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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이 사라진 계곡에 지금, 겨울 내내 얼음장에 짓눌려 쓰러졌던 지난가을 풀 사이로 버들강아지가 눈을 떴습니다. 얼음 녹은 개울에 이젠 제법 물 흐르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윗물에 떠밀려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에 청량감이 묻어 있었습니다. 봄은 얼음장 밑으로 슬며시 다가온다는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재잘거리며 흐르다 바위를 만나 굽이쳐 물살이 되면 조급하면서도 서두르는 소란스러운 소리도 들리지만 곧 정적을 안고 저만치 늙은 수초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 봄기운이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봄은 지난가을을 잊고 겨울도 잊어야 봄을 제대로 아름답게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잊는다는 것이야말로 미래를 현실로 당겨 오는 일 아니겠습니까! 잊지 못하는 일 스스로 정착시킨 안전이라 말하겠지만 봄을 만드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새 생명은 알을 깨고 나와야 비로소 얻는 축복입니다. 봄은 부활의 중심입니다.
피톤치드가 코로나 19에 눌려 숨을 죽이는 연습을 매일매일 하여 반은 죽여 놓았던 숨 길을 확~~ 열어 줍니다. 심연에 끝에 매달려 있던 생명이 한낮의 광명에 눌려 지내다 노을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뱃길을 열어주는 등대불처럼 환해집니다.
겹겹 하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수피(樹皮)는 생존을 이끌어 주는 중요한 기능입니다. 나이테가 늘어날수록 점점 거북이 등처럼 되어 가죠. 터지면 안쪽 새로운 막이 생겨 치유해 주고 다시 터지며 수피가 쌓여 가는 것이 우리들이 좋아하는 소나무나 참나무들입니다. 참 나무 수피는 굴피 집 지붕 용재로 또는 생활용품 뚜껑으로 사용되어 우리에게 사랑받습니다. 어느 해 인가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에 대하여 조사를 하였더니 소나무가 1등이 었으며 2등은 은행나무가 차지한 적이 있었습니다.
소나무는 전국의 산 능선 양지바르고 건조한 곳에 자라는 상록수로서 바늘잎 큰 키 나무입니다. 줄기의 위쪽 겉껍질은 적갈색이고, 아래쪽은 암적색입다. 잎은 2장씩 뭉쳐나며, 바늘 모양이라 침엽수라 부르지요. 2년이 지나면 낙엽이 되어 떨어집니다. 암수를 같이 갖고 있어 5월에 숫 솔방울은 새로 난 가지 밑부분에, 암솔 방울은 가지 끝에 달리지요. 열매는 구과이며, 씨에 날개가 있어 멀리 날아가 번식을 시키는데 효율적입니다. 작은 가지가 1년에 한 번씩만 자라고, 잎이 연한 녹색을 띠면서 잘 비틀리지 않으며, 겨울철에 발달하는 겨울눈에 수지가 없는 특징으로 소나무속의 다른 종들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잣나무는 우리나라의 기후 풍토에 적합한 대표적인 고유수종입니다. 소나무의 재목 색깔이 흰색을 띠는 데 반하여 잣나무는 붉은 황색을 많이 띠므로 일명 홍송이라고도 부릅니다. 또 소나무는 잎이 2개씩 달려있는 2 엽송인데 반하여 잣나무는 잎이 5개씩 달려있는 5 엽송이며 5개씩 속 생하며 3개의 능선이 있습니다. 소나무와 같이 암수 함께 있습니다.
심재는 황 홍색, 변재는 담홍 황백색으로 심·변재의 구별이 뚜렷하며 나이테도 뚜렷하답니다. 목리는 통직하고 거칠며 광택이 나고 향기가 강합니다. 절삭 가공성이 양호하고 내 후 보존성이 크며 접착, 도장성은 보통이고 건조 속도는 빠르고 약제 주입 성은 양호한 나무입니다.
