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2. 독백
사랑하는 벗이여,
슬픈 빛 감추기란 매맞기보다도 어렵소이다.
온갖 설움을 꿀꺽꿀꺽 참아 넘기고
낮에는 히히 허허 실없는 체 하건만
쥐 죽은 듯한 깊은 밤은 사나이의 통곡장이외다.
사랑하는 벗이여,
분한 일 참기란 생목숨 끊기보다도 힘드오이다.
적덩이처럼 치밀어오르는 가슴의 불길을
분화구와 같이 하늘로 뿜어내지도 못하고
청춘의 염통을 알코올에나 젓 담그려는
이 놈의 등어리에 채찍이라도 얹어주소서
사랑하는 그대여,
조상에게 거저 받은 뼈와 살이어늘
남의 것이라고는 벌거벗은 알몸뿐이어늘
그것이 아까와 놈들 앞에 절하고 무릎을 꿇는
나는 「샤일록」보다도 더 인색한 놈이외다.
쌀 삶은 것 먹을 줄 아니 그 이름이 사람이외다.
3. 고독
진종일 앓아누워 다녀간 것들 손꼽아 보자니
창살을 걸어간 햇발과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
두 손길 펴서 가슴에 얹은 채 임종 때를 생각해 보다.
그림자하고 단 둘이서만 지내는 살림이어늘
천장이 울리도록 그의 이름은 왜 불렀는고
쥐라도 들었을세라 혼자서 얼굴 붉히네.
밤 깊어 첩첩히 닫힌 덧문 밖에 그 무엇이 뒤설레는고.
미닫이 열어젖히자 굴러드느니 낙엽 한 잎새
머리맡에 어루만져 재우나 바스락거리며 잠은 안 자네.
값 없는 눈물 흘리지 말자고 몇 번이나 맹세했던고
울음을 씹어서 웃음으로 삼키기도 한 버릇 되었으련만
밤중이면 이불 속에서 그 울음을 깨물어 죽이네.
4. 너에게 무엇을 주랴
너에게 무엇을 주랴
맥이 각각으로 끊어지고
마지막 숨을 가쁘게 들이모는
사랑하는 너에게 무엇을 주랴.
눈물도 소매를 쥐어짜도록 흘려보았다.
한숨도 땅이 꺼지도록 쉬어보았다.
그래도 네 숨소리는 더욱 가늘어만 가고
시방은 신음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물도, 한숨도 소용이 없다.
죽음이란 엄숙한 사실 앞에는
경 읽거나 무꾸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당장에 숨이 끊어지는 너를
손끝 맺고 들여다 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에게 딸린 생명이 하나요 둘도 아닌 것을...
오직 한 가지 길이 남았을 뿐이다.
손가락을 깨물어 따끈한 피를
그 입 속에 방울방울 떨어뜨리자!
우리는 반드시 소생할 것을 굳게 믿는다.
마지막으로 붉은 정성을 다하여
산 제물로 우리의 몸을 너에게 바칠 뿐이다!
5. 만가(輓歌)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메고 나간다.
만장(輓章)도 명정(銘旌)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떠메어 내오던 옥문(獄門)을 지나
철벅철벅 말 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같이 껌벅이는데
동지들은 옷을 벗어 관 위에 덮는다.
평생을 헛벗던 알몸이 추울상 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 준다.
동지들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도 애인도 따르는 이 없어도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 송장들은
관을 메고 철벅철벅 무학재를 넘는다.
6. 산에 오르라
젊은이여, 산에 오르라!
그대의 가슴은 우울(憂鬱)에 서리었노니
산 위에 올라 성대(聲帶)가 찢어지도록 소리 지르라.
봉우리와 멧부리가 그대 앞에 허리를 굽히면
어웅한 골짜기의 나무뿌린들 떨지 않으리.
젊은이여, 바다로 달리라!
청춘의 몸이 서리 맞은 풀잎처럼 시들려 하노니
그 몸을 솟쳐 풍덩실 창파(滄波)에 던지라.
남벽(藍碧)의 하늘과 물결 사이를 헤엄치는
자아(自我)가 얼마나 작고 또한 큰가를 느끼라.
젊은이여, 전원(田園)에 안기라!
그대는 이 땅의 흙냄새를 잊은지 오래 되나니
메마른 논바닥에 이마를 비비며 울어도 보라.
