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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尊賢養士 스크랩 소수서원
이장희 추천 0 조회 49 14.09.02 15: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수서원     紹修書院

 

 

 

 

 

 

사적 제55호...세종 때에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지만, 최초로 국학제도를 본떠 선현(先賢)을 제사지내고, 유생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하여, 이 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祠廟)를 설립하였다. 그 후 1543년(중종 38)에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서,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 "라고 부를 정도이었다.

 

 

 

 

 이후 1546년(명종)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 (10명),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 재정(財政), 경리관계를 규정한 " 사문입의(斯文立義) "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였다.

 

 

 

 

  백운동서원은 약 30마지기의 토지와 18명의 노비 그리고 4명의 직원(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祠廟)의 부속된 기관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유생들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알려져 있었다.

 

 

 

 

 

 

 

 

 

그 후, 이황(이퇴계)에 의하여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와 강명도학(講明道學)위주로 변하였다. 특히 이황은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를 겪은 후 , 관료로서 왕을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하여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이끌 인재를 확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진흥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宋)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明宗의 친필)이란 현판과 사서오경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사림(士林)의 집결지가 되었다.

 

1868년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하게 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었다.

 

 

 

 

 

 

 

 

 

이퇴계가 풍기군수로 있을 때 그는 조정에 사액(賜額)을 건의한다.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1484~1555)에게 지시하여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한다.  신광한이 "소수(紹修)"라는 이름을 지으니

이는  " 기폐지학 소이수지 (旣廢之學 紹而修之) "의 뜻이다. 즉...이 곳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귀사건에 연루되어.. 이 곳 순흥은 폐읍되고,  順興鄕校 역시 폐쇄되었었는데...이미 폐지된 학교를 다시 세워 유학을 잇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명종은 친필로 쓴 소수서원의 현판과 함께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서원에 딸린 土地는 면세 혜택이 주어지고, 노비에게는 免役의 특전이 주어졌다. 국가에서 인정한 최초의 사립학교가 되었으며 최초의 정원은 10명이었으나, 후에 30명으로 늘고 , 입학자격은 生員,進士 등이 司馬試 합격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서원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적송군락(赤松群落)과 마주친다. 적송은 이름 그대로 겉과 속이 모두 붉다. 신라사람들은 이 赤松으로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을 빚어냈다. 그 중 하나가 일본으로 건너 가서 일본 국보 1호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적송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소수서원 안에는 수령 300년 이상 된 적송들과 은행나무가 서원을 뒤 덮고 있다.

 

 

이 곳에서는적송을 학자수(學者樹)라고 부른다. 적송처럼 꿋꿋이 자라 참 선비가 되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붙였다. 이 곳 영주의 적송이 가장 유명하다.

 

 

 

 

 

 

 

                                      숙수사지 (숙수사지)   당간지주

 

 

 

 

 

 

   

 

 

백운동 서원이 설립되기 전.. 이 곳이 절터이었음을 보여주는 " 숙수사당간지주(宿水寺幢竿支柱) "이다.  보물 제 59호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숙수사(宿水寺)는 세조3년(1457)...조산의 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官軍의 방화"로 폐허화 되었는데, 이 곳이 숙수사의 옛터라는 사실을 이 당간지주와 서원의 경내에 흩어져 있은 여러 유구(遺溝)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죽계천(竹溪川)이다. 소백산을 발원지로 하는 죽계천은  낙동강 원류중의 하나이다.  세조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 본거지이었던 이 곳 순흥(順興)의 백성들과 선비들은 토벌군에 의하여 몰살 당한다. 세살 이상의 백성은 모두 죽이라는 지시가 있었다 한다.

 

 

그 시신들이 죽계천에 수장되었고, 그 핏물이 20리 밖 안정면 동촌리까지 흘러가  그 동네를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이른바 정축지면(丁丑之變)이다.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도 있지만, 옛 선현들은 죽계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곳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이 유명하다.

 

 

 

 

 

 

 

 

 

  

죽계천 건너편 큰바위에 새겨진 "경(敬)"이라는 붉은 글씨가 보인다. 敬이라면 유교의 근본 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敬일수도 있고,     . 서원의 창립자인 주세붕(周世鵬)이 정축지변의 참상을 전해 듣고, 그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경을 직접 써서 음각(陰刻)하여 붉은 칠을 한 뒤, 여기서 정성들여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전설도 있고... 또 하나의 전설은 주세붕이 이 곳에 서원을 지을 때 (이전에는 宿水寺 절터이었음), 흩어져 있던 불상 등을 죽계천에 내다 버렸는데..밤마다  소란스러워 이를 달래기 위해 敬자를 새겨 넣었다는 얘기도 있다.

