
또 교회에 와서, "예수님, 추운데 헉헉거리며 왔습니다.
뭐 없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이고 말입니다.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미 우리 속에 이런 의식이 깔려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두 번째 시간부터는,
그렇다면 성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지난 첫 시간에 인간에 대해서
너무 절망적으로 이야기해서 낙담을 하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왜 그렇게 절망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종교도 필요 없고
신앙도 필요 없는 것이 되니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소용이 없어져버리면
깊은 허무에 빠질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 확증되었다 !! 확증되었다 !! 확증되었다 !!
여러분, 성경에 보면 "확증되었다"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어떻게 기분 좋게 들립니까?
아니면 절망적으로 여겨집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오히려 즐거움이 될 수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이 너무나 날아갈 것 같고 기분이 좋은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 "확증되었다" 라는 말을 듣고서는,
"아, 나는 이제 끝이로구나" 라는 느낌이 듭니까?
그렇게 낙심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 인생에 대해서 "확증되었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해도 소용없다. 그러니 치워"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런 "확증되었다" 라는 것에 대해서 같이 즐거워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증이 되었다" 라는 것은
요지부동을 의미하는데,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변화' 라는 것입니다.
즉 언제나 불확정적이고, 불안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확증되었다" 라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무엇과 무엇의 싸움입니까?
"확증되었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확정이 되지 않으려는 우리의 죄와의 싸움이
매일 같이 일어나는 우리들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매일성경'도 있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같이 우리에게 확정되었다고 말씀하는데,
우리는 매일 같이 그것을 싫어하고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확정하심의 그것을 거부하는 우리들의 죄가
날마다 싸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자기 아이의 몸이 아픈데,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하는 내용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어머니 : 하나님, 우리 집 아이 몸이 아픈 것 아시지요?
하나님 : 확증되었다.
어머니 : 아픈 몸에서 건강한 몸으로 변화를 좀 시켜주시지요?
하나님 : 확증되었다.
◈ 변화를 통한 기쁨보다도 확증되었다는 기쁨을 가져라 !!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화를 통한 기쁨보다도
확증된 기쁨을 가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이가 아프던 건강하던, 그것에 상관없이
자기 가정의 구원이 확증되었음에
언제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뭔가 자꾸만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이러한 "확증되었다" 라는 것이
상당히 불쾌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정론'과 같은 것은
너무나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이 '예정론'에 대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는데
예정이 되어버리면
자기가 하는 일이 의미가 없어지고 가치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까불고 촐랑거리고 하면 좀 잠잠해지기를 원하는데,
즉 까부는데서 잠잠해지는 변화를 추구하지만,
그러나 정말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면,
"애야, 너는 구원받았어" 라는 확증된 소식이
그 아이의 부모를 더욱더 즐겁게 하지 않겠습니까?
사모님, 그렇지 않아요?
그 아이가 좀 떠들고 까불더라도
구원이 확증되었다는 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확증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확증하심이 들어올 자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에게 지지 않고
변화를 요구하는 탐욕이 너무나도 충만하다보니,
주님의 확증하심이 밀려서 빠져 나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인생을 불행의 질곡에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확증된 그 즐거움을 삭제해버리고,
자기 기분에 따라서 변화무쌍하게 살아가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두 번째 이 시간에는
도대체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을 확증하셨는지,
과연 어떤 것을 확증하시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시는지,
그것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인간의 이름은 '아담' 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은 '흙' 이라는 말인데,
즉 인간은 흙으로 확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남자가 몸이 근육질이고
여자가 몸매가 아름다워도,
우리는 아담이기에
하나님의 확증하심으로 죽어야,
즉 흙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니 "우리가 죽자" 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죽이신다는 것입니다.
누구처럼 일부러 목을 매고 해서 죽을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모두 다 죽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확증을 미리 앞당겨서 지금의 확증으로 받아주면,
누구든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죽는다고 하는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성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모든 불행은
바로 살고자 하는데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날마다 살기 위해서 시나리오를 쓴 우리 !!
우리들이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흙으로 확증이 되어서 끝이 나아야 되는데,
이것이 우리의 본성인데,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환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흙이 아닌, 죽지 않는 그러한 시나리오를 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일 같이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뭘 하고,
오전에는, 오후에는 또 뭘 하고 등등,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 날마다 죽이기 위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주님 !!
이런 시나리오 자체가 일종의 환상으로,
사실 그런 삶은 주님께서 매일 같이 우리를 죽이는 과정인데,
그런데도 우리는 환상을 만들어서
매일 같이 살리는 시나리오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마음속부터 지퍼가 찌어지듯이 쫙 하고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후 3시가 되고 5시가 되도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환상이 자기의 본성을 거스리고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6월에 9급 공무원 시험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자기를 살리는 작업이 아니라 죽이는 작업인데,
만약에 걸리면 공무원 짓을 하다 죽으라는 것입니다.
월급도 받고 아파트도 준비하다가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공무원 시험을 쳐도
자기는 공무원이 되어서 살겠다고 한다면,
그러니 시험준비가 제대로 될 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죽어야 하는데 살려고 하니 말입니다.
얼마 전 2월에 우리교회 교인 중에 두 명이
전문의 시험을 친 적이 있었는데,
둘 다 합격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내과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과였는데,
둘 다 상당히 어려운 분야였는데 합격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전문의 시험이 어떻게 보면 사법고시보다도 더 어려운데,
도대체 이 시험을 치기 위해서 얼마나 공부를 했습니까?
