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반제린 -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 |
Evangelne - Henry Wadsworth Longfellow
서시 ( 序詩)
-아카디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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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그랑쁘레 마을이 불타버리고, 한민족의 전부를 그들의 전설과 함께 싣고서 정처없고 유례없는 유랑의 길에 오르게 하기 위하여 짐은 실은 배들이 썰물에 실려 떠나가버린지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아카디 사람들은 산산이 흩어져 먼 해안에 상륙했다. 마치 동북풍이 뉴우펀들랜드이 해안을 어둡게 하는 안개 사이를 헤쳐 나갈 때의 눈송이와 같이 산산이 흩어졌다. 친구도 잃고, 가정도 잃고, 희망도 잃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추운 북쪽의 호숫가에서 무더운 남쪽의 들판까지, 황량한 바닷가에서 미시시피강이 양 손에 언덕을 잡고 바다로 끌고 가는 곳, 모래 벌판 여기저기에 맘모스의 뼈가 묻혀 있는 내륙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정처없이 유랑하였다. 친구와 가정을 찾던 그들은 거의가 절망과 실의에 빠진 채, 더 이상 친구와 가정을 찾지 못하고 단지 묘비석에 그들의 경력만을 남기고 무덤만을 찾아 사라져 갔다. 그들 가운데 겸손하고 마음이 온유하고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며 애인을 기다리며 나날을 보내는 한 처녀가 있었다. 아름답고 젊은 그녀, 아, 그녀 앞에 전개되는 것은 황량하고 넓은 소리 없는 인생의 사막일 뿐, 그곳엔 옛날에 슬픔과 고통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의 무덤이 보이고 오랫동안 정열이 식어버리고 희망도 오랫동안 식어버린 곳, 마치 오랫동안 타던 모닥불과 태양 속에 표백된 뼈다귀를 볼 수 있는 서부의 사막을 지나가는 이민의 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삶에는 미완성에다 불완전한 것이 있었으니 마치 유월의 아침이 새소리와 햇빛과 더불어 밝았다가 갑자기 중천에 멎더니, 서서히 색이 희미해지면서 방금 솟아오른 동녘으로 슬며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때로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방황하다가 이윽고 그녀의 가슴 속에 타오르는 열정, 억제할 수 없는 사랑의 그리움, 굶주림, 그리고 목마름에 들떠서 그녀는 다시 끝없는 유랑의 길 떠났다. 때로는 묘지를 찾아가 십자가와 묘지의 비석을 바라보기도 하고, 이름 없는 무덤 앞에 앉아서 이것을 자기 애인이 영면하고 있는 묘지로 생각하고 그 곁에 묻히고 싶어했다. 때로는 들리는 소문과 덧없는 속삭임에 이끌려 그녀는 안타까이 지향없는 길을 떠나기도 했다. 때로는 애인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잊어버린 옛날의 일이며 먼 곳이었다. ‘가브리엘 라쥬네스?’ 그들은 말했다. ‘오, 그렇지! 만난 적이 있어요. 대장장이 바씰과 일행이 되어 둘다 고원지방으로 가서 지금은 숲길 안내자며 이름난 포수가 되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가브리엘 라쥬네스! 오, 그래, 만난 적이 있어요. 지금쯤 루이지애나 지방에서 뱃사공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에반제린, 왜 한없이 기다리고만 있는거야 가브리엘같이 훌륭한 젊은이가 없어서 그래? 상냥하고 진실한 마음과 공손한 마음을 가진 상대자가 없어서 그래? 공증인의아들, 밥티스트 르블랑도 에반제린을 사랑하고 있으니 그에게로 가서 행복하게 살지 그래! 너무 아름다워서 성 카타리나의 머리를 땋고 지내기는 너무 아까와.’ 에반제린은 슬픈듯 하나 침착한 목소리로 늘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나의 몸은 따라가는 거예요. 마음이 등불과 같이 가는 방향을 비춰줄 때는 모든 것이 어둠에서 벗어나 밝아진답니다.’ 그 말에 에반제린과 친밀한 고해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반제린! 그것이 마음속에 전해지는 하나님의 뜻이지! 헛된 애정이란 말해선 안돼. 애정이란 결코 헛되지 않아. 애정의 흐름이 남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해도 빗물되어 샘으로 되돌아와 샘을 신선히 흐르게 하는 것이지. 샘은 증발되었다. 다시 샘으로 돌아오는 법이지. 슬픔과 침묵은 강하고 인내는 황금 같은 것이니 참고, 노력해서 그대 사랑을 성취해야지 ! 마음이 황금같이 순화되고 강해지고, 완전하여져셔, 하나님같이 성화되도록 그대의 사랑을 성취해야지!’ 이 같은 신부의 말에 더욱 힘을 얻은 에반제린은 참고 견디며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는 바다의 만가가 들려오고 그 소리 속엔 ‘절망하지 말라’는 속삭임이 섞여 있었다. 이처럼 가련한 에반제린은 돌자갈과 가시덤불 위에서 맨발로 피를 흘리는 부자연스런 인고(忍苦)가 계속 되었다. 시의 신이여! 우리들로 하여금 이 유랑자의 발자취를 쫓게 하소서! 그녀가 방황하며 걸어온 길 그녀가 살아온 나날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산골짜기를 냇물을 따라 걸어가는 나그네처럼 때로는 물가에서 떨어져 들판 여기저기서 물빛을 바라보다 이윽고 물가에 다다르면 울창한 숲에 가려 비록 시냇물의 흐름은 보이지 않더라도 끊임없는 그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마침내 냇물의 어귀를 찾아내는 그러한 기쁨을 누리게 해주소서.
