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장,
허용수는 진경과의 약속장소를 나가면서 가슴이 울렁거린다.
무엇이라고 사죄를 해야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삼촌으로서 그 역할을 해 내지 못하고 오히려 어린조카에게 너무나 가혹한 상처만을 주었다는 생각에 자꾸만 몸이 움츠려든다.
진경은 시간이 되기 전에 차를 보낸 것이다.
나이가 드신 작은아버지가 찾아 오시기에는 조금 먼 곳이었다.
이십 여 년을 건너뛴 세월이었다.
항상 잊지는 않고 있었지만 작은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이 바로 중학교 졸업하기 전 그 집에서 나오기 전이었다.
그 세월동안 어떻게 변하셨는지 얼마나 늙으셨는지 궁금한 것이다.
팔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감생활을 하시면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이 좁았는지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진경은 작은아버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먼저 약속장소로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혼자서 제대로 끼니를 드시지 못하시는 것을 생각해서 조금 값이 비싸기는 했지만 음식이 맛있는 한정식 집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리 오래지 않아 허용수가 도착을 한다.
종업원의 안내로 룸으로 들어서는 허용수는 그저 죄인의 모습이었다.
“작은아버지!”
진경은 일어나 허용수의 손을 잡고 자리로 모신다.
“진경아!
차마 너를 볼 면목이 없다.
죽은 뒤에 내 형님과 형수님께 무슨 말로 사죄를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작은아버지!
이제는 모두 지난 일들입니다.
그동안 제가 속이 좁아서 진즉에 찾아뵙지를 못했습니다.“
“아니야!
진경아!
이 못난 작은애비와 애미를 용서하지 마라!
우리는 네게 용서를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다.“
허용수는 진경 앞에 무릎을 꿇는다.
진경은 기겁을 하면서 허용수를 일으켜 세운다.
“작은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식 앞에 무릎을 꿇다니요?
당치 않으신 일입니다.“
“아니다!
네게 너무나 큰 고통과 상처를 준 내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지 못하겠니?
못난 작은애비를 그래도 잊지 않고 이렇게 불러주니 고맙다.“
”작은아버지!
제가 찾아가려다 요즘 식사도 부실하신 것 같아 일부러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제 손으로 따뜻한 식사라도 대접해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미 아시다시피 제가 살림하고는 멀게 살고 있기에 그러지 못하고 이곳으로 모신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미 음식이 들어온다.
진경이 주문한 음식이었다.
“제 술 한잔 받으세요.”
진경은 술병을 들고 허용수의 잔에 따른다.
“고맙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 때문에 과용을 하는 것 같구나!“
허용수는 진경이 따라주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진경은 안주를 집어 허용수 앞에 있는 접시에 놓아준다.
“그래도 네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어 집안을 빛내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작은아버지!
제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제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유산이 생각보다도 거액이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 잊고 있었던 것들이었습니다.“
“........................”
허용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모든 재산은 자신들 부부가 모두 날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던 허용수로서는 진경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제 어머니께서는 은행에 금고를 설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 목에 걸어져 있는 은 목걸이는 그 금고의 비밀 열쇠었습니다.“
“아!”
“그리고 어머니께서 늘 입버릇처럼 제게 숫자를 말해주었던 것이 기억에 떠오른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신, 그것이 바로 비밀번호였고요.“
“그랬구나!
형수님다운 세밀하고 철저한 보안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알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으로도 끔직한 일이다.“
“그 모든 것들이 대양그룹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고 제가 대 주주로서 사장직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제 시어른들께서는 저를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시고 제가 가지고 있던 만큼의 대우를 해 주시는 분들이십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냐?
그리고 너는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자금이 많다고 해도 그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면 지금의 네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경아!
작은애비는 너 보기가 심히 부끄러울 뿐이다.“
허용수는 진정으로 진경이를 대하기 부끄럽다는 마음이었다.
“작은아버지!
음식이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진경은 허용수에게 음식을 권한다.
허용수 역시 이런 음식을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에 없다.
아내가 입원을 하기 전에도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집안 살림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퇴근을 하고 들어와 자신이 밥을 해서 아내를 먹이곤 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먼 산만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던 아내였다.
허용수는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지 못하던 허용수는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아무런 말도 없이 음식만 먹는 것이다.
그런 허용수를 바라보는 진경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는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차가 들어온다.
“잘 먹었다.
네 덕분에 얼마 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것인지 모르겠구나!
네게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
”작은아버지!
일 하시기 힘드시죠?“
“힘들긴?
그나마도 일이 없음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일이라도 있으니 그래도 걱정을 덜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니에요.
이제 연세도 있으시고 하시니 그만 쉬시는 것이 어때요?
두 분의 생활비는 제가 대 드릴게요.“
“아니다!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말아라!
내가 무슨 염치로 네게 생활비를 받으며 편안하게 살아갈 생각을 하겠니?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라!“
허용수는 손사래를 치면서 완강하게 거절을 한다.
“작은아버지!