 

 

바위의 하얀 글씨 백운동(白雲洞)은 이퇴계가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 직접 쓴 글씨이다.

 

 

 

 

 

  

서원의 입구 밖, 죽게천 건너편에 있는 정자로 그 이름이 취한대 (翠寒臺)이다. 퇴계 이황이 이름을 지었으며,  푸른 연화산의 새로운 기운과 맑은 죽계의 물빛에 취하여 詩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에서 ...옛시 송취한계(松翠寒溪)의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에 인용되었다 한다.

 

 

 

 

 

 

 

 

 

서원 입구의 오른쪽에 있은 이 경렴정(景簾亭)은  유생들이 자연을 벗삼아 詩를 지으면서 휴식을 취했던 정자이다. 서원의 밖에 위치하여, 서원의 일정한 규칙이 없었던 초기의 배치형식이다.

1543년 주세붕이 지었으며, 현판의 글씨는 퇴계의 제자이며 초서(草書)의 대가인 황기로(黃耆老)가 썼다.

 

 

 

 

 

 

 

 

 

 

 

 생성단(生成壇)...매년 3월과 9월 제사를 모실 때 바치는 제물(祭物)의 상태를 파악하던 곳..서원 정문의 왼쪽에 설치되어 있다.

 

 

 

 

 

 

 

 

 

 

 

 

 

 

 

 

 

 

 

 

 

 

 

 

 

영정각(影幀閣)...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주세붕은 안향을 제향하기 위하여 이 백운동서원을 세웠고, 후일 이퇴계의 請에 의하여 소수서원이 되었다.

 

고려 충렬왕 시절.. 고려는 고종말에 원(元)과 화친을 맺은 이래 대대로 몽고의 간섭을 받아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이 많이 흔들렷다. 그러나 그들과의 전쟁이 끝남에 따른 평화의 회복은 학문과 문교(文敎)의 재건을 가능케 하였다. 당시 원나라는 이미 송(宋)을 멸망시키고, 유학을 장려하던 시기이었다.

 

 

安珦은 이러한 시기에 원나라를 왕래하며, 그 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우리나라에 전파한 최초의 性理學者이었다. 그는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직접 베끼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진상(眞像)을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  그후 또 사람을 보내 공자에 관한 모든 책들과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 악기(樂器) 등을 구해 오도록 하였고, 그리고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진상(眞像)을 모셨다.

 

 

그리고 안향은 왕에게 청하여 모든 문무백관은 벼슬에 따라 金,銀,布를 내게 하여 이를 일종의 육영재단인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켜 그 利子로 인재 양성에 충당케 하였다. 이는 당시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안향이 전한 성리학은 우주론적인 이기론(理氣論)보다는 심성 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는 성인의 도는 충(忠), 효(孝), 신(信), 경(敬), 성(誠)이라는 실천 덕목에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는 부모를 버리고, 집을 떠나 윤리를 경시하고 의리에서 벗어났다고 불교를 극력 배척하였다.

 

그는 회헌실기 (晦軒實記)에서...내 일찍 중국에서 朱子의 저술을 얻어보니, 성인의 道를 발명하고, 선불(禪佛)의 學을 물리친 것으로 그 孔이 족히 公子에 비할 수 있다. 공자를 배우려면 먼저 주자를 배우는 것이 제일이다....라고 기술하였듯이 불교를 배척한 주자를 높이  평가하고, 공자의 학문은 주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號도 주자의 號인 회암(晦菴)의 회자를 따서 회헌(晦軒)이라고 하였다.  안향으로부터 시작된 性理學은 한국 유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고려의 불교세력과 대항하고, 나아가 그것을 압도하면서, 조선시대의 건국이념으로 성장하였다.