예과 2년, 본과 4년, 인턴, 레지던트 등등 합쳐서 10년 넘게 공부해야하는데,
아마 사법고시를 이 정도 준비하면 다 되지 싶은데,
물론 전문의 시험은 20%가 탈락하니
그 자체로서는 좀 낮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정신과나 내과 같은 경우는 특히 어려운데,
아무튼 합격을 했다는 것입니다.
둘이 서로 부부인데,
한 분은 이제 군의관으로 가야되고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분들이 자기들이 의사를 해서 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어긋나는고 하니,
자기는 결국 죽는다는 엄연한 현실이고
사실에 위배되는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왕 죽을 몸,
이 얼마나 10년을 넘게 준비한다는 것이 어렵습니까?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말입니다.
이렇게 고생해서 되었으니
남에게 의료로 봉사해서,
물론 돈을 좀 받는 봉사이지만 말입니다.
결국 그것으로 인생을 마감하라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좀 더 은혜를 받으면 신약을 개발하고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를 조금 더 많이 하겠지만,
결국은 죽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죽이는 방법 중에 하나가
'공무원' 이고 '전문의'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시험을 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일이 아니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미 죽을 몸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똑같은 전문의 시험을 치는데,
하나는 살고자 그렇게 시험을 치고,
다른 하나는 죽고자 시험을 친다고 하면,
도대체 어느 쪽이 현실에 맞고 미래에 맞느냐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확증된 것에 맞느냐는 말입니다.
역시 죽고자 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여자에게 장가갈 것인지 망설이지 말고,
물론 한 사람도 오겠다는 사람이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만,
아무튼 어느 여자에게 장가가서 한번 제대로 살아볼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어느 여자에게 가서 봉사하다가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이 과연 무엇입니까?
이것이 사도바울에게는 '연약' 이라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자기로 하여금 '연약한 자'로 만들어내느냐는 것입니다.
즉 강자가 아니라 약자로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를 강자로 만나면 되는데,
강자인 마누라를 만나게 되면 자기는 자동으로 약자가 되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강한 아내와 강한 남편,
이것보다 더 좋은 찰떡궁합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남자가 강자가 되어버리면,
자기가 강자임을 유지하지 위해서는
여자를 점점 더 핍박을 가하고 해서
약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연약한 가운데
주님의 능력은 더 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강한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연약하고 하니,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강도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그리고 여러 번 굶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자만이 대우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나 대비가 되는 내용입니까?
그것이 성경말씀이고,
그런 인생관으로 사도바울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고후 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고후 11: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목사님, 일단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놀면 됩니까?" 라고 하는 분이 꼭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이렇게 자기는 죽고자 하는 모습으로 살면,
그것은 노는 게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 아담이 확정되었다 ]
먼저 이렇게, '아담'이 확정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즉 우리들의 운명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법'이 확정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법은 하나님이 제정했습니까?
아니면 인간이 제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제정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를 불러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칠 것은 고치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 : 야, 너희들 법을 한번 만들어봐라.
인간들 : 예, 알겠습니다.
하나님 : 내 생각에는, 하루에 성경 3장 읽고, 기도는 2시간 정도로 하면 좋겠는데, 괜찮겠지?
인간들 : 너무 심합니다. 성경은 하루에 한 장으로 하고요, 기도는 1분 정도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법을 이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독단적으로 모세를 산 위로 불러서,
백성들은 고사하고 모세와도 전혀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십계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밥을 먹고살기도 힘든 이때에 법까지 주어버렸으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 신자들은
그야말로 짐을 곱빼기로 이고 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니라면 일요일에 교회에 안 나오고 마음대로 놀러가도 되고,
십일조도 안 해도 되고,
물론 여러분들은 원래 십일조 같은 것은 안 합니다만,
그리고 마음대로 술 퍼마시고 놀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좋을때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법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법이란 자기가 만든 것인데,
그리고 자기 주먹이 법이고 말입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고등학교까지 억지로 교회에 다니고 했는데,
교회에 가야 용돈을 준다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대학에 가게 되면 교회와 작별하게 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지금 자기는 사귈 친구도 많고 엄청 바쁜데,
교회에 가면 자기가 요청하지도 않은 법을 주니,
두 가지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일과 속된 일을 두 가지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일을 안 하면 지옥에 가고,
속된 일을 하지 않으면 취직이 안 되니 말입니다.
이렇게 양다리를 걸치면,
물론 나중에 다리가 찢어지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성(聖)과 속(俗),
이렇게 두 가지를 다 하려고 하니까,
젊은 아이들이 너무나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취직을 하면
일요일에 교회 가라고 쉬게 해줍니까?
그렇게 하다가는 직장에서 쫓겨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놀아도 겁이 나서 놀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 한 달에 한 번,
나중에는 두 달에 한 번, 넉 달에 한번,
이렇게 하다가 결혼할 때가 되면
주례나 부탁하고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고 하니,
성과 속, 여기에도 법이 있는데,
즉 천당에 가는 법과 취직해서 먹고사는 법, 그것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두 가지 법을 다 지키려고 하니,
나름대로는 힘이 들고 헉헉거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교회에서는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약을 올리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목을 졸라놓고는,
그게 어떻게 쉬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에게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이쪽 50%정도 지키고,
저쪽은 50%정도로 말입니다.
