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속 책 여행, 남은 내 인생 최고 행복”
북구공공도서실 최고령 이용자, 서인규 할아버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할 일을 안 한 것처럼 허전한데 도서관이 가까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나처럼 책에 푹 빠져봐. 무엇보다 마음이 건강해진다니까.”
올해 84세인 서인규(북구 화봉동) 할아버지는 북구 공공도서실의 최고령 이용자다. 뿐만 아니라 다독자 중에 한 사람이기도 하다. 대출이 한 번에 다섯 권 밖에 안돼 아쉽지만 서 할아버지는 그 다섯 권을 다 읽으면 자전거로 도서관에서 가서 반납하고 또 다섯권을 꽉 채워 빌린다.
올해 2월부터 이 도서실을 이용하기 시작한 서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모두 200여권 가까운 책을 읽었다. 한달에 20여권은 읽은 셈이다.
서 할아버지는 도서관이 있는 줄 몰랐던 지난해까지는 동네에 있는 도서대여점에서 유료로 책을 빌려봤다고 한다.
그러던 중 북구보건소에 들렀다가 우연히 북구문화예술회관에 공공도서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도서대여점보다 훨씬 많은 책들을 거저 빌려볼 수 있다는 그 자체에 흥분됐다고 한다.
“도서관에 책이 많아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와~’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지. 그 때 도서관문을 나서면서 ‘그래, 남은 인생 계속 이곳을 출입하겠다’ 그런 결심을 했어.”
그렇다고 나이에 맞는 ‘지긋한’ 내용의 책만 읽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주로 추리소설을 빌려보고 있는데 “청춘시절 잠시 경찰직에 몸담았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형사물’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도서관에 있는 기독교 관련 책은 거의 다 독파했고, 역사물에도 손을 대고 있다.
도서관에서 서 할아버지를 자주 본 사람들은 ‘노익장을 과시하는 것인가’, ‘젊은 시절 책을 못 읽은 게 한이 됐나’, ‘학자였던 분이 퇴직하시고 도서관을 드나드는 것인가’ 여러 가지로 궁금해 하지만 거창한 이유는 따로 없다. 단지 책 읽는 자체가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고향 마을에 다시 들어와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어울리며 놀았는데 몸이 안 좋아서 술 담배를 일체 끊고 나니 솔직히 그 시간을 뭘로 메워야 하나 싶더라구. 다행이 눈이 건강해 그 때부터 재미를 들여서 하루에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책을 읽었지. 정말 늘그막에 호시절을 만났어.”
화봉동이 고향인 서 할아버지는 청춘시절 잠시 업으로 삼았던 경찰직을 그만 둔 뒤 줄곧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고, 지난 90년대 중반 동네가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신정동에 나가 살다가 99년 다시 부인 이무생(78) 할머니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집에 앉아서 책만 읽으면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아침 저녁으로 한 시간 이상씩 걷거나 조깅하는 것은 필수라고.
지금까지 추리소설을 탐독해 온 서 할아버지는 앞으로 위인전을 두루 읽은 뒤 공공도서실에 있는 책은 전부 다 읽을 계획이라고 한다.
읽을 책이 무궁무진하다는 생각만 해도 행복하기 그지없다는 서 할아버지는 “북구에 도서관이 몇 개나 있다는 말을 듣고 참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민들을 위해 도서관을 많이 만들고 있는 구청에 정말 고맙다”며 도서관 많은 북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 할아버지는 내년 쯤 북구 연암동에 중앙도서관이 들어설 것이라는 소식에 벌써부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
북구문예회관에 임시로 자리잡고 있는 현재의 북구공공도서실을 보고도 읽을 책이 너무 많다고 입이 벌어지는 서 할아버지에게 지금보다 더 크고 책이 많은 큰 도서관이 곁에 있다는 것은 ‘꿈에서나 이뤄질법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서 할아버지가 흠뻑 빠져 있는 것은 책뿐만이 아니다. 읽고 생각하는 만큼 글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커지는 법. 서 할아버지는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느끼는 대로’라는 제목을 붙인 자기만의 수필집을 만들어 이곳에 매일 빠짐없이 일기를 쓴다.
젊었을 때부터 글을 쓰고 싶었지만 다들 그렇듯이 서 할아버지 역시 먹고 살기 바빠 여유가 없었다. 이제 그 바람을 이뤄가고 있어서 좋을 뿐 아니라 책읽기와 함께 글쓰기는 생활의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
비록 틀린 글자 군데군데 보이지만 서 할아버지의 일기장엔 진솔하고 소박한 단어와 문체로 인생의 자락들이 촘촘히 채워져 있다.
매 일기마다엔 ‘새벽 등산길의 반딧불 한점’ ‘대자연의 경치’ 등 제목이 하나하나 붙여져 있다.
이 공책 속에는 “다방하면 예쁜 ‘레지 아가씨들’이 있는 곳을 연상하겠지만 내가 가는 교회 휴게실 자판기 앞 ‘우리다방’은 ‘노(No) 레지’ 다방이다”라는 재미있는 표현도 보이고, “아내가 젊은 시절 사진이 한 장도 없다고 해서 사진첩에서 중년 사진이라도 하나 골라 오늘 사진관에 확대해서 액자로 만들어 달라고 왔다”는 뭉클한 사연도 담겨 있다.
읽을 책이 많은 도서관이 가까이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좋다, 좋아”를 연발하는 서 할아버지의 넉넉한 웃음은 다음 구절 속에 배있는 할아버지의 인생관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간간히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 저 아래 계곡에서 들려오는 흐르는 물소리 뿐, 외로움....담담함....그러나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