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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거제 유명 유배인 67명 소개.
36) 이총(李摠)
미상∼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원(百源),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구로주인(鷗鷺主人)·
월창(月牕). 태종의 증손이며, 우산군(牛山君) 종(踵)의 아들로, 부인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의령남씨(宜寧南氏) 효온(孝溫)의 딸이
다. 유년에 무풍부정(茂豊副正)에 제수되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일손(金馹孫)·강경서(姜景敍) 등과 교유하였으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
고, 1504년 갑자사화때 아버지를 비롯하여 형인 한산정(韓山正) 정(挺), 화원부정(花源副正) 간(揀), 청양부정(靑陽副正) 건(揵),
금성부정(金城副正) 변(抃), 동생인 용성부정(龍城副正) 간(秆) 등과 함께 7부자가 죽임을 당하였다.
남효온·손유손(孫裕孫) 등과 함께 청담파의 중심인물로서 시문·음률·서예에 뛰어났으며, 양화진에 집을 짓고 고기잡이로 유유자적하
였다. 시조 약간이 전한다. 1506년(중종 1) 무풍도정(茂豊都正)에 추증되었으며, 1705년(숙종 31) 정려를 받았고, 1738년(영조
14) 무풍군(茂豊君)에 가증,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37) 조국빈(趙國賓)
1570(선조 3) ∼1642년(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이며 자는 경관이고 호는 설죽이다. 참봉 조유백의 아들이다.
1906년(선조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바로 중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임용되었다. 그 뒤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면서
언관으로 활약하다가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1632년(인조 10) 형조참의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반대파의 박해로 벼슬에서 물러나 충주에
서 은거 하였다.
38) 김복택(金福澤)
미상∼1740년(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광성부원군(光成府院君) 만기(萬基)의 손자이며, 인경왕후의 조카이다.
1721년(경종 1)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경종의 건강이 나쁘고 세자도 없어 세제(世弟) 책봉을 논의하자, 그는 서덕
수(徐德修)를 통하여 당시 잠저(潛邸)에 있던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에게 이 말을 전하였다.
김창집 등의 주장으로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어 정무를 대리하므로, 책봉에 반대하던 소론 승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은 노론 4대신을 무고하여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그도 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724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영휘전
참봉(永徽殿參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임사화 때 노론파의 대다수가 죽었는데도 유배만 당하였던 사실과 신임사화를 비난한 것이 영조의 비위에 거슬려 1740년 투
옥되어 옥사하였다. 그 뒤 영조는 자신의 지나친 조처를 후회하였다. 1779년(정조 3) 신임사화 때 죽은 노론파 대신을 증시(贈諡)하면
서 그도 증질(贈秩)되고 자손은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39) 이형령(李亨齡)
1566(명종 21)∼1614년(광해군 6). 조선 중기의 왕족.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원(壽元). 아버지는 하원군(河原君) 정(鋥)이
며,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영의정 섬(暹)의 딸이다. 1578년(선조 11) 13세 때 익성정(益城正)에 봉해지고 얼마 후 도정(都正)이 되었
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자 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호종(扈從)하였으며, 1596년 정의
대부(正義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이무렵 그가 왕족의 위세를 빌려 백성의 서적(書籍)을 침탈했다는 대간
의 탄핵이 지속되었으나 왕이 두둔하여 돌보아줌으로써 무사하였고, 오히려 왕이 수십 권의 서책을 하사하고 승헌대부(承憲大夫)에 가
자하였고, 1610년 종1품인 가덕대부(嘉德大夫)가 되었다.
1612년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김직재(金直哉) 등이 순화군(順和君)에게 입양한 그의 아들 진릉군(晋陵君) 태경(泰慶)
을 받들어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이른바 김직재의 무옥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
후 신원되었다.
40) 김신겸(金信謙)
1693(숙종 19)∼1738년(영조 1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존보(尊甫), 호는 증소(橧巢). 아버지는 진사 창업(昌業)이
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익풍군(益蘴君) 속(涑)의 딸이다. 숙부인 김창흡(金昌翕)을 사사하였다.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큰아버지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신임사화에 거제도로 유배될
때 연루되어 함께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에 풀려나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강원도 영월의 산중에
들어가 산수를 즐기면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그는 당시의 석학인 민우수(閔遇洙)·유숙기(兪肅基)·이봉상(李鳳祥) 등과 더불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명덕설(明德說) 등을 강
론하였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백육애음 百六哀吟〉이라는 사우(師友)들 106명의 행적을 읊은 대서사
시를 남겼다.
그는 전국 각지의 명승고적·명산·바다·도서 등지를 두루 구경하고 사적·풍속·지리·산물 등을 소개한 기행문을 많이 남겼다. 이조판
서 겸 좨주(祭酒)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증소집(橧巢集)》10권 5책이 있다.
41) 류희량(柳希亮)
1575(선조 8)∼1628년(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용경(龍卿), 호는 제교(霽嶠)·봉음(峯陰). 국구(國舅)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 자신(自新)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별시문
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설서·정언·전한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이조정랑·교리·수찬을 역임하였고, 지평·사인을 거쳐 직제학에 이르렀다. 1610년 분승지(分承旨)·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
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집안이 주살 또는 유배될 때, 그도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628년 귀양 가 있
던 아들 두립(斗立)과 조카 효립(孝立)의 모역사건에 연좌되어 유배지에서 교살되었다.
