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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차관 5천만불 이후에 대일 청구권 자금 6억불과 포항제철!
해방 이후 1948년에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한국은 80% 가까운 국민이 농어촌에 거주하는 농업
국가로, 당시 몇개 안되는 기업(공장) 은 경영주인 일본인 사장과 기술자가 귀국해 버리자.....
원료를 구입할 운영 자금을 댈 사람도 없고 제품을 생산할 기술자도 없으니 공장들은 문을 닫게 됩니다.
기업(공장) 이 없으니 대학 졸업자는 상당수가 실업자가 되는데... 설상가상으로 6.25
전쟁으로 나라는 폐허가 되니 봄철 보릿고개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니 죽과 부대찌개가 등장했으며..... 농지세가 가장 큰 세목이라 국세로는
공무원과 경찰에 군인들 월급 줄 돈도 모자라니 미국의 원조 물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석유를 비롯한 여러 원자재와 공업제품을 수입하는데 달러가 필요했으니 정부는 고령토, 납석, 형석,
마른 멸치, 건어 등 5개 품목은 수출 결손액을 보상해주는등 수출을 장려하였는데.... 주요 수출
품목은 중석등 광산물 외에는 쌀, 생사(生絲 누에고치 실), 김, 한천(寒天 우뭇가사리), 돈모
(豚毛 돼지털), 면직물에 다람쥐 등의 1차 생산품이 70 ~ 80% 를 차지했으며 공산품은 없었습니다.
1963년 박정희 정부에서 공업화를 시작하니 합판, 가발, 신발, 섬유 등 1차 경공업 제품의 수출 비중이
2공화국때 20% 선에서 우리 수출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농수산물을 밀어내고 무려 80% 선으로
늘어났고, 그중 섬유 제품은 전체 수출의 40% 를 차지했으며 1964년에는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합니다.
청구권자금 도입 이후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기계, 선박, 철강등의 중화학
제품들이 수출의 40~50% 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섬유 제품은 1973년 단일품목으로 수출 10억 달러
를 달성했으며.... 1980년대에는 전기, 전자, 자동차, 조선, 기계류의 중화학공업 제품이 수출의 50~
60% 를 차지하게 되었고 1990년대에는 자동차, 반도체, 컴퓨터, 가전제품 등이 수출 주력 상품이 됩니다.
국민이 굶어죽지 않고 또 졸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공업화를 시급히 해야만
했으니..... 이승만 정부는 1958~1959년 1년 8개월 동안 경제개발 3개년 계획(1960~
1962)을 구상하여 자립경제의 노선 추구, 차관 도입, 대일 국교정상화를 통한 한일
경제협력등 경제 계획안을 작성했으나... 4.19 혁명으로 인해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은 이승만 정부의 경제 개발 3개년 계획을 토대로 공업화라는 목표 아래 경제
학자, 민간 기업인, 미국측 경제학자들이 참여하여 경제개발계획을 만들었는데, 대미원조에 의존적
인 내수 위주의 공업화 계획이었지만 미국의 협조를 받지 못한 가운데 5.16으로 실행하지 못합니다.
박정희 정부는 1961년 5월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자마자 바로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했으니
기존 정부 계획안에 종합제철소 건설과 인프라 건설 계획이 추진되었으며, 개발에 필요한
외자의 동원을 기획했지만 수출 진흥은 미미한 수준이었고, 내자 조달을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그 과정에서 틀어진 미국이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협박까지 합니다.
박정희는 1961년 11월 경제개발에 대한 미국의 원조(차관)를 기대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데.... 외국 민항기와 미군 수송기를 빌려 타고 도쿄- 앵커리지- 시애틀-
시카고 등 네 곳에서 중간 기착한 뒤 사흘 만에 워싱턴 DC에 도착했는데, 박정희는 이케다
총리와 만나라는 미국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는데도 케네디 대통령에게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미국측에서 보기에 2억 5천만불을 빌려달라며 준비해 들고 간 사업계획서가 황당했으니 나중에 돈을
못받게 될 것을 걱정한 것인지 원조를 받는 나라에는 차관을 줄수 없다며 냉정하게 거절하는데
게다가 케네디 정부는 5·16 쿠데타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으니.... 미국이 돈을 빌려주면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이로 인해 아시아 전체로 쿠데타가 파급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종합제철소 계획은 후진국으로서 실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로 인해 곧바로 백지화 되기도
했는데, 1963년부터 시작된 경공업 공산품 수출진흥으로 수출제일주의를 통해 활로를
찾으니 1965년에는 7.8% 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목표치 5% 를 초과하였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3 $ 에서 1971년 126 $ 로 증가하였습니다 (2022년 현재는 35,000 $)
2차 계획(1967~1971)부터는 ‘산업구조 근대화’ 를 위해 중화학 인프라 투자가 시작되었으니
포항제철(포스코)의 건설이 추진되었는데, 미국은 경제적 실효성을 근거로 차관 제공을
불허하자 1961년 11월말 정래혁 상공부 장관등 ‘차관교섭 사절단’ 을 서독으로
보내기로 했지만 주독(駐獨) 대사관에도, 사절단에도 독일어를 할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서독(뉘른베르크 에를랑겐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고 귀국한 백영훈씨가 통역
으로 합류해 사절단은 서독에 도착했지만 관료들 중 누구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으니.... “당시 한국은 아프리카 최빈국 같은 나라였다.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 교섭 사절단이라고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누가 만나 주겠는가?”