Ⅱ
때는 오월, 아름다운 강의 훨씬 하류, 오하이오 강을 지나고 워배시 강을 지나, 넓고 빠른 미시시피강의 황금빛 물결 따라 저어가는 한 척의 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카디인들의 배였다. 그들은 유랑인들 무리였다. 말하자면 조난으로 해안 여기저기를 표류하던 파편들이 지금은 함께 연결된 뗏목과 같은 무리였다. 오직 희망과 소문에 의지하면서 아카디 해안과 오펠루스 고원에서 소작농을 하던 농부들 속에서 일가 친척을 찾는 남녀노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에반제린과 그녀의 보호자 휘리시앙 신부도 있었다. 그들은 얕은 사주(砂洲)를 지나 우거진 황야를 거쳐서 낮이면 파도치는 물결 따라 내려가고, 밤이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강가에서 노숙했다. 때로는 흰 솜털 같은 목화송이가 핀 푸른 섬들 사이의 급류를 지나 넓은 호반으로 나오면 은빛 사주들의 여기저기 눈같이 하얀 것을 반짝이며 수많은 펠리컨들이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지세는 평탄해지고 강 양쪽에 연하여 백단나무가 우거진 정원들 가운데 흑인의 집과 비둘기집이 있는 경작자들의 집이 있었다. 사시사철 여름인 열대 지방에 접근하고 있었던 골든 코스트를 지나고 오렌지와 시트론의 과수림을 지나서 장엄한 미시시피 강이 동쪽으로 구부러져 흐르는 지방에 가까이 갔다. 진로를 바꾸어 플레크민 만으로 들어가자 그곳은 거미줄처럼 얽히어져 있어서 우회하는 흐름의 미로 속에 빠져 버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는 키 큰 삼나무 가지들이 무성하게 뻗어 어두컴컴한 동굴을 이루고, 그 삼나무 밑의 이끼들이 마치 오랜 성당 벽에 걸려 있는 깃발처럼 하늘거렸다. 사방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해질 무렵 둥우리로 돌아오는 해오라기의 날개 소리나, 흉측한 웃음소리로 달을 맞이하는 올빼미 소리뿐이어서 사방은 죽은 듯 고요했다. 달빛은 물 위를 아름답게 비추고, 컴컴한 동굴 이루는 삼나무들을 비추고, 낡은 집 틈새로 나오는 빛과도 같이 녹음의 동굴을 비추었다. 사방은 오로지 꿈속같이 어렴풋하고 신기한 것뿐, 그들의 마음 속엔 경이와 슬픔이 감돌 뿐이고, 눈에 보이지 않고 알 수도 없는 불길한 징조뿐이었다. 들판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멀리 앞에 있는 풀잎들이 자지러지듯이 운명의 말굽 소리 듣고 불행의 징조 예감하여 운명이 닥치기도 전에 사람들의 마음은 자지러졌다. 그러나 에반제린의 마음은 달빛을 통하여 자기를 부르며 어른거리는 눈 앞의 환영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그것은 환영의 형태를 확신하려는 그녀의 간절한 마음의 바람이었다. 그러한 어두침침한 통로를 통해 가브리엘의 방황하는 모습이 노를 저을 적마다 그녀에게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 환영 대신에 뱃머리의 한 뱃사공 청년이 일어서서 이같이 음울한 밤중에 노를 저어 지나가는 배가 없나하고 그 신호로 피리를 불었다. 피리 소리는 어둠에 싸인 기둥과 나뭇가지 사이에 울리어 정적의 고요함을 개고 말이라도 하듯이 숲에 메아리쳤다. 머리 위에선 소리없이 이끼의 덩굴들이 피리소리에 떨기 시작했다. 메아리는 여러 갈래로 일어나 물길을 따라서 또 울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멀리 사라져 갔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사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메아리가 그쳤을 때 아픔의 아픔이 느져져서 침묵은 더해만 갔다. 그 뒤에 에반제린은 잠들었지만, 뱃사공은 밤새워 배를 저었다. 때로는 침묵을 지키다가, 때로는 그 옛날 아카디 강에서 부르던 ‘캐나다의 노래’를 부르면서 배를 저었다. 그때 밤의 어두움을 통하여 광야의 신비로운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파도 소리인지 숲속의 바람 소리인지 분간 할 수 없는 소리가 학의 울음소리와 사나운 악어의 으르렁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이튿날 낮이 되자, 그들은 숲속을 빠져 나와 눈앞에 황금빛 애처펄라이어 호수를 바라보았다. 저어가는 노로 그려지는 파문에는 수많은 수련이 출렁이고, 뱃사공의 머리 위에 아름답게 빛나는 연꽃이 황금화관을 이루고 있었다. 수련의 향기와 한낮의 열기로 공기는 희박해지고 숲이 무성한 섬들은 향기로운 장미의 울타리로 둘러싸여 그 곁을 지나는 뱃사공들은 졸음의 유혹을 받았다. 마침내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섬에 닿았다. 물가의 푸른 버드나무가지 아래 안전하게 배를 대어놓고, 밤새 지친 나그네들은 여기저기 잔디밭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머리 위에는 넓고 큰 삼나무가지가 퍼져있고 그 굵은 가지에서 능소화와 포도덩굴들이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처럼 늘어져 있었고,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바쁘게 날아다니는 벌새(蜂鳥)는 늘어진 층계를 오르내리는 천사와도 같아 보였다. 이와 같이 에반제린은 바로 그 나무 아래에서 꿈을 꾸었다. 그녀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차고 있었고, 밝아오는 천국의 새벽은 잠들었던 그녀의 영혼을 천국의 영광으로 비추었다.
그들이 잠자는 동안 총과 함정으로 사냥하는 사냥꾼들이 근육에 불거진 팔로 노를 저어서 강물따라 질주하던 가볍고 경쾌한 배 한 척이 많은 섬 사이를 뚫고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리고 물소와 물개들이 서식하는 육지로 향하고 있었다. 키를 잡고 있는 한 젊은이가 깊은 생각과 수심에 빠져 있었다. 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이마를 덮고, 나이보다 겉늙은 표정엔 어딘지 슬픈 빛이 어리어 있었다. 바로 그가 가브리엘이었다. 기다림과 불행에 지쳐 자신과 슬픔을 잊어버리고 서쪽의 황야로 급히 향해가고 있었다. 배는 섬 가까이 바람받이 쪽으로 질주해 갔으나, 반대쪽 강가 종려나무 숲이 방해를 해서 버드나무 그늘에 가리어있던 에반제린의 배는 보이지 않았다. 잠자던 뱃사공들은 노젓는 소리를 듣고도 깨어나지 못했다. 에반제린을 깨울 천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고원 위에 떠도는 구름과도 같이 배는 빠르게 지나갔다. 노젓는 소리가 멀리 사라질 즈음에 사람들은 곤한 잠에서 깨었고 아가씨는 탄식을 하며 신부에게 말했다. ‘오, 신부님! 어쩐지 가브리엘이 가까이 있는 것만 같아요. 어리석은 꿈일까요, 허황된 미신일까요 ? 아니면 천사가 지나다가 저의 마음속에 진실을 알려주고 간 걸까요?’