두 주는 교회에 나오고
두 주는 회사에 나가고 말입니다.
양적으로 조절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절을 하는데,
자기가 정하려고 하니 좀 양심에 걸리고 하니 목사에게 묻는데,
즉 상담 아닌 상담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목사는 뭐라고 합니까?
"안 되는데, 그래도 우짭니까?
너무 힘들지 않게 알아서 하이소"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이제 그 50:50을 적용해서 교회에 나오는데,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만 나오려고 하니, 너무 미안하고 해서
오후예배까지 참석하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보면
오후에는 또 불러내는 놈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후예배까지도 빼먹고 마는 것입니다.
헌금을 좀 더 하는 편법을 쓰기도 하고 말입니다.
"너 왜 오후예배에 안 보이지?" 라고 하면,
"나는 원래 오후예배에는 안 나오는데"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 교회에서는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대비책을 준비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화론' 이란 것입니다.
성화론이 무엇인고 하니,
"성화가 많이 된 사람들은
당신들이 원하는 복을 주십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성화가 복이 되는 규칙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니,
성화가 많이 된 사람들은
사업을 해도 돈을 잘 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화가 잘 되고 안 되고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고 하니,
현재 자기가 얼마나 많은 소득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성화론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득이 많은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이고,
이런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
그 교회에서 거룩하다는 행세를 하게 되고,
그런 사람은 장로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 오늘날의 성화론은? - 중세시대의 면죄부 !!
그러니 교회에서 이러한 성화론을 가르치면
어떤 점이 좋은고 하니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돈도 챙기도록 해주고,
직분도 챙기게 해주고,
또 헌금을 많이 하게 해서
양심이 거슬리는 것을 대체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있으니,
그야말로 중세시대의 '면죄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도 아울러 돈도 챙기고
사람도 챙기게 되고 말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고 하니,
하나님의 법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법이 없다면 지킬 것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 율법 - 너는 처음부터 죽게 되어있었어 !!
인간이 아무리 성화가 되어서 돈을 잘 벌어도,
의사가 되고 판사가 되어서 출세를 하고 해도, 설교를 잘하고 해도,
결국은 그 인간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법을 제대로 못 지켜서 죽는 것이 아니라,
"너는 처음부터 죽게 되어있었어" 라는 것을 지시하기 위해서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증된 법이 오게 되면,
이 법은 우리에게 죄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즉 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법이 옴으로 말미암아서
새로운 죄가 발생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번 3월 1일부터
정지선과 안전벨트를 경찰들이 집중단속을 한다고 합시다.
실제 그런 지침서가 각 경찰서에 하달되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계룡산에서 도를 닦던 사람이
면허증은 있어서 전혀 그런 것도 모르고 운전을 하다가 걸렸다고 해봅시다.
경찰 : 실례합니다. 안전띠 미착용입니다.
도사 : 예? 뭐라구요?
경찰 : 4만원 되겠습니다. 속히 납부해주시기 바랍니다.
도사 : 아니 전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경찰 : 예, 법이 바뀌었습니다.
도사 : ? ? ?
물론 정지선과 안전벨트에 관한 법은 이 전에도 있기는 했습니다만,
아무튼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도사는 전에는 이런 법을 몰랐기에 안전띠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제부터 문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안전띠는 법이 아니고 자기 안전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할지 몰라도,
그런 법이 없으면 누가 안전벨트를 하겠습니까?
귀찮고 답답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법 때문에 억지로 하는데,
그렇게 해서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런데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것조차도 못 벗어나게 하는
새로운 법이 또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죄가 되고 말입니다.
그러면 또 법이 추가되고
그러면 또 죄가 생기고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법이 추가되고 죄가 생기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예 법이 죄를 낳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 법 - 우리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
그러니 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죽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 라는 것을
단정짓기 위해서 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하는 말이,
"오 신이시여, 제가 전에는 절에 다니다가 이제 교회에 나왔습니다" 라고 하면서,
"목사님, 저를 축복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목사님의 설교가 무엇이었는고 하니,
다음의 마태복음 10장이라는 것입니다.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자기는 지금 교회에 나온 것이
남편 잘되고 자식 잘되기 위해서 왔는데,
그것이 너무나 정당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런 하늘의 법을 설교하니,
자기는 이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지키지 못하면 지옥으로 가야 되는데,
그렇다면 자기는 기껏 교회에 나와서 안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왜 지옥에 가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설교는 제대로 된 설교라는 것입니다.
지옥 가는 이유를 설명했으니 말입니다.
그 동안 이 사람은 환상 가운데 있었는데,
자기에게 법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기껏해야 교회에 나가는 것이 착한 일이 되니
천국에 가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모든 것이
다 저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고 자매고 모친이란 것입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지킬 사람이 누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눈에서 들보를 빼낼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아니 자기 눈에 들보가 있다는 것을 누구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까?
자기 눈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눈으로 자기 눈에 들보가 없으려면,
자기 눈에 들보가 없는 상태에서 확인해야 하는데,
이미 들보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러면 실제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자기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지금 제 말이 너무 어렵습니까?
아예, 듣기를 포기한 표정 같은데,
좀 쉬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헌금을 할 때에 자발적으로 한 것의 내용이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오는데,
그래서 어떤 청년이 교회에 다니면서
이 말씀대로 자발적으로 헌금을 했다는 것입니다.
