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머리가 비대한 조직이었다면 만주의 삼부(三府)는 머리와 몸통, 손발이 모두 있는 조직이었다. 하얼빈 이남을 관장했던 정의부는 내부적으로 철저한 민주주의 운영 원칙을 지키면서 행정·군사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던 만주의 사실상 정부였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가 있던 유하현 삼원보. 망국 직후부터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와 장작림 군벌정권의 탄압으로 정의부는 근거지를 계속 옮겨야 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일반 국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의 판도를 바꿀 만한 큰 사건이었다. 3·1운동 이후 곧 독립이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지만 3·1운동의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망라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였고, 상해에 위치해 무장투쟁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미주에서 활동하던 박용만(朴容萬)은 북경으로 건너와 국내외에 산재한 10개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해 1921년 4월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했다. 군사통일회의는 대체로 임정에 부정적이었다. 회의 자체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임정에는 큰 과제를 던져주었다. 모든 독립운동 단체가 참가하는 ‘통일전선체’를 결성하라는 과제였다. 이런 여망 속에서 1923년 1월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와 상해, 북경, 만주, 러시아령, 미주의 120여 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가 총망라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통일적인 조직체가 건설된다면 그동안 분산되었던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의 깃발 아래 보다 통일적이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의는 처음부터 임시정부를 개조해서 존속시키자는 개조파(改造派)와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創造派)로 나뉘어 대립했다. 만주와 상해의 대표들은 대체로 개조를 주장한 반면, 북경과 시베리아 대표들은 창조를 주장했다. 대립이 계속되자 5월 15일 국민대표회의 의장이었던 김동삼(金東三)을 비롯해 김형식(金衡植)·이진산(李震山) 등 만주 대표들은 대표 사면청원서를 제출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창조파는 6월 3일부터 윤해(尹海)를 의장에 추대하고 단독 회의를 열어 국호를 한(韓), 연호를 단군 기원으로 삼는 새로운 한국(韓國)정부를 창조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1 삼원포(옛 삼원보) 동명소학교. 아직도 동명학교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2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이었던 정이형. 해방 후 남조선과도입법의회 관선의원이 돼 친일파의 공민권 제한을 주장했다.
그런데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원으로 상해에서 개최한 국민대표회의”라고 말한 것처럼 대회 경비는 러시아 정부에서 나온 것이었다. 러시아는 민족단일전선을 만들어 항일투쟁에 나서라는 뜻에서 지원한 것이었지 한 파벌만으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라는 의도는 아니었다. 러시아 정부가 창조파를 추방하면서 새로운 정부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한국독립사' 4권, 임시정부사).
만주로 돌아간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지역 내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 작업에 나서서 1924년 7월 ‘전만(全滿)통일회의 주비회(籌備會)’를 결성했다. 주비회에는 대한광정단(大韓光正團:대표 김호), 대한독립군(대표:이장녕), 대한독립군단(대표:윤각) 등이 가담했는데 그 중심은 대한통의부와 서로군정서였다.
이때 대한독립군이 임정 옹호를 주장하자 통의부 등에서 극력 반대하면서 다시 갈등이 발생했다. 통의부에서 갈라져 나간 군부 세력이 임정 산하의 육군주만참의부(약칭 참의부)를 결성했으므로 통의부는 임정에 적대적이었다. 결국 대한독립단과 학우회 등이 탈퇴하고 나머지 8개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화전현(樺甸縣)에서 전만통일회를 열고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했다.
1924년 11월 24일을 창립기념일로 삼은 정의부는 창립 결의문에서 ‘개국 기원(紀元:단군 기원)을 연호로 사용하고 구(區)의회, 지방의회, 중앙의회를 설치’했다. 또한 ‘각 단체는 명의 취소 성명서를 작성해 대표가 연서해서 공포하고, 각 단의 사무는 폐회일로부터 2개월 이내에 정의부로 인계한다’는 내용을 결정했다(채영국,'정의부 연구', 1998, 박사학위 논문). 이 결의에 따라 서로군정서는 1924년 12월 31일 가장 먼저 통합 선포문을 발표하고 해산했다. 서로군정서가 선포문에서 “오직 우리 독립운동의 유일무이한 정의부라는 기관을 조직한 후 헌법 전문을 새로이 준비한다”고 밝혔듯이 정의부는 군정부(軍政府)를 지향했다.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대표 기관을 자임했는데 입법·사법·행정의 3권이 분립된 민주공화제였다. 법률 제정권은 의회에 있었고, 중앙행정위원회(행정부) 산하에 민사·군사·법무·학무·재무·교통·생계(生計)·외무 등 8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법부에 해당하는 사판소(査判所)가 있었다.