백영훈씨는 궁리끝에 경제장관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와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가
사정했지만 은사는 냉정하게 거절했고, 결국 매일 아침 6시 교수 댁 앞으로 가서 사모님이 밖으로
나올때까지 기다리다 마주치면 눈물로 호소했다. 사모님, 저를 살려주세요. 장관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은사에게서 연락이 왔으니 “차관과의 약속을 잡았다” 는 것으로 1961년
12월 11일 한국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 베스트리크 차관과 만났고 이튿날에는 장관 까지
만날수 있었으니, 마침내 1억5000만 마르크(3000만 달러) 의 상업 차관을 빌리는데 성공
하니..... 사절단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는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최초의 상업차관 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으니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한다는데.... 한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해외 은행들을 수소문했지만 국가 신인도가 전혀 없었던지라 전 세계에서 한국에 지급
보증을 해 주겠다는 나라가 단 한 나라도 없었으니, 이제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협상이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라..... 백영훈 교수는 매일 울면서 독일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돈 빌리려 왔는데 지급보증 서주는데가 없어 돈을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이번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나는 독일에서 그냥 죽어버릴 것’ 이라 말하고 다니던 어느날, 같이 공부했던 슈미트가
찾아왔으니.... 그는 서독 정부에서 노동부 과장이었는데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대개 다 파내 지하 1,000m 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간호조무사도 2,000명 가량 필요하다. 시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하는데 독일인은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백영훈이 즉시 신응균 주독 대사를 찾으니 “5,000명이 아니라 5만명도 가능한 것 아니냐” 고 말하는
데, 달러와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으니 신 대사는 본국에 긴급 전문을
넣었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공고가 나는데 서독 광부의 한 달 임금은 국내 임금의 7∼8배에
달했으며 한국의 실업률은 40% 에 육박했는데 이때 이야기가 “영화 국제시장” 에 잘 나옵니다.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으며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않던 시절로,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상당수가 대졸자로 7,932명이고 간호사는 1만 226명인데 3년 후인 1964년 말에,
백 원장은 다시 한번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긴급 호출을 받으니 한번만 더 도와달라는....
통역으로 서독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날 청와대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으니 서독으로 갈 비행기가 없다는 것이라..... “5만 달러를 주고 20일 동안 미국의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에서 비행기를 빌렸는데, 미 의회가 쿠데타로 집권한 한국 군인이 미국
비행기를 이용하면 다른나라를 자극한다고 갑자기 취소해 버리고만거였다. 독일 방문 열흘 전이었다.”
백영훈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됐고 당장 서독으로 날아가 비행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
하라는 것이었으니 궁리 끝에 일제강점기때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제3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내고
물러난 최두선 전 동아일보 사장과 함께 서독으로 날아갔으니,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訪獨)
일정을 상의하겠다며 뤼브케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노동부 차관을 만나 “비행기가 없다. 서독이
잘사는 나라이니 비행기 좀 제공해 주면 안 되겠느냐?”...... 다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독일 관료들이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안 되는
줄 알았다. 떠나기 사흘 전까지 연락이 없었으니까. 떠나기 직전 비행기를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1964년 12월 3일 도쿄에서 홍콩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가는 루프트
한자 여객기가 ‘경로를 변경’ 해 서울에 착륙했다. 박 대통령이 그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갔다.”
일반인들이 타는 상용 노선에 취항 중이던 비행기에 급히 타게 된 것이니, 박 대통령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쾰른 공항까지 28시간이나 걸려 독일 땅을 밟을수 있었는데,
화장실에 가니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거울 앞에 있었으니 무슨 용도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는데......
한국일보 정광모 여기자가 ‘물비누’ 라고 설명해줘 실소를 금치 못했으니 기자들도 국제 촌놈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서독에 국빈자격으로 초청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연일 서독 신문과 방송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한국 광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지하 갱도 1,000m 에서도 시간외 근무를 마다않고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이 TV 에 방영되자 서독인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다. 마침내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한국
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을 초청해 우리의 마음을 전하자’ 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에르하르트 총리가 열어 준 만찬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우리 국민의 절반이 굶어 죽고 있다’ 고 울먹
이며 말했으니.....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 달라. 우리 국민 전부
가 실업자다. 라인 강의 기적을 우리도 만들겠다’ 라고 말했으니 당시 대통령도 통역도 같이 울었습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 을 깔았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 국민차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 실제 박 대통령 귀국 이후 서독은 다섯명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보내줍니다.