10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 나온 청년이 하는 헌금을 보니
자기보다 훨씬 더 자발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는 왜 자기 헌금을 그렇게 스스로 했다고 생각을 했습니까?
그것은 그것과 대비되는 것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후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고후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섬기는데,
자기는 그만하면 효부라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동네에서는 자기가 제일 잘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며느리가 한 사람 왔는데,
그 며느리가 하는 효도는
자기가 한 것은 비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침 차려드리고 용돈 드리고 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온 종일 업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기존의 이 며느리는 환장한다는 것입니다.
졸지에 자기는 효부에서 죄인이(?) 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완벽한 법을 지킨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과연 예수님처럼 살라갈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자기가 법을 지킨다고 하는 차원에서 보지 말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법을 지켰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결단코 완벽하게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발각되면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 죄인 됨을 알기 위해서는? - 사고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면 !!
그러니 자기의 죄인 됨을 알기 위해서는
죄를 일부러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말씀으로 살면 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예수님의 말씀 지키기,
그리고 또한 예수님의 삶이 나와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하는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김 집사와 청년을 본다는 것입니다.
같은 인간들끼리 비교하면서,
"내가 너보다 낫다. 성화가 되었다" 라는 식으로
자기 정당화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체의 열매가 나오는데,
이 육체의 열매는 시기와 질투 등등 이런 것인데,
만약에 자기가 선교사라면,
자기가 이 만한 고생을 하니 선교사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선교사들이 와서 고생하는 것을 보니,
자기는 마구 놀았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마음속에 그만 부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시기가 생기고 질투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육체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지금 아이가 저렇게 그릇을 만지고 떠들고 해도
더 별난 아이가 오면,
이 아이는 그만 얌전한 아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갈 5: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아니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예수님 앞에 설 때에 과연 누가 그분 앞에서 의롭다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죽어서 흘리신 그 피가
우리들의 시기심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저 예수만 없으면 나도 괜찮은 인간인데"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예수가 잔소리하고 귀찮게 하니 떠밀었는데,
그래서 생긴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바로 그 현장을 그대로 포크레인으로 떠서
오늘날 우리에게 몽땅 가져와 버리면,
즉 십자가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로 떠민 자가 누구인지를
다같이 우리에게 터트려 버리면,
결국 우리가 동일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발각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누구라도 예수님처럼 말씀을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말씀을 집어넣어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법의 역할이 있는데 무엇인고 하니,
이게 좀 중요한데,
법은 우리에게 기준을 세우고,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의를 만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준을 세우게 하고,
거기에 도전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로서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일을 법이 한다는 것입니다.
◈ 법의 역할 - 날마다 새로운 자아를 만든다 !!
예를 들어서,
목사가 "오늘부터 40일 동안 특별새벽기도입니다" 라고 선포를 해버리면,
교인들은 40일이라는 기준을 정하고 도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4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도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목사의 말이 없었다면,
그냥 집에서 잠자고 있을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쁜 장로라고 해도
"바쁘지만, 그래도 목사가 저렇게 하니 일주일이라도 한번 해보지" 라고,
바로 그런 일을 법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는,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정죄하고 저주하는 일도
법이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기의 도전하는 것을 두고
'자아' 라고 하는데,
그래서 법은 날마다 새로운 자아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요구조건에 부응하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교회에 매주마다 나온 사람은
목사님의 설교를 많이 들어서 성경내용을 많이 알기 때문에,
"이것은 해야 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고" 라고 하면서 아는데,
그런데 군대에 가서 2년 동안 한번도 교회에 나가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그 동안 들었던 법의 기준을 다 잃어버렸는데,
그래서 자기 행동이
과거 2년 전에 군에 가기 전에 목사님이 설교한 그 기준에 맞는지 안 맞는지
그 기준조차도 날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자기 욕망밖에 없는데,
그러니 자기 욕망에 합당한 자아상이 구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왜 담배를 피워?" 라고 야단을 치면,
군대에 가기 전엔 "아이쿠, 담배를 피우면 안 되지" 라고 하면서 담배를 끄던,
그런 기독교 청년으로서의 자아상을 가지고 있던데,
그런데 군에 갔다오고 난 뒤에는
"담배를 피우면 좀 어때. 다들 피우는데" 라고 하는
새로운 자아상이 확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자아상이 말입니다.
그러니 '자아' 라는 것은 누가 만듭니까?
그때 그때마다 법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기와 5년 뒤의 자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아상은 다 다르지만
끝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화투를 전혀 못 치는데
들은 소문에 의하면 고스톱이 지방마다 다르다고 하는데,
대구에서 치던 사람이 광주에 가서 치는데,
점수가 나서 자기는 이긴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쪽에서 하는 말이, "여기서는 법이 다르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로마에 합당한 자아상을 구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아는 어떻게 됩니까?
자아는 언제나 물렁물렁하다는 것입니다.
건드리면 푹 들어가고 또 튀어나오고,
자기 자아를 종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 라고 하니 자꾸 어렵게 들리지 싶은데,
그냥 '나'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 '나' 라는 자아 - 언제나 타인에 의해서 변화를 강요받음 !!
이러한 '나'는 종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들쑥날쑥하니 말입니다.