42) 이노춘(李魯春)
1752년(영조 28)∼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군정(君正). 여주 출신. 동지돈령부사 용모(龍模)의 아들이며, 어
머니는 윤동석(尹東奭)의 딸이다. 1779년(정조 3) 유생강제(儒生講製)에서 제거수(製居首)가 되었으며, 178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782년 강화경력(江華經歷)이 되고 이듬해 교리·부응교·서장관을 거쳐, 1784년 응교로서 채제공(蔡濟恭)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운
산군에 유배되었다. 1785년 흑산도에 안치되었다가 1799년에 풀려나 이조참의가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802년 실록청당상으로 《정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대사성이 되었다. 1803년 예
조참판이 되었으나 1806년 탄핵을 받고 거제부에 유배되었다. 편서로 《홍문관지(弘文館志)》가 있다.
43) 신구(申球)
1666(현종 7)∼1734년(영조 10). 조선 후기의 유생(儒生).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관(綰). 자는 군미(君美). 고려 개국공신 숭겸
(崇謙)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육(堉)이며, 아버지는 여규(汝逵)이고,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수(脩)의 현손녀이다. 송시열
(宋時烈)의 문인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제주에 안치된 송시열을 위하여 소를 올렸고, 1716년 7월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유생 60명이 연
명하여 소를 올릴 때 그 소두(疏頭)가 되어 윤선거(尹宣擧)와 그의 아들 증(拯)을 논핵하여 그들의 관작을 추탈하고 윤선거의 문집을
훼판하게 하였다.
1722년 신임사화로 거제에 유배되었다가 영조가 즉위하자 방환되어 영릉(英陵)·희릉(禧陵)의 참봉을 지냈으나 1727년(영조 3) 정미
환국으로 다시 쫓겨나 고향으로 은퇴하였다.
44) 유기창(兪起昌)
1437(세종 19)∼1514년(중종 9).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자성(子盛),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 참판 해(解)
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1496년(연산군 2)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고 뒤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04년 좌의정 성준(成俊)이 왕의 난정(亂政)을 극간하다가 교살될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며, 그 뒤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
았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비인현(庇仁縣)에 은거하면서 사냥으로 나날을 지냈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근엄하며
9군(郡)을 역사(歷仕)할 때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燕山君日記》, 國朝人物考.〈權仁赫〉
공은 선공 참판공(휘 해)과 모부인 죽산 박씨 사이에 세종 19년 정사에 유복자로 태어나셨다. 공은 세종조의 명신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
공(영의정 황보인공의 사돈)의 재종질이며, 사육신 매죽헌 성삼문 선생과는 이종사촌 간이시다. 이로 인해 세조 때의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사건으로 인한 참상을 남달리 겪으셨다.
성종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구읍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벼슬이 첨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난정에 극간하다 죽은 영의정 성준공
(성삼문 선생의 당숙)의 친당으로 몰려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이 되어 병조참의에 특배되었으나 공은 이를 사양하고 향리인 비
인으로 낙향하여 78세에 고종명하시니 ‘연산 사절신’으로 일컬었다.
그러한 칭송을 받게 된 것은, 공께서 비록 구주(연산군)에게 부당하게 유배를 당하였으나 새임금인 중종조에 벼슬한다는 것은 ‘충신불
사이군’의 의리에 어긋난다는 절개에 투철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종에 자손들에게 “새 임금 중종이 제수한 병조참의의 관직을 신주에 쓰
지 말고 연산군 때의 벼슬인 첨지중추부사를 쓰라.”라고 유언하셨다.
세상에서는 공의 절개와 청덕을 백이숙제에 비유하였다. 호는 서호산인이요,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후촌만록(後村謾錄)》연려실
기술 제6권 연산조(燕山朝)의 절신(節臣)에서 유기창(兪起昌) 아들에게 편지하기를, ‘너는 새 임금으로부터 처음 벼슬을 받았으니 마
땅히 나아가 충성을 다하여라. 나는 비록 새 임금의 부름을 받았으나 옛 임금의 신하이다.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였으니 나는 이 길로 고향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농사만 지을 것인 즉, 혹시 내가
죽더라도 옛 임금으로부터 받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라는 벼슬 이름만 쓰지 새 임금으로부터 받은 높은 관직명을 쓰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한다.
그리고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평생 동안 농사만 짓고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또 유기창의 인품이 훌륭한 것을 알고 중종이 몇 번이나
그를 불렀지만 결코 다시 나오지 않았다 한다. 그 밖에도 당시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하다가 쫓겨난 선비로는 김숭조(金崇祖), 남세주
(南世周), 홍언충(洪彦忠) 등이 있는데, 이들도 모두 중종반정 이후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이들도 한결같이 벼슬을 물리치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김숭조는 일부러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었고, 남세 주는 깊은 병
이 있다며 벼슬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홍언충은 홀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핑계를 대었고….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燕山
君) 밑에서 벼슬을 하던 그 많은 재상들이 반정세력에 붙어서 삶을 모색하였는데 이러한 선비들을 높이 기리고 생각해 보는 마음이 필
요하지 않겠는가.
45)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1641~1680년, 조선 중기의 왕손으로 인조의 손자이자 원종의 3남 능창대군 이전의 손자이다. 본관은 전주, 휘는 정(楨)이다. 아버지
는 인조의 3남 인평대군 이요(李㴭)이며, 어머니는 감사 증 우의정 오단의 딸로 복천부부인이다. 부인은 창원황씨로 군수 도명(道明)
의 딸이다.