어차피 작은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병원에서는 제가 도우미를 불렀으니 상관없습니다만 언제까지 병원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야........그렇지.“
“그러니까 다른 사람보다 작은아버지가 작은어머니 곁에서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집안 살림은 작은어머니가 완쾌하실 때까지 도우미 아주머니를 보내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네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니?“
”작은아버지와 어머니는 제게는 핏줄이시고 부모님이십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고통을 몰라라 하는 것 또한 불효가 아니겠어요?“
“할 말이 없구나!”
“그리고 수일간 시간을 내서 작은어머니를 만나겠습니다.”
“진경아!
정말 그렇게 해 주겠니?“
“네!
이제는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잊고 가족끼리 미움도 원망도 모두 잊고 살아가야지요.“
“고맙구나!”
허용수는 진경이의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 이것은 그동안 한 번도 용돈을 드리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작지만 용돈으로 쓰세요.“
“아니다!
나도 용돈정도는 충분히 있단다.“
허용수는 진경이 주는 봉투를 한사코 받지 않으려 했으나 진경은 허용수의 손에 꼭 쥐어준다.
“시장하실 때까지 계시지 마시고 무엇이든지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면 사 드세요.
나이 드셔서 배를 곯으시면 건강을 해치십니다.“
허용수는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참으로 속이 깊고 정이 많은 아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성품이 돌아가신 형수님을 그대로 빼 박은 것이다.
진경은 허용수를 보내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만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핏줄이라고는 숙부네 가족뿐인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드리는 것만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다.
이젠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는 진경이다.
“엄마!
엄마가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지요?
진정한 사랑만이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이제 작은어머니 병세가 조금만 호전이 되면 만나 뵐 생각입니다.“
진경은 자신을 낳아준 생모를 떠올려본다.
이젠 어렴풋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엄마의 희미한 모습이다.
그 기억도 부모님의 사진을 확대를 해서 희미한 모습이나마 거의 매일 보고 있기에 차츰 되살아 난 기억들이었다.
진경은 작은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을 떠올려본다.
홍콩에서 팔년간의 수감생활 때문이었는지 나이보다도 더 늙어 보이는 것 같았던 것이다.
팔년간의 수감생활과 어느 누구 알뜰하게 보살펴드리는 가족이 없다.
자식들이라고 해도 모두들 자신들 살아가기에 바쁘다 보니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하고 작은어머니의 병으로 인해 더욱 초췌해 보이는 것이 가슴이 아파오는 것이다.
이제 육십의 중반에 들어선 작은아버지의 모습은 많이 늙어 보이고 지쳐 보이는 것이다.
진경은 그런 작은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작은어머니에 대한 모든 앙금들을 털어버리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심한 우울증을 앓고 계시는 작은어머니의 마음을 받아드리고 이해를 하자고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경은 회사일로 며칠을 정신없이 바쁘게 보낸다.
회사의 규모가 확대 되면서 진경의 일은 더 바빠지고 있었다.
이제 아파트공사를 다 끝내고 분양 또한 모두 마무리가 되어 정부에서 입찰하는 공사에 낙찰을 본 대양그룹은 더 활기를 띠고 모든 업무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정부에서 발주하는 대공사 공개입찰에 당당하게 낙찰을 본 것이다.
박회장으로서는 이 모든 것이 며느리의 힘이고 복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진경은 정신없이 보내던 중 작은아버지와의 약속이 생각난다.
수일 내로 찾아보겠다던 약속이었다.
벌써 열흘 이상이 지난 것이다.
진경은 저녁스케줄이 없는 오늘 병원에 들려 가리라 마음먹고 전화를 드린다.
허용수는 진경의 전화를 받고 기쁜 얼굴이 된다.
“여보!
진경이가 이따 저녁에 당신을 만나러 온다는 전화가 왔어!“
김서연은 남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갑자기 긴장이 된 표정이다.
“여보!
두려워하지 마!
이제 진경이는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나약하고 옹졸한 사람이 아냐!
혼자서 멋지고 당당하게 우뚝 선 진경이의 모습을 보면 당신도 좋아할 거야.“
김서연은 이제 많은 호전을 보이고 있었다.
예전보다 말수가 훨씬 줄어든 김서연은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차분한 초로의 여인의 모습이었다.
“진경이가 나를 용서해 줄까요?”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잊어줄 것이오.”
“내 욕심이.....당치도 않는 내 과욕이 진경이를 너무 힘들게 했고 너무 괴롭혔다는 생각을 하니 진경이를 만날 용기가 없어요.”
“이제는 그 무거웠던 마음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그렇게 부모로서 사랑을 베풀어 줍시다.”
허용수는 아내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그러나 김서연은 마음이 불안하다는 듯이 하루 종일 안절부절이다.
저녁때가 되자 병실을 노크하면서 가만히 문이 열리며 진경이 병실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글: 일향 이봉우
첫댓글 좋고! 좋다 말다지요... 세상 일이 이렇게 다 잘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요. 금년에는 이 소설의 순조로운 전개처럼 봉우님이 계획하시는 일도 술술 잘 풀리기 바랍니다.
그래 진경아!!!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 하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