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재일한국인 전용 양로원 ‘고향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1968년 목포에서 57세로 생애를 마친 나의 어머니(윤학자·일본명 田內千鶴子)가 운명하면서 남긴 ‘우메보시(매실장아찌)가 먹고싶다’는 마지막 한마디가 나에게 이 일을 하게 했다.
또 아버지가 씨를 뿌리고 어머니가 지켜온 공생원의 일을 해온지도 30년이다. 내년이면 56세가 되니 꼭 어머니가 돌아가신 나이가 되었다. 어머니의 뒤를 잇고 자신의
아이를 키워보면서 나는 ‘같이 산다’는 공생(共生)을
생각해 본다. 아버지가 만든 고아원의 명칭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일생은 이 ‘같이 산다’로 요약할 수 있을까. 어머니 윤학자의 생애를
영화화하는 것은 공생원 형제들의 희망이었다.
보통 여인이었던 윤학자와 고아들이 국경을 넘어서 ‘같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것이라는 것을, 빈곤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세계의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올바른
역사인식이 한·일간의 진정한 화해와 교류의 원천이라는 것을 제작 목표로 삼았다. 영화인이 아닌 나를 믿어주고 참여해 좋은 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만들어주신 한국의 영화인들에게
감사한다.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몰라서 극작가 차범석
선생께 제작지휘를 의뢰했다. 시나리오는 어머니의 고향 출신인 나가지마 조하쿠씨에게 맡겼다. 감독은 영화를 1백7편이나 만든 김수용, 촬영은 ‘서편제’로 너무나 유명한 정일성씨 음악 신병하, 미술 김유진, 녹음 유대현, 편집 박덕열 등이 영화 ‘태백산맥’의 촬영이 끝난 다음날부터 기라성 같은 한국 영화인들이 긍지를 가지고 만들었다.
어머니 윤학자역과 외할머니 부분만 일본 여배우를 기용했으며 최명수, 박승태, 길용우, 김금용, 이준등 나머지는 모두가 한국
배우다.
‘사랑의 묵시록’은 80%가 한국어여서 일본에서는 일본어 자막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2백60개의 지역에서 상영되었고,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일본 3대 도시에서 개봉되고 있다. 이 ‘사랑의 묵시록’이 상영되어 기쁜 것은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고 있는 한·일간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보고 충격과 반성의 소리가 높다는 사실이다.
기시 게이코라는 국민적 인기배우는 “목포의 교실에서, 일본의 교과서에서는 사라져버린 한반도에서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위와, 분노에 찬 감정으로 교과서를 읽는 장면을 보고 충격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잔인한 일을 우리일본인은 무엇 때문에 했는가. 그리고 역사를 교과서에서 왜 없앴는가 그렇다고 이 영화는 결코 원한의 영화가 아니다. 주인공 윤학자가 생애를 바친 목포에서 따뜻하게 포옹한 한국인의 깊고 넓은 마음에 감동했다”라고 말했다.
일본 아오모리 소학교에서 김수용감독에게 팩스가 왔다.
“우리들은 지금 ‘사랑의 묵시록’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먼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습니다. 우리들도 울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한국인을 괴롭힌 것을 몰랐어요. 우리들은 한국 어린이들과 절대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살아 가자고 홈룸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의 묵시록’은 우리 정부가 일본을 향하여 외치고 국민이 소리높여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일본인의 가슴속에 진실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여성 윤학자가 운명했을 때 목포 개항이래 최초의 시민장을 지내준 일은 국적이나 국가보다도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이 우선하는 멋진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윤학자의 고향 고치(高知)는 명치유신의 지도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나온 지역으로 유명하다. 태평양의 넓고 큰 파도가 치는 이곳에서 앞으로는 어린이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고 ‘윤학자 기념비’를 만드는 시민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의 영화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영화는 1백60개국에 보내기 위해 10개 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1920년대에 고아·부랑인 구제
사업부터 1990년대에 실향민을 위한 재일동포들의 노인
복지사업까지를 실시해 이
나라 민족의 아픔을 같이하면서 한국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목포에서, 서울에서,
제주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할 수 있도록 키워주고
지원한 것은 목포시민의 성원이 있기에
가능했고 ‘사랑의 묵시록’도 제작할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드린다.
‘사랑의 묵시록’의 국내 개봉은 일본 영화의 한국 상영을 원하는 차원이 아니다. ‘사랑의 묵시록’은 한국인 감독의 작품이고, 3천 고아들과 목포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다. 당국의 특별한 배려를 바란다.
<윤기 사회복지법인 공생복지재단 회장>
『진주의 노래』는 한국 고아의 어머니인 윤학자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헌신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녀의 삶을 돌이켜보는 책이다. 총독부 관리의 딸인 그녀가 학교 졸업 후 잠시 교자로 재직하다가 목포 공생원 고아들을 돌보게 되고 거지대장 윤치호와 결혼하고, 결혼 후 남편이 행방불명이 된 이후의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공생원의 초석을 다지는 눈물겨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난과 질병 등 고아들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현실과 싸우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했던 온갖 시련까지 생생하게 그려냈다.
