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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고려국(大高麗國)
○ 조선인(朝鮮人)은 페르시아 계, 백인(白人)이라는 “아시아/조선”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습니다.
물론 조선(朝鮮)과 관계(關係)된 진실(眞實)규명(糾明)이 어렵다보니, 흑백(黑白)사진(寫眞) 몇 장, 몇 장의 고지도(古地圖), 몇 분의 옛 기록서, 말과 언어의 전음(轉音)과정, 샤머니즘의 원류(原流)비교(比較)등등으로 추정(推定), 추리(推理), 추측(推測)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사실(事實)이 아닌 진실(眞實)인 냥 합니다.
그곳지방이 예전엔 불교(佛敎)유적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은 이미 20세기 초에 밝혀진 내용이며, 20세기 초 이곳을 처음 유적조사를 한 서구(西歐)인들의 보고서(報告書)를 보면, 이곳지방은 이미 그 이전 역시 지금과 같은 지형지세(地形地勢)였다는 것이며, 또 일천(一千)년 전, 이천(二千)여년 전의 지형지세(地形地勢) 기록과도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조선(朝鮮)은 동방(東方)에 있었으며, 그 동방(東方)으로 구분한 중심(中心)지나 중심선(中心線)은 어디였을까?
『조선(朝鮮)이 동방(東方)에 있었다는 것을 진실(眞實)』이라고 한다면, 또 『“중앙아시아/조선”이 맞다.』고 한다면, 그곳 역시 “동방(東方)”지역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 동방(東方)으로 구분(區分)지을 수 있는 중심(中心)이 되는 곳은 어디일까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해설(解說)은, 고증(考證)과 근거(根據)와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없는 “말로 끝나는 해설(解說)”을 벗어 날 수 없는 한계(限界)를 가질 수밖에 없다.
‘아랍’지방에서 사용(使用)하는 월기【月旗 : 초생 달이 그려져 있는 기(旗)를 뜻하며, 이는 굉장히 오래되었다고 한다.】는 『태양이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동방(東方)은 『태양이 올라오는 곳』이란 옛 철학(哲學)에서 시작된 것이다.
또 조선인(朝鮮人)이 백인(白人)이란 말은 백인(白人)을 우월(優越)시하는 어떤 잘못된 것에서 출발(出發)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萬若) 이러한 것이 가미(加味)된 것이라면, 이건 아주 중요(重要)한 문제(問題)다. 왜곡(歪曲)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아보겠다는 것이, 반대로 왜곡(歪曲)된 역사(歷史)를 다시 왜곡(歪曲)하여, 혼돈(混沌)으로 몰아넣는 것이니 말이다.
조선(朝鮮)은 방대(厖大)한 영토(領土)와, 수많은 종족(種族)으로 구성(構成)된 “왕조(王朝)”였으므로, 그 속에는 “흑(黑)백(白)황(黃)”인종들이 함께 섞이어 살았다. 그러나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구성(構成)하고 있던 군주(君主)의 혈통은 결코 “백인(白人)”이 될 수 없다. 이것은 “혈통(血統)”사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며, 만약 “백인(白人)계열‘의 인종(人種)이었다고 한다면, 서구(西歐)열강(列强)들에 의해 비참(悲慘)하게 해체(解體)되는 과정(科程)이 무척 순탄(順坦)하게 이루어 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옛 조선(朝鮮)으로부터 계속된 왕조(王朝)와 고려(高麗) 및 조선(朝鮮)왕조의 혈통(血統)은 결코 “백인(白人)이나 흑인(黑人)은 아니었다.”는 것이 역사서(歷史書)의 증언(證言)이다.』
이러한 증거(證據)는, 아시아/조선에서 말하는 몇 분의 형상(形象)이 역설적(逆說的)으로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著者) “김부식(金富軾)”
그의 얼굴은 검은색이었고, 덩치가 무척 크고, 장대했다고 하는데, 이 분의 형상(形象)이 특이(特異)하기 때문에 그 특이(特異)한 점을 말한 것이다. 만약 이 분의 형상(形象)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과 같다면, 기록자는 기록할 필요성(必要性)이 없다.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던 사람들과 다르게 특이(特異)한 점이 있으니 기록한 것이다.