자기 변명과 자기 핑계와 자기 위장술에 능통하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항상 들쑥날쑥하니 그렇다는 말입니다.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돌아가시게 되면
남은 가족들이 제일 난처한 것이 있는데,
장례식에서 억지로 울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던 부모의 경우라면 모르지만,
평소에 감정이 안 좋던 사람이 죽었다면
사실 웃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웃다가는 맞아 죽을 분위기이니,
우는 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요구하는 그런 자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순간 그 법이 요구하는
자기의 새로운 자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가 종용히 불러서 하는 말씀이,
"너, 평소에 할아버지와 감정이 너무 안 좋았지.
사실 그건 다 이유가 있었단다.
아무튼 이번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너에게 유산을 16억을 남겼단다" 라고 하면,
그때부터는 "할아버지!" 라고 하면서
제대로 통곡을 하면서 운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할아버지가 나를 미워한 것은 인간이 되라고 그렇게 한 것인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럼 교회에 3억을 헌금해야지" 라고 해놓고는
돌아서서는 "너무 많지. 1억만 할까? 아니 5천 만원..." 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자기조절, 자기흥정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에 교통사고로 죽는다고 할 때,
사실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변하니,
하나님을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를 향한 손자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졌을 때 죽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그런 순간에 죽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사람이 자살하면 천당 갑니까, 지옥 갑니까?"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똑같은 소리인데,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이
자기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그 사람이 어떤 '확증'을 믿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그 어떤 확증하심을 믿었느냐는 것입니다.
◈ 자기의 '변화'를 믿었는가? 성경의 '확증'을 믿었는가?
다시 말해서, 자기의 변화를 믿었는가?
"아침에는 하나님이 좋다가 저녁에는 밉고" 라는 말입니다.
아니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확증을 믿었느냐는 말입니다.
이러한 확증을 믿은 사람이라면
목매어 죽던 차에 바쳐서 죽던 상관없이 천당에 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생의 일부이기에 말입니다.
인생의 '끝' 이라는 일부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결단력으로 천당에 가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주님의 확증하심이 믿어질 때,
그래야 비로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힘으로는 확증이 아니라
항상 변화를 믿기 때문에 말입니다.
사실상 인간의 능력으로는 변화를 믿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데,
그런데 성경 말씀은 그런 변화와 상관없이
확증을 믿느냐고 추궁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주신 확증을 받아들인 자가 곧 구원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인간의 변화와
주님의 확증하심의 다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이미 인간에게 확증된 것 3가지 !!
①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모두 죽는다 !
② 법을 가지고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
③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하신다 !
세 번째로, 무엇인고 하니,
세 번째를 하기 전에 먼저 첫 번째부터 다시 봅시다.
모두 잊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첫째가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누구나 다 죽도록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의사든지, 판사든지, 목사든지, 그리고 가정주부이든지 말입니다.
인간은 결국에는 모두가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그 코스가 확증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코스를 빈 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법을 동원해서, 즉 "너는 왜 죽어야 하는지 아는가?" 라고 하면서,
법을 통해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확증되었다는 말입니다.
법을 가지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말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 확증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일 중요한 부분들을 강의하려고 하니,
잠이 오더라도 조금만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눈꺼풀이 무겁더라도 테이프를 눈에 바르던지 해서 좀 참으시기 바랍니다.
아담의 이름은 아담이고 그 내용은 흙인데,
그렇다면 아담을 죽게 하는 것은,
아담이란 이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이 무엇입니까?
아담이라는 흙이 담고
그 이름의 뜻이 작용해서 아담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면서 정했으니 말입니다.
그러한 능력이 임해서
아담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그 안에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름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확증적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확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흙이라고 확증한 동일한 능력으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늘에서 확증된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 이름을 가졌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주님의 이름이 임한 사람은
주님의 이름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말입니다.
아담의 이름에서 능력이 나오듯이
주님의 이름에서도 생명을 주는 능력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강의내용이 이해가 됩니까?
우리 스스로 '아담' 이라는 이름을 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보고 '흙' 이라고 라벨을 갖다 부친 분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름만 덜렁 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 힘없는 부모들이 하는 짓이고,
하나님은 그 이름에 합당한 길을 가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님의 이름의 능력이 이미 확증되어서 적용 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고 수시로 뭘 부르는고 하니까,
이러한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다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옵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예수님을 '주' 라고 시인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성령이 임해서 그렇지
다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인해서 이런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 능력이 나왔는데,
자기에게서부터 나온 능력이 아니고 말입니다.
자기에게는 아담의 죽는 능력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너는 구원받았어" 라고 확증해서 주신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의사가 수술을 하고 하니
누군가가 말이 "참 의사 선생님은 수술을 잘 하네요.
그러니 오래 사셔야 합니다" 라고 하면,
성령을 받은 의사 같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수술을 잘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저는 당연히 흙으로 돌아가야 하고,
수술하는 그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데,
그런데 주님의 이름 때문에 이렇게 살아갑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위의 확증된 3가지가 다 나오는데,
첫 째로 자기는 흙이라는 것과,
둘 째로 수술한다는 법이 등장하고,
셋 째로 주님의 이름으로 영생을 얻어서 구원을 받는 것,
이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의사는 이 확증된 3가지를 다 믿으니,
이런 사람이 바로 '성도' 라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는 자기의 변화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어떤 것을 확증해주셨는지,
그것을 믿는 자가 성도라는 것입니다.
"①②③"를 말입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가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마지막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강조해도,
집에 돌아가면 또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형편, 더 나은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매진하고 수완을 부릴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어디에 가게를 차리면 돈이 잘 벌리는지 말입니다.