볕이 좋고 봄기운도 평화롭고 낮의 기온도 적당한 날 松林을 찾아 나섰습니다. 나무 중에 가장 으뜸은 바로 소나무 즉 송(松)입니다.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면 송(松)이라 불렀을까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입니다. 그리고 소나무는 우리 민족과 는 불가불의 관계이지요. 소나무로 짓은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 관솔로 지펴 지은 밥을 소나무 밥상과 소나무 그릇과 수저를 이용하여 먹었으며 추석명절이 돌아오면 송편을 만들어 먹습니다. 그리고 흉년이 들면 소나무 껍질을 먹었고 밤이 찾아오면 관솔에 불을 밝혀 등잔불로 사용하였으며 이 세상을 등지며 집 뒤 양지바른 소나무 밑에 소나무로 짠 집에 들어 가 누웠습니다. 송진은 약재로 공업용으로는 피대의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 존경받은 것입니다. 언덕 사이에 만들어 놓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숲을 접근하기 위하여 행장을 다시 추슬렀습니다.
걸음 여행을 시작할 준비를 끝낸 후 자연과 인간은 숙명적인 공동체라는 인식의 자각을 위하여 손을 들어 나무의 모습을 연출해 보았습니다.
천지동근(天地同根)처럼 자연과 인간은 같은 뿌리라 하여도 과언은 아닙니다. 인간의 들숨에 깃든 산소는 나무의 날숨으로 만들어집니다. 나무 또한 광합성 작용을 통해 성장하는 것은 인간의 날숨에 포함된 이산화탄소를 들숨으로 흡수하여 생기는 일입니다.
이러한 한 가지 자각만으로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연을 비켜가는 것을
찾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잠시 사유의 시간을 갖으며 걷는 순간 테르펜(Terpen)이라는 유기화합물질이 심신을 쾌적하게 이끌어 주었습니다. 데르펜을 흡입하게 되면 도시생활에서 누적된 스트레스로 손상된 심신을 치유해 주어 피로 해소를 촉진시켜주며 면역성을 높여주고 마음을 맑게 해 줍니다. 숲을 찾아와 숲 속을 걷다 보면 건강해지고 행복해지는 이유입니다.
해방 전 일본인들에 의해 조림된 숲은 지금도 나무의 밀도가 좋은 편입니다. 수령 90여 년의 침엽수 잣나무 숲. 또는 소나무 숲이나 전나무 숲에서 느끼게 되는 숲 향기 독특하면서도 향기로운 휘발성 향기는 페르 텐이라는 향으로서 가슴을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손쉽게 표현할 수 있는 V자 손 표시 숲을 닮아 통섭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이며 나를 지켜 주려고 자신의 이외 것들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그 존재성들에게 늘 감사하며 살고 있다는 감사의 마음이 불러오는 평화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정의로운 질서를 갖고 사는 일, 존경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이기도 합니다. 기능만 좋으면 오만해 지기 십상입니다. 개개인의 능력의 평가는 스스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삶의 반석에서부터 출발점을 찾는 것이 정상입니다. 바른 인성은 미래를 자유롭게 더욱더 발전시키며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인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표정, 마음에 꽃이지요. 아름다운 마음은 또한 그 지속은 늘 미소의 꽃이 떠나지 않습니다.
광활한 숲 여기저기에서 흐르는 물을 한 곳으로 모아 흘려보내는 숲이 간직하고 있는 중앙천을 중심으로 경량철골로 지탱할 수 있는 철다리를 만들고 그 위에 판재를 깔아 데크 오솔길을 만들어 완성한 후 최근 들어 개장한 길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걷는 길입니다. 무장애의 길로서 만들어진 길이랍니다. 정상인도 함께 공유하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난간 설치 조건이 완벽하지 않아 난간에 기대거나 무리하게 여러 사람이 기대면 안전 효과가 떨어져 사고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안전망을 쳐 놓아 보완해 놓은 그물망도 환경친화적입니다.