지방은 촌락의 크기에 따라 ‘중앙→총관구(總管區:1000호)→지방(地方:500호)→백가장(百家長:100호)→구(區:50호)→십가장(十家長:10호)’ 등으로 나누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했다. ‘지방’이나 ‘구’에서 호수(戶數)를 비율로 중앙의회 의원을 선출하면, 의원들은 재만(在滿) 한인사회에 신망이 높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중앙행정위원회 위원들을 선임했다. 선출된 위원들은 위원장 및 각 부 위원을 상호 투표로 선출했다. 민주공화제를 운영한 경험이 전무했던 상황에서는 경탄할 만한 민주적 조직 운영 방식이었다.
정의부는 초대 중앙집행위원장에 이탁(李<6CB0>)을, 현정경(玄正卿)·지용기(池龍起)·이진산(李震山)·김용대(金容大)·김이대(金履大)·윤병용(尹秉庸)·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만주 독립운동의 대표격인 이상룡(李相龍)이 빠진 이유는 이미 만 66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들 이준형(李濬衡)은 선부군 유사(先府君遺事)에서 ‘국민대표회의의 결렬에 실망해서 반석(盤石) 동쪽 호란하(呼蘭河)가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참의부가 군사 중심의 조직체라면 정의부는 행정과 군사 병행 체제였다. 정의부는 창립 선언서에서 “…광복사업의 근본 문제인 경제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산업 진흥을 시도하며 민족발달의 유일한 요소인 지식 정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교육 보급을 실시한다”고 선언했듯이 산업 부흥과 교육 우선, 그리고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정의부는 양기탁(梁起鐸)의 주도로 만주 여러 곳에 수전(水田)농업을 하는 ‘이상적 농촌 건설 계획’ 등을 계획했지만 토지 구입대금을 마련하지 못해 실패했다. 정의부 학무국은 1925년 소학(小學)·중학(中學)·여자고등·직업·사범학교 등으로 구성되는 학제를 발표하면서 소학교 의무교육 제도를 선포했다. 정의부는 각지에 설립되어 운영 중인 학교를 인가하기도 하고 새로 설립하기도 했다.
정의부 본부가 있던 유하현 삼원보의 동명중학교를 필두로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의 화흥(化興)중학과 남만주학원 등을 설립했으며, 그 외에 화성(華成)의숙, 부흥(復興)학교, 삼흥(三興)학교 등도 모두 정의부에서 운영했던 학교였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 정의부에서 22개 학교를 경영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2년 숭실전문학교 경제학연구실의 이훈구(李勳求)는 이보다 2~3배 이상 많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장작림(張作霖) 군벌정권의 경무국장 우진(于珍)이 ‘삼시협약(三矢協約:미쓰야협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총독부에 넘겼다. 그래서 처음 삼원보에 중앙행정위원회를 두었던 정의부는 계속 이주해야 했다. 삼원보에서 화전현(樺甸縣) 공랑두(公郞頭)와 밀십합(密什哈)으로, 다시 길림현 대차(大<5C94>)와 신안둔(新安屯) 등으로 계속 옮겨간 것이다.
정의부는 산하에 의용군 사령부가 있었는데, 1925년 9월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司令長)은 한말 무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의 지청천(池靑天)이었다. 압록강 대안에 있던 참의부보다 더 북쪽에 자리 잡은 정의부도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에는 2개 대의 유격대를 국내로 잠입시켜 서울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했다. 비록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 때문에 만주로 퇴각했지만 여건만 허락하면 다시 진입할 수 있었다.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이었던 정이형은 1927년 만주에서 체포되어 해방 때까지 18년 동안 장기 복역한다. 그의 혐의 중 하나는 참의부 독립군이 평북 초산(楚山)경찰서에게 당한 고마령 참변에 대한 보복 투쟁이었다. 일제 신문조서는 ‘정이형이 김석하(金錫夏), 김정호(金正浩) 등 의용군 간부들과 다수의 독립단원이 초산경찰서 경찰관에게 피살된 일을 복수하기 위해 초산경찰서 추목(楸木)출장소(김석하)와 외연(外淵)출장소(김정호), 벽동(碧潼)경찰서 여해(如海)출장소를 각각 습격했다’고 판결했다.
정이형은 6명의 의용군과 함께 1925년 3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새벽 5, 6시쯤 여해경찰관 출장소를 습격해 순사 서천융길(西川隆吉)과 임무(林茂)·신현택(申鉉澤)의 두부를 저격해 즉사시키고 다수를 부상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정의부는 전 만주를 아우르지는 못했지만 이상룡의 손부(孫婦)인 허은(許銀)이 “그렇게 조직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단체 덕을 보았지 안 본 사람 어디 있나? 그 너른 천지에 자력으로 어디 가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겠나?”라고 말한 것처럼 재만 교포들에게는 사실상의 정부였다.