에반제린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계속했다. ‘아, 어리석은 나의 공상이지! 신부님의 귀에는 이런 말이 무의미하게 들리겠지요?’ 그러나 신부는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너의 말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니야. 나에겐 의미있는 말이야. 감정이란 깊고 고요한 것이며 곁에 나타나는 말은 숨겨진 닻이 묻힌 곳을 알려주는 부표와 같은 것이지. 그러니 마음을 굳게 믿고 세상 사람들이 꿈이라고 부르는 것도 믿어야지. 가브리엘은 필시 너와 가까운 곳에 있어. 남쪽으로 멀지않은 테시 강가에 성 마우르와 성 마르틴이란 두 마을이 있지. 그곳은 오랜 동안 유랑하던 신부가 신랑의 품에 안기는 곳으로 목자가 오랫동안 잃었던 양을 다시 찾게 되는 곳이지. 아름다운 그곳엔 고원이 펼쳐지고 과수의 숲이 우거진 곳 밤 아래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향기롭고 새파란 하늘이 퍼져서 무성한 숲이 벽을 이루고 있지. 그래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루이지애나의 에덴 동산이라고 부르고 있단다.
이 말에 위로를 받은 일행은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조용한 석양이 찾아왔다. 서쪽 수평선에서 태양이 마술사처럼 금빛 광채로 사방의 산과 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수면으로부터 황금빛 아지랑이가 올라와서 하늘과 물과 숲이 그것을 접해서 모두 한데 어우러진 듯 보였다. 에반제린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술에 걸린 듯 투명한 감정의 샘은 주위에 있는 하늘과 물과도 같이 사랑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 이웃 숲속에서 거칠게 노래하던 앵무새가 물 위로 늘어진 버들가지에 올라 앉아 그네를 타며 그 조그만 목소리로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마치 하늘과 숲과 물이 숨을 죽이고 듣는 듯 조용했다. 처음엔 그 노래는 슬픈 가락이었으나 어느 새 미친 듯이 드높아져 술의 여신 버캔디즈를 섬기는 교도들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마치 소리가 한데 모이더니, 소나기 후에 부는 시원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지나치며 빗방울을 흔들어 떨어뜨리듯 그 새는 조롱하는 노래가락을 내던졌다. 이 같은 전주곡을 들으며 감개무량한 가운데, 일행은 서서히 푸른 오펠루사스 벌판을 흐르는 테시 강으로 들어갔다. 이때, 호박빛 하늘 저편, 숲 언덕 위의 인가에서 오르는 연기줄기가 보이고, 피리소리와 멀리서 우는 가축의 소리가 들려 왔다.
Ⅲ
강둑 근처, 참나무 그늘로 뒤덮인 곳에 외따로 조용한 목자의 집이 한 채 서 있었네. 그 참나무 가지에는 옛날 드루이드 신부들이 크리스마스에 쓰려고 금도끼로 잘라낸 나무처럼 스페인 이끼와 신비스러운 겨우살이 인동꽃이 휘날리고 있었다. 집 주위 꽃밭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향기로 대기를 채우고, 집은 알뜰하게 다듬어진 참나무로 지어져 있었다. 지붕은 드넓고 낮았으며, 주위에는 널따란 베란다가 있고, 그것의 가느다란 기둥에는 장미와 포도덩굴이 뻗어있고, 벌새와 꿀벌들이 그 주위를 날아다녔다. 집 양쪽 모퉁이에는 꽃밭이 있고, 그 가운데는 비둘기집이 있었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의 상징, 끝없는 구혼과 끝없는 사랑의 싸움터였다. 사방은 고요했고, 양지와 응달의 선이 숲꼭대기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으나, 집은 그늘 속에 잠겨 굴뚝에서는 가늘고 파란 연기가 솟아 서서히 저녁하늘에서 사방으로 사라져갔다. 집 뒤에는 정원입구에서부터 오솔길이 하나 무정한 참나무 싶을 지나 끝없는 평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꽃들의 바다 속으로 해는 지고 있었다. 이 석양빛을 담뿍 받으며, 열대지방의 잔잔한 파도를 달리는 배가 돛폭에 그림자를 받고 있듯이 이 숲속의 나무들에는 포도 덩굴이 엉키어 있었다.
고원의 풀꽃들 물결치는 숲 언저리에는 스페인식 안장과 등자(?子)를 얹은 말이 각반 두르고 녹비(鹿皮) 승마복을 입은 목자가 앉아 있었다. 다갈색의 큼직한 얼굴에 챙이 없는 스페인 모자를 쓴 그는 위엄있는 시선으로 평화스러운 경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암소들이 조용히 풀을 뜯고, 강물에서 오른 신선한 수증기를 숨쉬면서 산야를 이리저리 노닐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후, 그는 옆구리에 찬 피리를 빼어들고 한 번 세게 불자, 그 소리는 습기찬 저녁의 대기를 뚫고 멀리 울려퍼졌다. 그러자 숲속에서는 갑자기 소들의 희고 긴 뿔이 밀려드는 흰 거품과도 같이 나타났다. 소들은 잠시 바라다보고는 울면서 들판을 달리어 구름 떼처럼 목장으로 몰려갔다. 목자가 집으로 돌아오니, 정원의 문간에서 신부와 처녀가 자기를 맞으러 나오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라,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두 팔을 벌리고 환성을 지르면서 그들에게 달려갔다. 얼굴을 보자, 그가 바로 대장장이 바씰임을 곧 알아볼 수 있었다. 바씰은 손님들을 정원으로 안내하면서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들은 장미꽃 만발한 정자에서 끝없는 질문과 대답을 주고 받으며, 서로 정에 넘쳐 얼싸안고 웃고 울기도 하다가 서로 잠잠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분명 가브리엘은 이곳에 없었으니, 에반제린의 마음에 새로운 의문과 불안이 맴돌았다. 당황하듯 바씰은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만일 애처펄라이어 호수 쪽에서 왔더라면 도중 어디에선가 가브리엘을 만났을텐데.’ 바씰의 이 말을 듣자, 에반제린의 얼굴은 어두워지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여기에는 없다고요? 가브리엘이?’ 바씰의 어깨에 얼굴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바씰이 이렇게 말했다. ‘에반제린, 기운을 차려, 그가 떠난 것은 오늘 아침이야. 미련한 녀석 ! 내게 가축을 맡겨두고 떠나버렸지. 늘 마음이 불안에 지치고 안정을 얻지 못해 이같이 변화없는 조용한 생활을 참지 못한거야. 늘 너를 생각하고 말없이 괴로와하면서 너와 자기의 고민만을 이야기하다가, 마침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치고 싫증이 나고 나마저 싫증이 난 모양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과 노새 장사나 하라고 어데이예스로 보냈지 거기서 인디언의 발자취를 따라 오자크 산맥으로 들어가 숲속에서 야수를 잡아 털가죽을 얻고, 물에서는 물개를 잡을거야. 그러니 낙심 말아, 이제 우리들이 함께 그 녀석을 쫓아가면 될 테니. 아직 멀리는 못 갔을 거야. 