요즘 허리 불편으로 당혹해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쾌하신 자매님 데레사~~ 점점 사라져 가는 근육은 지탱과 건각을 앗아갑니다. 사라지는 속도도 갈수록 나이를 닮아 간다고 합니다. 반복적으로 걸으며 근력운동을 병행하고 단백질 섭취를 잘해나간다면 견딜 만큼 근력은 만들어집니다. 봄날에 시작을 잘해야 성하의 계절을 이기고 수확의 계절을 만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늘 파이팅 하시기 바랍니다. 나무들이 비탈에서도 잘 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튼튼한 뿌리의 활성 때문인 것처럼 걷기로 건각을 세우시고 근력 운동으로 장력을 쌓으시다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봄~~ 봄, 봄은 계절의 미소에 해당됩니다. 겨우내내 움츠려 잠을 자다 숲의 식구들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이 3월 중순을 넘으면서부터입니다. 비로소 대지가 호흡을 시작하여 숲을 생동으로 이끌어 주기 시작합니다. 마을 돌담 옆에서 산수유가 피기 시작하면 동산에선 생강나무 노란 꽃이 향기와 더불어 봄나들이가 시작됩니다. 아주 짧은 시간에 꽃을 피우고 새싹을 돋아나게 하고 메말랐던 숲에 봄 향기를 버무려 놓습니다. 이 향기는 명지 바람이 앞장서서 꽃을 피우고 싹을 돋게 하는 목표로 숲을 휘감습니다. 명지 바람 덕분에 초록물감이 퍼지듯 연못에 파문이 퍼져 나가듯 점점 숲 전체를 봄의 선율에 도취시켜 갑니다. 결합된 음률은 교향악의 반주가 되어 숲의 합창곡으로 완성됩니다. 신록을 유혹하는 명지 바람 덕분에 초와 목까지 생명의 잔치를 벌이려 경쟁하듯 흙을 터전으로 살고 있는 모든 것들은 꽃을 피우고 싹을 틔우며 연녹색 바다를 연출합니다. 봄 향연은 계절의 여왕인 5월까지 이어지면서 봄을 아름답게 완성시켜 놓습니다. 욕심이 없어 몇 알의 씨앗이나 알곡으로 배를 채우고 한 모금의 물만으로 종일 살아가는 새들도 숲을 찾아 자유롭게 비상하며 새로운 숲을 조성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새는 늘 선택한 가난한 삶을 살아가기에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들의 거처도 썩은 나뭇가지, 풀, 이끼, 점토 등으로서 아무 데나 짓을 수 있는 나뭇가지입니다. 원시의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새는 욕심마저 잃어버려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욕심을 잡을 수 있는 손을 선택하지 않아 날갯짓으로 얼마든지 창공을 날을 수 있는 자유가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새들이 떠난 숲이 있다면 그 숲은 그만큼 황폐해질 것입니다. 5월은 새들의 혼인과 출산의 계절입니다.
맨손 체조~~ 보기 좋습니다. 봄을 깨우는 새들의 날갯짓이 연상됩니다. 모든 것을 지금보다 더 덜어내어 스스로 선택한 가난의 영성으로 작음으로 지향하는 삶으로 동안 힘들게 했던 생태계 복원을 위하여 생활하는 것이 바로 바이러스 19를 추방하는 일입니다. 아직도 늦지 않었습니다. 입, 코를 틀어막고 살아갈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한 순간입니다. 더 이상 방치하게 되면 인류가 일시에 전멸하는 순간을 맞이 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지구가 처한 환경입니다. 작음은 일상화되어야 합니다. 겸손과 함께~~~ 인류가 평화를 원하신다면 겸손과 작음을 선택하시는 삶으로 나가야 합니다. 진정으로 평화를 위한 삶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숲 한 칸을 만들어 사진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한 점으로 회귀하는 삶의 구도를 명상으로 기도로서 불러내어 스스로 숲에 통섭의 한 점이 되어야 합니다.
피정의 걸음 여행! 어느새 명상의 자리까지 왔습니다.
일체를 멈추고 사유의 행로를 마음에 담아봅니다.
한시도 고요하지 못한 마음, 마음을 잡는 일이 바로 선입니다. 선으로 일궈낸 평화가 삶의 진리입니다. 깨달음! 변화의 점입니다. 점, 점은 연결의 선이 일궈내는 새로운 시작점~~ 평화를 빕니다.
참 고요합니다. 지속은 구도를 요구합니다. 수덕의 존재와 가치를 향해 정진하는 일입니다.
사유의 시간을 마음에 내려놓고 다시 길 위로 나섰습니다. 걷지 않는 자는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시간은 어느새 행동식 나눔의 시간으로... 한 줄의 김밥과 한 개의 옥수수 맑은 찻물과 향기를 숨겨 놓은 맥주 한 잔으로...
다시 또 길 위로 나섰습니다.
걷다, 청설모가 먹다 버려 놓은 잣방울, 묶은 잣 향이 심성을 고요하게 인도합니다.
작년 가을에 숨겨 놓은 밤, 도토리를 찾아 입 안에 가득 넣고 먹는 다람쥐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고 있는 두 사람, 좋은 결과가 있었습니다.