신민부, 장작림 잡으려 장개석과 손잡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신민부가 성립되면서 압록강 대안의 참의부, 그 북쪽의 정의부와 북만주를 관할하는 신민부의 삼부(三府)가 정립하는 삼부체제가 완성되었다. 삼부는 삼권분립의 정치체제와 독립군을 가지고 일제와 치열하게 투쟁했다. 삼부는 만주 한인들에게 사실상의 정부 같은 조직이었다.
백범영-독립군 도강작전, 143×75㎝,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2
만주의 삼부(三府) ⑧북만주의 통합 바람
봉오동·청산리 승첩 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들어갔다가 ‘자유시(自由市) 참변’을 겪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들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뜻밖에도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아일보 1921년 11월 15일자는 ‘배일(排日) 거두(巨頭) 서일(徐一) 피살설’이란 제목 아래 “군정서 군무총재 서일은… 부하 삼사십 명을 거느리고 웅거하여 있다가 동월 8일에 돌연히 마적과 충돌해 밀림지대에서 장렬하게 싸움을 하다가 마적의 탄환에 맞아 그만 사망하였다는 말이 있다(군사령부 발표)”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아직은 믿지 못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자세한 진상은 ‘독립신문’ 대한민국 3년(1921) 12월 6일자가 말해주고 있다. 이 날짜 ‘독립신문’은 ‘고 서일 선생을 조(弔)함’이라는 애도문을 1면 머리기사로 실으면서 3면에 ‘독립군 총재 서일씨 자장(自<6215>:자살)’이란 제목으로 자세한 내용을 보도했다.
서일은 1921년 9월 28일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무장 군사 12명을 대동하고 밀산(密山)현 흥개호(興凱湖) 부근 한 촌가에 머물러 있던 중 붉은 옷을 입은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을을 포위한 수백 명의 마적 떼가 주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자 서일의 호위병력이 응전했는데 수적으로 절대 열세여서 12명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서일은 이에 책임을 통감하고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서일은 1916년 자결한 대종교 1대 교주 홍암(弘巖) 나철(羅喆)의 유서(遺書) 중에서 “…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라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서일의 죽음은 북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큰 타격이었다. 신단민사(神檀民史)의 저자이기도 했던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이 1923년 11월 영안(寧安)현의 대종교 총본사에서 병사한 이유 중의 하나가 서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질 정도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도 북만주의 혈성단(血誠團), 북로군정서, 의군부, 광복단, 대진단(大震團) 등의 독립운동세력들은 통합운동을 전개해 1922년 8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남만주에서 대한통의부가 결성된 것과 같은 해 같은 달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두만강을 자주 넘나들었던 역전의 용사들이자 봉오동·청산리 승첩의 주역들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었기 때문에 북만주로 파고들던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러시아가 1920년 3월 하얼빈에 ‘동지철도 부속지(東支鐵道附屬地) 공산당 사무국’을 설치하고 사회주의 전파에 나서자 목릉현 소추풍(小秋風) 일대에서 소비에트 반대 활동을 전개하고, 1924년에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적화방지단(赤化防止團)’까지 만들어 대립하기도 했다.
남만주에서 참의부와 정의부가 잇따라 결성되자 북만주에도 단체 통합의 바람이 불어서 1925년 1월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군정부(軍政府) 설치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3월 10일 영안현에서 신민부(新民府)가 만들어진다. 신민부는 김혁(金爀)·조성환(曺成煥)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정서와 김좌진(金佐鎭)·남성극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의 두 군사세력이 주축이 되고 중동선(中東線)교육회장 윤우현(尹瑀鉉) 등 민선대표들과 국내 10개 단체 대표들이 참가했다.
신민부는 “아등(我等)은 민족의 요구에 응하고 이래(爾來:가까운) 단체의 의사에 기하여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하고 일치된 정신 하에 신민부의 조직이 성립된 것을 자(玆)에 선포한다”라고 시작해 “래(來)하라 단결. 기(起)하라 분투”로 끝나는 선포문을 발표했다.
신민부도 행정부인 중앙집행위원회와 의회인 참의원, 사법부인 검사원을 두어 삼권분립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집행위원장은 대종교 계통의 김혁이었고, 민사부 위원장 최호(崔灝), 군사부위원장 김좌진, 외교부 위원장 조성환, 교육부 위원장 허빈(許斌)이었다. 참의원 의장은 의병장 출신의 이범윤(李範允)이었는데 이미 만 62세의 노령이었다. 검사원 원장에는 대종교 계통의 현천묵(玄天默)이 선임되어 대체로 대종교 계통의 우위가 관철되었다.
