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주 앞에 거룩할 자 누구며, 물과 피로 씻음없이 지성소로 들어갈 자 누구입니까. 주의 성령으로 거룩하다 인침받은 당신의 백성이오나, 오늘도 구주의 공로와 거룩한 말씀없이는 주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1~22)"
물두멍은 물을 담은 커다란 놋항아리이다. 이 물은 음용이 아니라 손과 발, 몸의 세척을 위해 사용되었는데,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이나 제단에 제사 드리기 전에 먼저 이 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야 했다(출30:17~21). 놋으로 만든 이 물 항아리는 훗날 솔로몬의 성전에서 화려하고 거대한 문양과 크기로 다시 만들어진다(왕상7:27~39). 그러나 크기와 갯수, 장식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 물그릇의 용도는 제사장의 성결을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이 제의적 규례없이 성소에 들어가거나 제단 일을 보는 것은 곧 그 자의 죽음을 뜻했기 때문이다(출30:21).
하나님은 관유를 제조하여 성막 전체와 제사장 들에게 바르라고 하신다. 이것은 성막과 제사장들을 다른 이들보다 우위에 서게 하여 우상화, 신격화 할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됨을 뜻하는 "거룩"케 하신 것의 의미로 쓰였다. 그렇기에 이 모든 관유의 수혜대상들은 "하나님의 구별된 소유"를 의미하며 그 도구로써 사용된 이 관유는 일반 백성들의 사용을 엄금하여 '그 의미가 훼파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출30:31~33).
또한 여러향품을 같은 비율로 섞어 향을 만들고, 거기에 소금을 쳐서 정결하게 하는 간소한 예를 치른 뒤 곱게 빻아서 지성소 앞 향단에서 피울 재료로 사용한다(출30:34~36).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만 드리기 위한 향으로, 백성 중 누구도(제사장이라 해도) 이 방법과 동일한 제조법의 향을 써서는 안되었다(출30: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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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을 보자. 제사장 복식을 해 입고 강단에 오른 목사님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holy water를 갖다 놓는 천주교도 있다. 형식이나 형상, 눈에 보이는 것에 천착하고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이같은 시도들은 그래도 일말의 동정과 연민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모든 규례와 권위와 은사를 가지고 "자기 신격화", "자기 합리화"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회막과, 거기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만 발라주었던 관유. 관유 바른 그들을 바라보며 일반 백성들이 느꼈을 자연스러운 부러움과 존경심 앞에서 "나는 선택받은 자"라는 자만과 교만에 홀랑 넘어가는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어떤 목사는 숱한 예언사역자들로부터, 거의 이 시대의 선각자, 선지자, 참 사도로서 대 사명을 홀로 감당할 주님의 크고도 놀라운 종이라는 예언을(축복도 아니고) 숱하게 듣는다는데, 그가 강단에서 옷을 찢고 눈물을 흘리며 "아니다! 그런 참람한 말을 하지 말라!"고 외쳤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지금도 계속해서 그런 류의 예언가들이 자기 교회를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이가 어디 한 두명인가. 조금만 큰 교회, 조금만 뜨겁다는 곳에 가보면 여기저기서 "~비어천가"를 지어 부르기 바쁘다. 내용이야 다 하나같다. 주님의 큰 종, 기름부음 받은 종, 헌신의 종, 신유의 종... 다들 굉장한 인물들이시다. 찬가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겸손한 자세로 그 모든 찬가들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고개 숙인 채로 교만한' 그들의 굽은 양심은 언제나 꼿꼿이 펴질 것인고.
하나님의 관유가 그 사람을 특별히 숭상의 대상으로 세우시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을 특별히 자기 소유로 삼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는 의미였고,
제단 앞 물두멍이 그들의 성결을 보장해 주는 신비적 제의가 아니라 성결한 자만이 하나님께 나아와 섬길 수 있음을 알려주시는 방편이었으며,
지성소 앞의 향단은 보좌를 움직여서 내 뜻을 관철할 수 있는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한 거룩한 기도의 향기였음을 오늘날 우리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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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앞에 선 나는 갑자기 황망함을 느낀다. 말씀의 맑은 물이 내 존재에 부어지며, 나 역시 그러한 자 - 고개만 숙인 채 교만한 자 - 의 대열에 어깨를 비집고 들어서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주께 나아와 교제하는 오늘을 마치 관유처럼 여기고, 에봇처럼 떨쳐입고는 스스로를 높여 보려는, 동화속 까마귀 임금과도 같은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헤매고 방황할 때, 내가 의심하고 한발을 저쪽에 여전히 담그고 긴가민가 하고 있을 때, 그때 나를 받아주고 참아주던 믿음의 가족들처럼 살아갈 마음이 내게는 없다. 나보다 뒤쳐진 자를 답답해 하며, 간보고 테스트하느라 빙빙 돌기만 하는 자를 향해 마음 속으로 화를 터트리며, 스스로 괜찮다 여기며 날마다 다른 우물을 파느라 머리가 세는 자를 보면 빠따라도 치고 싶은 심정일 때가 많다.
그러나 그들이나 나나, 존재를 거룩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 없다면 똑같은 까마귀일 뿐이다. 왕관을 쓴 까마귀가 낙엽을 꽂은 까마귀를 조소하고 답답해 하는 꼴이다. 왕관을 씌워준 분, 나에게 물을 뿌리고 관유를 발라주신 분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하다가 동류들 틈에 오면 왕처럼 행세하려고 한다. 끝없이 추악한 나의 내면은, 오늘도 스산한 까마귀의 울음처럼 나를 높이고 나를 정당화하려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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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말씀으로 찬물을 뒤집어 쓴 듯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십자가 앞에 나의 마음을 내어 드린다. 저들이 반역하고 있던 반항하고 있던, 아니면 방황하고 있던. 그들을 판단할 권은 오직 창조주께만 있음을 다시 고백한다. 나는 여기서 맑은 물로 몸을 씻을 뿐이다. 나는 여기서 제단 위에 거룩한 제사를 드릴 뿐이다. 나는 여기서 지성소 안, 그 시은좌로 나아갈 뿐이다.
† 주님, 주의 거룩하신 진리의 말씀으로만 제가 성결하게 됩니다. 구주의 온전한 제사로만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아들의 피만이 시은좌까지 나아간 제 실존의 생명을 보장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자랑했습니다. 받은 은혜, 받은 은사, 받은 재능, 받은 생명, 받은 말씀, 받은 모든 소유들... 까마귀 깃털에 꼽은 공작새의 깃털처럼, 제게 주어졌으나 제게서 난 것이 아닌 선물들을 가지고 저 자신을 자랑했습니다. 은밀하게, 그러나 확실히 그리 하였습니다.
어디에 무엇에 쓰시든 제 삶은 주의 것이며, 제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오늘도 거짓과 자랑으로 비참하게 밝혀진 저의 실체를 구주의 십자가에 합하길 원합니다. 존재로 드리는 산 제사의 삶은, 주님의 심판에 오늘도 수긍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임 없이 불가능함을 고백합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고, 기도를 들으사 주님의 것으로 오늘을 사는 참됨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I pray in Jesus name. Amen.
2012.6.5. Timothy Cho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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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 경외함 알기 원합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Timothy Choe
첫댓글 고개만숙인채교만한저입니다.
입으로는겸손을기도하지만심령은교만을끌어일고있습니다.이런제가싫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심판으로 넘기셨습니다. 나도 용납이 안되는 나라는 존재를, 아들의 심판에 연합시켜 자기 안에 용납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아들의 심판의 복음에 믿음으로 연합하여, 아들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복된 날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