◈ 인간의 새로운 변화추구에는 과연?
인간은 이렇게 항상 변화를 추구하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누군가 자기로 하여금 가만히 두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도록 하는데,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고,
더 넉넉한 것, 더 풍족한 것을 많이 소유하도록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합니까?
누가 은행에 보다 더 많은 잔고를 요구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말입니다.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우리를 이렇게 계속해서 더 풍요하고 넉넉하도록 부추기는데,
그렇게 하는 주체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것입니다.
사실 배후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우리를 부추기면 우리는 기분이 좋은데,
살아가는 보람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런 부추김이 없다는 시체라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 이라는 것인데,
이 희망이 바로 신(神)이라는 말입니다.
현대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신은 이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희망은 달성되면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신이 죽어버리니 말입니다.
◈ 신의 특징 - 날마다 새로운 희망을 제공해주어야 !!
그래서 신은 새로운 희망을 생산해주어야 신인 것이지,
희망을 성취하게 하고 만족시켜주는 그러한 신 같으면
시시하게 여기고 별로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의 특징은,
날마다 새로운 희망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것은
새로운 희망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제공하는 신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
래서 감히 '희망=신' 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희망이 없이는 살지를 못하는데,
어떤 사람은 여기에 대해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를 소망하라는 말씀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것과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늘나라를 소망하면 자살하면 되지 않습니까?
제 말이 맞잖아요?
그런데 정작 이런 희망은 교인들이 가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죽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고,
그런 소망 말고,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동안에
누가 신의 이름으로 그런 희망을 좀 부추겨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feeling so good!" 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와서 헌금하는 보람도 느끼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도대체 누가 뒤에서 우리를 부추깁니까?
사실 그것은 누가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나' 라는 것이 항상 들썩들썩하면서
자기가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기의 희망에 대해서 결제만 해주면 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뒷바라지만 해주면 되고,
그 주동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 포스트모더니즘 - '욕망' 이란 이름의 배후를 발견하다 !!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철학에서는 밝혀내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두 글자로 '욕망' 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왜 현대철학에 들어와서 이 욕망이라는 것이 밝혀졌는고 하니,
그러면 과거에는 왜 몰랐을까요?
불교도 있고 하는데 말입니다.
옛날에는 이 욕망을 의식에 관한 것으로
윤리와 도덕의 문제라고 여겼는데,
그래서 공자가 "예절을 지켜라" 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남과 사귈 때 자기 욕망을 적당한 선에서 조절하라는 말입니다.
뷔페식당에서 음식을 손으로 잡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에티켓에 어긋나니 말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옷을 벗어도 되는데,
그런데 남과 같이 있을 때는 입어야 하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자기 욕망을 스스로 조절하면서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이웃 사람들이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여겨준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면,
그것이 그 사람의 장래를 편하게 보장해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윤리와 도적으로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 프로이트 - 여러분, '무의식의 세계'가 있습니다 !!
그런데 프로이트가 나오면서,
그가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무엇을 발견했는고 하니까,
도덕과 윤리의 의식단계가 문제가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의식의 세계는 손을 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어쩔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이성에 해당되는데,
그런데 무의식은 감정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행동하는 것이 이성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고,
과거에는 그렇게 윤리와 도덕으로 다스릴 수가 있었는데,
그것이 그 당시 종교이고 철학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엉터리였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아니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에
이성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감정으로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의 진짜 원초적인 행동은
감정의 발산이지 이성의 발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세계가 드러나면서
드디어 정설(定說)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같은 자식이라도 좋은 놈이 있고 덜 좋은 놈이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말입니다.
밥을 먹을 때 똑같이 물을 엎질러도,
미운 첫째 놈이 그렇게 하면, "에라, 이 놈아. 넌 밥도 먹지마" 라고 하지만,
사랑스러운 둘째 놈이 하면, "조심해야지. 그럴 수도 있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의식에서 윤리와 도덕이 그렇게 하는데,
하지만 문제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좋은 자식이 따로 땡기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 자꾸만 밀리는 건너서는 안 되는 선 !!
흔히 말하기를,
"건너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 라고 하는데,
윤리와 도덕에서는 이런 말이 통하지만,
그러나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건너서는 안 되는 선이 자꾸만 이동한다는 것입니다.
쭉쭉 민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컴퓨터 오락을 하는데,
엄마나 한 시간만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한 시간을 했는데,
그런데 엄마가 볼일이 있어서 하루 밤을 자고 온다고 하니까,
그만 한 시간을 더 한다는 말입니다.
즉 그 선을 한번 넘어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보니 너무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다 있느냐는 말입니다.
자기가 전에 전혀 맛보지 못한 쾌감을 느꼈다는 겁니다.
이왕 선을 넘었으니 그 다음은 3시간이 선이 되고,
그 다음은 4시간이 선이 되고,
이렇게 선이 그때 그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 선을 자기가 임의대로 조정한다는 말입니다.
◈ 리비도(욕망) - 죽음의 욕망과 삶의 욕망이 !!
이것을 '리비도' 라고 하는데,
이 리비도(욕망)에는
죽음의 욕망과 삶의 욕망이 있다는 겁니다.
