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만이라는 무지막지한 저번 폭설 때의 일이다. 처음엔 달콤한 기분으로 쳐다 본 눈이었다. 한 뼘이 넘자 제법이다 싶었는데 두 뼘 차고 세 뼘 차니 그때서야 비로소 이게 아니다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 목줄을 조이는 것이 바로 저 무심한 눈인 것이다. 아차하는 마음으로 부랴부랴 눈 치울 차량수배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포크레인은 거의 동이나 있었다. 물론 차주이면서 기사도 겸하는 사람들도 개중에는 있겠지만 차주인 따로 운전기사 따로가 대개의 그쪽 실정이다. 아무튼 회사를 상대해선 무리이다 싶어 직접 상대한 기사들은 주인 모르게 부른다면 몰래 갈 수 있으나 거의 평상시 가격의 두 배 가까운 50만원을 불렀다. 그럼에도 아쉬운 처지라 그리 한다하여 겨우 한 대를 수배하였다. 일요일 비상소집을 하여 시설 관련한 용역 직 부터해서 소속직원까지 거의 다 나왔다.
포크레인은 큰 도로에 달라붙고 50여명은 삽을 들고 본관 앞을 치우기 시작하였다. 막상 한 시간이 지나 일의 성과를 보니 기대했던 포크레인이 한 일은 봉지에 든 설탕을 한 수픈 정도 겨우 옮긴 개미가 한 일의 양에 불과 했고 50여명의 삽질은 소인국 나라 사람이 챙긴 거인의 식사 밥 한 톨쯤 양에 해당되는 꼴이었다. 해도 해도 눈치우기는 끝이 안보였다. 당장 내일이면 수백 대의 차가 쏟아져 들어올 텐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불도저를 이곳저곳에 다시 알아보았지만 있을 리가 없다. 겨우 조그만 용량의 페이로더란 장비 두 대를 더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하지 않은 행운의 빛이 비추기 시작하였다. 포크레인은 주걱같이 생긴 기구를 이용해 한 주걱 퍼 올려 이동해서 옮기고 하는 방식으로 일을 전개하여 생각보다 일이 더뎠는데 조그맣기 때문에 별 기대를 안했던 페이로더가 제 몫을 톡톡히 하는 것이었다. 불도저 식으로 밀고 나가서 게의 집게발처럼 눈을 움켜쥐고 번쩍 들어올려 바로 내던져 버리니 일의 진척이 당연히 빨랐다. 크다고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고 적재적소에 쓰임이 다 틀리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그런데 묘하게 페이로더를 운전하는 기사들이 모두 가는 귀가 먹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의 작업 장소라는 곳이 대개 소음이 그득한 폐기물처리 운반 현장이라 소음에 청각을 버린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문득 내 근무처 기계실에 근무하는 용역직 생각이 났다. 별도의 사무실이 없는 그들이다. 전 시설에 공급되는 보일러와 냉방장치가 가동되는 기계실 안쪽에 각 건물을 돌고 돌아오면 잠시 머물 그들의 협소한 장소가 있기는 한데 보일러도 보일러지만 유독 소리가 큰 콤프레셔(압축공기 공급장치)로 말미암아 늘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서성이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난 눈 작업을 마치고 생각은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그들의 쉼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주변에 방치된 중고 콘테이너 하나를 구해 기계실 남쪽 처마 바로 옆에 설치를 하고 녹을 벗겨내고 페인트 칠을 하고 사무실에서 쓰다버린 하지만 여전히 깔끔한 독립형 냉난방기와 책상과 의자를 갖다 놓았다. 전기선이 들어오고 전화도 놓고 어제는 기념으로 중고 형 정수기를 하나 사주었다. 거울까지 매 달으니 그런대로 번듯한 사무실이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컴퓨터 두세대 들여다 놓는 것만 남았다. 특별히 자산관리 부서에 부탁해서 용량이 적다고 버리는 컴퓨터를 기증 받기로 예약이 되어 있다.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그들이지만 진심이 통하였는지 비교적 잘 화합하고 잘 지내는 그들과 나이다. 눈 치우는 일요일도 어찌 생각해보면 그들의 일이 아닌데 군소리 없이 차도 거의 안다니는 그 길을 그들은 달려 나왔다. 이심전심이 되니 솔직히 나 역시도 그전엔 입도 안 대었던 그들이 엄청스레 좋아하는 개고기도 먹고 정규 직원과 별 차별 없이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 하는 마음도 우선 갖게는 되는데 하지만 성냄은 여전하고 부족한 마음이 늘 현실이다.
생각해보면 그들을 위한다는 마음은 결국 나를 위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돈독한 정을 나누는 삶의 터전이 늘 평화로웠듯 우리의 일터도 늘 인간의 애로서 다져지고 어울려질 때 하나가 된다. 어쨌거나 지금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의 삶이다. 하지만 누리자는 그 문명으로 인하여 인간이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세상이다. 기계를 잘 다스려야 할 것이지만 어차피 다스리는 주체는 인간이다. 직업병을 예사로 볼 것이 아니다.
눈 작업이 끝나고 개를 세 마리 잡았다. 그들 중 개를 부업삼아 키우는 사람이 있으니 개 잡는 것 일도 아니다. 불교에 심취한 집식구한텐 미안한 소리지만 어쩔 수 없이 어울리기 위해 개고길 먹는 것이 아니라 이젠 맛이 있어서 그들과 개고길 즐긴다. 오랜만에 할 도리를 제대로 다했다는 뿌듯함에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마시는 생맥주가 달콤하다. 지난주는 이래저래 바쁜 나날이었지만 달겨드는 봄바람이 마냥 향기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