운명과 강물은 반대로 흐르니, 내일 아침 동이 틀 무렵 아침 이슬 헤치며 뒤를 쫓아 가면 그를 도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때 즐거운 목소리 들리더니 강 위쪽에서 친구들의 팔에 부축되어 바이올린 켜는 미카엘이 왔다. 추방 후, 오랫동안 바씰의 신세를 지며 음악을 들려주면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지내고 있었다. 올림포스 산의 신과 같이 그는 은빛 백발과 바이올린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다. ‘미카엘 만세!’ 사람들은 외쳤다. ‘용감한 아카디의 음악가 만세!’ 친구들은 개선행렬을 이루고 그의 몸을 치켜 올렸다. 휘리시앙 신부와 에반제린은 이 노인을 맞아 옛날을 회상하며 기뻐했다. 그때 바씰은 소리를 높여 친구들과 이야기에 흥을 돋구었다. 그리고 크게 웃으면서 어머니와 딸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날의 대장장이가 부유해져서 넓은 땅과 많은 소들을 소유하고, 의젓한 자태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또한 이 지방의 토지와 기후 이야기를 듣고 새삼 놀랐다. 그리고 대초원의 마소들은 먼저 잡는 자가 임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저마다 자신도 이 고장에 정착하여 목축업을 하려했다. 그들은 층계를 올라가, 베란다를 거쳐 집안으로 들어서니 잔칫상이 준비되어 있었고, 일동은 잠시 쉰 다음 즐거운 만찬을 들었다. 만찬이 한창일 때, 어느 새 주위에 어둠이 깔리었다. 주위는 고요해지고 이슬 머금은 달과 무수한 별들이 모든 정경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이보다 더 밝은 불빛에 얼굴들이 빛나고 있었다. 식탁 상좌에 앉았던 바씰은 포도주와 마음을 가득히 부어 권하기도 하고 맛좋은 내키토쉬 담배를 담은 파이프를 피우면서 손님들에게 이야기 하자 그들은 웃으면서 듣고 있었다. ‘오랜 동안 친구도 가정도 없이 헤매던 친구들을 만나니 정말 기쁩니다. 전에 살던 집보다 나은 곳에서 여러분들을 맞이 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이곳의 겨울은 강물을 얼게 하는 추위도 없고, 굶주림도 없고, 이곳의 토지는 농민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자갈밭이 없소. 뱃전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이 쟁기는 부드럽게 흙을 헤쳐줍니다. 사철 오렌지 나무에 꽃이 피며, 풀은 캐나다의 한여름보다 하룻밤 사이 더 길게 자란다오. 임자없이 많은 소들은 추원에서 뛰어 놀고, 땅도 마음대로 가질 수 있고, 숲의 나무들은 얼마든지 벌목하여 집을 지을 수 있다오.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 밭에 곡식이 누렇게 익어도 영국의 조지왕이 우리를 추방할 염려도 없는 곳이오.’ 이렇게 말하며 바씰은 노기에 찬 담배 연기를 뿜으며, 다갈색 커다란 손으로 힘껏 탁자를 두드리자, 손님들은 모두 놀랐다. 휘리시앙신부도 놀라 피우던 담배를 멈추고 멍히 바라보았다. 용감한 바씰은 다시 부드럽고 유쾌하게 말했다. ‘여러분들, 이곳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열병이요! 추운 아카디와는 달라 이곳에서 유행하는 열병은 목에 거는 호두 속에 거미를 넣어도 예방되지 않소.’ 그때, 문간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더니 층계를 지나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것은 목자 바씰의 초대를 받은 이웃에 사는 크리올인과 아카디 농부들이었다. 옛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의 모임은 즐거웠다. 유랑 끝에 만난 친구들은 서로 손을 잡고 흉금을 털어놓았다. 그때, 옆방에서 미카엘의 미묘한 바이올린 소리 들려오자, 사람들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어린아기같이 즐거워하며 지난 일을 모두 잊어버린 채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흥에 취하여 옷자락을 휘저으며 미친듯이 누구나 할 것 없이 춤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 들었다.
이 동안 신부와 바씰은 멀리 떨어져 앉아서 과거, 현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편 에반제린은 넋잃은 사람처럼 서서 모든 추억을 누를 길 없어 그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도 바닷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어쩔 수 없는 슬픔에 마음이 사로잡혀 남모르게 정원으로 빠져 나갔다. 아름다운 밤, 숲의 검은 장벽 저쪽 뒤에서는 맑고, 밝은 은빛 달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전율적인 달빛은 여기저기 나뭇가지 사이로 강물을 비추었다. 마치 즐거웠던 사랑의 추억이 어둡고 슬픈 영혼을 비추듯이 그녀의 둘레 핀 온갖 꽃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향기로 쏟았고 침묵하는 카투지언 교도처럼 말없는 밤을 향하여 꽃의 기도와 참회를 드렸다. 에반제린은 꽃보다 향기로웠고 그녀의 마음은 밤이슬같이 무거웠다. 정원의 문을 통해서 참나무 그늘을 지나 멀리 끝없는 평원을 향해서 걷고 있을 때, 밤의 정적과 매력적인 달빛은 그녀의 가슴 속에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을 퍼붓는 것 같았다. 평원은 고요했다. 은빛 안개는 들판을 덮고, 수없는 반딧불은 날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하나님의 뜻인 별들이 이미 놀라와 하고 기도를 잊어버린 사람들의 눈 위에 빛났다. 인간은 마치 천사가 나타나 ‘멸망’이라는 글자를 쓰기라도 한듯이 빛나는 혜성이 성전의 벽에 나타났을 때만 하나님께 경배를 하지. 그녀의 마음은 다만 홀로 별들과 반딧불 사이를 방황하며 외쳤다. ‘오, 가브리엘!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그대는 가까이 계시다면서 어찌 볼 수 없나요? 가까이 계시다면서 어찌 그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나요? 아 ! 당신의 발은 이 길을 수없이 밟으셨겠죠! 아 ! 당신의 눈은 이 숲을 수없이 바라보셨겠죠! 아 !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 참나무 밑에 찾아와 저를 생각하면서 쉬신 것도 한두 번이 아니죠! 언제나 나의 눈은 그대를 보게 되고, 나의 팔은 그대를 안게 되나요? ‘ 이때 갑자기 이웃에서 요란하게 솔개의 울음 소리가 숲속의 피리처럼 들리더니 이윽고 옆의 숲을 지나 멀리멀리 울려퍼져, 다시 고요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참아라’ 하고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 참나무는 속삭이고 달빛에 빛나는 풀밭은 ‘내일!’하고 탄식으로 대답하였다.