신민부도 재만 한인들의 생활 향상과 군사력 증강,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신민부는 결의안에서 “군사는 의무제를 실시할 것. 둔전제(屯田制) 혹은 기타의 방법에 의해 군사교육을 실시할 것.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를 양성할 것. 군사서적을 편찬할 것” 등을 규정했다. 신민부는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城東)사관학교를 열고 모두 500여 명의 장교를 양성했는데 교장 김혁, 부교장 김좌진, 교관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오상세·백종렬 등이었다.
신민부는 군구제(軍區制)와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해 전시가 도래하면 금방 대규모 병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했다. 군구제는 신민부 관할 내의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 장정들의 군적(軍籍)을 작성해서 독립군의 기본대오를 편성한 것이었다.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가 지휘하면 금방 정규군으로 바뀔 수 있었다.
둔전제는 일종의 병농일치제도였다. 신민회는 결의문에서 교육에 관해 “소학교 졸업연한은 6개년, 중학교 졸업연한은 4개년으로 함. 단 100호 이상의 마을에는 1개의 소학교를 설치하고 필요에 따라 기관에서 중학교 또는 사범학교를 설치함. 교육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교과서를 편찬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신민부는 주하(珠河)·목릉(穆陵)·밀산(密山)·요하(饒河)·돈화(敦化) 등 15개 지역에 50개 이상의 학교를 건설하는데 이때 신민부에서 파견되어 안도현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이강훈(李康勳)은 민족해방운동과 나(1994)에서 “나는 아침 조회 때마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송화강 상류 언덕 위에 학생들을 집결시켜 놓고 마주 보이는 백두산 영봉을 바라보면서 애국가를 제창하게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만주 군벌당국이 신민부 탄압에 나섰다. 그럼에도 독립군은 중국군과는 정면으로 충돌하기 어려웠다. 중국군 중에는 1920년대 초 보병단장(步兵團長) 맹부덕(孟富德)이 일본군의 토벌계획을 사전에 알려주면서 독립군의 이동을 권한 것처럼 독립군에 우호적인 인물도 있었다.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와 이른바 미쓰야협약(三矢協約:삼시협약)을 맺고 독립운동가를 조선총독부에 넘겨준 이후 환경은 극도로 열악해졌다. 장작림 군벌 경찰은 1925년 10월 영고탑(寧古塔)에서 회의 중이던 신민부 별동대를 급습해 박순보(朴順甫)·신갑수(申甲洙) 등 8명을 연행했다. 이듬해 4월 여섯 명은 석방되었지만 위 두 사람은 그 사이 옥사할 정도로 혹독한 취급을 당했다. 1928년 1월에는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넘겨주기도 했다.
그 전에 신민부는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중국국민당의 장개석 정부와 연합전선을 결성하려 했다. 최형우(崔衡宇)의 해외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에 따르면 신민부는 중국국민당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貢沛誠)과 연결해 ‘만주 군벌타도가 목적인 국민당 북벌정책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기본 계획은 중국국민당과 손잡고 신민부 군부를 중국 중앙군 제8로군으로 개편해 장작림 정권을 무너뜨리는 동북혁명군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국민당에서 무기와 군자금 400만원을 제공하면 중앙군 제8군으로 명칭을 바꾼 신민부가 목단강(牧丹江)과 하얼빈을 점명하고 봉천(奉天:장춘)으로 진군해 장작림 정권을 타도한다는 계획이었다.