저자 : 모리야마 사토시
저자 모리야마 사토시(森山諭, 1908~1996)는 일본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사이자 학자. 후쿠시마 현 출신.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폭거를 목격하고 그 실상을 일본 사회에 고발했다. 이후 한ㆍ일 친선을 위해 노력했다. 1976년 ‘목포공생원 마음의고향 어버이협력회’를 창립하고 이사장을 지냈으며, 1981년에는 ‘일ㆍ한 친선 선교협력회’를 만들고 회장을 역임했다. 저자의 명저로 평가되는 《신도(神道)와 불교를 밝힌다》에서 일본 왕실의 조신(祖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 신공황후(神功皇后) 등을 비롯, 일본 역사상의 유명인사가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역자 : 윤기
역자 윤기(尹基, 1942~ )는 목포에서 태어났다.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를 졸업하고 1968~1977년까지 목포공생원 원장을 역임했으며, 1977년 사회복지법인 공생원이 공생복지재단으로 개편되면서 회장으로 일했다. 1982년 공생복지재단 도쿄사무소를 개설한 뒤 1989년 일본 오사카 부(府) 사카이 시에 재일동포 고령자를 위한 노인 홈 ‘고향의 집’을 세웠으며, 이후 오사카, 고베, 교토 등 모두 네 곳에 ‘고향의 집’을 건립했다. 2000년 마이니치(每日) 신문사로부터 사회복지상을, 2006년 호암재단으로부터 제16회 호암상(사회봉사 부문)을 수상했다.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0년 사카이 시 제정 제2회 자유도시ㆍ사카이 평화공헌상 대상(大賞)을 받았다. 현재 일본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 이사장, 숭실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으로 있다. 저서로 《어머니는 바보야》(홍성사), 《김치와 우메보시》(예지), 역서 《괴짜 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예지), 《고령 사회 이렇게 살아보세》(공생복지재단) 등이 있다.
서문_ 사랑은 국경을 넘어
사진으로 보는 윤학자 여사의 모습
어린 시절에서 공생원에 이르기까지
프롤로그
1. 어두운 역사 속에서
2. 섭리의 질병
3. 윤치호의 사람이 되어
4. 목포 공생원 설립
5. 일본어와 음악 선생이 되어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6.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7. 반일운동 투사를 숨겨 주다
8. 결혼
9. 출산 그리고 성별(聖別)
10.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
11. 친어머니가 되어
12. 계속되는 시련
13. 기념식
시련을 넘어
14. 동족상쟁
15. 인민재판
16. 또 하나의 시련
17. 실종
18. 당신이 남긴 뜻
진주의 노래
19. 원생들의 출정
20. 함태영 부통령의 방문
21. 고민할 때 큰 힘이 되어
22. 성윤이의 죽음과 사회부장관과
23. 진주의 노래
24. 영광의 개선
25. 목포는 울었다
26. 충실해진 공생복지재단 사업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한국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 탄생 100주년
2012년 10월 29일,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에서 유엔 세계 고아의 날(UN World OrphansDay) 제정 추진대회 개회식 및 심포지엄이 열렸다. 윤학자 여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날 행사에는 한국과 일본 각지에서 온 1,000여 명이 국제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일본 개신교계 및 민간 단체 인사들도 상당수 참석한 이 자리는 한·일 양국 사람들이 세월을 뛰어넘어 한 여인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되는 현장이기도 했다.
이 책의 옮긴이이자 윤학자 여사의 장남인 윤기 숭실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은 선친의 뜻을 이어 온 그간의 소회와 더불어 “어머니의 생일이자 기일인 10월 31일을 ‘유엔 세계고아의 날’로 제정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윤학자 여사를 기리는 여러 행사는 10월 30, 31일 목포에서 이어지며, 11월 7일 그녀의 고향인 일본 고치(高知) 시에서도 열린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헌신의 발자취
윤학자(尹鶴子, 1912-1968. 일본명 다우치 치즈코田內千鶴子) 여사는 일본 고치 시에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의 부임지인 전남 목포에 와서 부모님과 살았다. 야마테 소학교(지금의 유달초등학교)와 목포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정명여학교 음악선생으로 재직했다.
24세 때인 1936년, 은사 다카오 선생의 소개로 고아 수용 시설인 목포공생원에서 봉사하게 되었으며, 2년 뒤 공생원 원장 윤치호(1909∼1951)와 결혼했다. 1951년 1월, 식량 조달을 위해 광주로 떠난 윤치호가 행방불명이 된 이후 남편의 뜻을 이어 평생 한국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다.
이 책에는 윤학자 여사의 이러한 삶의 자취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총독부 관리의 딸인 그녀가 학교 졸업 후 잠시 교사로 재직하다가 목포 공생원 고아들을 돌보게 되고 ‘거지대장’ 윤치호와 결혼하기까지, 결혼 후, 특히 남편이 행방불명이 된 이후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공생원의 초석을 다져 오기까지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그려진다.
