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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跡 巡禮 (4)
史跡 10호 서울 성곽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史跡 56호 행주 산성
임진왜란(1592)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선조 26년(1593)에 왜병과의 전투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현재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남아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다.
史跡 57호 남한 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史跡 11호 송파 풍납리 토성
한강변에 남아있는 초기 백제시기의 토축 성곽으로,
주로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원래는 둘레가 4㎞에 달하는 큰 규모의 토성이었으나,
1925년 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려나가 현재는 약 2.7㎞ 가량 남아있다
史跡 101호 서울 송파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史跡 330호 효창공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 아들인 문효세자·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숙의 박씨의 자녀인 영온공주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시대에 문효세자의 묘를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기면서 효창원은 효창공원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김구·이동녕·차이석·이봉창·윤봉길·조성환·안중근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무덤를 모시게 되었으며,
매년 이 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무덤지역이 넓고
소나무숲이 울창하며, 무덤 주위로 산책로가 있다.
史跡 267호 서울 암사동 선사주거지
아차산성을 마주하는 한강변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B·C 4,000∼3,000년기에 걸친 유적이다.
20여 기의 집터와 딸린시설, 돌무지시설이 드러났다.
. 바닥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으며 돌도끼,
그물추, 불에 탄 도토리 등이 출토되었다.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유적이며,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중 최대의
마을단위 유적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당시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신석기인의 문화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史跡 162호 북한산 성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
史跡 193호 동구릉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史跡 194호 헌릉·인릉
헌릉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이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다
인릉은 23대 순조대왕(재위 1800∼1834)과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대신 정치를 돌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으며, 사회가 혼란해졌다
史跡 209호 남양주시 사릉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자식이 없었으므로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무덤을 만들었고,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史跡 297호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벽을 쌓고,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고,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도성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있는 곳이다
史跡 132호 강화 산성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 그리고 관아 시설은 1234년에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어,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 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史跡 133호 강화 고려궁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
史跡 136호 강화 참성단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강화도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단군과 연관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상고시대에 무시못할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史跡 225호 강화 초지진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왜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곳으로
1871년에 미국 해병이 초지진에 침략해 왔을 때
전력의 열세로 패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군기고, 화약창고 등의 군사시설물이 모두 파괴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뒤 허물어져 돈대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나
1973년 초지돈을 복원하였다
史跡 227호 강화 광성보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史跡 323호 파주 윤관장군묘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111)의 무덤이다.
그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史跡 358호 파주 소령원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이며 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무덤이다.
숙빈최씨는 최효원의 딸이며 숙종 44년(1718)에 49세로 죽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영조는 최씨의 무덤 근처에다 막을 짓고
무덤를 받들었으며, 친필 비(碑)와 비각을 4곳에 세웠다.
위패는 조선시대 역대왕이나 추존된 왕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중 육상궁에 모셨다.
史跡 299호 경기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 후 4월 5일에 발안 장날을 기하여 교회 청년들과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 행진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는데,
격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져 경찰부장을 죽이게 되었다.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다.
또 교회당 밖으로 시체를 끌어다 모아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1982년 제암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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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전도비를 보면 청나라 오랑캐 울화가 치민다. 비문을 쓴 한성판윤 오준은 죽어서도 눈에서 눈물이 흘렀으며 손목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삼전도비 하니 가슴이 메이네요.
백운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