대군의 2남으로 1641년 탄생하였다. 진하(進賀) 겸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으나 1680년(숙종 6) 남인 일파가 정치
적으로 대거 실각하자 서인이 득세를 하게 되므로 1674년(현종 15)에 예론(禮論)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숙종으로부터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던 차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유악남용사건(油渥濫用事件)으로 왕은 더욱 남인들을 꺼려하게 되었
다.
이 때 서인 중 김석주·김익훈 등이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이 종실인 복창·복선·복평군 3형제와 같이 역모(逆謀)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복창군의 3형제와 허견·허적·윤휴도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 일파도 옥사(獄死)·사사(賜死) 파
직, 유배되었다.
이로써 남인들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하였으며 후에 서인 김수항(金壽恒)은 영의정이 되고 김석주(金錫胄)는 우의정이 되어 정권은 서
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680년(숙종 6)에 횡피죄명(橫被罪名)으로 사사되었고 묘소는 대군묘에서 서쪽 1강에 있다. 1864년(고
종 1) 7월에 복관작위되고 특명으로 완원군의 뒤를 잇게 하였다.
46) 권익관(權益寬)
1676(숙종 2)∼1730년(영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홍보(弘甫). 아버지는 사간 두기(斗紀)이며, 어머니는 대
사간 이합(李柙)의 딸이다. 1711년(숙종 3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사서·홍문관수찬·부교리·헌납·세자시강원문학
·보덕·홍문관부응교를 지냈으며, 1723년(경종 3) 충청감사가 되었다.
1724년(영조 즉위) 대사간에 오르고, 이어 승지를 지냈다. 신임사화로 실각 당했던 노론이 영조의 즉위로 재집권하자 소론을 축출하였
는데, 이때 소론이었던 관계로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거제에 정배되었다. 1727년에 풀려나와 공조참의·함경감사에 올랐으
나, 1728년 같은 소론이었던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연좌되어 다시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러나 그해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변방에 정배되었다. 1735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1776년에 다시 반역의 죄상이 추궁되
어 관작이 추탈되었다.
47) 익성군 이향령(益城君 李享齡)
1566~1614년.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향령(享齡), 자는 수원(壽元)이다. 덕흥대원군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하원군(河原君) 의헌공 이정(李鋥)이며, 어머니는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로 영의정 홍섬(洪暹)의 딸이다. 부인은 군수
(郡守) 진주인(晋州人) 소수(蘇遂)의 딸로 진주군부인(晋州郡夫人) 소씨(蘇氏)이다.
하원군 2남으로 1566년(명종 21) 3월 24일생으로 탄생하여 1578년(선조 11) 13세 때 익성정(益城正)에 봉해지고, 얼마 후 도정(都
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자 아버지 하원군과 함께 걸어서 의주 행재소(行在所)에 호종(扈從)하
였으며, 1596년 정의대부(正義大夫)로 가자(加資)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이 무렵 그가 왕족의 위세를 빌려 백성의 서적(書籍)을 침탈했다는 대간의 탄핵이 지속되었으나 왕이 두둔하여 돌보아줌으로써 무사하
였고, 오히려 왕이 수십권의 서책을 하사하고 승헌대부(承憲大夫)에 가자하였고, 1610년 종1품인 가덕대부(嘉德大夫)가 되었다.
1612년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김직재(金直哉) 등이, 순화군(順和君) 이보(李王+土)에게 입양한 그의 아들 진릉군(晉陵
君) 이태경(李泰慶)을 받들어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이른바 김직재의 무옥 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어 1614년(광해 6) 7월 1
일 배소(配所)에서 향년 49세로 별세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묘소는 충남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산 93-3 익성군신도비 및 무석(益城君神道碑 및 武石)으로 충
남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48) 이수백(李守白)
미상∼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무신. 1606년(선조 39) 경원판관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 포도청종사관으로 있었
다. 사람이 본래 음란하고 도의에 어긋난 일을 무상으로 하여 추행이 훤히 드러났으나 징계하여 감금하지 않았기에 포도청의 위엄을 빙
자하여 수절과부를 모욕, 겁간하는 등 악한 짓을 계속하여 그 행태가 사람같지 않았다.
또한,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고 큰 옥사를 일으킬 적에 공이 따르지 않자 노하여 가버린 적도 있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
适)이 변을 일으키자 그의 부하로 난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괄의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 부원군에 봉하고 천금을 주겠다는 현
상이 붙자 기익헌(奇益獻)과 함께 괄과 괄의 아우 수(邃) 및 괄의 아들 전(旃), 한명련(韓明璉) 등 9명의 목을 베어 원수부(元帥府)에
전하였다.
이 사실로 죽음을 특별히 면제받고 귀양갔다가 수년 후 사면되어 편의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 때 희생당한 청흥군(靑
興君) 이중로(李重老)의 아들 문웅(文雄)과, 풍천부사 박영신(朴榮臣)의 아들 지병(之屛)에 의하여 대낮에 서울 거리에서 목이 베
어 죽음을 당하였다.
49) 김보택(金普澤)
1672(현종 13)~1717년(숙종 4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시(仲施), 호는 척재(惕齋),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진구(金鎭龜)이며 할
아버지는 숙종의 장인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이다. 1695년(숙종 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연원도 찰방(察訪)이 되었다가 검
열, 정언 등 삼사(三司)의 언론직을 역임하였다.