㉡ 이순신(李舜臣)의 수염이 붉다.
이 분이 실존(實存)한 인물이었다면, 만약 이 분의 수염이 일반사람들처럼 “까만”색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말했을까? 이 분의 “수염”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붉은 색”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과 다르니 기록했을 것이며, 이는 이 분에 대한 숭상(崇尙)에서, 과장(誇張)된 표현(表現)도 있었을 것이란 면도 생각해 보았을까? 만약 이 분의 수염이 “까만 색”이었다면, 기록자는 이 분의 수염이 “석자”였다는 말을 했을 수도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필요(必要), 또는 이용(利用)할 때는 항상 각색(脚色)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 역사서(歷史書)에는 간혹, 이런 특이(特異)한 체형(體形)을 가진 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렇게 특이(特異)한 형상(形象)을 가진 자는, 특별(特別)한 재능(才能)을 가진 것으로 묘사(描寫)되어 있다는 점을 사전(事前)에 점검(點檢)해 보고, 주장(主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최후(最後)의 황비(皇妃)
민비(閔妃)라고도 하고, 민 황후(皇后)라고도 하는데, 이 분의 초상화(肖像畵)가 가짜라는 파문(波紋) 때문에, 또 이 분이 『“백인(白人)”이었다.』등등 화제(話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분은 안타깝게도 일제(日帝)의 계획(計劃)된 모략(謀略)으로 “낭인(浪人) 곧 자객(刺客)들에 의해 비참(悲慘)하게 살해(殺害)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국가적(國家的) 계획적인 살인(殺人)사건에, 그 분의 초상화(肖像畵)를 남겨 놓았을 리 없다는 것쯤은 상식적인 일 아닙니까!
일제(日帝) 입장(立場)에서 자신들이 계획(計劃)하고, 자객(刺客)들에 의해, 황후(皇后)가 살해(殺害)되고, 그 초상화(肖像畵)가 백성들이 보아지게 되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그 정도(程度)도 예측(豫測)못할 자들이라면, 식민지(植民地) 지배(支配)란 없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시중에 돌아다니는 ‘초상화(肖像畵)’라는 것이 모두 가짜라는 것이지요. 풍문으로 들은 것을 그린다거나, 황후(皇后)를 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렸다거나, 이런 것들이지요. 그러니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 『조선(朝鮮)의 역사! 그 진실(眞實)을 찾자』는 것에, 어떤 제약(制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본인(本人)도 환영(歡迎)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그마한 것, 아니 더 조그마한 것일망정, 근거(根據). 증거(證據). 고증(考證)등을 필요(必要)로 합니다. 주장(主張)하는 것이 본질(本質)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증명(證明)치 못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조선(朝鮮)의 역사(歷史)! 진실(眞實)의 조선역사(朝鮮歷史)”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본인(本人)도 알고 있는 내용(內容)이나, 『조선사(朝鮮史)를 마치 판타지세계와 같은 내용으로 생각하는 분도 계시고, 마치 이 세계(世界)가 계획(計劃)된 자의 조종(操縱)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믿고 게시는 분도 계시는데』, 살아있는 생물이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人間)집단을 계획적으로 조종(操縱)한다는 정신세계는 소수(小數)인들의 뇌리(腦裏)에서 파생(派生)된 것이며, 이를 다른 부류들이 적당히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조선사(朝鮮史)는 인간(人間)의 발자취 그 이상(以上)도, 그 이하(以下)일 수도 없는 그저 평범(平凡)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손(天孫)인 냥 한다거나, 늑대나 이리의 후손(後孫).........뭐 이러한 것들은 선대를 미화(美化)한다거나, 상대(相對)을 업신여기는 풍조(風潮)에서 기인(起因)한다는 것쯤은 알면서, 조선사(朝鮮史)를 공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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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사(高麗史) 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의 고려(高麗)에 관한 옛 역사서(歷史書)를 보다보면,
『천 덕 군(天德軍)이니, 귀 덕(歸德)장군(將軍), 귀의(歸義)장군(將軍), 유원(柔遠)장군(將軍), 회화(懷化)장군(將軍), 귀 순주(歸順州)』니 하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이것을 이해(理解)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예문(例文) 몇 개를 보면서, 계속해 보자.