쇠쾡이 높이 들어 힘껏 지심(地心)을 두드리면
쿠웅하고 울릴지니 그 반향(反響)에 귀를 기울리라!
7. 동우(冬雨)
저 비가 줄기줄기 눈물일진대
세어보면 천만 줄기나 되엄즉허이,
단 한 줄기 내 눈물엔 베개만 젖지만
그 많은 눈물비엔 사태가 나지 않으랴.
남산인들 삼각산인들 허물어지지 않으랴.
야반에 기적소리!
고기에 주린 맹수의 으르렁대는 소리냐
우리네 젊은 사람의 울분을 뿜어내는 소리냐
저력 있는 그 소리에 주춧돌이 움직이니
구들장 밑에서 지진이나 터지지 않으려는가?
하늘과 땅이 맞붙어서 맺돌질이나 하기를
빌고 바라는 마음 몹시도 간절하건만
단 한길 솟지도 못하는 가엾은 이 몸이여
달리다 뛰면 바단들 못 건느리만
걸음발 타는 동안에 그 비가 너무나 차구나!
8. 거리의 봄
지난 겨울 눈밤에 얼어죽은 줄 알았던 늙은 거지가
쓰레기통 곁에 살아 앉았네.
허리를 펴며 먼 산을 바라다보는 저 눈초리!
우묵하게 들어간 그 눈동자 속에도
봄이 비취는구나, 봄빛이 떠도는구나.
원망스러워도 정든 고토에 찾아드는 봄을
한번이라도 저 눈으로 더 보고 싶어서
무쇠도 얼어붙는, 그 추운 겨울에 이빨을 악물고 살아 왔구나.
죽지만 않으면 팔다리 뻗어볼 시절이 올 것을
점쳐 아는 늙은 거지여, 그대는 이 땅의 선지자로다.
사랑하는 젊은 벗이여,
그대의 눈에 미지근한 눈물을 거두라!
그대의 가슴을 헤치고 헛된 탄식의 뿌리를 뽑아버리라!
저 늙은 거지도 기를 쓰고 살아왔거늘
그 봄도, 우리의 봄도, 눈앞에 오고야 말 것을
아아, 어찌하여 그대들은 믿지 않는가?
9. 어린이 날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내립니다.
여러분의 행렬에 먼지 일지 말라고
실비 내려 보슬보슬 길바닥을 축여줍니다.
비바람 속에서 자라난 이 땅의 자손들이라
일년의 한번 나들이에도 옷깃이 젖습니다그려.
여러분의 어머님께서 새 옷감을 매만지실 때
물을 뿜어 주름살 펴는 것을 보셨겠지요?
그것처럼 몇 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만 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비단같이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잎만 얼크러진 벌판에도 봄이 오면은
하늘로 뻗어오르는 파란 싹을 보셨겠지요?
당신네 팔다리에도 그 싹처럼 물이 올라서
지둥치듯 비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말라고 비가 옵니다.
높이 든 깃발이 그 비에 젖습니다.
10. 필경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에 갈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
거치른 산기슭에 한 이랑의 화전을 일려면
돌뿌리와 나무 등걸에 호미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었던고?
그러나 파랗고 빨간 잉크는 정맥과 동맥의 피
최후의 한 방울까지 종이 위에 그 피를 뿌릴 뿐이다.
비바람이 험궂다고 역사의 바퀴가 역전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날을 기약하는 우리의 정성이 굽힐 것인가
동지여, 우리는 퇴각을 모르는 전위의 투사다.
'박탈' '아사' '음독' '자살'의 경과보고가 우리의 밥벌이냐?
'아연활동' '검거' '송국' '판결언도'
'5년' '10년'의 스코어를 적는 것이 허구한 날의 직책이란 말이냐
창끝같이 철필촉을 배려 모든 암흑면을 파헤치자.
샅샅이 파헤쳐 온갖 죄악을 백주에 폭로하자!
스위치를 제쳤느냐, 윤전기가 돌아가느냐?
깊은 밤 맹수의 포효와 같은 굉음과 함께
한 시간에도 몇만 장이나 박아 돌리는 활자의 위력은,
민중의 맥박을 이어주는 우리의 혈압이다.
오오 붓을 잡은 자여 위대한 심장의 파수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