1701년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정면으로 대립하였을 때 형 김춘택(金春澤)과 함께 노론의 선봉이 되
어 희빈을 인현왕후 민씨에 대한 역(逆)으로 단정, 그 처형을 주장하면서 전은설(全恩設)을 펴는 소론 영수 남구만(南九萬)과 최석정
(崔錫鼎)을 호역(護逆)으로 몰았으며, 소론의 산림(山林)이었던 윤증(尹拯)에 대해서도 배사(背師)를 들어 배척하였다. 문장과 글
씨, 그림에 능하였다. 시호는 익헌(翼軒)이다.
50) 고려 의종(毅宗)
1127~1173년. 고려 제18대 임금(재위: 1146~1170년)이다.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시호는 의종강과장효대왕(毅宗剛果莊
孝大王). 인종과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맏아들이다. 1134년에 왕태자(王太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하
였다.
즉위한 뒤에 그는 이미 인종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전횡과 반란, 묘청의 난 등으로 크게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여 쇠약해진 왕권
을 강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무신(武臣)들을 총애하여 친위군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
민 등이 발탁되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문신(文臣)들 및 환관(宦官)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깊이 빠지고, 지나치게 불교·음양설(陰陽說)·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를 멀리하는 등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신들을 소외시켜 천대받게 만들어 무신정변(武臣政
變)의 계기를 낳았다.
1170년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鄭仲夫,1106~1179), 이의방(李義方,?~1175), 이고(李高,?~1171) 등의 무신
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무신정권에 의해 폐위되어 3년간 거제도의 폐왕성(廢王城, 둔덕기성)에 유폐되었다.
그 뒤 1173년에 김보당(金甫當)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 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셔와 받들고
경주로 가서 웅거하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패하였다. 이때 의종은 총애하던 장수 이의민에 의해 곤원사(坤元
寺) 연못가에서 술을 두어 잔 마신 뒤에 등뼈가 꺾여지고 시체는 그대로 연못에 수장당하는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동생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禧陵)이다.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
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1) 승통(僧統) 정(竀)[僧統竀(승통탱)], 왕수(王㸂) 부여후, 부여공(夫餘公) 수(燧) : 1112년(예종 7).
①부여공(夫餘公) 수(燧) : 1112년(예종 7), 문종의 12번째 아들(인경현비 이씨 둘째아들,순종 선종 숙종의 배다른 형제)
②僧統竀(승통탱) : 流俗離寺住持(류속리사주지) 속리사(俗離寺) 주지. 승통 정(竀)을 거제현으로 귀양보냈다. 1112년
僧統竀(승통탱) : 문종의 여섯째 아들. 순종 선종 숙종 형제임.
1112년 8월, 속리사(俗離寺) 주지승통(住持僧統) 정(竀)은 문종의 아들로 속리사에 주지로 있으면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사람들
에게 후히 베풀어 주어 귀부하는 자가 많았는데, 누군가 정이 전주목사 이여림, 상서우승 김인석등과 반역을 꾀한다고 고해, 정은 거제
로 귀양가고 그 외 수십명이 귀양 가거나 목이 잘렸다.
승통(僧統)정(竀) : 1112년 고려 예종7년 4월, 송 정화 二年 2년, / <고려사> 宴群臣于賞春亭. 時, 又御禁內紗樓, 製牧丹詩命儒
臣應製, 顯宗嘗手植牧丹於樓前, 自德宗肅宗皆有詩. 流, 僧統竀于巨濟.
봄을 맞아 즐기는 정자(상춘정)에서 뭇 신하들이 잔치를 열었다. 이때, 또 대궐 안의 사루(沙樓)에 거둥하여 모란시(牧丹詩)를 유신에
게 명하여 짓게 하고 현종이 일찍이 누각 앞에서 모란을 손수 심었더니 덕종으로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화시(詠花詩)가 있었
다. 8월 승통정을 거제로 귀양 보냈다.
52) 김보(金普)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공민왕의 수종공신(隨從功臣).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죽강(竹岡). 당시의 권신 김용(金鏞) 등과 더불어
권행(權幸)을 다투던 친원파 인물이다. 1351년(공민왕 즉위년) 공민왕이 고려왕으로 지명됨에 따라 왕을 호종하여 입국하였으며 그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고 의성(義城) 덕천창제조(德泉倉提調)를 겸하였다.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따랐던 수
종공신들을 녹훈(錄勳)할 때 찬성사(贊成事) 조일신(趙日新) 등과 더불어 일등공신에 오르고 아울러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亮節匡
輔功臣)의 호를 하사받았으며, 뒤에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354년 찬성사에 임명되어 지밀직사사 전보문(全普門)과 더불어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원나
라에 드나들었다. 공민왕의 비호를 받고 김용과 권세를 다투면서 인사행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러던 중 1355년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게 되자 김용은 복직을 봉쇄하기 위하여 거짓 왕명을 꾸며 백관들로 하여금 부모상에 3년간
벼슬을 쉬도록 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왕이 3년상을 폐지, 다시 불러들여 첨의평리에 복관하고, 이어 중서문
하시랑평장사판밀직(中書門下侍郎平章事判密直)에 제수하였다.
1356년에 반원정치(反元政治)가 결행됨에 따라 부원배(附元輩)의 거두였던 기철(奇轍) 등이 주륙되면서 함께 체포되어 장형(杖刑)
을 받고 가라산(加羅山)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신돈(辛旽)이 집권하면서 이춘부(李春富)와 함께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발탁되더니, 곧 이어 수시중(守侍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신돈과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같은 해 9월에 면직되었다. 시호는 충간
(忠簡)이다.