애국동지원호회에서 편찬한 한국독립운동사(1956)는 1927년 2월 중국 구국군 제13군 사령관 양수일(楊守一)이 김좌진을 백두산 산록의 군구 사령부로 초청해 한·중연합부대 결성에 대해서 논의했으며, 그해 8월에도 왕청현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한·중연합회의가 열렸다고 전한다. 국민당 측에서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 기병 3000과 보병 2만을 지닌 악유준(岳維峻), 비슷한 규모의 군사력을 지닌 사가헌(史可軒)이 참석하고 신민부에서는 김좌진 외 2명이 참석해서 신민부를 중앙군 제8로군으로 바꾸고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작림이 공패성·사가헌·악유준을 체포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한·중 연합부대가 계획대로 결성되었다면 독립운동사 자체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5월 15일자는 김좌진이 1925년 3월 신민부 특공대원 강(姜)모 등에게 권총과 폭탄을 주어 사이토 총독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하고, 해림(海林)의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 배두산(裵斗山)을 처단하는 등 신민부는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북만의 15~6개 현, 40만~50만 명의 한인사회를 관장했던 신민부는 이후 민정파와 군정파로 갈라지는 분열을 겪으면서 삼부 통합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머리가 비대한 조직이었다면 만주의 삼부(三府)는 머리와 몸통, 손발이 모두 있는 조직이었다. 하얼빈 이남을 관장했던 정의부는 내부적으로 철저한 민주주의 운영 원칙을 지키면서 행정·군사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던 만주의 사실상 정부였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가 있던 유하현 삼원보. 망국 직후부터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일제와 장작림 군벌정권의 탄압으로 정의부는 근거지를 계속 옮겨야 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일반 국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의 판도를 바꿀 만한 큰 사건이었다. 3·1운동 이후 곧 독립이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지만 3·1운동의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망라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였고, 상해에 위치해 무장투쟁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미주에서 활동하던 박용만(朴容萬)은 북경으로 건너와 국내외에 산재한 10개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해 1921년 4월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했다. 군사통일회의는 대체로 임정에 부정적이었다. 회의 자체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임정에는 큰 과제를 던져주었다. 모든 독립운동 단체가 참가하는 ‘통일전선체’를 결성하라는 과제였다. 이런 여망 속에서 1923년 1월부터 국민대표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와 상해, 북경, 만주, 러시아령, 미주의 120여 개 독립운동 단체의 대표가 총망라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통일적인 조직체가 건설된다면 그동안 분산되었던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이 하나의 깃발 아래 보다 통일적이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의는 처음부터 임시정부를 개조해서 존속시키자는 개조파(改造派)와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創造派)로 나뉘어 대립했다. 만주와 상해의 대표들은 대체로 개조를 주장한 반면, 북경과 시베리아 대표들은 창조를 주장했다. 대립이 계속되자 5월 15일 국민대표회의 의장이었던 김동삼(金東三)을 비롯해 김형식(金衡植)·이진산(李震山) 등 만주 대표들은 대표 사면청원서를 제출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창조파는 6월 3일부터 윤해(尹海)를 의장에 추대하고 단독 회의를 열어 국호를 한(韓), 연호를 단군 기원으로 삼는 새로운 한국(韓國)정부를 창조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1 삼원포(옛 삼원보) 동명소학교. 아직도 동명학교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2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이었던 정이형. 해방 후 남조선과도입법의회 관선의원이 돼 친일파의 공민권 제한을 주장했다.
그런데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원으로 상해에서 개최한 국민대표회의”라고 말한 것처럼 대회 경비는 러시아 정부에서 나온 것이었다. 러시아는 민족단일전선을 만들어 항일투쟁에 나서라는 뜻에서 지원한 것이었지 한 파벌만으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라는 의도는 아니었다. 러시아 정부가 창조파를 추방하면서 새로운 정부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한국독립사' 4권, 임시정부사).
만주로 돌아간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지역 내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 작업에 나서서 1924년 7월 ‘전만(全滿)통일회의 주비회(籌備會)’를 결성했다. 주비회에는 대한광정단(大韓光正團:대표 김호), 대한독립군(대표:이장녕), 대한독립군단(대표:윤각) 등이 가담했는데 그 중심은 대한통의부와 서로군정서였다.
이때 대한독립군이 임정 옹호를 주장하자 통의부 등에서 극력 반대하면서 다시 갈등이 발생했다. 통의부에서 갈라져 나간 군부 세력이 임정 산하의 육군주만참의부(약칭 참의부)를 결성했으므로 통의부는 임정에 적대적이었다. 결국 대한독립단과 학우회 등이 탈퇴하고 나머지 8개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화전현(樺甸縣)에서 전만통일회를 열고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했다.
1924년 11월 24일을 창립기념일로 삼은 정의부는 창립 결의문에서 ‘개국 기원(紀元:단군 기원)을 연호로 사용하고 구(區)의회, 지방의회, 중앙의회를 설치’했다. 또한 ‘각 단체는 명의 취소 성명서를 작성해 대표가 연서해서 공포하고, 각 단의 사무는 폐회일로부터 2개월 이내에 정의부로 인계한다’는 내용을 결정했다(채영국,'정의부 연구', 1998, 박사학위 논문). 이 결의에 따라 서로군정서는 1924년 12월 31일 가장 먼저 통합 선포문을 발표하고 해산했다. 서로군정서가 선포문에서 “오직 우리 독립운동의 유일무이한 정의부라는 기관을 조직한 후 헌법 전문을 새로이 준비한다”고 밝혔듯이 정의부는 군정부(軍政府)를 지향했다.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대표 기관을 자임했는데 입법·사법·행정의 3권이 분립된 민주공화제였다. 법률 제정권은 의회에 있었고, 중앙행정위원회(행정부) 산하에 민사·군사·법무·학무·재무·교통·생계(生計)·외무 등 8개 부서를 두었으며, 사법부에 해당하는 사판소(査判所)가 있었다.