이튿날 태양은 밝게 솟아오르고 정원의 꽃들은 이슬의 눈물로 태양빛을 적시고, 수정화관 속에 간직한 향기로 태양의 기다란 머리를 적시었다. ‘잘 다녀오시오!’ 신부님이 응달진 문간에서 말했다. 절식하고 굶주린 당신의 탕아를 데려오시고, 신랑이 올 때 잠들고 있던 어리석은 처녀도 데리고 오시오.’ 에반제린은 대답하고 미소지으면서 바씰과 함께 강가로 내려갔다. 뱃사공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아침과 햇빛과 기쁨으로 길을 떠나 마치 사막에서 운명의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도 같이 앞서 가버린 가브리엘의 행적을 뒤쫓았다. 그 날도,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호수에서, 숲속에서, 강가에서도 그들은 가브리엘의 행적을 찾지 못했다. 분명치 않은 풍문에 이끌리어 황야의 고적한 산길을 헤매었다. 이윽고 어데이예스라는 스페인의 마을에 있는 조그만 여인숙에서 지친 몸을 쉬면서 수다스런 주인의 말을 들으니 바로 전날 말과 안내인들과 동료들과 함께 이 마을을 떠나 인적 드문 고원을 찾아 갔다고 한다.
Ⅳ
서쪽 아득한 먼 곳에 황야가 있는데, 거기에 산들이 솟아 있고 노을이 빛나는 산봉우리는 일 년 내내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 아래 험하고 깊은 절벽의 골짜기에는 출입문과도 같이 이민의 마차도 지나가기 곤란한 산길이 있었다. 오레곤 강이며 델라웨어, 오와이히 강이 서쪽으로 흐르고, 동족에는 네브라스카 강이 윈드리버 산맥 속에 스위트워터 계곡을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다. 남쪽에는 폰텐 퀴브 강이 스패니시 산맥에서 흘러나와 강물은 모래와 바위를 침식하면서 황야의 바람에 쫓기고 무수한 폭포가 되어 하프의 굵은 줄과도 같이 장엄하고 큰 소리를 내며 끊임없는 주악 속에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강물 사이로 사뭇 아름다운 고원이 펼쳐져 양지와 응달에 걸쳐서 물결치는 풀덤불이 보이고, 장미와 자주빛 콩꽃이 풍성하게 엉켜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 평야에는 들소며 큰 사슴이며 애기 사슴들이 뛰놀고 이리와 야생마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산불이 일고 길손들을 괴롭히는 거센 바람이 부는 들판에는 이스마엘 후손들이 정처없이 유랑하다 피로써 사막을 물들인 싸움터에는 독수리와 매가 마치 싸우다 쓰러진 추장의 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층계를 올라가 공중을 향해 달리듯이 근엄한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떠돌고 있었다. 여기저기 난폭한 야만인들의 움막집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급류로 흐르는 냇가에는 우거진 숲이 있었다. 사막의 군자인 근엄한 말없는 곰은 냇가의 나무 뿌리를 캐러 골짜기 어두운 곳을 내려가고 이 모든 것 위에 수정 하늘이 신의 가호의 손길인 양 뒤덮고 있었다. 오자크 산 기슭에 있는 이상한 곳으로 깊숙이 가브리엘은 사냥꾼과 덫꾼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한편, 에반제린과 바씰은 인디언 안내자와 함께 가브리엘을 만날 것 같은 생각에 날마다 그의 행적을 따라 갔었다. 때로는 먼 평야의 아침 하늘에 연기를 보고는 그의 모닥불 연기로 착각하고, 날이 저물어 거기에 당도하면 거기 있는 것이라곤 타다남은 나무와 재뿐이었다. 때로는 서글프고 피곤하여도, 마법사 파타 모르가나가 광명의 호수 나타냈다가 금방 사라지게 하는 마법의 신기루 같은 희망이 그들을 여전히 인도하였다.
어느 날 저녁, 모닥불을 쬐고 있을 때, 한 인디언 여인이 소리도 없이 움막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엔 슬픔과 그 슬픔만큼이나 깊은 인고(忍苦)의 흔적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숲속의 안내인인 캐나다인 남편을 저 잔인한 카만치족들의 먼 사냥터에서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셔니족 여인이었다. 그녀를 성의껏 환영하고 위로하였고 모닥불에 쇠고기와 사슴고기를 구워서 대접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자, 바씰과 다른 사람들은 긴 하루의 여행과 사슴과 들소의 추적에 지친 몸을 땅바닥에 누이고 잠시 후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일렁이는 불빛이 담요에 싸여 누워 있는 그들의 검은 얼굴을 불꽃이 비추고 있었고 인디언 여인은 에반제린의 천막 어귀에 앉아서 또박또박 부드럽고 나직한 어조의 인디언 사투리로 자신의 즐거웠던 사랑과 불행했던 일들을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듣고 에반제린은 한없이 울었고, 자기와 비슷한 불운과 슬픈 사랑에 우는 여인도 있음을 알고, 측은한 생각과 여자다운 연민의 정이 가슴 속 깊이 파고 들었다. 그녀 또한 자신의 사랑과 그 재난을 모두 털어놓았다. 셔니족 여인은 놀란 표정으로 앉아 듣고 있더니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침묵만을 지키다가 이윽고 신비스런 공포가 그녀의 머리 속에 떠올랐던지 다시 입을 열어 전설의 ‘모위스’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위스라는 눈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한 처녀와 결혼했으나 날이 밝아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햇빛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신부는 그를 찾아 숲속으로 쫓아갔으나 끝내 애인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이어서 인디언 여인은 그 부드럽고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듯이 아름다운 ‘릴리노우’ 이야기를 하였다. 릴리노우는 유령에게 구애를 받았다. 그 유령은 황혼이 깃드는 고요한 어느 날, 아버지의 집 위에 우거진 소나무 저쪽으로부터 저녁 바람과 같은 말소리로 릴리노우에게 사랑을 속삭이었다. 그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남편의 녹색 모자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녀를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상스런 놀라움에 에반제린은 아무 말 없이 요술 같은 인디언 여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때 그녀의 주위도 요술에 싸인 듯 했고, 인디언 여인가지도 요술장이같이 보였다. 오자크 산맥 정사에서 달이 서서히 떠올랐다. 그 신비스런 달빛은 조그만 천막을 비추고 그늘진 잎을 비추면서 숲을 빛으로 포옹하고 있었다. 냇물은 졸졸 흘러가고, 나뭇가지들은 들릴까말까하는 속삭임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에반제린의 마음은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으나, 독사가 제비 둥우리를 기어들 듯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한없는 두려움이 그녀의 가슴 속에 기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두려움이 아니었고 유령의 나라에서 풍기는 입김이 밤 공기 속에 떠도는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에반제린은 자기가 그 인디언 여인이 말한 그 처녀처럼 유령을 쫓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잠이 들어 두려움도 유령도 사라져 갔다.