이날 그는 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도 손을 잡아라” 는 파격적인 조언도 했으니 “독일은
프랑스와 무려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박대통령이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표정으로 “우리는 일본과 싸운일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
고 말하자, 에르하르트 총리는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 고 답했는데.....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은 결국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결실을 보게 되었고 회담 후에는
담보가 필요 없는 2억5000만 마르크(5천만불) 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으며 그후 현지에서 광부 및 간호사와 만나 “눈물의 애국가” 를 부르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서독에서 참으로 어렵게 빌린 저 5천만불은 경제 개발 자금으로는 턱도 없으니.... 서독
에서 조언을 받은대로 이제 한국에 몇억불씩 돈과 기술을 줄 나라는 원수놈인 일본 밖에
없다는게 분명해졌으니, 박정희는 일본에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과 기술 제공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 전인 제1차 한일회담(1952년2~4월) 당시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항(대일청구요강)'
을 제시했고, 제5항에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 내용이 포함
됐는데 회담이 결렬된후 5.16 직후에 다시 배의환과 정일영이 일본을 방문해 회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1961년 11월 12일 회담에서 이케다 총리는 예상대로 현금이 아닌 산업 건설을 해주겠다는 이야기
를 꺼냈고 그 명목도 배상이 아닌 경제 협력이라는 점을 강조하자, 박 의장은 "우리는 구걸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받는 것" 이라고 반박했으며, 청구권 문제에 대해 "충분한
법적 근거가 있는 청구권" 이라면서 “일본이 5천만달러를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다" 고 지적합니다.
1961년 11월 박정희 의장은 독도 영유권과 국토 관리를 위하여 “독도를 정확히 측량하여 토지대장에 등록
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 고 특별 지시하였으며 일본과 여러차례 밀고 당기는 험난한 교섭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한일 기본조약은 한국 외무부장관 이동원(李東元) 과 특명전권대사 김동조(金東祚) 그리고 일본국
외무대신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와 다카스기 신이치(高杉晋一)가 1965년 6월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때 대일청구권 협정도 같이 체결되어 12월 국회 비준을 받았는데 무상 3억불과 장기저리 차관
2억불을 받기로 했으며, 그후 일본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민간은행 차관 1억불을 합쳐 6억불
이 10년 동안에 걸쳐 현금 및 물자로 도입되는데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는 15억불 정도 였습니다.
한국정부는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 자금 중에 일부는 일본 화폐 및 채권 소지자와 징용자 등에게 보상
하기 위해 1971년 1월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국민들로 부터 대일청구권
신고를 접수 받았으며, 1974년에 대일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1977년 6월말 까지
총 83,519건에 대하여 합계 91억 8,769만 3,000원의 보상금 (무상 제공된 3억달러의 9.7% 에
해당) 을 지급하였고, 2007년 노무현 정부에서도 징용자 78,000여명에게 6,500억원을 지급합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1970년대에는 청구권 자금(무상 3억불) 중에 징용자 몫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 나눠주면 공업화를 할 수가 없으니 우선에 포항제철등 공장건설에 돈을 먼저
쓴 후에 5년이 지나서 신고를 받아 83,519건을 보상한 것이며, 2007년 노무현 정부는 협정
내용을 이전 정부와는 다르게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해석했으니, 협정후 47년
이 지난 2012년 대법원이 처음으로 일본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2018년 확정하게 됩니다.
노무현 정부는 당시 박정희 정부가 협정을 맺으면서 일본이 강제동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그 불법성을 주장하는 대신에 피해자들이 고통받은 사실에 정치적
차원에서 피해보상을 요구해 무상자금 산정에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무상자금에 강제동원 피해보상금이 반영된 것이 정치적 요구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보상을 요구하건 신의칙상 곤란하다고 판단해 78,000명에게 돈을 지급
하면서 " 피해자 개인들이 '강제동원은 일제의 불법적인 한반도 지배 과정에서 발생한 정신적·
물질적 총체적 피해' 라는 법적 논거로 일본에 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라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일본 대법원은 해당 협정 합의의사록에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되는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에 대한 문제에는 '한국의 대일청구요강' 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동 요강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게 됨
을 확인했다" 고 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일본 기업의 보상(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합니다.
한국은 8개항을 요구했는데 제5항에 피징용 한국인 미수금과 전쟁에 의한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구체화 했으니 징용자 수는 노무자 667,684명, 군인 및 군속 365,000명 총 1,032,684명
이라고 산정했는데, 개인청구권에 대해서는 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우리(한국)는
나라로서 청구하며 개인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조치하겠다” 라고 언급했으니.... 따라서
개인 청구권은 1965년 한일 기본조약에 의해 마무리 되었다고 일본이 주장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으로 알고 있지만 공식 명칭에는 경제협력에 방점을 두고 있는데,
일본의 배상 근거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조약 14조에 연합국에 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물질적인 손해와 정신적인 손해 배상을 지불할 것을 명시했는데..... 이후 6.25 전쟁과
미·소 냉전 구도 하에서 자유 진영 국가 대부분은 일본에 대한 배상 요구를 포기했고
배상금을 받은 나라는 49개 조인국 중에 필리핀, 월남, 버마, 인도네시아 등 4개국에 불과합니다.
