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좋은 제자”입니다. 옆에 분에게 인사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제자가 됩시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내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전혀 혈육관계가 아니지만 복음 안에서 낳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형제, 자매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강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힘 쌔고, 가진 것 많은 자가 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자가 진정 강한 자입니다. 언제나 은혜 가운데 굳게 선 이가 강한 자입니다. 은혜 가운데 ‘주 예수와 동행하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땅에 살아도 하늘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의 평화를 맛보고 하늘의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1장 9절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부터? 영원 전부터 누구를 통해? 예수님을 통해 계획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들은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한 복음입니다. 아들을 통해 전한 말씀이 복음이고 아들이 이 땅에서 행한 일이 복음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복음의 절정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은 것이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디 가면 새로 맛 집 생겼더라, 어디 가면 더 싸더라, 어디 가면 끝내주더라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바울은 복음을 누구에게 부탁하라고 합니까?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누가 충성된 자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것을 볼 때 복음을 듣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가르치는 자가 충성된 자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전하지 않는 자를 충성된 자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눈물이 많은 것을 보면, 정말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것을 보면, 감성이 풍부하다고 말합니다. 아픈 것을 보고도 본 척도 않고 듣고도 들은 척도 않으면 감정이 말랐다고 합니다. 냉랭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복음을 듣고 구원의 기쁨을 알고 또 다른 사람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자를 충성된 자라고 하지만 복음을 듣고도 전하지 않으면 충성된 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충성된 자입니까? 예레미야처럼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는 자입니까? 바울은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적군이 오는 것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으면 파수꾼에게 그 책임을 물으리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충성된 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는데, 본문에서 제자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충성된 사람들이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좋은 제자가 되려면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충성된 자가 되려면 복음을 듣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자입니다. 그가 좋은 제자입니다. 할렐루야! 본문에서 좋은 제자에 대하여 세 종류의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좋은 병사, 운동선수, 그리고 농부입니다.
1.먼저 좋은 제자는 좋은 병사라고 합니다. 누구의 병사입니까? 3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군사로 모집된 자입니다. 총칼을 든 군인이 아니라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우리 영혼을 삼키려는 마귀와 영적 싸움을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주님의 군사입니다. 밤낮 쉬지 않고 우리 믿음을 떨어지게 하고 넘어지게 하여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엡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했습니다.
병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군인은 모집한 자를 위해 존재합니다. 군인은 국가의 부름에 따른 것입니다. 군인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토를 지키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안위와 자기 생활이 우선될 수 없습니다. 군인은 국가를 위해 있습니다. 국가가 필요할 때 자기 생활을 핑계할 수 없습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라는 것은, 자기 일은 전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일이 우선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즉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군인은 자기를 모집한 국가를 위해 세움을 받는 자입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하듯 우리도 우리를 불러 세우신 우리의 왕 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조차 주님을 위해 했습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합니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를 군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충성의 상징이 바로 군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부르신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계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2.주님의 제자는 또한 좋은 선수라고 했습니다. 5절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운동선수는 규칙을 엄수해야 합니다. 어떤 종목이든 경기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법과 규칙을 모르고서는 선수라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메튜 에몬스라는 미국의 소총 사격선수는 50미터 3자세에서 마지막 한발을 옆 선수 표적에 쏜 결과로 꼴찌로 밀려난 일이 있습니다. 달리기 선수가 코너를 돌 때 옆 라인을 밟아 실격 처리된 일이 자주 있습니다. 이번에 아시아게임에서 김한솔 체조선수가 마루에서 기술을 성공시키고 착취도 잘 해서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했는데 금메달을 못 땄습니다. 심판에게 인사를 안 해서 감점을 받아 그만 은메달에 그쳤습니다. 체조에서는 심판에게 인사하는 게 규칙입니다. 점수에 포함됩니다. 축구에서 골 넣었다고 옷 벗으면 안 됩니다. 경고 받습니다. 선수는 법과 규칙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규칙을 어기면 반칙이 되고 경고가 되고 퇴장이 됩니다. 실격처리 됩니다. 격투기 종목이나 조정, 역도 등은 정해진 몸무게보다 많이 나가면 경기하기도 전에 실격됩니다. 경기 후에도 약물검사에 걸리면 메달을 박탈합니다. 그래서 철저히 자기 관리를 합니다. 운동선수는 경기에 나서기 전에 이기기 위해서 항상 자기를 점검하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생명처럼 여기고 지켜야 하는 법과 규칙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겨 지켜야 합니다. 구원 받았다고 자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지켜야 하고 사랑의 계명은 지켜 행해야 합니다. 자녀의 권리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의무이고 기쁨으로 행할 의무입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 계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녀양육도 의무가 되어 얽매이는 짐이 되지만 사랑하면 그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신앙생활이 그러합니다. 주일성수가 의무로 느껴진다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9장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했습니다.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도 이처럼 절제하거늘 하물며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을 얻고자 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향방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목표를 정하고 달음질하라고 했습니다. 가는 방향이 잘못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표가 잘못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확한 표적을 보고 활을 쏴야 하듯 인생의 목표도 정확히 조준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까? 많이 벌어서 실컷 써 보고 죽는 것입니까?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고 잘 먹고 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만족이 아니라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목표를 두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을 얻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은 실격자임을 고백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이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으며 복음에 핍박자요 대적자라고 합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실격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그를 용서하시고 불러주셨는데 이후의 삶은 실격자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다른 사람이 수고한 것에 숟가락 하나 얻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의 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자격은 실격자였는지 몰라도 그의 삶은 실격이 아니라 합격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합격이었습니다. 딤후4:7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자격 있어 주님이 부르신 자가 있습니까? 자격 없는, 실격자 같은 우리를 주님은 불러주셨으니 이제 이후의 우리 삶도 실격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반드시 상 받는 자가 되길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좋은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3.마지막으로 좋은 제자는 좋은 농부라고 합니다. 6절에서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농부를 보고 배워야합니다. 농부는 수고한 대로 소출을 얻습니다. 갈6:7“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열매를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을 알려 줍니다. 수고한 만큼 보상 받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농부는 부지런하고 성실함의 상징입니다. 게을러서는 절대로 농부가 될 수 없습니다. 농부는 해뜨기 전에 밭에 나가고 해질 때 돌아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잡초가 나고, 벌레가 생기고 병이 듭니다. 새가 와서 쪼아 먹습니다. 농부는 추울 때도, 더울 때도 곡식에 눈을 떼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한시도 한 눈 팔아서는 아니 됩니다.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죄가 스며들고, 교만해 지고, 자만해 집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고 잡초를 제거해 주는 일을 쉴 수 없는 게 농부이듯 마음 밭을 기경하고 말씀을 듣고 자라 열매를 맺게 해야 합니다. 밭을 망치는 것은 간단합니다. 잡초는 씨를 뿌리지 않아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절로 자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도 가만히 있으면 온갖 세상 것이 들어와서 자라게 됩니다.
우리도 부지런히 복음의 씨를 뿌리고 잘 자라도록 살펴야 하고 내 믿음도 빼앗기지 않도록 기도와 예배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농부처럼 열심을 내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도 이 땅에 계실 때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좋은 농부이셨습니다.
누가 좋은 제자입니까? 자기 일에 얽매이지 않는 병사가 좋은 제자입니다. 법대로 경기하는 선수가 좋은 제자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좋은 제자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보실 때 좋은 제자, 충성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이와 같은 삶이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