이튿날 아침 일직 북쪽으로 계속 행진했는데 떠날 때 셔니족 여인이 이렇게 말했다. ‘이 산맥 서쪽 기슭의 조그만 마을에 제수이트라고 부르는 검은 옷 입은 전도단의 신부가 살고 계십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마리아와 예수의 이야기를 가르치시고 사람들은 그 얘기에 웃기도 하고 슬픔에 잠기어 울기도 한답니다.’ 그러자 갑자기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에반제린은 말했다. ‘그 신부에게 가 봅시다. 좋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니!’ 그래서 그들은 말머리를 그곳으로 돌렸다. 해가 서산에 질 무렵 그들은 돌출한 산 기슭에서 마을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넓고 푸른 초원을 흐르는 강 언덕 가까이에 기독교도의 천막, 예수회 전도단의 천막들이 보였다. 마을 한복판에 서 있는 큰 참나무 아래 검은 옷의 전도단장이 아이들과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나무 줄기 높이 매달아 놓은 십자가상은 포도 덩굴에 감기에 괴로운 얼굴로 아래에 꿇어앉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성당이었다. 나뭇가지들이 엇갈려 하늘 높이 이룬 푸른 천정에는 저녁 기도의 찬미가 메아리 쳤고 그 곡조에 맞추어 나뭇잎과 가지들은 속삭이고 있었다. 그 일행들은 모자를 벗고 말없이 가까이 가서 잔디에 엎드려 그들과 함께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가 끝나고, 축도가 농부의 손으로 씨뿌리듯이 신부의 손으로 회중들 위에 주어진 후 신부는 그들에게로 천천히 다가와 반가이 맞았다. 그들의 답례를 받자, 신부는 숲속에서 반가운 모국어를 듣고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상냥한 말로 그들을 자기 집으로 안내하였다. 돗자리와 털가죽 위에 앉아 쉬면서 수수 과자 대접을 받고 신부의 표주박에서 물을 얻어 목마름을 해갈하였다. 이윽고 그들의 사연이 이야기 되었고, 신부는 엄숙하게 대답했다. ‘가브리엘이 지금 내 곁의 자리, 아가씨가 앉은 바로 이 돗자리에서 떠난 지 엿새째가 됩니다. 지금 말씀과 똑 같은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소. 그리고 그는 쓸쓸한 여행을 떠난거죠!’ 신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친절한 어조였지만, 에반제린의 마음에는 그 말들이 마치 철새가 떠나버린 외로운 둥우리에 차가운 겨울 눈송이가 내리듯 들렸다. ‘가브리엘은 멀리 북쪽으로 갔소’ 신부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사냥이 끝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오.’ 이말을 듣고 에반제린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겸손했다. ‘신부님과 함께 기다리겠어요. 저의 마음은 수심과 슬픔으로 못견디겠어요.’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모두가 찬성하였고, 이튿날 아침에 일찍이 바씰은 인디언 안내자들과 함께 일행을 데리고 멕시코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에반제린은 그 마을에 남게 되었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하루, 하루가 뒤를 이어 지나가고 며칠, 몇 주일, 몇 달이 지나갔다. 처음 나그네로 왔을 때 파릇파릇하던 옥수수 잎이 이제는 밭에서 푸른 물결치며 키가 높아지고, 옥수수의 그 가는 줄기에 우거진 잎 사이에 들새가 쉬고 다람쥐들이 곡식을 찾아 모여드는 계절이 되었다. 황금빛 물결치는 가을, 옥수수 껍질을 벗길 때, 빨간 옥수수알이 나타나면 처녀들은 사랑하는 임이 오시는 징조라 하여 얼굴 붉히었다. 그러나 찌그러진 알이 나오면 그것은 밭도둑놈이라고 깔깔대었다. 빨간 옥수수알이 나와도 에반제린의 애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참으시오!’ 하고 신부가 달랬다. ‘믿음을 가지시오. 그대의 기도는 이루어질 것이오. 초원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이 연약한 식물들을 보시오. 그 잎사귀들이 이 자석같이 똑바로 북쪽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다와 같이 길도 없고 끝도 없는 황야를 헤매는 나그네의 여행을 인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이 정처없는 이곳에 심으신 ‘자석풀’이라오. 이와 같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랍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정열의 꽃들은 향기도 한층 더하지만 그 냄새는 사람을 매혹시켜 길을 잃게 하고 죽게 하지요. 이 보잘것없는 식물은 나그네의 안내자가 되고 저 세상에서도 영약인 망우약(忘憂藥)의 이슬에 젖은 아스포델로스꽃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준답니다.