한국은 일본과 전쟁 당사국이 아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회담에 참가하지도 못했으며 따라서 배상금
을 요구하기가 어려웠는데....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후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로 넘어가 소멸됐으며 1931년 만주사변후 중국인 군대와 연합한 독립군은 12년만인
1932년 조선혁명군 양세봉의 1개 대대가 영릉가 전투를 벌인후 1933년 9월 1일 동녕현 전투에서
전멸해 소멸해 버렸으니..... 이후 12년간 일본군과 중대 규모 전투를 벌인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해 발발한 태평양전쟁에서 한국인들이 미국편에 서거나 중립을
취했다고들 아는데.... 위 자료를 보듯 일본군에 입대해 미국, 중국, 영국군과 싸운 한국인들이
일본군 현역 10만 이상을 포함해 36만이 넘으며, 징용으로 석탄을 캐거나 공장에서 무기를
만들고 미국 군함을 공격한 일본군 전투기들이 이륙한 비행장 활주로를 건설하는등에 한국인
들이 67만명에 이르는등 100만명 이상이 일본 편에 참가했으니.... "연합국에 들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청구권 자금을 식민지배 배상금이라고 할수도 없었으니.... 만약 식민 지배
배상금이라고 한다면 일본 보다 훨씬 많은 식민지를 가졌던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델란드,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등도 자기들 식민지 나라에
배상금을 주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런 난처한 외교적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대법원은 청구권 자금 중에 징용공 보상이 들어있다면서 한국 대법원과는 정반대의 판결을 했으니
이제 이런 마찰(협정문 해석의 차이) 에 대해서는 당시 협정문에 정해진 대로 제3국을 포함시켜
조정을 하고..... 그래도 안되면 네델란드 헤이그 상설 중재재판소(PCA) 로 가서 판결을 받으면
되는데, 우리 정부는 혹시라도 패소가 걱정되는지 중재재판소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 모양 입니다.
2021년 6월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는 강제징용 피해자 85명이 일본제철· 닛산화학· 미쓰비시
중공업등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각하했는데.... 2018년 10월 선고된 대법원 전원
합의체 판결과 정면 배치되니, 그 때 소수의견인 “청구권 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제한
되는 것으로 봐야 하므로 일본 기업이 아닌 대한민국이 피해자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 는 논리와
같았으며,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결과가 뒤집히면 문명국으로서 위신이 추락한다고 판결문에 적었습니다.
저 협상은 공식 창구 외에 김종필과 오히라 마사요시가 비밀 협상을 하니 1962년 10월 21일 1차 협상
에서 김종필의 6억불 요구에 오히라는 3억불을 주장해 결렬되었으며, 11월 12일 2차 협상에서 무상
3억불, 장기저리차관 2억불, 일본수출입 은행 정부보증 1억불등 6억불로 타결하고 메모를 작성합니다.
어업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관어업수역 12해리 밖에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하기로 합의하였으며
독도 영유권은 한일간에 도저히 타결될수가 없으니 폭파하자는 얘기도 있었다고 하는데......
다르게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게 주느니 독도를 폭파시켜 버리겠다" 고 말했다고도 합니다.
포항제철의 건설은 와세다대학 출신인 박태준의 모교 은사의 제자등 인맥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한일
회담도 일본 육사 출신 박정희의 인맥이 도왔으니, 2013년 미국을 방문중이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워싱턴시 전략국제문제 연구소(CSIS)에서 '일본이 돌아왔다 (Japan is Back)' 라는
특별강연을 한후 기자 질문에서 자신의 조부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아베 신조 총리가 말한 조부는 평화주의자이자이자 반전주의자로 1942년 도조 히데키에게 맞서 대정익찬회
의 공천을 거부하고 무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재선된 아베 간 중의원 의원을 말하는게 아니고.... 군국
주의자로 만주에서 근무했던 일본 총리로 조슈번 요시다 쇼인의 정한론을 계승한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를 말하는데.... 아베 총리의 친아버지 아베 신타로 의원도 친아버지를 계승한 자유주의자로 친한파 입니다.
1961년 6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일본 수상 이케다를 만나 한국과 수교를 권유했고 7월 전 수상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에게 국교정상화 여부를 타진하면서 초청하자 박정희는 미국 방문 전에 일본을
먼저 방문하니, 일본 정치인들은 “충성 혈서(一死以テ御奉公)” 를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일본육사에 편입했던 박정희를 주시했는데, 만주 신경 군관학교 나구모 중장에게 고개숙여 인사
했으며 기시 노부스케에게는 혁명을 했을때 메이지유신의 일본 지사들을 떠올렸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외 독도 밀약이란게 있으니 정일권-고노의 '미해결의 해결' 이라는 대원칙 아래 1965년 1월 11일 서울시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 우노 소스케 자유민주당 의원이 한일정상
회담 과정에서 한일기본조약 체결과정중 큰 문제였던 독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합의해서 맺은 밀약입니다.
월간중앙과 월간조선등 언론보도와 KBS 특종으로 실존이 확인되었는데 1980년대 신군부의 등장 이후 대한
민국에서는 밀약 문서를 없애 버렸으나, 미 중앙정보국 보고서와 일본 외무성의 독도밀약 내부문건이 드러
나면서 그 실체가 밝혀지게 되는데 주도한 인물은 김종필의 형인 한일은행 전무인 김종락으로 알려졌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독도밀약을 통해 일본으로 부터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인정과
함께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다고 평가했으며, 고노 이치로 등 당시 독도밀약 과정에
참여한 일본 정치인들은 독도밀약을 맺었다고 증언하였으나 현재 일본 정부는 부인하고 있습니다.