사실 둘 다 같은 말이지만,
먼저 죽음의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 죽음의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서 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죽음, 즉 자살 충동을 대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을 죽인다는 것이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에게는 죽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그런데 자기가 죽어버리면 그것은 비극이니 자기를 죽이지 않고
남을 미워하고 질투함으로 그것에 대해 대리만족을 하는데,
이것을 두고 "타인을 죽임으로
자기 죽음을 대체한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축구를 해도
유독 한일전을 하면 "죽여라" 라는 고함 소리가 더욱 크고,
야구를 해도 라이벌이 1루에서 2루로 가다가 아웃이 되면,
심판은 '아웃' 이라고 선언해도, 관중들은 "죽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편이 아웃이 되면, '에이' 라고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가 죽고 싶은 충동을
타인에게 전가해서 대신해서 채우게 되는데,
이것이 스포츠가 될 수 있고,
문학이 될 수 있고,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도 될 수 있고 말입니다.
또 인간에게는 살고자 하는 욕망도 있는데,
이런 삶의 욕망은
현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생존본능' 이라는 것입니다.
생식적 본능으로, '성적본능' 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당신은 왜 여자를 밝힙니까?" 라고 하면,
윤리와 도덕의 차원에서는 되는데,
그런데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묻지를 마라는 것입니다.
아예 질문자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이 무의식이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자아가 무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욕망이 땡기는 데로 그때 그때마다 자아가 재구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왜 그랬지?" 라는 말은 되지만,
"내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라고 말은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윤리와 도덕의 의식에 속한 문제이지,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입니다.
◈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그 때 그 시점에서 죄를 지을 때가 되었기 때문에 !!
영화배우 이은주가 자살할 때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때도,
자기가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죄가 와서 죽이라고 시켰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욕망이 지시해서 죽였다는 말입니다.
더욱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그 때 그 시점에서 범죄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범죄를 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사람이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동일한 욕망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나쁜 짓은 두 달 뒤로 미루어져있고,
그 사람은 우리보다 두 달 앞에 그런 나쁜 짓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더 나쁘고 덜 나쁘고 하는 것이 없고,
다만 그 사람은 자기를 해신해서
그것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표시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본색을 드러낸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강의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것 아닙니까?
인간은 동일하게 죄인인데,
각자 다 나름대로 죄를 밝히는데,
A라는 사람은 A라는 데로 죄를 드러내고,
B라는 사람은 B라는 데로 죄를 드러내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더 나쁘고 덜 나쁘다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동일한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살인죄를 저질렀다면,
만약 자기가 그 상황 속에 있었더라도
자기도 그런 사고를 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같은 한 통속이기에 말입니다.
모두 동일한 아담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기는 지금 그런 살인죄를 범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살인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지금부터 조금 어렵더라도 이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즉 그 사람이 살인을 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같으면 그 순간에 살인을 하지 않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자기가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살인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주의 이름으로 이미 확정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가는 건 좋은데,
그런데 자기 같으면 그런 창녀 짓을 하지 않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자신의 무의식을 모르기에 하는 철없는 생각이란 겁니다.
부모가 이혼을 하고 어머니는 도망을 치면,
누가 있어도 그런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주 못생긴 추녀가 시집을 가고 싶어서
남자만 보면 애교를 떨면서 오버액션을 취하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예쁘게 생긴 여자가 보고서 하는 말이,
"여자 망신은 다 시킨다" 라는 것입니다.
자기 같으면 남자에게 저렇게 빌붙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못생긴 여자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도 한번 못생겨봐라. 나 같이 하는지 안 하는지" 라고 말입니다.
◈ 사람은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 다르다 !!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남의 사정을 전혀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살아온 환경이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남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처음 결혼하면 그렇게 많이 싸운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만.
사실 이렇게 싸우는 것도 다 각자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게 싸움일 수도 있고 애정행각일 수도 있고 하지만 말입니다.
사람은 각자 다 자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좋을 때는 서로 빨고 난리를 치지만,
그러나 조금만 삐지는 일이 생겨서 사이가 나쁠 때는
그만 원수가 되어서 갈라서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서로 살아온 환경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친구야, 거치른 벌판을 달려가자" 라고 해도,
지금 그 친구가 어려우니 도와준다고 할지 몰라도,
막상 그 친구가 잘되면
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근처에도 안 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죄가 튀어나올지,
그것이 의식에 속한 문제 같으면 윤리와 도덕으로,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지식으로 커버가 되는데,
"스톱. 멈춰라. 이 선을 넘어서면 안돼"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인간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되어서,
"스톱. 멈춰라" 라고 해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앞으로 가다보면,
성도의 경우에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고 하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아하, 그래서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하는구나"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라고 해서 완전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성도도 역시 무의식의 산물로,
그래서 감정 따라 살아가는데,
컨디션이 좋고 기분이 좋을 때는 기도도 잘되고 하지만,
그러나 몸이 피곤하면 기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잠이 오고 피곤하면 강의가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하지만 몸이 가뿐하면 강의가 쏙쏙 다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 강의를 잘 들으면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확증된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이런 리비도는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 라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자식이 하나 있는데,
아버지가 그 아이보고 하는 말이,
"너는 내 자식이지만 어떻게 미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느냐?" 라고 한다면,
그 자식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버지, 제 마음은 저의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잘못입니다.
어떻게 아버지 기준으로 저를 매도합니까?
그러시면 섭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고치라고 하십니다"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은 목사와 교인들의 대화내용입니다.
한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목사 : 여러분, 거룩하시기 바랍니다.
교인 : 목사님, 어떤 것이 거룩입니까?