가을이 왔다 가고 또 겨울이 왔으나 가브리엘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봄이 오고 꽃은 피었고 물새와 파랑새들이 아름답게 숲속에서 우짖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돌아오지 않았다. 초여름의 미풍이 불 무렵, 새들의 노래보다 즐겁고 꽃들의 향기보다도 더 반가운 풍문이 전해졌다. 동북쪽 먼 미시간 주 숲이 우거진 세지노 강가에 가브리엘이 오두막 집을 짓고 산다는 것이었다. 에반제린은 전도단과 슬픈 이별을 고하고, 성 로렌스 호반을 찾아 안내자들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길고 험한 늪지대를 지나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미시간의 숲속에 이르러 깊이 숲속을 헤매었으나 사냥꾼의 집에는 인적도 없고 이미 폐가가 되어 있었다. 길고 슬픈 세월은 이렇게 흘렀다. 에반제린은 바뀌는 계절따라 여기저기 멀고도 먼 곳을 방황하였다. 때로는 온순한 모라비아 전도단 천막안에서 때로는 군대의 야영지나 싸움터에서, 때로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혹은 시끄러운 도시의 거리에 유령처럼 나타나 남모르게 떠나버려도 아무도 아는 이 없었다. 희망을 안고 긴 여행을 시작했을 때는 젊고 아리따왔지만, 이제 실망에 지친 그녀의 얼굴은 주름살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그녀의 아름다움은 빼앗기고 그 자리에 슬픔의 그림자만이 짙게 남아 있었다. 그 사이에 그녀의 머리 위에는 이른 아침의 동녘 햇살과도 같이 희끗희끗한 흰 머리가 나타나 퍼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세상의 지평선을 넘어서 나타나는 저 세상의 서광이다.
Ⅴ
델라웨어 강물이 씻고 지나가는 기름진 땅에 아직도 숲의 그늘이 전도자 펜의 이름을 지키고 있는 곳, 그 아름답게 흐르는 강의 언덕에 그 시조가 세워놓은 도시가 있었다. 거리의 공기는 향기롭고 복숭아는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주님들을 괴롭힌 ‘숲의 요정’을 달래주려는 듯 그 도시의 거리들은 숲속의 나무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것 같았다. 괴로움의 바다를 처음 벗어난 에반제린은 이 도시에 머물렀다. 그리고 시조 펜의 후예들에게서 몸을 의지할 집을 찾게 되었다. 이곳은 르네 르블랑이 죽은 곳으로, 그가 임종시에는 백명의 자손들 가운데서 한 사람만이 지켜보았다고 한다. 웬지 그녀는 이 도시의거리가 친근한 마음이 들었고 웬지 자기 마음속에 속삭이는 것이 있어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았다. ‘형제 자매여!’ 하고 외치는 퀘이커 교도가 반가왔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형제 자매였던 그 옛날 아카디의 그랑쁘레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헛된 탐색도, 실망만을 안겨준 노력도 끝내고 이 세상에서는 그런 노력을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때, 아무런 불평도 없이 풀잎이 햇빛을 향하듯 생각과 발걸음이 이 도시로 향했다. 산꼭대기에서 비를 머금은 아침 안개가 사라져 갈 때 멀리 밑을 바라보면 강과 도시와 마을들이 빛나고 모든 경치는 햇빛 속에 밝아지듯이 에반제린의 마음도 안개가 사라지고 내려다보이는 세상은 어둠이 걷히고 사랑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올라온 언덕 길도 저 멀리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결코 그녀는 가브리엘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은 서로 헤어질 때처럼 사랑과 젊음의 아름다움에 싸여 그녀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더구나 죽음 같은 침묵 속에 더욱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었다. 가브리엘을 생각하는 마음은 시간이 변하여도 아무런 변함이 없었고 세월도 무력하였고 그 모습은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가 비록 죽었다 해도 그녀의 마음에는 그가 영원히 살아 있었을 것이다. 인내와 자기 극복과 그리고 남을 위한 헌신만이 슬픔과 고난의 생애가 그녀에게 가져다 준 교훈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향기와도 같아 대기 중에 향기를 풍기면서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인생에 대한 희망도 소원도 없었으나 오직 경건한 걸음으로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를 뿐이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여러 해 동안 ‘자비의 자매’ 중 한 사람이 되어 붐비는 도시 뒷골목의 가난한 외로운 집들을 찾아 다녔다. 거기에는 고생과 결핍으로 햇빛이 가리어 있고 거기에는 질병과 슬픔이 다락방 속에 내버려져 있었다. 밤마다 사람들이 잠든 바람부는 거리, 거리를 야경꾼이 큰 소리로 ‘안전무사’라고 외치고 지나노라면 어느 쓸쓸한 높은 창에 그녀의 촛불빛이 보였다. 날마다 아침이면 꽃이며 과일을 장에서 팔려고 들어오는 농부들이 밤새 사람들을 간호하다 돌아오는 창백해진 그녀를 만나는 일도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지방에 페스트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상한 징조의 재앙이었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것은 산비둘기들이 상수리 열매를 입에 물고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때마침 9월 들어 바다의 조수가 일어 은빛 물결이 범람하더니 이윽고 초원에 호수를 이루듯이 죽음이 생명을 침범하여 자연의 둑을 넘어 생존의 맑은 흐름을 혼탁한 호수로 만들어 버렸다. 돈도 이 억압자를 매수할 힘이 없었고, 아름다움도 매력을 잃어 많은 사람들은 그 노여움의 채찍 아래 하나하나 사라져갔다. 아아! 친구나 돌보는 이 없는 가련한 사람들은 집없는 사람들의 집인 요양소에 기어들어가 운명하는 것이었다. 이 요양소는 초원과 숲 사이에 있었으나 지금은 시가지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그 건물 한복판의 통로와 문쪽에는 ‘가난한 자는 항상 나와 함께 있나니’라는 성구(聖句)가 보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비의 자매가 이곳을 드나들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녀의 이마 주위에 천국의 빛이 서리고 있어 마치 화가가 성자나 사도의 얼굴을 그릴 때의 후광이나 멀리 바라보이는 도시의 밤하늘에 멀리 걸려 있는 광채와도 같았다. 병자들의 눈에는 에반제린의 얼굴이 마치 빛나는 문을 통해서 머지않아 가게 될 천국의 등불과도 같이 보였다.