(1)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문종 / 《신해 25년(1071), 송 희 녕 4년ㆍ요 함 옹 7년 : 夏四月,西女眞,酋長奴于達等十人,來獻土物各賜職,麻胡達等十八人,來獻土物,加歸德將軍,賜例物 : 여름 4월에, 서(西)여진 추장 노우 달(奴 亏 達)등 1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니 각각 직위를 내려주고, ‘마 호 달(麻 胡 達)’ 등 18명이 와서 토산물(土産物)을 바치니, 『귀 덕(歸德)장군』으로 올렸으며, 전례에 따라 물품을 내려주었다.》
(2) 고려사절요 / 문종 / 《계축 27년(1073), 송 희 녕 6년ㆍ요 함 옹 9년 : 二月,東女眞,歸順州都領古刁化等,率衆內附,乞爲郡縣,賜古刁化,姓名孫保塞,授懷化大將軍,其餘,皆賜姓名及爵. : 2월에, 동여진, 귀순주도령(歸 順 州 都領) 고 조화(古 刁 化)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들어와 복속(내부)되어, 군ㆍ현이 되기를 청하니, 고 조화에게 ‘손 보새 (孫 保 塞)’라는 성명을 내려서, 회화대장군으로 제수하고, 그 밖의 무리에게도 모두 성명과 작을 내려주었다.》
(3)《九月,翰林院,奏,東女眞,大蘭等十一村,內附者,請爲濱,利,福,恒,舒,濕,閩,戴,敬,付,宛十一州,各賜朱記,仍隷歸順州,從之. : 9월에, 한림원이, 아뢰기를, "복속된 동여진의 대란(大 蘭) 등 11촌을, 빈(濱)ㆍ리(利)ㆍ복(福)ㆍ항(恒)ㆍ서(舒)ㆍ습(濕)ㆍ민(閩)ㆍ대(戴)ㆍ경(敬)ㆍ부(付)ㆍ완(宛) 11주로, 만들어서 각각 주기를 내려주고, 이어 귀 순 주(歸 順 州)에 예속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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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나오는 “귀 덕(歸德) 장군(將軍), 회화(懷化)장군(將軍), 귀 순주(歸順州)”외에 또 “귀 의주(歸義州), 귀의군(歸義軍), 귀 덕 주(歸德州)”등도 대륙 사(大陸史)에 등장한다. 도대체 이러한 지명(地名)을 차용(借用)한 직책(職責)은 무엇이며, 그 지명(地名)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선(于先), 이러한 지명(地名)이나 직책(職責)이나, 관직(官職)은 “반도(半島)와 관련(關聯)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야기를 계속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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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 덕(歸德) : (1)에서 나오는 서(西)여진(女眞) 추장(酋長)에게 내린『귀 덕(歸德)장군(將軍)』이란 호칭(呼稱)에서 “귀 덕(歸德)”이란 무엇일까? “귀 덕(歸德)”이란 지명(地名)이며, 귀 덕 수(歸德水)가 흐르는 지역을 말하며, “귀 덕 수(歸德水)”는 바로 황하(黃河)를 말함이며, 그곳은 “귀 덕 현(歸德縣)”이다. 또 “봉류 하(逢留河)”라고도 한다.
