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늦게서야 다시 보게 되었다. SF문학사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가 필립 K.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그러나 SF보다는 느와르에 가깝다. 아름답기까지 한 어둠의 세계에서 선과 악은 모호하며, 주인공의 반대편으로 설정된 인조인간 ‘리플리컨트’들은 혐오스러운 악역이라기보단, 가혹한 운명에 괴로워하면서도 그 끝을 향해 나가는 고전 비극의 주인공 같다.
할리우드에서 최근 이 전설이 된 작품의 후속작을 최근 내놓았다. 사실 속편인지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리부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블레이드 러너 릭 데커드가 다시 나오고, ‘리플리컨트’란 중요한 소재가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연관성은 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대강 세계관은 알고 가자는 생각에 첫 번째 <블레이드 러너>를 봤던 것인데, 보고 나서 오히려 이번 영화는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수준이 낮을 것 같아서가 아니다. 보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두려울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릭은 리플리컨트 레이첼을 데리고, 다른 블레이드 러너들이 찾지 못할 먼 곳으로 떠난다. 그리고는 독백한다. 그녀와 언제까지 함께 있을 수 있을지, 그리고 우리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이 결말의 여운이 주는 아련함은 강렬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모호하고 어두운 세계와 거기서 살아가야만 하는 작은 사람들의 삶이 주는 아련함. 릭과 레이첼의 운명에 어떤 빛이 비쳐질지, 아니면 그들도 비극의 리플리컨트 ‘로이’와 같은 결말을 맞게 될지 우린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 각자의 삶에 비추어 수많은 해석과 예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정답일 수 있다. 여기서 아련함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의 ‘후속작’이 등장하여 ‘보충 설명’을 하고, ‘모호한 것을 깔끔하게 풀이’한 순간, 여운은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감독이 해석한 대로만 따라오라는 숨막히는 닫힌 세계만이 남아버렸다.
영화의 세세한 설정에 집착하는 매니아라면 이런 친절함에 감동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것이 불만스럽다. 모든 영화가 요즘 인기있는 마블 코믹스 원작의 영화처럼, 작은 것까지 세세하게 설명하는 세계관을 가져야 하며, 이른바 '떡밥'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모조리 '회수'해야 하는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드러내는 신비스런 모호함을, 영화를 그냥 못 만든 것을 감추려는 장난질이 아닌 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세계를 위해 그냥 남겨 두면 안되는 걸까?
<양들의 침묵>이 흥행하고 특히 영화 전체를 좌지우지했던, 악역 이상의 악역 ‘한니발 렉터’가 인기를 끌자, 제작사와 원작 소설 작가는 합심하여 그의 캐릭터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먼저 사라졌던 렉터 박사가 그 후 어떤 일을 벌이며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보여준 <한니발>, 이런 괴물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설명하는 <한니발 라이징>, 괴물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또다른 드라마 <한니발> 연달아 제작한 것이다. 심지어 명백히 렉터 박사가 주인공이 아닌 소설 <레드 드래건>을 다시 영화로 만들면서(이 소설의 영화는 <양들의 침묵>보다 먼저 나왔지만 덜 주목받았고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진짜 주인공 프랜시스 달러하이드는 뒤로 밀어내고 렉터 박사를 더 부각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관객과 독자와 렉터 박사의 팬(과 긁어모을 때까지 더 돈을 긁어모으고 싶어하는 제작자와 투자자들)을 ‘배려’한 후속작들의 제작은, 오히려 내가 보기엔 한니발 렉터란 신비롭기까지 한 괴물을, 그저 ‘잘못 키워서 망가진 미치광이 범죄자’로 추락시켰을 뿐이었다. 세세하게 보여줄수록, 궁금한 걸 모조리 밝혀버릴수록 한니발 렉터의 아우라는 점점 초라해져 가기만 한다.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에이리언> 시리즈의 세계관을 완성시킨다는 야심으로 만들고 있는 일련의 시리즈,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커버넌트>로 이어지는 영화 시리즈도 비슷한 효과를 내고 있다. 우주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신비로운 괴물들의 아우라는 이 시리즈에서 점점 빛이 바래지고 있다(고작 그런 배경을 가진 놈들이었다니!). 우연이지만 이 영화의 감독도 리들리 스콧인데, 이 시리즈는 사정이 더욱 복잡하다. 리들리 스콧이 에이리언이란 영화의 창조자긴 하지만 1편만 감독했으며, 2편부터 4편까진 각각 다른 감독이 맡아서 시리즈에 다양한 색깔을 입혔다. 아마 다른 편엔 관심없고 한 편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2~4편의 팬들은, 아무리 시리즈의 창조자라고 해도, 이제와서 자신이 이 영화의 세계관을 만들고 해석할 독점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듯한 리들리 스콧의 행보에 불쾌감까지 보인다고 한다. 아무리 자신의 영화라고 해도 제작이 끝나고 스크린에 걸리는 순간 해석은 이미 자신만의 것이 아니게 되는데도, 세계관을 독점하겠다는 감독의 욕심과, 굳이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는 일부 '오타쿠'들의 편집증(과 당연히 또 제작자와 투자자들의 욕심)이, 우주의 어둠과 한 몸일 것 같던 괴물의 위상을 한낱 총 좀 쏘면 죽고 마는 비디오 게임의 '잡몹'수준으로 떨어트려버렸다(<에이리언 대 프레데터>같은 한심한 영화는 그냥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마치 불교의 가르침처럼, 또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말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매혹적일 수가 있다. 결국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매혹이다. 예술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다큐멘터리나 언론 심층 보도가 아니다. 영화가 자기자신을 닫힌 세계 속에서 정해진 결말로 끝내 버리려는 욕망을 자제할 때, 그 모호하고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세계 속에서 비로소 인간의 상상력은 빛을 뿜게 되지 않을까.
사족 : 릭이 레이첼을 데리고 떠나는 결말은 극장 개봉했을 당시 <블레이드 러너>의 결말이고, 이후 '감독판'을 내면서 리들리 스콧은 결말을 바꿨다고 한다. 극장 영화의 결말은 너무 해피 엔딩이란 평가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단순한 해피 엔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멀리 떠나는 장면에 나온 탁 트인 풍경들이 영화의 분위기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첫댓글 속편이 전작을 능가하는 경우는 드물죠.. 속편 때문에 전작의 여운마저 사라져버리는 경우는 그 속편을 만들어낸 이가 원망스럽기까지 하죠..^^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그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게 만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