어느 안식일 아침, 에반제린은 인적이 끊어진 침묵의 거리를 지나 조용히 걸어서 요양소로 들어갔다. 정원의 꽃들은 여름 바람에 향기를 피우고, 에반제린은 잠시 발을 멈추고 꽃밭에 들어가 꽃을 꺾어서 한 번 더 이 아름다운 향기로 환자들을 위로해 주려고 했다. 그때 계단을 올라 동녘 바람 시원한 복도를 나왔을 때, 교회의 종루에서 부드러운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그것과 어울려서 들판 저쪽 위카코의 스웨덴 교회에서 스웨덴인들이 부르는 시편의 노래가 들려왔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나래가 부드럽게 내려오는 듯한 시간의 정적이 깃들었고 그대의 시련은 이제 끝났도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얼굴에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병실에 들어섰다. 열에 탄 입술을 축여 주고, 아픈 이마를 쓸어주고 그 얼굴에 면포를 덮어주는 간호자들의 주위를 소리없이 돌아다녔다. 거기에는 거적 위에 많은 환자들이 길가의 눈처럼 쓰러져 있었다. 에반제린이 나타나자 많은 환자들이 얼굴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려고 했다. 그녀의 우아한 모습은 감방에 비치는 햇빛과 같이 환자들에게 비쳤다. 그녀가 사방을 살펴보니 위로하는 죽음의 신이 많은 사람의 가슴에 손을 얹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 있었다. 밤 사이에 낯익은 많은 환자들이 사라져갔고 그 자리는 비기도 하고 낯선 환자들이 채우고 있기도 했다.
두려움과 놀라움에 사로잡힌 듯이 갑자기 에반제린은 입술에 핏기를 잃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에반제린은 이상한 전율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꽃다발을 떨어뜨렸고 그녀의 눈과 볼에서는 아침 햇빛과 같은 광채가 사라졌다. 그녀의 입에서 불안의 외침이 터져나오자 죽어가는 환자들은 깜짝 놀라 베개에서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녀 바로 앞자리에 한 늙은 병자가 누워 있었는데, 키가 크고 수척한 그 노인은 백발이엇다. 그러나 아침 햇살이 누워 있는 노인의 모습을 잠시 동안이나마 씩씩했던 젊었을 때 모습이 풍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누구나 죽어갈 때는 모습이 변하는 것이다. 그 노인의 입술을 빨갛게 열에 타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죽음의 신이 보게 되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표지로서 히브리인이 문간에 양피를 칠한 것 같았다. 움직이지 못하고 감각도 잃은 채 죽어가는 노인은 겨우 누워 정신은 지쳐버렸고 한없이 깊은 졸음과 죽음의 영원한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노인은 희미한 생사의 경지에서 점점 울려퍼지는 에반제린의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그 소리에 이어 고요 속에서 부드럽고 성스러운 어진 음성의 속삭임을 들었다. ‘가브리엘! 오, 나의 사랑하는 그대여!’ 그 목소리는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노인은 꿈꾸듯이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의 고향을 꿈속에 보았다. 푸른 아카디의 초원, 그 사이를 흐르는 맑은 강물, 그리고 마을과 산과 숲이 보이고 그 모든 그늘 밑을 걸어서 지나가던 어린 시절의 에바제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눈을 가만히 떴을 때, 꿈은 사라졌으나 에반제린이 자기 곁에 꿇어 앉아 있었다. 가브리엘은 에반제린의 이름을 부르려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음성은 들리지 않고 표정만이 뜻을 나타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옆에 있던 에반제린은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는 그의 얼굴을 자기 가슴에 안았다. 그의 눈동자는 아름답게 빛났으나,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등잔불이 꺼지듯이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희망도, 공포도, 슬픔도, 가슴 아파하던 것도, 마음의 번뇌도, 안타깝던 그리움도, 심한 고통도 오래 참고 견디어 온 고뇌도 모두 사라졌다! 에반제린은 차디찬 애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가슴에 껴안으면서 조용히 고개 숙여 기도 드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감사하나이다.’
지금도 여전히 태고의 숲은 서 있고, 그 나무 그늘 멀리 떠나 이름없는 무덤 속에 사랑하던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있다. 이 도시의 중심가 어느 조그만 성당의 마당 밑에 아는 이 없고 찾아오는 이 없는 그들은 누워 있다.
날마다 생명의 조수만이 그들 곁을 밀려오고 밀려갈 뿐, 그들의 가슴은 영원히 쉬고 있지만 뭇사람의 가슴은 고동치고 그들의 두뇌는 쉬고 있지만 뭇사람의 두뇌는 번뇌하고 있다. 그들의 손은 움직이지 않으나 뭇사람의 손은 쉬지 않고 그들의 발은 여행을 끝냈지만 뭇사람의 발은 지금도 피로에 지쳐있다.
지금도 여전히 태고의 숲은 서 있고 그 나뭇가지에는 풍속과 언어가 다른 민족이 살고 있다. 다만 구슬프고 안개 낀 대서양의 해변을 따라 유랑 끝에 돌아온 아카디 농부들의 후예들은 뼈나마 조상들의 땅에 묻히려고 살고 있을 뿐, 어부의 오두막집에서도 지금의 물레와 베틀 소리가 들려오고, 소녀들은 지금도 옛날 노르망디 모자를 쓰고, 수직물의 드레스를 입고, 저녁이면 벽난로가에서 에반제린의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다. 가까운 바다에서는 동굴 바위에 부딪치는 드높은 파도소리에, 숲속의 바람 소리가 서글프게 화답하고 있다. | |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
미국의 시인. 보든대학 졸업 후 약 3년 동안 유럽에 유학하고, 귀국 후 모교의 근대어학 교수가 되었다(1829∼35). 18년간 하버드대학 교수직에 있었으며, 그 동안 케임브리지에 살면서 많은 시작(詩作)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식민지 전쟁을 배경으로 한 비련의 이야기 《에반젤린》(1847), 핀란드의 《칼레발라》의 영향을 받고서 쓴 인디언의 신화적 영웅 이야기 시 《하이어워사의 노래》(55), 퓨리턴 군인의 연애 이야기 《마일즈 스탠디시의 구혼》(58) 등의 장시(長詩)가 유명하다. 이것 외에도 《인생찬가》를 포함한 《밤의 소리》(39), 《마을의 대장간》을 포함한 《민요》(42), 《화살과 노래》를 포함한 《블루주의 종루(鐘樓)》(45) 《길가 여인숙 이야기》(63∼74), 단테의 《신곡》의 번역(65∼67), 《황금 전설》(51) 《뉴잉글랜드의 비극》(68) 《신성(神聖) 비극》(71)으로 된 시극 《크리스터스》(72) 등이 있다.
너무나 가슴아픈 사랑의 서사시이다. 결혼하는날 사랑하는 가브리엘과 헤어져서 에반제린이 찾아 헤메이다가 페스트로 세상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가브리엘을 만나는 이詩를 기억이 가믈한 먼옛날 읽었다. 그리고 그향수를 못잊어서 찾아 헤메이다가 이제야 다시 이詩를 읽어 보아도 안타까운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마음의 감동과 슬픔이 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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