53) 오희길(吳希吉)
1556~1625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鞱庵). 언기(彦麒)의 아들이다. 김인후(金麟厚)·
정여립(鄭汝立,1546~1589)의 문인이다. 고창에 살았는데 스승 정여립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비방하는 말을 듣고 그 잘못
된 점을 적어 정여립에게 주어 노여움을 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그의 편지를 정여립이 보관하고 있다가 나타남에 따라 석방되어 천거되었다. 후릉참봉
(厚陵參奉)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의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서 태조의 어진(御眞)을 비롯한 제기
(祭器)와 역대 실록을 내장산에 숨겨 보전하였다.
그 뒤 전쟁의 참화를 수습할 쇄신책과 인심수습을 상소하였다.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과 태인현감을 지내고 70세에 죽었다. 고창의
월계정사(月溪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도동연원록(道東淵源錄)》이 있다. 1619년 적당(賊黨)의 무함으로 거제로 유배, 도동
연원록(道東淵源錄)과 명척난역문(明斥亂逆文)을 지음. 1635년 거제배소에서 사망.
54) 삼호(三湖) 이중협(李重協)
학공(學公), 1681년(숙종 7)∼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화중(和仲). 정언 익(瀷)의 증손으로, 병(炳)의 아
들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15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1717년 사헌부지평에 오르고, 동지사 유명웅
(兪命雄)을 따라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8년 경종의 비 단의빈 심씨(端懿嬪沈氏)가 죽자 대전(大殿)인 숙종의 며느리에 대한 복상이 부장기(不杖朞)로 결정되자, 대공복
(大功服)으로 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719년 흉년을 당하여 기민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에서 공명첩(空名帖)을 발행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상소하였다.
1722년(경종 2) 이후 사간원사간·홍문관수찬·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는데, 대간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 하여 의금부에 갇혔다가 석방되더니 해남으로 귀양 가고 다시 경원(慶源)으로 이배되었다. 1728년(영조 4) 승지를 거쳐 1736년 강춘도관찰사(江春道觀察使)
를 역임하였으며, 1745년 대사간, 1747년 공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영의정 김창집, 호조판서 민진원과 더불어 숙종 경종 조까지 조정에서 뜻을 같이하였고, 영조 때에는 민진원과 더불어 조정에 참여해 탕
평책을 옹호했다.〈기사편고(紀年便攷) 왕실도서관 의궤자료〉에 의하면, 이중협은 병자년 1693년 본홍우령(洪禹寧,1660~1717)
의 사위로 숙종 신유년(辛酉年, 1681, 숙종 7)에 태어났고, 자는 지화(䙙和), 호는 삼호(三湖)이다.
을유년(1705, 숙종 31) 사마시(司馬試), 계사년(癸巳年, 1713, 숙종 39) 참봉으로 증광문과에 올랐다. 한림원 삼사 대간(大諫), 지신
사(知申事), 직학(直學),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했다. 경종(景宗: 조선 제20대왕) 1721년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여러 번 간(諫)하다가
국문을 당했으나 굽히지 않았다.
대의(大義) 이론(理論)에 따라 조태구(趙泰耉)를 꾸짖고 잠입(潛入)한 일로, 거의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을 당했다. 임인년(壬寅年,
1722, 경종 2) 거제로 멀리 귀양갔다가, 계묘년(癸卯年, 1723, 경종 3) 해남현으로 이배되었다. 을사년(乙巳年, 1725, 영조 원년)
에야 비로소 귀양지에서 방환되었다.[李重協炳子洪禹寧婿 肅宗辛酉生字䙙和 號三湖 乙酉司馬 癸巳以參奉登增廣歴翰林三司大
諫知申直學東伯 景宗 辛丑士禍三諫臣之一被拿鞫不屈力主 大義理論劾泰耉潛入之事㡬被不測之禍 壬寅(1722년)巨濟遠配 癸
卯(1723년)移海南 英祖乙巳(1725년)放還始赴謫也].
55)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문충공(文忠公) 1664(현종 5)~1736년(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노론의 영수. 본관은 여흥.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
巖)·세심(洗心).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유중(維重)이며, 어머니는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으로 숙종의 계
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급제했으나, 1689년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는 문제
로 발생한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이 탄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등용되지 못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
위되고 노론이 집권하자, 다음해 검열로 등용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지평·부수찬·사복시정·집의 등을 지냈다.
1703년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방재정을 어렵게 하고 당쟁의 원인이 되는 서원의 건립을 억제하고 그 수를 줄일 것을 상소했다.
1705년 공조참의로 남구만(南九萬)의 감형을 상소해 이를 실현시켰다. 1715년〈가례원류(家禮源流)〉의 간행문제로 노론·소론
이 대결하자 노론 정호(鄭澔)를 옹호했다가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다.
이듬해 노론이 득세하자 다시 등용된 뒤 예조판서·양전구관당상(量田勾管堂上)·이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했다. 1721년(경종 1) 실
록청총재관으로〈숙종실록〉편찬에 참여했으며, 왕세제(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실현하도록 했다. 이듬해 신임사화로 다시 성주에
유배되었으나, 1723년 6월 22일 찬배(竄配)토록 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으로 보아 거제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724년 10월 8일 영조 즉위로 석방과 양이(量移, 가까운 곳으로 옮김)의 논쟁이 있었는 바, 거제에서 특별 석방된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노론이 집권하자 우의정에 올라〈경종실록〉편찬을 관장했다. 1725년 소론의 영수인 유봉휘(柳鳳輝)를 탄핵해 유배시켰
고, 송시열의 증직(贈職)을 상소했다.