지방은 촌락의 크기에 따라 ‘중앙→총관구(總管區:1000호)→지방(地方:500호)→백가장(百家長:100호)→구(區:50호)→십가장(十家長:10호)’ 등으로 나누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했다. ‘지방’이나 ‘구’에서 호수(戶數)를 비율로 중앙의회 의원을 선출하면, 의원들은 재만(在滿) 한인사회에 신망이 높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중앙행정위원회 위원들을 선임했다. 선출된 위원들은 위원장 및 각 부 위원을 상호 투표로 선출했다. 민주공화제를 운영한 경험이 전무했던 상황에서는 경탄할 만한 민주적 조직 운영 방식이었다.
정의부는 초대 중앙집행위원장에 이탁(李<6CB0>)을, 현정경(玄正卿)·지용기(池龍起)·이진산(李震山)·김용대(金容大)·김이대(金履大)·윤병용(尹秉庸)·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했다. 만주 독립운동의 대표격인 이상룡(李相龍)이 빠진 이유는 이미 만 66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들 이준형(李濬衡)은 선부군 유사(先府君遺事)에서 ‘국민대표회의의 결렬에 실망해서 반석(盤石) 동쪽 호란하(呼蘭河)가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참의부가 군사 중심의 조직체라면 정의부는 행정과 군사 병행 체제였다. 정의부는 창립 선언서에서 “…광복사업의 근본 문제인 경제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산업 진흥을 시도하며 민족발달의 유일한 요소인 지식 정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교육 보급을 실시한다”고 선언했듯이 산업 부흥과 교육 우선, 그리고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정의부는 양기탁(梁起鐸)의 주도로 만주 여러 곳에 수전(水田)농업을 하는 ‘이상적 농촌 건설 계획’ 등을 계획했지만 토지 구입대금을 마련하지 못해 실패했다. 정의부 학무국은 1925년 소학(小學)·중학(中學)·여자고등·직업·사범학교 등으로 구성되는 학제를 발표하면서 소학교 의무교육 제도를 선포했다. 정의부는 각지에 설립되어 운영 중인 학교를 인가하기도 하고 새로 설립하기도 했다.
정의부 본부가 있던 유하현 삼원보의 동명중학교를 필두로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의 화흥(化興)중학과 남만주학원 등을 설립했으며, 그 외에 화성(華成)의숙, 부흥(復興)학교, 삼흥(三興)학교 등도 모두 정의부에서 운영했던 학교였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 정의부에서 22개 학교를 경영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1932년 숭실전문학교 경제학연구실의 이훈구(李勳求)는 이보다 2~3배 이상 많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1925년 6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장작림(張作霖) 군벌정권의 경무국장 우진(于珍)이 ‘삼시협약(三矢協約:미쓰야협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총독부에 넘겼다. 그래서 처음 삼원보에 중앙행정위원회를 두었던 정의부는 계속 이주해야 했다. 삼원보에서 화전현(樺甸縣) 공랑두(公郞頭)와 밀십합(密什哈)으로, 다시 길림현 대차(大<5C94>)와 신안둔(新安屯) 등으로 계속 옮겨간 것이다.
정의부는 산하에 의용군 사령부가 있었는데, 1925년 9월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司令長)은 한말 무관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의 지청천(池靑天)이었다. 압록강 대안에 있던 참의부보다 더 북쪽에 자리 잡은 정의부도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에는 2개 대의 유격대를 국내로 잠입시켜 서울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려고 했다. 비록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 때문에 만주로 퇴각했지만 여건만 허락하면 다시 진입할 수 있었다.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이었던 정이형은 1927년 만주에서 체포되어 해방 때까지 18년 동안 장기 복역한다. 그의 혐의 중 하나는 참의부 독립군이 평북 초산(楚山)경찰서에게 당한 고마령 참변에 대한 보복 투쟁이었다. 일제 신문조서는 ‘정이형이 김석하(金錫夏), 김정호(金正浩) 등 의용군 간부들과 다수의 독립단원이 초산경찰서 경찰관에게 피살된 일을 복수하기 위해 초산경찰서 추목(楸木)출장소(김석하)와 외연(外淵)출장소(김정호), 벽동(碧潼)경찰서 여해(如海)출장소를 각각 습격했다’고 판결했다.
정이형은 6명의 의용군과 함께 1925년 3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새벽 5, 6시쯤 여해경찰관 출장소를 습격해 순사 서천융길(西川隆吉)과 임무(林茂)·신현택(申鉉澤)의 두부를 저격해 즉사시키고 다수를 부상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정의부는 전 만주를 아우르지는 못했지만 이상룡의 손부(孫婦)인 허은(許銀)이 “그렇게 조직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단체 덕을 보았지 안 본 사람 어디 있나? 그 너른 천지에 자력으로 어디 가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겠나?”라고 말한 것처럼 재만 교포들에게는 사실상의 정부였다.