 

 

 

 

 

 

 

 

  

 

 

문성공묘 (文成公廟)... 회헌(晦軒) 안향 (安珦)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후에 안보와 안축 그리고 주세붕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서원에는 학교 기능의 강학당(講學堂)과 제사 기능의 사당이 있다. 중국식은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해서 학교를 앞에 세우고, 사당을 뒤에 세우는 것이며, 우리나라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배치를 취하고 있지만..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로서 학교는 동쪽에, 사당을 서쪽에 세워,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는 우리나라 전퉁의 위차법(位次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른 것이다.

 

 

 

 

 

 

 

학구재(學求齋)...학생들의 기숙사이다. 학문을 의미하는 "三"을 취하여 세칸으로 지었고, 공부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건물 모양이  "工"자 형태로 되어 있다. 학생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에 따라 두채의 학생 기숙사가 , 원장이나 교수들의 숙소인 일신재, 직방재에서 훨씬 물러나 동쪽에 치우치게 배치한 것도 이란 이유이다. 제자는 스승의 발치 아래에서도 잠 들수 없는 것이다.

 

 

 

  

일신재 (日新齋)... 書院의 교수들의 숙소이다.

 

 

 

  

직방재 (直方齋)...소수서원의 원장의 숙소.

 

 

 

 

 

 

장서각 (藏書閣)...오늘 날의 대학 도서관이다. 임금이 직접 하사한 어제본(御製本)을 비롯, 3000여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적은 좌우지선(左右之先)의 예에 따라 으뜸자리에 둔다 하여, 스승 숙소보다 오른쪽에 배치하였다. 

 

 

 

  

전사청 (典祀廳)...제사에 필요한 집기,비품들을 보관하던 곳

 

 

 

 

 

 

사료관

 

 

 

 

 

 

 

  

 

 

소혼대(消魂臺)... 공부에 열중하던 학생들이 이 곳에 올라 머리를 식혔다고 한다. 이름이 재미있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 곳 학생들을 방문하고 돌아가며 서로 울던 장소라는 애기도 있다.

 

 

 

 

 

 

 

 

 

탁청지 (濯淸池)... 선조 26년 (1593), 풍기군수 유운용이 서원 담장을 끼고 대(臺)를 쌓고, 그 아래에  연못을 만들어 경승(景勝)을 가꾸던 곳이다.

 

 

 

 

 

 

 

 

소수박물관  (紹修博物館)...

 

 

 

 

 

이 곳 영주지역.... 先史時代  사람들의 생활, 신앙의 대상지었던 곳임을 밝혀주는 공간이다. 경상북도 최북단에 자리한 영주는 예로부터 사람이 정착하여 생활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으며 고인돌, 선돌, 바위그림 등 청동기시대의 여러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이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삼국시대 그리고 조선시대의 영주의 여러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다.

 

 

 

 

 

이 백운동서원 (후에 소수서원)의 설립자...주세붕(周世鵬... 1495 ~1554)..... 그는 학문이 깊어 海東孔子로 불리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고, 또한 청백리이었다.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그가 풍기군수로 있을 때,  人蔘을 보급하여,  백성들의 윤택한 경제생활에 기여하였으며, 요즈음에도 유명한 풍기인삼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60년 일생동안 30년을 관직에 있었지만, 서울에는 집도 없이 남의 집을 빌려 살았으며, 물려받은 재산 외에는 조금도 더해지지 않았다. 무릉잡고(武陵雜稿)에 의하면  그가 죽었을 때에는 집에 쌀 한섬의 저축도 없어서 임금이 내려준 비용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룰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글로 쓴 최초의 훈민시조(訓民詩調)인 오륜가(五倫歌)를 남기어 전해온다.

 

사람 사람마다 이 말씀 드러시라                    사람사람들마다 이 말씀을 들으려무나

이 말씀 아니면 사람이오 사람아니니              이 말씀 듣지 않으면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니니

이 말씀 닛디 말오 배호고야 마로리이다          이 말씀을 잊지말고 배우고야 말 것입니다.

 

아버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아버님이 날 낳으시고 어머님이 날 기르시니

부모 옷 아니셨으면 내몸이 업실낫다              부모님 아니셨으면 이 몸이 없으렸다.

이 덕(德)갑흐려 하니 하늘 가이 업스샷다.       이 부모의 덕을 갚으려니 하늘같이 끝이 없다.