1) 독도는 앞으로 한일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2)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 수역으로 한다.
3) 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4)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간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초로 보도된 것은 1991년 고 김학순 할머니의 육성 녹음파일을 첨부해
발표한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이니... 1965년 당시는 그 존재가 공식적
으로 알려진 상황이 아니라 회담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는데, 우에무라 다카시는 일본에서
매국노로 지탄받아 대학 교수 임용이 막히는등 그와 가족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1945년 해방후 46년만인 1991년에 일본인이 종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밝힌 것인데 한국에도 정부,
대학, 지식인, 언론인, 시민단체가 수없이 많은데도 왜 일본인 기자가 밝힐 때 까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을까요? 비슷한게 하나 더 있으니 “KBS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인데,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 총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했던 프로그램으로 세계 최장기간 연속 생방송 기록 입니다.
KBS 인력(아나운서, PD, 조연출, 음향, 조명 스태프 등)과 전화를 받는 대학생 아르바이트까지
합하면 동원된 인력만 1천명에 육박하며.... 방송기간 동안 이산가족 5만여명이 여의도를
찾았고 접수 100,952건 중에 53,536건이 방송되었고 10,189 가족이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KBS TV는 1961년부터 방송을 시작했으니 22년만에 이산가족 첫 방송을 한건데... 문제는 저
프로그램이 처음에는 6.25 전쟁 33주년(휴전 30주년) 특별기획 2부작 '지금도 이런 아픔이'
라는 특집방송 중 제2부에 해당되는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라는 코너로, 1시간
30분 정도 진행한후 마감뉴스를 내보내고 0시 30분경 그날의 방송을 종료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회, 1시간 30분짜리로 기획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응이 폭발적이다 보니 가장 놀란게 KBS
사람들이었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황급히 이어가다 보니 여자 아나운서가 5~6시간동안 오줌을 누지
못해 옷에 지리는 등.... 종군위안부 문제와 이산가족찾기가 제대로 기획되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가 타인
의 아픔에 공감하는,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선제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부족한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과거사 부분에 있어 한일기본조약은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이고, 중일공동성명은 “일본은 일본국이 과거 전쟁
으로 인해 중국인민에게 입힌 중대한 손해와 책임을 통감하며 심각한 반성을 표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일기본조약은 일제의 침략에 대한 합·불법성 여부를 명시하지 않고 이미 무효라는 모호한 표현
에 그쳤는데.... 한국은 (당초 부터) 이미 무효라고 해석하여 일제 강점기가 불법이라고 보는
반면에 일본은 (이제는) 이미 무효라고 해석하여 일한 합방기가 합법이라고 보는데, 아마도
합의에 도달할 수가 없는지라 결렬을 피하기 위해 서로 편하게 해석하기로 동의 했는지도.....
포기한 청구권의 범위는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은 “양 체약국은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
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3은 “일방체약국 및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반면 중일공동성명에서 중국은 제5조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중일 양국 국민의 우호를 위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 배상 요구를 포기할 것을 선포한다.” 라고 해서 일본에 대한 ‘배상을 통 크게 포기’
했는데.... 중국은 자기들이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라며 돈 보다는 “자존심” 을 더 중시한 것 같습니다.
1964년에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상등 내용들이 알려지자 야당과 대학가는 민족의 수치이며 국민
자존심을 팔아먹었다며 크게 반발하였으니, 전국 각지에서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와
격렬한 시위를 벌였는데.....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64년 6월 3일의 시위, 이른바 6.3 항쟁 입니다.
1964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며 일어난 6.3 항쟁의 뒤를 이어 1965년에 한일협정
조인 비준 반대투쟁이 일어나는데... 3월 26일 동국대의 시위를 시발로, 4월 2일에는 대성
고등학교등 대학과 고교에서 성토대회와 시위가 잇달았고 4월 16일 동국대 학생 김중배
(20) 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대학가의 시위는 더 격렬해 집니다.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전국 34개 대학, 119개 고등학교에 4월 24일까지 휴교조치를 내렸지만
시위는 확산되었고... 5월 서울대 법대 학생들은 미국에 한일회담에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
했으며, 6월 이화여대 학생들은「워싱턴 데일리뉴스」에 한일회담을 간섭하는 미국을 규탄하는
서한을 보냈고 고려대 시위에서는 ‘양키여 침묵하라(Yankee Keep Silent)’ 는 구호가 등장합니다.
6월 서울대 법대생 200여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각 대학으로 파급되었으며
6월 22일, 전국에 갑호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서울대 법대생 185명이 단식으로 졸도했고 전국에서 성토대회와 시위가 벌어졌으니
7월 이화여대생들은 국회청원을 위한 가두서명에 나서 모두 3만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학생들의 끈질긴 한일회담 반대 투쟁과 박정희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7월초 개신교
목사 100여명이, 7월 중순 재경 대학교수단 354명이 회담 반대의 강력한 입장을
표명했으며, 기독교계와 불교 및 유교 등 종교계가 참가하고 윤보선등 야당
의원들은 야당의 해체를 주장했지만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안이 국회에서 통과됩니다.