신민부, 장작림 잡으려 장개석과 손잡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신민부가 성립되면서 압록강 대안의 참의부, 그 북쪽의 정의부와 북만주를 관할하는 신민부의 삼부(三府)가 정립하는 삼부체제가 완성되었다. 삼부는 삼권분립의 정치체제와 독립군을 가지고 일제와 치열하게 투쟁했다. 삼부는 만주 한인들에게 사실상의 정부 같은 조직이었다.
백범영-독립군 도강작전, 143×75㎝,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2
만주의 삼부(三府) ⑧북만주의 통합 바람
봉오동·청산리 승첩 후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으로 들어갔다가 ‘자유시(自由市) 참변’을 겪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들은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뜻밖에도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아일보 1921년 11월 15일자는 ‘배일(排日) 거두(巨頭) 서일(徐一) 피살설’이란 제목 아래 “군정서 군무총재 서일은… 부하 삼사십 명을 거느리고 웅거하여 있다가 동월 8일에 돌연히 마적과 충돌해 밀림지대에서 장렬하게 싸움을 하다가 마적의 탄환에 맞아 그만 사망하였다는 말이 있다(군사령부 발표)”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아직은 믿지 못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자세한 진상은 ‘독립신문’ 대한민국 3년(1921) 12월 6일자가 말해주고 있다. 이 날짜 ‘독립신문’은 ‘고 서일 선생을 조(弔)함’이라는 애도문을 1면 머리기사로 실으면서 3면에 ‘독립군 총재 서일씨 자장(自<6215>:자살)’이란 제목으로 자세한 내용을 보도했다.
서일은 1921년 9월 28일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무장 군사 12명을 대동하고 밀산(密山)현 흥개호(興凱湖) 부근 한 촌가에 머물러 있던 중 붉은 옷을 입은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을을 포위한 수백 명의 마적 떼가 주민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자 서일의 호위병력이 응전했는데 수적으로 절대 열세여서 12명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서일은 이에 책임을 통감하고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서일은 1916년 자결한 대종교 1대 교주 홍암(弘巖) 나철(羅喆)의 유서(遺書) 중에서 “…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오”라는 구절을 읊조리면서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서일의 죽음은 북만주 독립운동 세력의 큰 타격이었다. 신단민사(神檀民史)의 저자이기도 했던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이 1923년 11월 영안(寧安)현의 대종교 총본사에서 병사한 이유 중의 하나가 서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질 정도다.
그러나 이런 시련 속에서도 북만주의 혈성단(血誠團), 북로군정서, 의군부, 광복단, 대진단(大震團) 등의 독립운동세력들은 통합운동을 전개해 1922년 8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남만주에서 대한통의부가 결성된 것과 같은 해 같은 달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두만강을 자주 넘나들었던 역전의 용사들이자 봉오동·청산리 승첩의 주역들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령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었기 때문에 북만주로 파고들던 사회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러시아가 1920년 3월 하얼빈에 ‘동지철도 부속지(東支鐵道附屬地) 공산당 사무국’을 설치하고 사회주의 전파에 나서자 목릉현 소추풍(小秋風) 일대에서 소비에트 반대 활동을 전개하고, 1924년에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적화방지단(赤化防止團)’까지 만들어 대립하기도 했다.
남만주에서 참의부와 정의부가 잇따라 결성되자 북만주에도 단체 통합의 바람이 불어서 1925년 1월 목릉현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군정부(軍政府) 설치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3월 10일 영안현에서 신민부(新民府)가 만들어진다. 신민부는 김혁(金爀)·조성환(曺成煥)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정서와 김좌진(金佐鎭)·남성극 등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의 두 군사세력이 주축이 되고 중동선(中東線)교육회장 윤우현(尹瑀鉉) 등 민선대표들과 국내 10개 단체 대표들이 참가했다.
신민부는 “아등(我等)은 민족의 요구에 응하고 이래(爾來:가까운) 단체의 의사에 기하여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하고 일치된 정신 하에 신민부의 조직이 성립된 것을 자(玆)에 선포한다”라고 시작해 “래(來)하라 단결. 기(起)하라 분투”로 끝나는 선포문을 발표했다.
신민부도 행정부인 중앙집행위원회와 의회인 참의원, 사법부인 검사원을 두어 삼권분립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집행위원장은 대종교 계통의 김혁이었고, 민사부 위원장 최호(崔灝), 군사부위원장 김좌진, 외교부 위원장 조성환, 교육부 위원장 허빈(許斌)이었다. 참의원 의장은 의병장 출신의 이범윤(李範允)이었는데 이미 만 62세의 노령이었다. 검사원 원장에는 대종교 계통의 현천묵(玄天默)이 선임되어 대체로 대종교 계통의 우위가 관철되었다.