그 뒤 좌의정·중추부영사 등을 지냈으나, 1727년 영조가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조정의 인사를 개편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파직
되어 순안(順安)에 안치되었다. 이듬해 풀려난 뒤에도 소론을 배격하는 데 앞장섰다. 17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733년 봉
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저서에〈단암주의 丹巖奏議〉·〈단암만록 丹巖漫錄〉·〈연행록 燕行錄〉·〈민문충공주의 閔文忠公奏議〉 등이 있다. 영조의 묘정에 배
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725년 민진원이 차자로 신방, 이중협의 서용과 정형익의 수용을 청하여 이중협은 잠시 본직(本職)
을 해면하도록 되어 구제하였다.
◯ 민진원공덕비(閔鎭遠功德碑)
이 비는 1863년(철종 14) 인천 강화도에 건립된 민진원공덕비(閔鎭遠功德碑)이다.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성유(聖猷)이며. 호는 단암(丹巖)이다. 1691년(숙종 17)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동생 인현왕후의 유폐로 등용되지 않다가 1694년
(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 후에 등용되었다.
사복시정, 집의를 거쳐 1703년(숙종 29)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서원이 난립되자 지방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원인을 들어 이를 막았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민진원이 강화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선정에 대한 은혜의 보답으로 공덕비를 세운 것이다. 현
재 탁본은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56) 윤광소(尹光紹)
윤광소는 1708(숙종 34) ~ 1783년(정조 10),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本貫) 파평(坡平), 자는 치승(稚承), 호는 소곡(素谷), 이조
판서 동규(東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창 맹씨(新昌孟氏)로 숙장(淑章)의 딸이다. 19세 때 생원시에 급제하고 1739년(영조 15) 의
릉참봉(懿陵參奉)을 제수 받았다.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744년(영조 20)에 시강원 겸 설서가 되었다. 같은 해에 홍문관 수
찬을 제수방아 이조판서(吏曹判書)인 이종성(李宗城,1692~1759)과 같이《속오례의(續五禮儀)》를 수찬했다.
이때 그는 개원례(開元禮)에 의거하여 원본을 개정하는 한편, 그 차이점을 상세히 밝히고 문구를 교감하여 별도로《고이(考異)》를 첨
가하기도 하였는데 그뒤 예(禮)에 밝다고 인정받아 여러 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 뒤에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교리(校理)·
사간(司諫)·필선(弼善)·승지(承旨)·공조참의(工曹參議)·이산 부사(理山府使)·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냈다.
1755년 윤지(尹志)의 난에 관련되어 을해옥사(乙亥獄事-나주괘서사건) 때 투옥되었고 1776년(정조 즉위) 부사직(副司直)으로 정후
겸(鄭厚謙)의 일파로 몰려 거제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무고함이 밝혀져 복직되었다. 1786년 자헌대부지돈녕부사(資
憲大夫知敦寧府事)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소곡유고》 22권이 있고 편서로는《명재연보(明齋年譜)》가 있다.
57) 최숙생(崔淑生)
최숙생은 1457(세조 3)∼1520년(중종15), 字(자)는 자진(子眞), 號(호)는 상재(像齋), 현우(玄祐)의 7세손이며 철중(鐵重)의 아들
이다. 1492년(성종 23) 式年文科(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496(연산군 2)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책을 읽음를 한 뒤 1504년(연산군 10) 응교(應敎)로 있을 때, 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 복위 문제로 연산군이 일으킨 사화)로 신계에에
유배, 다시 거제도로 이배되어 이행(李荇), 홍언충, 김세필 등과 거제시 신현읍에 함께 유배되어 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으로 풀려나 1508년 文臣庭試(문신정시)에 장원하여 대사간·대사헌을 역임하고 1518년(중종 13) 우찬성(右贊成)에 올랐으나, 이듬
해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직 되었다가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그는 특히 시문(詩文)에 능하여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거제도 유배는 갑자사화 때문이며, 당시 신현읍 일대에 유배 온 최숙생(子
眞), 이행(李荇, 擇之), 강유선(元叔), 이려(強哉), 홍언승(大曜), 홍언충(直卿), 홍언국(公佐), 이윤(李胤, 子伯), 자선(子善), 홍언방
(君美), 공백(恭伯), 이인지(李守訒, 訒之), 공신(公信) 등과 함께 교분을 나누었다.
1504년 늦가을부터 1506년 가을까지 거제 유배생활 동안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즐긴 장소가, 장평바닷가, 운문(문동)폭포, 소요
동[상문동], 신청담(神淸潭, 문동폭포 웅덩이)과 매립전의 고현바닷가, 그리고 유자도(현 대섬(竹島), 현재 유자섬(橘島)은 당시에는
소도(小島), 주봉 계룡산, 구천동(삼거리)까지 함께 다니며 거제비경을 즐겼다.