곧 황 하(黃河) = 귀 덕 수(歸德水) = 봉류 하(逢留河)이며, 이곳은 감 숙성(甘肅省) 경양(涇陽)현 동북(東北)이며, 현 영하 성(寧夏省) 황하(黃河) 연변(沿邊)이다.
이곳을 흐르는 황하(黃河)를 “귀 덕 수(歸德水)”라 했으며, 이 물 이름으로 인해, 귀 덕 현(歸德縣), 귀 덕(歸德)보(堡) 등의 이름이 태어났다. 또한 『귀 덕(歸德) 장군(將軍)』이란 이름 역시 이러한 것에서 연유(緣由)한 것이다. 서(西)여진(女眞) 추장(酋長)에게 내린 관직(官職)이며, 이는 명예(名譽)직 일 뿐이다.
㉡ 위 글 (3)에 나오는 “귀 순주(歸順州)”에 대해 알아보자. 옛 귀화군(歸化郡)이며, 또는 “순주(順州)”라고도 했으며, 당(唐)나라 때는 기미(羈靡)주로 영하(寧夏)지경(地境)에 있었다.
㉢ 귀 의주(歸義州) 역시 감 숙(甘肅)지경에 이었다고 하였는데, 감 숙(甘肅)이란 “감주(甘州)와 숙주(肅州)”지방을 말하며, “감주(甘州)는 장액(張掖)을 말하며, 숙주(肅州)는 주천(酒泉)지방을 말한다.”
㉣ 귀의군(歸義軍)은, 당(唐) 경운 초(初)에 하서(河西)절도사 관내(管內)에 설치(設置)하여, 량 주(凉 州)에서 다스렸으며, 후엔 무위(武威)에서 다스리기도 했다. 그 후에는『량 주(凉 州). 감주(甘州). 숙주(肅州). 이주(伊州). 서주(西州). 과주(瓜州). 사주(沙州)』등지를 통치했으며, 감 숙성(甘肅省)의 무위(武威)로부터 신 강성(新疆省) 동북(東北)의 땅이다.
토번(吐蕃)에 함락(陷落)되었으나, 대중(大中) 시기에, “장 의조(張義潮)”가 토번(吐蕃)을 물리치고, 당(唐)에 귀순(歸順)하여, 귀의군(歸義軍)이 되었으며, ‘귀의절도사’로 개칭된 곳이다. 후엔 이곳을 서하(西夏)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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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번(東蕃)이란?
[ 번(蕃)이란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번국(蕃國)을 말하며, 이는 속국(屬國)을 뜻하며, 오랑캐나라 ] 로 인식(認識)되고 있다. 따라서 “반도(半島) 고려(高麗)”라는 반도(半島)/식민사관(植民史觀)에선 존재(存在)할 수 없는 것이다. 지형지리(地形地理)로 볼 때, 동쪽지방은 바다라는 천연적(天然的) 장애물(障碍物) 때문이다. 바다 속에서 인간(人間)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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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문종. 경신 34년(1080), 송 원풍 3년ㆍ요 태강 6년 조 기록을 보면,
《東蕃,作亂,以中書侍郞,平章事,文正,判行營,兵馬事,同知中樞院事崔奭,兵部尙書廉漢爲兵馬使,左承宣李顗,爲兵馬副使,將步騎三萬出屯定州,夜,三軍,各將一萬,分道,直趨賊巢穴,遲明奄至,鼓譟震地,賊大懼,遂麾兵奮擊,斬首三百九十二級,擒渠帥三十九人,獲牛馬百餘,委棄器械,塡積,凡攻破廬落十餘所,晡後,凱還奏捷,王,遣左司員外郞裴緯,勑文正等,曰,近緣邊事未息,宵旰軫慮,今省所奏,婉畫降戎,掃除民害,使朕,無東顧之憂,惟乃之功,特賜文正,銀合一副,重一百兩,崔奭,廉漢,李顗,銀合各一副,重各五十兩,竝盛丁香. : 동번이 난을 일으키자 중서시랑평장사 <문정(文正)>을 판행영병마사로, 동지중추원사 <최 석(崔 奭)>과 병부상서 <염한(廉 漢)>을 병마사로, 좌승선(左 承 宣) <이의(李 顗)>를 병마부사로 삼아서, 보군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정주(定 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밤에 삼군이 각기 1만 명씩 거느리고 길을 갈라서 바로 적의 소굴로 향하였는데, 날이 샐 녘에 갑자기 당도하여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땅을 울리니 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휘몰아 공격하여 3백 92급을 베고 그 우두머리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소ㆍ말 백여 필을 노획하였고, 적이 버린 군기(軍器)가 길을 메웠으며, 적의 막사와 부락을 파괴한 것이 십여 곳이었다. 