8월 전국 대학 및 고교생 1만여명의 시위에 이어 서울지역 대학생 1만여명이 기말시험을 거부하고
성토대회를 가진뒤, 거리로 나와 경찰과 충돌하자 박정희는 군인을 투입하여 시위를 막았고, 8월
25일 500여명의 무장 군인들이 고려대에 난입해 학생들을 군화로 짓밟고 곡괭이 자루로 패면서
수십명을 연행하였으며 8월 26일 서울시에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주요 대학에 군인이 상주합니다.
이로써 1964년부터 1965년까지 7개월간의 한일협정 비준반대 투쟁은 실패로 막을 내렸고
군대에 의해 완전히 진압된 것이며.... 한일협정으로 한일관계는 정상화되었지만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협정에 대한 양국의 해석의 차이는 오늘날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청구권 문제, 독도분쟁 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상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정부도 고민이었으니 식민지에서 도망나온 일본인 히키아게샤들이 일본 정부에
옛 식민지에 버리고 온 개인 재산을 보상하라고 하니.... 무려 230만명에 이르는 개인재산을 일본 정부가
다 보상해 줄수는 없는지라 상대국 정부에 청구하는걸로 하고 한국에 청구권 자금을 주었는데, 저들
일본인들은 자기 재산(적산) 을 미군정이 몰수한지라 한국정부가 아닌 미국정부에 청구해야 할 판입니다?
히키아게샤(引揚者 / ひきあげしゃ)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까지 일본
의 식민지였던 한국, 만주, 대만 등에서 거주했다가 귀국한 일본인을 이르는 표현이니 한국에
70만을 비롯해 모두 230만에 달하는데.... 일본에서 자기 재산을 처분해 식민지에 가서 구입한
재산인데도, 개인 재산(한국에서는 적산이라고 함) 을 되찾을 길이 없게되니 결국 거지 신세가 됩니다.
청구권 자금은 6억불에다가 그후 민간차관 2억불이 추가되어 모두 8억불(현재 가치로 80억불?)이 들어오는데...
당시 한국은 농업국가로 공장이라고 해야 삼백산업이라 불리는 제분, 제당, 면방직 회사들과 같은
경공업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니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니 일본인 기술자들이 건너와 자국에서 한물 간 기술들을 전수해주고
제품을 만드는 원료와 원료를 가공하는 기계들을 수입하기 시작하고, 일본 기술자들이 전수해
준 것을 바탕으로 품질이 날로 향상되어서는 조립품을 미국이라는 광대한 시장에 내다 파는게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이니...... 1965년 경제성장률은 7.2% 였는데, 1966년 12%로 뛰어올랐습니다.
1965년 이래 30년이상 연평균 9.5% 가 넘는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국민소득 100$ 였던 나라가 국민소득
35,000$ 나라로 성장했으니.... 한 집에 라디오 한대 정도 가졌던 한국의 개인들은 자동차 한대씩을
보유하는 사회로 변모하여 반도체를 넘어 문화에서도 한류(韓流) 가 세상을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발표한 1962년 인구의 70% 가 거주하는 농촌에선 마을의 온 가정이 굶주리는
보릿고개가 일상적인 상황이었고.... 사정이 나은 도시에만 집계한 "공식실업률" 이 30% 였으니,
극빈층이 많아 세금이 안 걷히는지라..... 미국의 원조 농산물인 밀과 콩에 옥수수를 시장에 판
돈이 “국가예산의 절반” 이었습니다. 양놈들의 원조 물자가 대한민국 국가예산의 절반이라니......
농촌사회인 한국은 세금이래야 공장이나 기업이 없으니 대학교를 나와도 대부분이 실업자
이고.... 국세 세목 중에는 농지세가 가장 큰 품목이라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세금을
다 합쳐도 공무원과 경찰, 군인 월급줄 돈도 안되는 비참한 실정이라, 미국 원조에
목을 메는 실정이었으며 달러 지출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통제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일본 화폐와 국채등 보유자와 강제 징용자에 대해 한국은 1977년 6월말까지 83,519건에 91억 8,769만원
의 보상금을 지불했으니 저 청구권 자금 무상 3억불 중에 9.7% 에 해당하고 나머지는 공장건설과
원자재 수입등에 썼으니, 징용자 입장에서는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후 대기업들이 수출산업과 첨단사업
에 까지 진출하고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증가를 이루어 국민 모두에게 고도성장의 혜택이 돌아간 것입니다.
