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일대역본 수필집을 펴내고서
현봉 이 병 수
아홉번째 수필집「짧는 인생 긴 학덕」을 한․일 대역본(번역자;이춘학)으로 펴내었다. 지난 6월 26일 일본 교토(京都)에서 개최된 표암공(瓢巖公) 후손 종친총회에 참석하여 이를 100권 배포하고 돌아왔다. 그 후 이 책이 일본에서 찾는 사람이 많으니 더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고 우선 100권을 또 추가로 송부해주었다. 일본은 우리의 이웃이었기에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아온 나라이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기에 서로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왔다.
400년 전 나의 방조(榜祖)였던 이진영공(李眞榮公)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곽재우 장군 휘하에 들어가 진주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23세의 몸으로 일본에 포로가 되어갔다. 처음엔 오사카(大阪)에 몇 년간 머슴살이처럼 지내다가 와카야마(和歌山)로 옮겨 해선사(海善寺)에서 심부름꾼으로 동거하게 되었다. 5~6년 지내는 가운데 언어가 통하게 되매 유교학자임이 드러나, 그 후 해선사 주지의 호의로 당시 기슈(紀州 : 지금의 和歌山) 번주(藩主=城主)인 도꾸가와 요리노부(德川賴宣)에게 천거되어 그로부터 학덕을 인정받아 번주의 시강(侍講)이 되었으며, 학숙(學塾)을 차려 지역 주민에게 학문과 도덕을 가르쳐 유학을 전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20년 후 그곳에서 일본 여인과 결혼해 아들 매계(梅溪)를 낳았는데, 매계는 부친의 학덕을 계승해 더욱 큰 학자가 되어 제2대 번주 도쿠가와 미쯔사다(德川光貞)의 시강이 되었으며, 학문은 물론, 정치 고문 역할까지 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 가운데서도 그가 지은 부모장(父母狀)(내용: 부모에게 효도하고 법도를 지키며 염치와 겸손으로 제 일에 충실하고, 정직을 근본삼아야 하며 좀더 다짐하기 위하여는 항상 가르치고 타일러줌이 옳으니라.) 을 번주가 높이 평가해 교육지침으로 채택, 가가호호에 배포해 벽에 붙여두고 암송, 실천케 함으로써, 그로부터 약 250년간 명치시대 교육칙어(敎育勅語)가 반포되기까지 이 지역 교육자료로 삼게 되었다. 이렇게 이진영과 매계는 2대에 걸쳐 각각 와카야마 번주의 시강이 되었을 뿐 아니라, 지역 주민 교화와 학문 전수에 힘씀으로써 지역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니, 그 업적이 지금도 와카야마 전역 곳곳에 유적으로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주민들이 진영․매계 부자가 위대한 학자이고 지역문화 발전에 공헌한 사실을 잘 알고 있어 그곳 역사학자 중에는 히라오카 시케이찌(平岡繁一) 교수 등, 진영․매계 부자를 전공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나는 수차 이곳을 방문하여 현지에서 이를 답사 확인한 바 있다.
그리하여 1998년 7월 18일 와카야마시장 (和歌山市長)이 이진영․매계 현창비(顯彰碑)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때 제막식에 초청받아 나는 합천이씨 중앙종친회 이만섭(李萬燮) 회장과 함께 부산종친회장으로서 50여 명이 참석한 바 있다. 제막식은 한국민단(韓國民團) 와카야마 지방본부 단장 (李德)의 개식사를 시작으로 현창비 건립 경과보고, 와카야마시장(尾岐吉弘)과 와카야마 현지사(縣知事 西口勇)의 인사 및 오사카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金世澤)의 축사가 있었고, 문중대표(門中代表) 이만섭 회장의 인사말도 있었다.