해질 무렵에 개선하여 전승하였음을 아뢰니, 왕이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배위(裵 偉)>를 보내서 ‘문정’ 등에게 내린 칙서에, "근래에 변방에 일이 그치지 않아 밤낮으로 걱정하였는데, 이제 아뢴 바를 살피건대 훌륭한 계책으로 오랑캐에게 항복을 받아 백성의 해를 소탕하여 짐에게 동쪽을 염려하는 근심이 없게 함은 오직 그대들의 공이다." 하고, 특히 ‘문정’에게는 무게가 백 냥 되는 은합 한 벌을, 최 석ㆍ염한ㆍ이이에게는 무게 50냥 되는 은합 한 벌씩을 모두 정향(丁香)을 담아서 내려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은, 고려(高麗) 왕조(王朝)에 대한 역사서(歷史書)이다. 반도(半島)/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바라보면, “정주(定州)”라는 곳은 당시 황도(皇都)였던 “개경(開京)”에서 볼 때, 북쪽이면 북쪽이지, 동쪽일 수 없는 지리적(地理的) 방향(方向)이다.
위 기록(記錄)에서는 『분명(分明)하게도 동번(東蕃)이 난(亂)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며, 『중서시랑평장사 <문정(文正)>을 판행영병마사로, 동지중추원사 <최 석(崔 奭)>과 병부상서 <염한(廉 漢)>을 병마사로, 좌승선(左 承 宣) <이의(李 顗)>를 병마부사로 삼아서, 보군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정주(定 州)에 주둔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이들은 난(亂)을 일으킨, “동번(東蕃)”과의 전투(戰鬪)에서 승리(勝利)하였다고 했으니, 분명(分明)한 것은 당시(當時) 『고려(高麗) 땅 동쪽지방에, 동쪽의 속국(屬國 : 제후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고려(高麗) 조정(朝廷)의 명을 받은 판행영병마사 “문정(文正)”이하(以下) 장수(將帥)와 병사(兵士)들은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이었다. 이들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이 출전(出戰)하였다면, 육전(陸戰)이었다는 이야기이며, 『고려(高麗) 땅, 동쪽지방의 번국(蕃國) 땅도, 바다가 아닌, 육지(陸地)땅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보통 유치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연(當然)히 바다 물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人間)은 존재(存在)할 수 없는 이 세상에, 고려(高麗) 땅, 동쪽지방에 또 다른 나라가 있어, 힘이 약하니 고려(高麗)의 속국(屬國)으로 있었다는 이야긴데, 이러한 간단(簡單)한 이야기를 빙빙 돌리며 말하는 것은, 반도(半島)/식민사관(植民史觀)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장(主張)은 반도(半島) 땅에 “고려(高麗)”가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고려(高麗)의 동쪽은 “바다”라는 곳이며, 이곳은 육지(陸地) 곧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냉정(冷靜)한 자세(姿勢)로 조선사(朝鮮史)를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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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송(宋)의 두 황제(皇帝 : 휘종과 흠종)는 사막(沙漠)에 구금(拘禁)되었다.』고 조선사(朝鮮史)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반도(半島)/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반도(半島) 두만강(頭滿江)변(邊)에 이들의 무덤이 있다고 하며, 이들이 구금(拘禁)되었던 곳은 현재(現在)의 반도(半島) 두만강(頭滿江)변이라고 역사(歷史)를 설명(說明)하고 있다. 정말 이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맞는 말일까?
