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수도
일곱 개의 이름을 가진 도시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넘어서 세계적인 대도시가 되면서 점차 '도시 중의 여왕(바실리사 톤 폴레온/Βασιλὶς τῶν πόλεων)', 이걸 넘어서 더 흔하게는 그냥 '도시(이 폴리/ η Πόλη)라고 불렀다.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마저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비하면 소읍이라고 할 정도로, 도시라는 이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의미로 널리 쓰였다. 마치 조선시대부터 한양이라는 자기만의 이름이 있었음에도 우리들은 그 도시를 죽 수도라는 의미의 '서울'로 불러온 것처럼. 그 뜻을 생각하면 나중에 나오는 터키어 명칭 '이스탄불'과도 상통하는 명칭이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시절에도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오스만 터키어로 음차한 콘스탄티니예(정확하게는 아랍어로 '콘스탄티누스의 것'이라는 뜻의 쿠스탄티니야(Qusṭanṭīniyya/قسطنطينية)를 음차했다.)라고 부르며 제국의 수도로서 크게 번영했다. 콘스탄티니예를 정복하고 오스만 술탄들은 카이세리 룸(Kayser-i-Rûm, 로마 황제라는 의미)를 자칭하며 종교적 관용, 각종 면세 혜택, 급여 보장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며 동로마 제국 말기 많이 인구가 빠져나가고 초라해진 도시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덕분에 오스만의 정복 이후 한 두세대 만에 ‘콘스탄티니예’는 동로마의 전성기 시절 같은 번영과 중요도를 다시 누리게 됐다. 당시 이 도시는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의 한복판에 위치한 중심지였다. 후계자들은 이 도시를 중심으로 각지로 대군을 보내 지배영역을 확장했고, 실패하기는 했지만 심지어 유럽 내륙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까지 원정했을 정도였다.
오스만의 정복 이후로도 제국의 공문서에서는 '콘스탄티니예’를 더 선호했다. 아랍어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리스어 "폴리스"를 빼고, "콘스탄티누스의 것"이라는 뜻의 "알 쿠스탄티니야" 라고 쓴 것을 다시 투르크 식으로 읽은 것이다. 이미 현지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명칭이 이스탄불보다 이게 더 발음상으로 매력이 커서 뿌리 깊게 박혔던 탓이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조차도 이슬람 제국이지만 이미 오스만 제국의 전신인 룸 술탄국 시절부터 로마와 동로마의 후계 국가를 자처한 바 있었다. 룸은 로마의 투르크 식 발음이다. 따라서 로마 제국과의 직접적인 연결성을 부여하는 이 명칭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국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가 독립하고 반작용으로 투르크 민족의식이 강해진 19세기 후반에는 그리스적인 느낌이 강한 콘스탄티노플과 확실히 차별화하기 위해 이스탄불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자 이런저런 명칭들을 완전히 폐지시키고 이스탄불이 완전히 공식화 되었다. 아예 공식 우편에서 이스탄불 외에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니예, 짜르그라드, 쿠스탄티니야 등의 이름으로 적힌 우편은 무조건 취급하지 않겠다고 강경한 엄포를 내리기에 이르렀다.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언어에서 이스탄불로 거의 통일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러시아보다 천년 앞서 제3의 로마라고 자처한 불가리아는 꿋꿋이 황제가 계시는 도시란 의미 그대로 짜르그라드라 부르고 있다. 중세 불가리아 제국이 잘 나갈 때는 자신들 수도인 벨리코 타르노보를 짜르그라드라 불렀는데 이후에는 그냥 이스탄불만 그렇게 부른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소피아-베오그라드를 연결하던 중세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발칸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로도 짜리그라드 도로 (불가리아어: Цариградски път)라고 부를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