숲 향기~~ 순치시켜 주는 매력 덩어리입니다.
오름과 내림 사이에 늘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오름을 오름으로 온전하게 받고 내림을 순수하게 받아들였을 때 동요는 사라지고 평상심으로 걷게 됩니다. 오름 길인데 자꾸 내리막길을 찾다 보면 혼란이 모든 것을 분란으로 부추기게 됩니다.
봄기운을 넉넉하게 보충할 목적으로 누워버렸습니다.
갈색은 마음을 편하게 이끌어 주는 마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휴식을 의미하는 색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푸른 나무와 메마른 흙 위에 갈색의 조화를 보며 순간 생과 명의 상관을 자신에게 따져 물어보았습니다. 시작과 끝, 그 상이에 놓여 있는 긴 시간의 집합체를 삶이라 부릅니다. 삶은 결국 사람의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마음이 가꾸는 생애의 정원이 삶이지요.
재속을 벗어나 숲을 찾아오면 자신도 모르게 침묵하게 됩니다. 대신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한 도시의 그물에 갇힌 채 살아가며 잊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아의 발견은 자신과 대화의 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특히 걸으며 사유의 지평으로 빠져 드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속삭이듯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두 발을 이용하여 숲으로 다가 가 점점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나무의 나이테를 따라 걷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되새김을 통해 현실의 방향을 수정하게 되기도 합니다. 숲에는 생명의 원기가 충만하고 순수한 정열이 가득하여 그러한 것들과 저절로 감흥의 속도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자주 숲을 찾다 보면 자연의 수평적, 수직적 공간을 이해하게 되어 자연의 생태계를 통해 생명의 가치를 잘 이해하게 됩니다.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는 능력이 생기면 숲에 넘치는 은밀한 환희심에 자신도 모르게 도취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깨달음은 단순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섭의 진리에 다가가는 환희심도 체험이 가능해집니다.
도시 문명 안에서는 모든 것이 경쟁심리를 유발해 줍니다. 이런 심리는 결국 자가당착에 머물게 되어 모든 면에서 자신이 우선 시 되어야 하는 병든 자존감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숲에서는 생명의 원리를 통해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무수한 감사의 사랑과 도움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자신보다 나 이외의 것들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주어진 삶에 숙제를 풀어가는 데 소중한 자산이 되어 평화의 근본이 되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숲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정체성 느림과 여유로 인하여 얻어지는 혜안이지요.
안락의자는 아니지만, 나무토막에 불과한 원형 나이테에 걸터앉아 잠시 쉬며 휴(休)의 환희심을 얻었습니다.
점점 어두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발 길을 숲 중앙을 가로질러 난 오솔길을 걸어 원점회귀를 성사시켜 나갔습니다.
녹색 이끼에 덮인 바위, 모양만으로도 예지력을 불러줍니다. 이 또한 감흥이지요. 감정에 흥이 모아지면 사람들은 무엇인가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 뜻을 전하려 손바닥으로 감정을 이입시켜 봅니다. 결국 흥취는 언어가 되어 시가 되고 율동이 되어 노래가 됩니다. 그럴 때 명지 바람 한 줌이 바위를 휘감고 잣나무 숲 너머를 희롱하고 사라져 갑니다.
산촌을 대변하는 너와 지붕으로 만들어진 너와 집, 사계의 장단을 깊이 알고 만들어진 집이지요. 봄, 여름, 가을의 속 뜻과 겨울의 엄중한 정적을 이겨내기 위한 지혜로 가득한 집입니다. 특히 자연환경적 집이라 해체와 동시에 전부 자연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참 매력 덩어리입니다. 잠시 빌려 살다 가는 것이 영혼이란 주체로 살다 가는 인간의 삶입니다. 그 바탕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가는 것이 전제될 수 있다면 코로나 19와 같은 역질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무리한 욕심이 만들어낸 역질,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풀과 나무로 정주 공간을 만들고 흙을 빗어 용품을 만들어 사용하는 일, 그 사실이 소중한 일입니다.
불은 사라지게 하는 일과 동시에 단단하게 만들어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게 하는 양면을 지닌 존재입니다. 사용하기에 따라 결과를 맺어 주는 근본들은 올바른 사용법이 중요 시 되어야 합니다.
