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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역사 속의 기독교 이야기 -나바테 왕국과 헤롯왕 - 하스몬 왕조의 출현
하스몬 왕조의 출현
예수의 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헤롯 왕(재위 기원전 37-기원후 4)은 에돔(이두마이아) 출신이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전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인 안티파스는 부유한 이두마이아인으로, 당시 이두마이아에서는 제1의 실력자가 됐다. 또한 헤롯의 어머니 큐프로스는 나바테아 귀족의 딸이었다. 이두마이아와 나바테아는 매우 가까웠고, 따라서 안티파스가는 나바테아 왕가와 친한 사이었다. 헤롯 왕은 훗날 로마로부터 유대 왕의 칭호를 얻게 되는데, 따지고 보면 그는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두마이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서거 후 이른바 헬레니즘 시대에 유대에 세워진 하스몬 왕조(기원전 142-기원전 37)의 침략을 받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하게 됐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두마이아 사람들을 ‘반(半) 유대인’이라고 불렀다. 두 민족은 근친 관계이면서 서로 반목하는 경향이 강했다. 헤롯에게는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다’라는 열등감이 평생 따라다녔고, 그의 기행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할 수 있다.
하스몬 왕조(마카베오 왕조) 스립 전후의 유대 역사는 매우 복잡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서거 후 그 영토는 4명의 부하 장군들이 나누어 가졌다. 이 중 유대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놓고 애굽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쟁탈전을 벌였는데, 여섯 차례의 시리아 전쟁으로 지배자가 종종 바뀌었다. 팔레스타인은 애굽과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만큼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유대는 기원전 301년에서 기원전 200년까지는 대체로 애굽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향을 받았다.
안티오코스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유대에서 몰아내고, 이집트마저 손에 넣으려 했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 후 유대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안티오코스 4세(재위 기원전 175-164)는 또다시 이집트 침략을 시도했다. 그는 두 번의 침략으로 수도 알렉산드리아 함락 직전까지 이집트를 압박했다. 그러나 또다시 로마가 개입하는 바람에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안티오코스 4세는 알렉산드리아 침략 실패의 분풀이로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 신전을 파괴했다. 그리고 양민을 학살하고 보물을 약탈하는가 하면 예루살렘 남동부 언덕에 시리아군 수비병을 배치한 성곽(아크라)를 건설했다.
지배자가 바뀔 때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생활은 나름대로 영향을 받아왔지만 종교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는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이후의 이민족 지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는 자신들의 신전 예배와 율법 준수라는 종교생활이 유지되면 그 규율에 복종해가는 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명목상의 지배권 귀속은 그들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헬레니즘 문화는 서서히 확산됐고, 신전의 사제 중에서도 헬레니즘 문화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8년간이나 로마에서 볼모생활을 했고, 풀려난 후에도 아테네에서 생활하는 등 성장기 그리스-로마 문화(이른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 유대교단 그룹이 분열하는 허점을 이횽해 철저하게 헬레니즘화를 추진했다. 그는 예루살렘 신전에 그리스의 신 제우스 상을 세우고 예배하도록 강요하며 도시를 그리스풍으로 개조했다. 또 알몸으로 하는 경기를 장려하고 ‘3년 6개월 동안 일상 번제를 중단시키고 유아 할례를 금지하며, 제단에 돼지고기를 바치도록 했다’(폴라비우스 요세푸스), 돼지고기는 유대인에게 가장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종교 탄압이었다.