우선(于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주장(主張)은 『역사(歷史)사기극(詐欺劇)』이라고 분명(分明)하게 말씀드리며, 이러한 자(者)들은 바로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한 자(者)들과 상통(相通)하는 무리들이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인종 / 무신 6년(1128), 송 건 염(建 炎) 2년ㆍ금 천회(天 會) 6년 조 기록을 보면,
《王,以書答曰,中略,豈使二聖,久勞沙漠,每祝早還京闕,以副天下之望.中略 : 왕이 글로 답하기를, 중략, 어찌 두 황제께서, 오래 사막에서 고생하게 되겠습니까. 빨리 서울 궁궐로 돌아오시어, 천하의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기를 항상 축원하고 있습니다. 중략.》
위 기록(記錄)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속에 있는 것이며, 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고려(高麗)가 망(亡)하고 난 뒤, 조선(朝鮮)시대 왕명(王命)에 의해 편찬(編纂)된 것이다.
《豈 使 二 聖, 久 勞 沙 漠 : 어찌 두 황제께서, 오래 사막에서 고생하게 되겠습니까?》라고 고려(高麗) 황제(皇帝)가 송(宋)나라에서 온 사신(使臣)에게 점잖게, 안타깝게 말을 하고 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當時)에,
송(宋)나라의 두 황제(皇帝)였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金)나라의 군대(軍隊)에게 끌려 간 곳이 “사막(沙漠)”지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반도(半島)/식민사관(植民史觀)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반도(半島) 북방지대와 두만강(頭滿江)과 그 북쪽지방은 『사막(沙漠)지대』”라는 말이 성립(成立)된다.
그러나 이러한 특이지형(特異地形)은 반도(半島)나 그 북방(北方)지대(地帶)에 존재(存在)하지 않는, 『산림(山林)과 산악(山岳)과 하천(河川)과 초원(草原)이 있는 곳』이며, “사막(沙漠)”이라는 천연적(天然的) 특이지형(特異地形)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당시(當時)의 생활환경(生活環境)과 기후(氣候)적 환경(環境)의 자연생태계를 보면, 그 당시(當時)의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최소한(最小限),
『현 영하 성(寧夏省)을 남북(南北)으로 관통(貫通)하는 하(河)의 서북(西北)쪽 지대(地帶)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최소한(最小限)의 영역(領域)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일천(一千)년전의 모습은 아마도 『그곳 “하(河)”로부터 일천(一千)리 이상(以上) 더 떨어진 서북(西北)쪽 지대(地帶)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예측(豫測)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송 막 기문(松漠紀聞)”이란 기록(記錄)을 남긴 “홍 호(洪皓)”의 여정(旅情)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일 게다.
● 따라서 당시(當時)의 “고려(高麗)”는 현재(現在)의 대륙(大陸)에 있었던 왕조(王朝)이며, 그 영역(領域)은 “전 대륙의 땅”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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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려(高麗)가 대륙(大陸)의 서북(西北)쪽에 있는 “사막(沙漠)”을 정복(征服)했다는 사실!