황토의 질감 같은 심성, 그 고유성이 지켜지는 삶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움 터지는 소리, 반가운 소리... 곧 산수유 꽃그늘이 펼쳐질 것 같습니다. 우선 이 자리에서 보여 주었던 노란 꽃을 되돌려 보겠습니다.
성급한 마음이 봄 향기를 불러옵니다. 향기 따라 연둣빛 너 울이 남실 거릴 시간이 그리 멀지 않습니다.
도시에 남겨 놓고 온 약속이 있어 걸음을 재촉해야 하였습니다.
유난히 이끼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북사면 언덕에 자리 잡은 나무 계단, 이끼가 만든 채색이 고운 곳입니다.
반원형의 다리, 숲의 느림과 여유를 대변해 줍니다.
봄을 실어 나르는 모습이 점점 완연해지는 개울, 지금 당장 물소리와 버들강아지 은회색 빛뿐이지만 곧 녹색 물결이 장관을 이룰 것입니다.
어느새 우리의 걸음은 점, 점 이어져 원점회귀 막바지에 섰습니다. 환희의 자유라는 숲에서 흐르는 바람에 맡겨 두었던 마음을 다시 챙기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었습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하루 살기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루에 살림살이 어깨에 걸머지고 숲 길을 걷는 길, 낭만의 세계였습니다.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두견이 울고 철쭉이 피를 토하듯 산정을 물들이는 날 동무들과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알고 있는지 산비둘기 한쌍이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을 본 후 차를 몰았습니다. 다시 돌아온 콘크리트 박스의 아파트, 모든 것, 이 또한 나의 정주 막이라 다독이며 커피를 우선 끓여 한 잔을 책상머리에 올려놓고, 거대한 아프리카 평원을 떠올리며 한 모금을 마시다 커피의 자취의 흔적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커피를 최초로 마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양들이었습니다. 아프리카 키리만자로 산이 있는 고원지역에 살고 있던 칼디라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양질의 목초를 먹이기 위하여 양 때를 몰고 자주 이동하는데, 어느 날 이상한 열매를 먹은 양들은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뛰어다니는 양 때를 발견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동 칼디는 스스로 열매를 먹어 본 후 각성효과를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에 기인하여 에디오피아는 커피 종주국이 되고 대표적인 카페도 칼디의 이름을 따 칼디스가 되지요. 서기 500년에서 1000년 경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에디오피아에서 커피를 볶고 빻서 먹게 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목동 칼디가 각성효과를 느낀 후 에디오피아 정교회 수도자들에게 커피 열매를 선물하게 됩니다. 이를 받은 수도자들은 커피나무에 악령이 들었다고 판단하여 불속에 던져 버립니다. 타면서 내는 커피 향기가 얼마나 근사한지... 향기에 반한 수도자들이 볶아서 물에 타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커피는 볶아서 물에 타서 먹는 것이 정설이 된 것입니다. 에디오피아에서 시작된 커피 식음은 아리비아 반도를 넘어 이슬람교도들에게 퍼져 나갔고 오스만 터어키에 의해 유럽에 퍼지면서 세계적인 식음의 대표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종의 커피나무가 자생하지만 가장 높은 품종으로 대우받는 커피는 역시 에디오피아의 아라비카 품종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떠 올리며 오늘 다녀온 숲을 다시 유영하면서 걸음 여행 추억을 커피 향에 담아 단상을 적어 보았습니다. 커피와 휴의 궁합은 무엇보다도 잘 어울리는 관계입니다. 커피 향에 다시 숲을 찾아가는 기획서를 만들고 있습니다. 곧이어서 산수유 노란 꽃이 남실거리는 산마을과 길고 긴 꼬리를 물고 돌아 나가는 동쪽에 매달려 있는 동강 할미꽃과 쑥에 스며 있는 청빈한 쑥향을 떠 올리고 그리고 옥빛 남쪽 바다에 홀가분하게 놓여 있는 섬, 섬, 섬을 만나기 위한 계획을 적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봄을 맞이하고 보낼 것 같습니다. 그럼 함께 떠나실 명단에 올려드릴까요? 아니면 역질과 더 많은 숨박꼭질 시간을 더 갖으시겠는지요? 선택은 늘 자유이십니다.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찾으셔야 하는 절기 잘 여미셔서 신선한 변화로 자신을 이끄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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