 

죵과 항것과를 뉘라서 삼기신고                     종과 상전의 구별을 누가 만들어 내었던가

벌와 기여미아 이뜨들 몬죠 아이                    벌과 개미같은 미물들이 이 뜻을 먼저 아는구나

한 마음에 두 뜻 업시 속이디나 마옵새이다       한마음 두뜻을 품지말고 서로 속이지나 마시요

 

지아비 밧갈나 간듸 밥고리 이고 가                남편이 밭갈러 간 곳에 밥담은 광주리 이고 가서

반상(반상)을 들오듸 눈섬의 마초이다              밥상을  눈썹 높이까지 공손히 들어 바칩니다

진실노 고마오시니 손이시나 다를실가             진실로 고마운 분이니 귀한 손님과 다를것이 없다

 

형님 자신 져즐 내조차 먹우이다                    형님이 먹고 자란 젖을 나까지 먹습니다

오와 우리 아아 어마님 너 사랑이야                 내 아우야 너는 어머님의 사랑이로다

형제와 불화(불화)면 개도치라 하리라              형제간 화목치 않으면 개,돼지 소리 들으리라

 

늘으니는 부모같고 얼운은 형가타니                늙은이는 부모같고, 어른은 형님같으니

가튼데 불공(불공)하면 어듸가 다를고              이와 같은데  공손치 않으면 짐승과 다를까

날노셔 마지어시든 절하고야 마로리이다           나로서는어른을 만나면 절하고야 말 것입니다.

 

 

 

 

 

 

 

선돌... 길쭉한 돌을 그대로 또는 약간 손질하여 세운, 사람의 의지가 깃들인 돌기둥을 말한다. 立石이라고도 하며, 고인돌과 더불어 대표적인 거석문화(巨石文化)에 속한다.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고인돌의 분포지역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돌을 세웠거나, 서 있다는 뜻에서 선돌 이외에 삿갓바위(笠巖)이라고도 불리며, 지역에 따라서는 구지바위,할머니탑,할아버지탑,돌장승,수구막이,수살장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선돌의 기능은 대략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의인화(擬人化)되어 있다. 첫째, 암석, 칠성,성기 숭배에서 나타나듯이  다산(多産), 생산(生産), 장수(長壽)를 바라는 풍요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둘째, 벽사(劈邪), 수구막이의 역할을 하는 선돌은 수호(守護)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이 것은 쌍(雙)으로 있던지, 성(性)의 구별이 뚜렷한 점이다. 세워져 있는 끝부분이  뾰족한것은 남자를...뭉툭한 것은 여자를 상징하고 있다.

 

세째, 죽은 사람을 상징하거나 무덤을 표시하는 무덤돌의 기능이다.

 

 

 

 

 

 

 

바느레 고분(古墳)...고구려의 무덤 양식이다. 남한에 있는 몇 안되는 고구려의 유적인 것이다.  이 곳 일대는 삼국시대에  신라의 영토이었지만, 고구려와 접경을  이루는 지역으로 , 고구려의 문화가 신라로 전파되는 관문이었다. 고구려의 돌방무덤 (石室古墳)이다.

 

 

 

 

 

 

 

고인돌...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한국 先史時代의 여러 유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분포는 중국과 일본의 극히 일부 지방에서 발견될 뿐이며, 한국에서는 수만기(基)에 달할만큼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기능면에서 볼 때...당시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어떤 대상이나, 자연의 힘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의식(儀式)을 거행하던  " 제단(祭檀) 고인돌 "과 죽은 사람을 묻기 위하여 만들었던 ' 무덤 고인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것은 거의 무덤 고인돌이다. 무덤 고인돌의 형식을 보면... 먼저 밖으로 도러난 모습인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굄돌에 따라 몇가지로 나뉜다.  탁자식 고인돌은 4개의 판판한돌을 세워서 지표 위에 네모꼴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놓았다.

 

바둑판 고인돌은 땅위에 놓인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무덤은 땅 속에 있다.  구덩식 고인돌은 땅 위에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많이 발견되고 있는 고인돌 형식이다.

 

 

 

 

 

 

 

  

선비촌....원래 이 곳 순흥지방은 경상도에서 가장 번창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십리길을 비 안 맞고 지나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한 후, 이 곳 3살 이상 주민들은 모두 살륙당하였으며, 향교 등 모든 시설은 파괴되고, 순흥은 그 이름조차 없어지면서 인근 풍기,봉화 등으로 나뉘어 지고 만다.  그 시대의 모습을 再現 한 곳이  선비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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