동사강목(東史綱目) / 기축 년 <예종> 4 년 (송 휘종. 대관 3, 요 천조제. 건 통 9, 1109) 조 기록을 보면,
《구(九)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중략). 왕이 원수(元帥) 등에게 조서를 내려 구성을 여진에게 돌려주라고 유고(諭告)하였다. 28일(신유)에 병마별감(兵馬別監) 최 홍 정(崔 弘 正)과 병마사(兵馬使) 문관(文 冠)이 여진의 추장에게 타일러 맹세를 약속하도록 하니, 추장 등이 함 주 문(咸 州 門) 밖에 단(壇)을 설치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지금부터 후일에 구부 (九 父 구대(九 代)의 자손(子孫))의 시대에 이르도록 악심(惡心)을 가지지 않고 해마다 조공할 것입니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다면 오랑캐의 땅은 멸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맹세를 마치자 물러갔다. 홍정(弘 正)이 비로소 길주(吉 州)로부터 차례대로, 구성의 전구(戰具)와 자량(資糧)을 내지(內地)에 거두어 들여왔다. 임술 년(인종 20 1142)에 崇 寧 鎭ㆍ通 泰 鎭의 2진(鎭)을 철폐하고, 갑자년(인종 22 1144)에 영주(英 州)ㆍ복주(福 州) 2주(州)와 眞 陽 鎭을 철폐하고, 을 축 년(인종 23 1145)에 함 주(咸 州)ㆍ웅주(雄 州) 2주와 선화진(宣 化 鎭)을 철폐하니, 오랑캐들이 기뻐하여, 그들의 소와 말로, 우리 백성들을 실어 돌려보내었는데, 버려졌던 노유(老幼) 남녀(男女)가 한 사람도 상한 이가 없었다. 최씨(崔 氏)는 이렇게 적었다. “변방을 개척한 실수는 숙종(肅宗)에게서 시작되어 예종(睿宗) 때에 이루어졌는데, 재물을 한없이 낭비하고, 죄 없는 백성을 사역(使役)하여 『북쪽 사막(沙漠)을 정복한 것은』 다만 우리나라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오랑캐의 분심만 돋우어 놓은 것뿐이니, 얻은 것이 어찌 잃은 것을 보상(報償)하겠는가?” 》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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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崔)”씨라는 분은 당시(當時) 『윤관(尹瓘) 장군(將軍)이 북쪽 사막(沙漠)지대를 정복(征服)하고, 이곳에 있는 여러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들을 복종(服從)시킨 것에 대해 한심한 일이다』라고 논평(論評)을 하고 있다.
『북쪽 사막지대(沙漠地帶)를 정복(征服)하였다!!!!!!!!!!!』
이러한 말은, 대륙 사(大陸史)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불가능(不可能)한 말이다. 그런데, 고려(高麗)는 그것을 해냈다.
오백(五百)년, 고려(高麗) 왕조(王朝)를, 비록 그것이 역성(易姓)혁명(革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조선(朝鮮)”이 그 땅과 그 백성(百姓)들에 의해 건국(建國)되었으며, 그 “조선(朝鮮)”은 5백년(百年)을 이어왔다.
그곳이 어떻게 “반도(半島) 땅”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이해(理解)할 수 없는 역사(歷史) 이야기다.
지금, 비록 그 땅을 찾아 되돌릴 방법(方法)은 없다손 치더라도, 진실(眞實)은 규명(糾明)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인(本人)의 외침이다.
2012년 06월 24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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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요즈음 들어 이상하게도 "반도 무지랭이"라는 말들이 자주 나오는데, 우린 이러한 풍조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은연중 퍼지는 "유언비어"와 같은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들 스스로 "반도의 역사에 대한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자"들에 의해 이런 말들이 전파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지요. 인간은 하루에 두끼든, 세끼든 먹어야 체력을 유지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며, 이러한 동물들이 모래 밭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참으로 이해가 곤란합니다. 지형지리가 만들어진 것은 수십만년, 수백만년전의 일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들은 아닐것 같은데, 알 수 없군요
이순신 장군에 관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대적인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 "이순신"을 앞세웠지요. 이 순신 장군에 관한 또 다른 기록들이 존재한다면, 좋으련만...........이 순신에 대한 전쟁터는, 반도에서, 대륙으로 옮겨간 것은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생각됩니다. 근거없는, 고증없는 막무가내식 주장들이 판을 치니, 참 답답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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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씀입니다.
계승이라는 단어가 있기에 합리성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조선과 대한한국은 왕도(서울)가 다른 형태의 국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