거제고을 선비인 이악(李鶚, 斯立), 이맹전(李孟全), 이백완(李伯完)도 가끔씩 참석했으며, 또한 거제 관리 이수간(李守幹), 수위(守
威), 수인(守訒), 수심(守諶) 형제들과도 시문을 교환했다. 이분들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 거제 고전문학의 1번지, 문동저수지에서 문동
폭포 사이였다. 특히 최숙생 선생의 거제도 유배문학 작품은 거제읍지, 거제부읍지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58) 백동준(白東俊)
1724(경종 4)∼1792년(정조 16),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파주 법원읍 갈곡리에 묘가 있다. 자는 子弘, 본관은 水原, 師謐의 아들이
다. 1752년(영조 28) 선전관에 제수되고, 이듬해 무과에 합격한 뒤 1755년 통정대부에 특진되었다.
외직으로 순천군수·흥주목사·평산 도호부사·선천방어사·영변대도호부사를 지내고 전라우도수군절도사·경기도수군절도사·경상좌
도병마절도사·함경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내직으로는 훈련원도정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을 지냈다.
59) 이언충(李彦忠)
1524(중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사경(思敬). 좌찬성 이즙(李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평 이기(芑)
이고, 아버지는 이흔(李掀)이며, 어머니는 이극창(李克昌)의 딸이다. 처는 성수영(成守瑛)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생원시와 즉위
증광시(卽位增廣試)의 병과에 잇달아 급제하였다. 관은 대사헌까지 이르렀다. 1563년 이량(李樑) 등이 정배될 때 함께 탄핵되었다.
60) 박성원(朴性源)
1697(숙종 23)~1767년(영조 43). 조선 후기 의학자. 본관은 밀양. 자는 사준(士濬), 호는 포암(圃菴). 진사로서 예학(禮學)에 뛰어나
고 음운학(音韻學)에 밝았다. 그의 저서《화동정음통석운고(華東正音通釋韻考)》는 1747년(영조 23)에 지은 것이다. 2권 1책이며
1787년(정조 11) 정조가 책머리에〈정음통석서 正音通釋序〉를 써서 간행시켰으므로〈정음통석〉이라고도 한다.
《화동정음통석운고》는 중국어 역관 이언용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하며,《삼운통고(三韻通考)》《사성통해(四聲通解)》를 참고하여
당시 한국과 중국의 한자음을 밝힌 책이다. [W]음을 표기하기 위하여 ◇자를 만들었으며 초성의 배열순서에 치음(齒音)과 순음(脣音)
을 바꾸었고 구개음화를 인정했다.
또 한자음의 정확한 표기가 훈민정음의 창제의도라고 밝혔다. 역시 그가 지은《화동협음통석(華東叶音通釋)》은 1권 1책으로 필사본
이다.《화동협음통석운고》에 빠진 글자를 보충하고 한국과 중국의 한자음을 나란히 적은 운서(韻書)이다. 그 밖의 저서로《제례초
(祭禮抄)》가 있다.
61) 조재민(趙載敏)
1706(숙종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언신(言愼). 상변(相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수(祺壽)이고, 아버
지는 적명(迪命)이며, 어머니는 송징오(宋徵五)의 딸이다. 1737년(영조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1741년 소시(召試)를 통하
여 서지수(徐志修)와 함께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으나 영상(領相)·좌상(左相)과 친척의 혐의가 있다고 하여 체직되었다.
다음해 정언으로 등용되어 이후 수찬·부교리·교리·겸문학·헌납·필선·사간 등 삼사의 직을 두루 거쳤다. 1745년 부수찬으로 있으면
서는 임금의 지나친 거조에서 나온 하교는 거두어들일 것을 상소하였다. 1749년 옹주혼도감(翁主婚都監)으로 수고하여 가자(加資)되
었다.
이 후 승지를 거쳐 1752년에는 대사간에 올랐으나 1755년 김일경(金一鏡)의 잔당인 심정연(沈鼎衍)과 함께 반란을 모의한 신치운
(申致雲)의 무고로 거제도에 정배되었다가 1763년에야 풀려났다. 1764년과 1765년 두 차례에 걸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서
용 요청이 있었으나 사헌부 등에서 반대하여 끝내 서용되지 않았다.
62) 홍중효(洪重孝)
1708(숙종 34)∼1772년(영조 4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원(聖源), 호는 백서헌(栢西軒)·소와(疎窩). 원주
에서 살았다. 우부승지 만기(萬紀)의 아들이다. 1740년(영조 16) 진사로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정언·장령·홍
문관교리·필선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지내고 1757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뒤이어 대사간·공조참의·호조참판을 지내고, 1763년에 주청사(奏請使)의 부사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766년 대사헌이 되고 이
어 한성부좌윤과 형조 및 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영조의 권우(眷遇)가 두터웠으나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죽은 이후로는 거의 향리에
서 떠나지 않은 채 대사헌 이후의 벼슬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경전에 마음을 쏟으면서도 시(詩)에 뛰어났으며, 만년에 글씨에도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소와집》·《학본내외편(學本內外篇)》·
《이기왕복서(理氣往復書)》·《예기강목고이(禮記綱目考異)》 등이 있다. 시호는 효민(孝敏)이다.
63) 이민곤(李敏坤)
1695(숙종 21)∼1756년(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후이(厚而), 호는 임은(林隱). 아버지는 헌기
(軒紀)이며, 어머니는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환(奐)의 딸이다. 1718년 박필주(朴弼周)에게 사사하였고, 그 뒤 김한간(金翰幹)·이재
(李縡)의 문하에도 출입하였으며, <오자근사록변(五子近思錄辨)> 등을 저술하여 학계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1727년(영조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의 주서가 되었다. 이어 사헌부의 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 나
가 의리를 밝히고 언로를 개척하게 하였다. 그뒤 시임(時任) 정승을 탄핵하다가 삭직되었다. 1746년 다시 보령현감이 되어서는 <황극
연의(皇極衍義)>를 지어 왕에게 바쳐서 왕도정치를 촉구하였다.