가난과 질병 등 고아들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현실과 싸워야 했던 그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치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했던 온갖 시련과도 맞서야 했다. 그러한 그녀의 일상의 힘이 되어 준 것은 그녀의 진심을 이해하고 그녀를 ‘어머니’로 여기며 따르던 많은 고아들과, 이들을 위해 힘을 모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었다.
시련 그리고 믿음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녀에게 힘이 된 것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통해 심어진 신앙심이다. 말씀과 찬송과 기도가 그녀의 일상의 바탕을 이루었다. 하나님은 그녀의 신산(辛酸)한 삶의 굽이굽이에서 꼭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도움의 손길을 뻗치며 역사하셨음을, 이 책의 곳곳에서 느끼게 된다. 그녀의 삶은 언젠가 자신이 말했듯이 “아무리 위태로워도 언젠가는 영광으로 이어질 나의 십자가의 길”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걸어간 것이었다.
한편, 윤학자 여사는 1963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을, 1965년에는 제1회 목포시민상을 수상했으며, 1967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남수포장(藍綬褒章)을 받았다. 1968년에는 전라남도 도지사로부터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으며, 1969년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5등보관장(勳五等보冠章)이 추서되었다.
◀…하나님은 반드시 치즈코가 아니면 안 되는 사명을 준비하고 계실 거다. 지난번에도 목사님이 ‘희망은 하나님이 갖고 계시지만 실망은 악마가 갖고 있다’고 하셨잖니.”
“그렇군요. 어머니!”
치즈코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처럼도 생각되었다. 아무튼 그녀는 “하나님! 저에게 목숨을 걸 만큼 보람 있는 일을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2. 섭리의 질병, 51쪽)
◀주여! 이 종은 당신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밤을 꼬박 새며 기도하다 그는 아침을 맞이했다. 그때는 치호의 결심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 아이들을 위해 일해야지, 만약 이대로 아이들을 버린다면 겨울을 지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아이들을 위해 흘린 것이다.
아이들과 만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인도임이 분명했다. 치호는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마음도 가벼워졌다. (4. 목포 공생원 설립, 70-71쪽)
◀‘그렇다. 저분은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아무 일도 못 하더라도 저분의 구혼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일본이 범한 수많은 범죄에 조금이라도 속죄하자. 설령 이것이 고난의 길이고 또 아이가 없는 가정이라 하더라도 저분이 말한 대로 공생원 아이들을 내 아이라 믿고 고아들을 키우는 데 생애를 바치자. 다카오 선생님이 언젠가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가 없으면 월계관도 없다. 이것이 나의 십자가의 길이라면 그 길이 아무리 위태로워도 언젠가는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다.’
치즈코는 이렇게 결심하고 먼저 어머니에게 동의를 구했다. (8. 결혼, 109쪽)
◀“…이제 제막하는 이 기념비는 이 나라의 어떤 비보다도 뜻깊은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 기념비는 윤치호 원장 부부가 피와 땀과 눈물로 보낸 20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공생원을 이끌어 오는 20년 동안 윤 원장 부부는 수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윤 원장의 숭고한 뜻이 오해되어 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고,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것은 공생원 원생들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학대받고 멸시당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윤 원장 부부는 그 모든 시련을 묵묵히 견뎌 냈습니다. 욕하는 사람 앞에서, 돌을 던지는 사람 앞에서 오로지 고아들을 돌보는 사랑의 정신만으로 수많은 생명을 지켜온 것입니다.” (13. 기념식, 176-177쪽)
◀“여보, 그래요. 나는 혼자가 아니었어요. 내게는 이 아이들……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 아이들이 있었어요.”
학자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날, “아이들을 부탁해요!”라고 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다시금 귀에 쟁쟁했다.
“여보, 당신이 돌아오실 때까지 나는 당신의 뜻을 따라 이 아이들을 돌보겠어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해 오신 당신의 뜻이 오래오래 빛나도록 제가 이 아이들을 돌보겠어요.”
학자는 두 주먹을 힘 있게 쥐었다. (18. 당신이 남긴 뜻, 220쪽)
◀해변의 진주조개는 거친 파도에 실려 오는 딱딱한 모래알이 껍질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여기저기 상처가 생긴다. 조개는 이 이물질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이물질은 속으로 점점 파고든다. 그래서 진주조개는 이 이물질을 아예 동화시키기 위해 진주질을 분비해서 아름답고 빛나는 진주를 만들어 낸다.
학자의 생애도 어쩌면 이와 같을지 모르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온갖 시련을 오로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견디어 냈다. (23. 진주의 노래, 272쪽)
◀윤 여사는 떠났습니다만, 윤 여사가 남긴 사랑의 정신은 목포 시민은 물론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유달산 산록에는 윤 여사의 따스한 손길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윤 여사가 손수 키운 3천여 명의 고아들은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을 가슴에 묻은 채 그 족적을 따라가며 살아갈 것입니다. (25. 목포는 울었다, 290쪽
첫댓글 귀한 정보 감사드립니다..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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