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윤회설을 바탕으로 교리가 이뤄졌다고 흔히 알려지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전생이나 환생이야기들을 들으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할 때도 있습니다. <자타카>라고 하는 석가모니의 전생이야기를 모은 책도 있고, 김대성이 다시 태어나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했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실려있고, 티벳의 달라이 라마가 환생한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원래 윤회설은 힌두교의 전신인 바라문교의 세계관입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를 발전시킨 종교이므로 당연히 윤회설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고대이든 현대이든 인도인들은 당연히 윤회를 믿고 있습니다. 붓다도 고대 바라문교의 세상에서 태어났고 그 세계관의 영향하에 불교를 창시해서 당연히 윤회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스님들 중에 윤회를 믿지 않는다는 분들이 있어서 약간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윤회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었고, 법륜 스님도 윤회에 부정적입니다. 윤회를 믿는다면 믿을 수 있지만 수행하는데는 믿든 안믿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믿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고 어차피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사실여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지만, 정작 법륜 스님은 인간의 일생 동안에 벌어지는 여러 굴곡을 윤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초기불교 : 붓다의 근본 가르침과 네 가지 쟁점>이라는 책을 읽어보니 붓다가 윤회에 대해서 분명하게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초기불교는 붓다가 활동하던 시기를 포함하여 붓다 입멸후 100~200년까지 존재했던 불교를 말합니다. 이후에 불교 교단이 분열되어 수십개의 교파가 난립하는 부파불교 시대가 있었고, 또 대승불교가 흥기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초기불교 시기에 간행된 경전으로 팔리어 경전과 한역(漢譯)된 아함경이 있는데. 팔리어 경전이 제작된 시기가 부파불교 시기였으므로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가르침이 혼재되어 있어 경전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고, 붓다의 원래 가르침에서 변형되고 왜곡된 부분도 있어서, 붓다의 참뜻을 알려면 초기경전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붓다의 원음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윤회사상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므으로 인도만의 사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인도에서는 바라문교가 바라문계급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윤회를 근본 교리로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윤회설은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되어 지배계급인 바라문계급은 전생의 선업때문에 바라문계급으로 태어났으니 자신들이 권세를 누리는 것은 당연하고, 노예계급인 수드라는 과거의 악업때문이므로 현세에 노예로 고생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숙명론이 되고 맙니다.
바라문교는 어떤 생명체에도 영원불멸인 아트만[我]이라는 본질적 존재가 있는데, 한 생명체가 죽으면 그 속에 있는 아트만이 빠져나와 다른 생명체 속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체의 본질이 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 아트만이 윤회를 하는 주체가 됩니다. 즉 아트만은 만물에 깃들어 있는 '영혼과 유사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아트만이 없거나 아트만이 아니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교리 중에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는 것이 있는데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 삼법인이고, 여기에 일체개고(一切皆苦)가 들어가면 사법인이 됩니다. 제행무상은 모든 만물은 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으로 나(아트만)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법무아입니다. 내(아트만)가 없는데 내가 있다고 착각하여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체개고입니다. 열반적정은 물론 이 괴로움이 없는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붓다가 체득했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열반적정은 내세가 아닌 지금 바로 여기에 일어나야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붓다에게 윤회는 별 가치가 없는 일이어서 윤회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법륜스님의 태도와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믿고 싶으면 믿어도 좋다. 그러나 윤회는 깨달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인도에서 점차 힌두교화 되면서 윤회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특히 대승불교 말기에는 거의 힌두교와 차별점이 없을 정도로 힌두교화가 되고 맙니다. 그점이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지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고귀하고 평등한 존재이며 부처를 이룰 존재라고 설한 아름다운 대승경전인 법화경에 있는 '법화경을 비방하면, 여러 가지 나쁜 환경에 태어난다. 만약에 인간으로 태어나도 신체에 결함이 생긴다.'라는 내용은 분명히 윤회를 말하고 있고, 힌두교의 숙명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장애인에 대한 비하를 담고 있어서 붓다의 뜻과는 다른 것입니다. 카스트를 부정하고 과거의 업으로 현재의 삶이 결정된다는 숙명론을 강력하게 비판한 붓다의 말씀과는 전혀 달라서 이는 붓다의 교법이 아니라고 불교계에서 해명해야 할 일입니다.
책 <초기불교>의 저자 박광준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인간 붓다는 <바라문적인 윤회를 설하지 않았다.> 설했을 리도 없다. 바라문적인 윤회를 설하는 것은, 자신의 근본법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붓다 사상이 갖는 혁명성은 하층민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바라문교 질서에 도전한 것에 있었고 바라문교의 핵심사상이 윤회이므로, 윤회를 인정한다는 것은, 붓다 사상의 혁명성을 부정하는 것이자, 인간 붓다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래 내용은 윤회와 관련한 연기법에 대한 저자의 설명입니다.
아마르티아 센은, 붓다 사상의 특징으로서 '좋은 행위 실천을 신(神)에 대한 회의주의와 결합시킨 것'이라고 통찰한 바 있다. 즉 인간이 보다 좋은 행위를 해야 하는 근거를, 신이나 사후세계와 완전히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붓다는 고통문제를 현세문제, 도덕문제로 보았다. 이말은, 선업인가 악업인가는, 안락함을 가져오는가 고통을 가져오는가라는 기준으로 판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왜 좋은 행위를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붓다의 답은 '그것이 나와 나와 관련된 사람들 나아가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을 보다 행복하게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신체장애로 인하여 소득을 얻지 못하고 고통스러워졌다고 할 때, 그 '고통의 원인이 신체장애라고 생각하는 것은 붓다의 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애라는 인과, 고통이라는 과를 직접 연결하는 사고법이기 때문이다. 인-과 사이에 존재하는 연은, 예를 들자면 고용기회가 될 수 있다. 장애인 앞에 고용기회가 있는 것도 연이요, 고용기회가 없는 것도 연이다. 전자는 좋은 연이요 후자는 좋지 않은 연이다. '신체장애라는 인이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연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고통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붓다의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 장애인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장애라라고 하는 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연(적절한 노동기회와 소득보장)이 조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붓다의 법으로 본다면 인이 어떤 것이든 그에 실망할 필요가 없다. 적절한 연이 갖추어진다면 고통문제는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늦지 않다'는 자세야말로 붓다의 법을 관통하는 위대한 정신이다.
'사람들은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갈 때' 더 행복해짐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존재가 더 소중해지는 느낌을 경험했다.
다음 생이 있다 한들 없다 한들, 지금 여기에 고통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야말로 해탈에 장애가 되는 것, 곧 번뇌라고 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