1975년 보상 대상에 생존자 등이 빠지면서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한다는 취지로 2007년 노무현 정부는 또
다시 특별법을 제정해 78,000여명에게 6,500억원을 정부 재정으로 보상했는데, 1965년 협정당시 일본
정부가 깅제징용의 불법을 부인하며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협정대상에 포함됐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으니 과거정부와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무상 3억불과 장기저리 차관 2억불등 5억불 사용처는 포항제철 건설에 1억 1,948만불이 쓰였고 소양감댐
건설 4,122만불, 농업용수 3,084만불, 수산청 어선 2,717만불, 중소기업 지원 2,223만불, 철도청 2,116
만불, 해양실습선 1,347만불, 해운진흥 817만불, 경부고속도로 건설 724만불, 기상예보 638만불, 체신부
시외전화 419만불, 한국전력 송배전 366만불, 대한준설 329만불, 농촌진흥청 320만불 등이 쓰였습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가 심했으니 차도 몇대 없는 나라에서 부자 한량들이나
놀러다니는데 이용할 것이라는 말이나, 이명박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야당 정치권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했습니다. 국가를 팔아먹는다, 업자를 위해
그 일을 하느냐, 나라를 망가뜨리려 하느냐....”하는 말들은 좀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동아일보는 1968년 1월 11일자에 유진오 신민당수 인터뷰를 실었으니“경부고속도로는 근대화의
기간인 도로건설이라 취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남북 간보다는 오히려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는 김대중도 1968년 2월 22일 국회에서 질의를 합니다.
“시급한 것은 동서를 뚫는 교통망이 필요하다, 일제시대에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남북종단에 철도와
도로를 치중하였기 때문에 그 유산으로 이와같은 교통 체제가 되는데, 가장 발달된 그 노선에 고속도로
를 건설하겠다니 철도·도로 시설이 거의 없는 강원도를 연결하는 동·서 고속도로 건설사업이 더 필요하다!”
경제기획원에서도 반대했고 세계은행(IBRD)의 결론 역시 그렇다는 김대중 의원의 질의에 주원 건설부 장관
답변은 “전국에서 교통량과 수송량 전체를 볼때 가장 폭주하고 있는 것을 완화하는 것이 긴급한 문제이며,
그래서 경부간 고속도로가 된 것이다. 지역을 개발하거나 도로의 선을 결정한다든가 문제에서 권력이나
정치적 압력은 있을 수 없다.” 주원은 경인산업벨트와 낙동강산업벨트를 연결하려고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실 사업의 우선순위야 훗날 입증되는 것이고 당시는 늘 문제가 되었으니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
된 1970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놓고 김학렬 경제부총리가 대통령 면전에서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라는 극언을 올렸고, 1970년 아시안게임은 재정부담을 이유로 반납해 방콕 아시안
게임이 되었으며 1988 서울 올림픽 유치때는 남덕우 국무총리가 올림픽 망국론을 부르짖는 판이었으니...
청구권 자금은 공장 건설 외에도 외환은행은 전체의 27% 에 해당하는 1억 3,280억불로 석유,
철광석, 석탄(갈탄), 고무, 나무등에 나프타등 원자재와 부품 등을 도입하는데 사용
했는데.... 그 중에 공업화에 가장 중요한 분야는 공업의 쌀이라는 "종합제철소" 건설 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인 박태준은 종합제철소인 포항제철(포스코)을 설립하기 위해 원래 농업분야
에 투입하기로 했던 자금중 1억불을 전용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가서 와세다대학 출신이니
옛 은사를 찾아 읍소해 그 제자들인 일본정관재계 인사들을 설득하는데 마침내 성공하는데...
물론 일본도 친환경적인 새로운 기게설비 도입을 위해 중고 설비를 판매했으니 이득이긴
한데, 포항제철(포스코)이 훗날 저리 크게 성장할줄 알았다면 절대로 협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청구권 자금중 1억불로 후지제철(신일본제철) 일본 기술자들이 일본의 공장시설을 뜯어와서는
포항에서 조립하고 한국인들을 제철 기술자로 훈련시키면서 공장건설을 완료하고 1973년
에 첫 쇠물까지 뽑도록 도와주는데.... 도중에 비용이 증가해 결국 1억 2천만불이 들어갔습니다.
일본에서는 지나친 보상이라며 일본 정계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자민당의
우츠노미야 도쿠마 의원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포항제철은 국내 수요만으로는 안되고
수출을 해야 하는데 세가지가 약점이니 먼저 한국은 후진국이고 두 번째 포항제철은
아직 철강 샌산과 수출을 하지 못한 신생기업이며 셋째는 품질이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수출이 되려면 “철강 제품의 가격을 싸게” 해야하는데 그러자면 먼저 포철 건설공기를 단축하고
또 원재료인 철광석을 싼 가격으로 장기구매를 해야 생산단가를 낮출수 있는지라.... 공장 건설 중에
박태준은 1971년에 호주로 날아가 원자재인 철광석 도입 계약을 맺으려고 했지만 일본업체가 이미
15년 독점계약을 맺은지라 광산 업체 리오틴토의 자회사인 해머슬리 사장이 만나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철광석은 채굴한 후에 부두에 쌓아놓고 판매하는게 아니라 5년내지 20년간 장기 구매계약을 체결하는
데 수요가 늘면 새로운 광산을 물색해 투자를 해야 하니 만약에 수입업체가 나중에 구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광산업체는 엄청난 손해를 입어야 하는지라, 후진국 신생기업은 만나주지도
않으니 매일 해머슬리 회사 사장 집에 찾아가 출퇴근시 한번 만나 달라고 “뻗치기” 를 해야 했습니다.