인사말과 축사에서는 진영․매계 두 선생의 공적을 찬양하는 내용이 수없이 언급되었으며, 앞으로의 한․일 간 우호 증진과 친선을 부르짖는 제의가 연달아 제기됨으로써 모든 참석자들의 호응을 얻는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한편, 2008년 6월 국제퇴계학 학술발표회에 참석한 나는 일본 규슈(九州) 후쿠오카현(福岡縣) 카스가시(春日市) 정행사(正行寺) 경내에 퇴계 선생 현창비가 건립된 것을 보았다. 건립 시기는 2003년 4월, 건립 주최는, 한국측은 서울 남한산성 망월사(望月寺) 주지 성법삼장법사(性法三藏法師)이고, 일본측은 정토진종(淨土眞宗) 정행사 주지 다케하라지묘(竹原知明)와 역원(役員) 다이가 레이타로(大賀禮太郞), 호소가와 가요고(細川佳代子) 등 3인이었다. 양측이 모두 퇴계선생의 높은 학문이 일본의 유학(儒學)중흥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공감하였으므로 합의 성사가 되었다. 특히 명치유신 때 일본교육헌법인 교육칙어(敎育勅語) 제정 시에 퇴계선생의 교육 사상이 칙어의 근본 축이 되었다는 사실까지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선생의 현창비를 일본 땅에 세우는 것은 뜻 있는 일이라 하여 쉬 합의가 이루어졌었다.
그 밖의 일본여행에서도 나는 임진란 때 도공(陶工)으로 끌려간 심수관(沈壽官), 이참평(李參平) 등이 도자기 기술을 전수하여 그 후손들이 세계적 수출산업으로 육성시키면서도 14대를 내려오면서 그들이 조국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현장을 보았으며, 또 나라(奈良) 등, 일본의 문화 관광을 하는 가운데서도 많은 것을 보고 느꼈으므로, 여기에서 10여 편의 일본기행문을 얻을 수 있었다.
이번 수필집은 이것을 위주로 엮었는데, 거기에 최근 신작 몇 편과 과거의 수필집 중에서 가린 몇 편을 보태어 편집하였다. 책 이름을 「짧은 人生 긴 學德」으로 한 것은 진영(眞榮) ․ 퇴계(退溪) 두 선생이 한정된 짧은 인생을 살다 가셨지만, 학덕을 갖고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기에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이국(異國) 땅 일본에서까지 최근에 현창비를 세웠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때는 바야흐로 지구촌 시대를 맞아 국제화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필집 속의 <시혜(施惠)와 보은(報恩)>에서 밝힌 것처럼, 인간의 본심은 숨길 수 없는 것이어서 400년 전 은혜를 잊지 않고 현대에 와서 현창비를 건립하고 있으니 ,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는 만고(萬古)에 불변이라 할 수 있다.
수필집을 일본어 대역본(對譯本)으로 간행한 것은 그간 일본을 자주 왕래하면서 재일본 종친회 회원들을 다수 만났으며, 와캬야마 해선사의 진영선생 위패(位牌)와 묘소(墓所) 참배를 하는 가운데서 우리말과 글을 잘 이해 못하는 일족들이 많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이 안타까웠으며, 또 그간에 사귄 일본인들에게도 작품을 통한 친교(親交)를 했으면 하는 소망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역본으로 내면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에게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됨으로써 한․일 친선과 우호증진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또 나는 한때 국제로타리클럽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일본, 대만 등과 자매결연으로 교유한 바 있고, 유네스코에 가입해 활동하면서도 상호교유가 있었으므로 여기에서도 독자가 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되돌아보면 나는 교사가 꿈이었는데, 40여년 교직에 몸담았다가 정년퇴직한 지도 어언 20년이 되었다. 첫수필집을 회갑 기념으로 상재하였으니, 이 또한 25년이 되었다. 이번이 마지막 수필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에 이 한․일대역본 작품집에 더욱 애정이 가고, 국내외의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첫댓글 한, 일 관계에 수필로 큰 일을 하셨군요.
대박 나시길 바래요.
졸문에 관심 기울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