목사 : 제가 살아보니 이런 이런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교인 : 목사님의 거룩은 목사님의 경험이고, 제가 보기에는 거룩의 축에도 못 드는 것 같습니다.
목사 : ? ? ?
교인 : 목사님, 우리 김 집사님이 목사님보다 훨씬 더 거룩합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좀 고치세요.
목사 : ? ? ?
여러분,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분명 교인들의 말이 옳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최고의 법인데,
그러니 예수님의 행적과 예수님의 삶을 가지고서
거룩이라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런데 목사가 자기 폼을 낸다고 자기 경험을 가지고
그렇게 건방을 떨면서 이야기를 해버리니,
교인들이 웃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를 당장 그만 두어야 하고 말입니다.
목사님도 트럭 운전을 한번 해보라는 겁니다.
대번에 욕이 튀어나오지 말입니다.
집에서 매일 같이 노니까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말이지,
하루종일 노가다하고 몸이 파김치가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 싶으면 바로 잠이 들어버리고 하는데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로 엎드려지니 침이 흘러서 책만 다 버리고 말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자기 체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해석을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는 성화가 되었으니 자기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중요한 시간에 와서 갑자기 음성이 높아지고 흥분하는데,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살아온 모든 것은 자기가 살고자 하는 자기 위주로 나가는데,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나오는데,
성경도 역시 확증적인데,
자기 욕망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그것을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욕망에 관심을 두면 이단이라는 말입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자기가 어떻게 자기를 관리하고 자기를 조절하느냐는 것,
그것이 바로 마귀가 노리는 점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소위 '성화' 라는 이름을 빙자해서 등장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우리가 누구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누구의 표적이 되는고 하니,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표적이 되고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12장을 보겠습니다.
(계 12: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계 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계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계 12: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계 12: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마지막 때에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핍박이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런 핍박이 온다는 것은 취직을 하고 못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런 세상적인 먹고사는 어려움이 아니라,
그것은 고생이지 고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생은 누구나 다 한다는 것입니다.
개척교회를 한번 해보세요.
얼마나 힘이 드는지 말입니다.
장사를 해도 그렇고 말입니다.
◈ 고난 - 오로지 예수 이름을 포기하지 않아서 발생되는 시선과 눈초리 !!
'고난' 이라는 것은,
오로지 예수 이름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외부에서 그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모든 시선과 눈초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 각자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데,
유독 자기 혼자 예수님을 자랑하고 그분의 義만 의지하는, 이런 데서 오는 외로움,
그래서 좁은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위의 본문에 의하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 전쟁' 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성도는 그런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 성도 - 영적 전쟁의 TARGET !!
제가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하지만 마지막 결론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개인적으로 여기지 말고,
우리는 우리를 자기 개인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누구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의 타켓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넓게 생각하고 전체적으로 포괄적으로 생각해야하지,
개인적으로 자기가 어떻게 자기를 조절하고
착하게 살 것인지를 고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개인적으로 자기의 죄악 된 욕망을
어떻게 억누를 것인지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마귀가 즐기는 것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우리가 확증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서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교재에 보면,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교재 - [ 따라서 여자란, (마리아도 아니고 하와도 아니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현 세상을 지배하는 뱀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성도이다 ]
그러니 성도는 영적인 것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말을 빼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지금까지 무의식의 리비도(욕망)이라는 철학적 용어를 사용해서 이야기를 했던,
그러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것을 빼버리니,
인간에게 무의식이 있고,
그 무의식을 주체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무의식이 자아를 만들고,
그래서 자아가 무의식을 관리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그를 미워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이런 무의식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자기는 무의식이든 뭐가 되든 자기는 죽게 되어있는데,
다만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부셔서 예수 안에서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그 얼마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미워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타켓트로 성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죽어가지만,
그러나 영생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강의를 마치면서 당부하고 싶은,
여러분들의 신상에 그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개인적인 잘못이라고 스스로 자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래 잘못된 것이고 엉터리인데
뭘 또 개인적으로 돌리고 말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내하고, 절제하고, 고치고 하면 더 나아진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더 나아지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이런 일들을 통해서,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마.
효력이 없어. 달라지지도 않는데 말이야" 라는
유혹과 시험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전혀 모르는 할머니가 자기를 양자로 입적해서 유산을 10억을 남겼는데,
그런데 이 분이 하루는 목사님을 찾아와서,
"목사님, 그 동안 제가 돈이 조금 있다고 너무 까불었지요" 라고 한다면,
목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고 하니,
"그 동안 당신은 돈이 없어서 안 까불었지, 원래 까부는 인간입니다.
다만 제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까불던 그렇지 않던
아직도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이 있다고 건방스럽게 까불고 하는 것은 잠재워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마귀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인데,
"봐라, 너는 그런 짓도 하잖아. 또 선을 넘었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라고 하면서,
마귀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그 사람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에 대해서
스스로 손을 떼도록 만드는 것인데,
즉 마지막 때에 우는 사자와 같이
바로 그런 점을 노린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마다 목사는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죄인의 괴수라도
오로지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우리를 죽이는 동일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베풀고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참고 절제하고 오래 견디는,
그런 행함이 아니라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텐데,
매일 같이 우리는 자기 중심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철없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에 보니 이런 철없는 자들도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확증적이 되었사오니,
앞으로 저희들 신상에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런 확증됨을 거부하지 않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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