1755년 사간이 되었을 때 이천보(李天輔)를 탄핵하다가 귀양가는 조종보(趙宗溥)를 신원하는 상소를 올려, 언로를 막는 것은 망국
의 근본이라 직간하다가 거제로 귀양갔다. 그 해 다시 풀려나 시강원의 보덕으로 승진되었고, 다시 사헌부의 집의와 사간에 임명되었
다.
이 때 강도유수(江都留守)의 독직사건이 있어 이를 논핵하다가 육진(六鎭)으로 귀양 가던 도중 금성(金城) 창도역(昌道驛)의 숙소
가 불탈 때 타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귀양을 풀고 관직을 회복, 도승지에 추증하였다. 저서로는《임은집》이 있다.
64) 조완벽(趙完璧)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중국(重國). 진주 출신. 맹수(孟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琦)이고, 아버
지는 계종(繼宗)이다.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 경도(京都)로 잡혀가 복
역하였다.
왜상(倭商)들에게 강제로 이끌려 1604년(선조 37) 이후 세 차례나 안남(安南)에 가서 진기한 사물을 견문하였고, 여송(呂宋 : 필리
핀)·유구국(琉球國) 등에도 다녀왔다. 1607년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갔을 때 그의 본국송환을 간청하여 10
년 만에 돌아왔다. 학문이 뛰어났다.
65) 이봉징(李鳳徵)
1640(인조 18)∼1705년(숙종 3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명서(鳴瑞), 호는 은봉(隱峰). 주(澍)의 증손으로, 할
아버지는 창정(昌庭)이고, 아버지는 지평 완이며, 어머니는 이원량(李元樑)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생원이 되고, 이 해 증광문과
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수찬(修撰)으로 등용된 뒤 사인·부제학 등을 거쳐 1691년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 1694년 대사헌이 되었다. 같
은 해 갑술옥사가 일어나 남인이 제거될 때 함께 파직되었다. 1698년 형조참판으로 복직되고, 1701년 부사직으로 희빈 장씨(禧嬪張
氏)의 사사(賜死)를 반대, 지도(智島)에 위리안치되었다. 1704년 거제부에 안치 되었다.
66) 이의징(李義徵)
?∼1695년(숙종 21).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판서 응시(應蓍)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었
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공덕으로 음관(蔭官)에 천거되어 진안현감이 되었다. 1681년(숙종 7) 암행어사로 내려온 오도일(吳道一)
의 추천으로 양리(良吏)로 뽑혀 관직이 특승되었다.
그러한 치적으로 1689년 호조참의에 발탁되었다. 이듬해에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1691년 지방행정관으로서 세
운 선정을 인정 받아 호조참판으로 승직되었다. 이듬해에 공조판서가 되고, 1693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훈련대장이 되었다.
그 해 국방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축성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하여 왕의 특명을 받아 문수산(文殊山)을 답사, 그곳이 축성적지임을
보고하여 성을 쌓았다. 1694년 지의금부사가 되어 옥사를 공정히 다루었으며, 다시 훈련대장이 되었다.
타고난 무골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질이 너무 강직하여 의금부사로서 죄인을 너무 거칠게 다룬 것이 당쟁인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
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보복적인 탄핵을 받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사(賜死)되었다.
67) 왕강(王康)
?∼1394년(태조 3).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1371년(공민왕 20) 어린 나이로 회시(會試: 국자감시)에 합격하였으므로 왕이 의심하
여 회시의 책제(策題)를 쓰게 하였으나 이를 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전시(殿試: 복시에서 선발된 사람에게 임금이 친히 보이던 과거)
가 정지되고, 15세 이하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동진사(同進士)가 되고 성균직학(成均直學)·강녕부승(江寧府丞)이 되었다. 1374년 대군시학(大君侍學)·주
부(注簿)를 역임하였다. 우왕(禑王) 때에 전리총랑(典理摠郎)을 거쳐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옮겼다가 이어 서북면안무사(西北面安
撫使)가 되어 유리인(流離人)들을 안집(安集)하였다.
1390년(공양왕 2)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서 양광·전라·경상도수군도체찰사겸방어영전염철사(楊廣全羅慶尙道水軍都體察使
兼防禦營田鹽鐵使)가 되었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밀직부사 겸 전라·경상·양광삼도수군도체찰사(密直副使兼全羅慶尙楊
廣三道水軍都體察使)가 되어 염철(鹽鐵)·조전(漕轉)·초토(招討)·영전(營田)·선성(繕城)의 일을 겸하여 삼도(三道)의 군수(軍需)
와 세공(稅貢)을 운반하는 데 공이 많았으며, 어염(魚鹽)의 이익으로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하였다.
태안과 서산의 접경인 탄포(炭浦)에 운하를 파서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자는 헌의(獻議)를 올려 공사에 착수했으나 물 밑에 암석
이 많고 또 조수의 문제로 인해 결국 실패하였다. 1392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으나 조선 개국으로 거제에 유배되었다. 이
듬해 풀려나와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기도 하였으나 1394년(태조 3) 다시 공주에 유배되고 뒤에 왕씨 일족(王氏一族)이 화
를 당할 때 함께 살해되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