결국 1971년에 철광석 장기구매 계약이 성사되는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되면서 OPEC 의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리비아, 이라크, 이란, 시리아, 튀니지가 손잡고 석유를 감산
하는 동시에 원유 가격을 인상해 1차 오일쇼크가 닥치고 그 영향으로 철광석등 원자재 가격이 폭등
하자 이제는 돈이 있어도 살수가 없게 되었으니 그럼 저 구매협상은 포항제철과 한국을 살린 것입니다.
비슷한 일화는 현대조선이 있으니.... 1971년 정주영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강요로 울산 미포만
해변 사진과 축척 지도,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를 들고 차관을 얻기 위해
유럽을 돌았는데, 영국에서 바클리스 은행과 4,300만불 차관 도입을 협의했지만
은행이 거절하자 저 은행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선박 컨설턴트 회사 회장 롱바텀을 찾아갑니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영국 보다 무려
300년 앞서 철갑선(? 실제는 목선으로 장갑선)을 만들었다" 라며 우리는 할수 있으니
믿어달라고 설득하여 추천서를 받아냈지만.... 바클리스 은행에서는 "배를 구매
하겠다는 사람을 먼저 찾아와라, 배 주문서를 가져오면 차관을 주겠다." 라고 얘기합니다.
정주영은 롱바텀에게서 그리스의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가 값싼 배를 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를 찾아가서는 26만톤 짜리 선박 수주계약을 따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원금을 돌려준다는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리바노스도 그의 말을 듣고 워낙 싼 가격인 탓인지 아직 조선소를 짓지도 못한 동양인에게 도박을 건 것
인데.... 정주영은 그에 대해 "나보다도 더 미친 놈" 이라고 말했으니..... 그리고 한국 정부도 보증을
서줘서 바클리스 은행에서 차관을 빌렸고, 정주영은 "우리가 지금 조선소는 없지만 배를 계약해주면
그걸로 돈을 빌려 조선소를 지은뒤 배를 만들어 주겠다" 라는 말도 안되는 허풍(!)을 결국 실현하게 됩니다.
박태준은 국회의원등이 추천한 입사희망자 이력서를 뜯어보지도 않고 불사르고 건물의 상태가
불량하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재건설하며 밤새워 공사트럭들을 운행해 운전수들이
졸면서 운전하는등 무리에 무리수를 거듭해 예상보다 일찍 공장을 건설하였습니다.
철광석을 장기 도입해 생산단가를 낮춤으로써 수출에 까지 성공하기에 이르며 이후 경험이 축적
되면서 후임자들은 신기술 도입 및 개발로 일본과 경쟁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합니다.
포항제철이 건설되어 철강이 생산되니 값싸게 철강을 구입한 국내 기업들은 건설현장과 철강공업, 기계공업,
자동차, 가전제품, 조선소등에서 싼 제품을 생산해 수출에 나서는데.... 만약 당시에 포항제철이 건설되지
못했더라면 철강을 일본이나 미국에서 수입해야 하니 가격도 엄청 비싸고 또 수입하는 과정이 오래
걸리니 제품 단가가 비싸지는지라 우리나라의 저런 수출공업들은 탄생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봅니다.
박정희 정권은 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에 종합 제철소를 짓고 1966년 그 아래쪽인 울산에 석유화학
단지를 건설해 중화학공업을 일으키는데.... 원래 울산산업단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사업으로 1962년 2월 울산공업센터의 기공식을 가졌으며 이런 노력으로 1인당
국민소득은 1953년 67 달러에서 1982년에 1,991 달러를 거쳐 2022년 35,000 달러로 성장합니다.
지금은 우수 인재가 의대로 몰리지만 1960년대 초까지 대학입학시험 고득점자 상당수가 건설·토목학과에
진학했으니 경부고속도로와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기적같이 완수해 냈고.... 1960년대 중반부터 1970
년대 초까지는 화학과·화학공학과에 인재가 몰렸으니 울산에서 석유화학공업을 일으키는 주역이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물리학·전자공학과에 인재가 몰렸으니 이후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과거사를 매듭짓지 못하고 한일기본협정과 청구권 자금을 들여와 공업화를 시작한게 "굴욕적" 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 “대안이 무엇이냐?” 야당이나 지식인 대학생등에서 철천지 원수놈인
일본 대신에 다른 방법으로 돈과 기술을 들여올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는 말을 아직 까지도
들어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 공업화 하지 말고 원시적인 "농업 국가로 만족" 하자는 것인지...
그렇다면 1965년에 야당과 지식인에 대학생과 종교인들이 민족의 자존심을 팔아먹는 친일파라며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주장을 수용해서 저 회담을 중단했다면.... 이미 미국등은 여러차례 거부
했던지라 포항제철등을 건설할 자금과 기술을 확보할 다른 방안이 없었다고 보여지니, 한국은
전래의 농업국가에서 의류나 합판에 신발등 경공업 정도 하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은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혼란속에 국제사회로 나오지 못하고 몸살을 앓다가 1970년대
중후반에 미국과 수교하고 세계시장에 진출하였으니.... 만약 저때 포항제철 건설등 공업화를 시작해
자동차와 철강, 가전 및 조선에서 중국에 앞서 달아나지 못했더라면, 중국과 세계시장에서 경쟁
해야 하니, 수출 달성에 어려움은 가중되었을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경제 발전은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