신민부도 재만 한인들의 생활 향상과 군사력 증강,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신민부는 결의안에서 “군사는 의무제를 실시할 것. 둔전제(屯田制) 혹은 기타의 방법에 의해 군사교육을 실시할 것.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를 양성할 것. 군사서적을 편찬할 것” 등을 규정했다. 신민부는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城東)사관학교를 열고 모두 500여 명의 장교를 양성했는데 교장 김혁, 부교장 김좌진, 교관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오상세·백종렬 등이었다.
신민부는 군구제(軍區制)와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해 전시가 도래하면 금방 대규모 병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했다. 군구제는 신민부 관할 내의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 장정들의 군적(軍籍)을 작성해서 독립군의 기본대오를 편성한 것이었다.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가 지휘하면 금방 정규군으로 바뀔 수 있었다.
둔전제는 일종의 병농일치제도였다. 신민회는 결의문에서 교육에 관해 “소학교 졸업연한은 6개년, 중학교 졸업연한은 4개년으로 함. 단 100호 이상의 마을에는 1개의 소학교를 설치하고 필요에 따라 기관에서 중학교 또는 사범학교를 설치함. 교육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교과서를 편찬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신민부는 주하(珠河)·목릉(穆陵)·밀산(密山)·요하(饒河)·돈화(敦化) 등 15개 지역에 50개 이상의 학교를 건설하는데 이때 신민부에서 파견되어 안도현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이강훈(李康勳)은 민족해방운동과 나(1994)에서 “나는 아침 조회 때마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송화강 상류 언덕 위에 학생들을 집결시켜 놓고 마주 보이는 백두산 영봉을 바라보면서 애국가를 제창하게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만주 군벌당국이 신민부 탄압에 나섰다. 그럼에도 독립군은 중국군과는 정면으로 충돌하기 어려웠다. 중국군 중에는 1920년대 초 보병단장(步兵團長) 맹부덕(孟富德)이 일본군의 토벌계획을 사전에 알려주면서 독립군의 이동을 권한 것처럼 독립군에 우호적인 인물도 있었다.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와 이른바 미쓰야협약(三矢協約:삼시협약)을 맺고 독립운동가를 조선총독부에 넘겨준 이후 환경은 극도로 열악해졌다. 장작림 군벌 경찰은 1925년 10월 영고탑(寧古塔)에서 회의 중이던 신민부 별동대를 급습해 박순보(朴順甫)·신갑수(申甲洙) 등 8명을 연행했다. 이듬해 4월 여섯 명은 석방되었지만 위 두 사람은 그 사이 옥사할 정도로 혹독한 취급을 당했다. 1928년 1월에는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넘겨주기도 했다.
그 전에 신민부는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중국국민당의 장개석 정부와 연합전선을 결성하려 했다. 최형우(崔衡宇)의 해외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에 따르면 신민부는 중국국민당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貢沛誠)과 연결해 ‘만주 군벌타도가 목적인 국민당 북벌정책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기본 계획은 중국국민당과 손잡고 신민부 군부를 중국 중앙군 제8로군으로 개편해 장작림 정권을 무너뜨리는 동북혁명군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국민당에서 무기와 군자금 400만원을 제공하면 중앙군 제8군으로 명칭을 바꾼 신민부가 목단강(牧丹江)과 하얼빈을 점명하고 봉천(奉天:장춘)으로 진군해 장작림 정권을 타도한다는 계획이었다.
애국동지원호회에서 편찬한 한국독립운동사(1956)는 1927년 2월 중국 구국군 제13군 사령관 양수일(楊守一)이 김좌진을 백두산 산록의 군구 사령부로 초청해 한·중연합부대 결성에 대해서 논의했으며, 그해 8월에도 왕청현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한·중연합회의가 열렸다고 전한다. 국민당 측에서 만주공작 책임자 공패성, 기병 3000과 보병 2만을 지닌 악유준(岳維峻), 비슷한 규모의 군사력을 지닌 사가헌(史可軒)이 참석하고 신민부에서는 김좌진 외 2명이 참석해서 신민부를 중앙군 제8로군으로 바꾸고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작림이 공패성·사가헌·악유준을 체포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고 전하고 있다.
한·중 연합부대가 계획대로 결성되었다면 독립운동사 자체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5월 15일자는 김좌진이 1925년 3월 신민부 특공대원 강(姜)모 등에게 권총과 폭탄을 주어 사이토 총독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전하고, 해림(海林)의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 회장 배두산(裵斗山)을 처단하는 등 신민부는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북만의 15~6개 현, 40만~50만 명의 한인사회를 관장했던 신민부는 이후 민정파와 군정파로 갈라지는 분열을 겪으면서 삼부 통합운동에 참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