이떼 셀레우코스 왕조의 탄압에 저항하는 자가 나타났다. 첫 번째 인물은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 모딘에 사는 하스몬가의 마타시아스였다. 그는 제우스 숭배를 강요하는 셀레우코스 관리를 살해하고 5명의 아들, 일가족과 함께 유대의 황야로 도망쳐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항전을 시작했다. 기원전 164년에 마타시아스가 죽자 셋쩨 아들인 유다가 뒤를 이었다. 그는 매우 용맹하게 사웠고, 게릴라 전법으로 연승을 거둬 ‘마카베오(철망치와 같은 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스몬가를 마카베오가라고도 하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원전 152년, 유다가 전사하자 다섯 째 아들은 요나단이 뒤를 이었다. 또 기원전 143년, 요나단이 죽고 그의 형인 시몬이 뒤를 이었다. 이미 요나단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내부 분열을 통해 한 때 시리아 왕이 된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재위 기원전 160-145)로부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기원전 153-142) 지위를 얻었는데, 시몬 또한 대제사장의 지위를 이어 받았다(기원전 142-134). 이후 하스몬가의 지배자가 대사장의 지위를 세습하게 됐다. 기원전 141년, 시몬은 예루살렘 언덕의 성곽에서 셀레우코스의 수배대를 추방하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해방시켰다. 또한 성벽을 강화하고 국내 각지에 수많은 요새를 건설했다. 또 항구도시 야파를 장악, 지중해로 가는 바닷길을 확보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유대 지배는 이렇게 끝났다. 이후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로 귀속되기까지 약 80년간 유대는 사실상 독립국가 체제를 유지했다. 기원전 587년 유대 왕국이 멸망한 지 약 450년 만의 일이다.
기원전 134년에 시몬이 암살되자 아들인 요한(재위 기원전 134-104)이 후계자가 됐다. 요한은 히르카누스 1세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유대 남부와 북부 사마리아는 물론 요르단 강 동안으로 펼쳐진 이두마이아까지 정복했다. 더 나아가 이두마이아인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종교적으로도 이두마이아인을 유대에 편입시킨 것이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죽고 1년 후 뒤를 이은 요나단은 알렉산드로 안나이우스(재위 기원전 103-76)라는 이름으로 전권을 휘두르며, 팔레스타인에서 시리아 남부에 이르는 이전의 다윗 통일왕국에 필적할 만큼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하스몬가 중에서도 아마 아마 가장 유능하고 전투적인 동시에 가장 잔인한 지배자’로 이름을 떨쳤다. 십자가형을 처음으로 유대에 도입한 것도 그였다. 얀나이우스가 죽은 뒤에는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재위 기원전 76-67)가, 또 그 후에는 차암인 아리스토불루스2세(재위 67-63)가 왕위와 대제사장직을 이었다.
한편 동방세계 지배에 나선 로마는 장군인 폼페이우스가 시리아를 침략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안티오코스 13세(재위 기원전 69-64)를 무너뜨렸다. 이로써 240년에 걸친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는 막을 내렸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유대를 포함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로마의 시리아 주로 편입됐고, 유대도 로마의 시리아 총독 지배하에 들어갔다. 여기서 80년간에 걸친 하스몬 왕조의 지배도 막을 내리게 된다.
반쪽짜리 유대왕 헤롯
이제 헤롯 왕 이야기를 해보자. 헤롯의 아버지는 부유한 이두마이아인이었던 안티파트로스 2세였다 안티파트로스 2세는 그의 아버지 때부터 하스몬 오아조인 알렉산드로스 얀나이우스로부터 이두마이아의 모든 일을 위임받았다. 안티파트로스 2세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지도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두마이아뿐 아니라 전 유대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다양한 책략을 썼다.
먼저 얀나이우스의 장남 히르카누스 2세를 추대해, 그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했다. 동생인 아리스토불르스에 의해 히르카누스가 대제사장의 지위를 박탈당하자, 안티파트로스는 히르카누스와 함께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로 피신해 나바테아 왕인 아레타스 3세를 꼬드겨 유대 토벌을 부추겼다. 그 결과 아레타스 왕은 5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고, 아리스토불루스는 참패했다. 예루살렘 함락은 이제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시리아 원정에 나선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이 소식을 듣고 부하 장군을 보내 안티파스의 지위를 보장해주고 이 둘을 화해시켰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함락시켰다. 그리고 히르카누스 2세는 대제사장 자리에 다시 올랐다.(재위 기원전 63-기원전 40).
아리스토불루스와 그 아들들(알렉산드로스 또는 안티고노스)은 이후 수차례 반란을 꾸몄으나 그때마다 로마에 의해 진압됐다. 그 사이 히르카누스와 안티파트로스는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나타나면서 안티파트로스는 또다시 활약할 무대를 얻게 됐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사르가 고전하는 모습을 보고 안티파트로스는 소아시아에서 온 로마의 원군에게 대대적인 지원을 해줬을 뿐 아니라 자신도 완전 무장한 유대 병사 3000명을 이끌고 맨 앞에서 진격했다. 또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국경 요충지인 페르시온 포위전에서도 가장 용맹하게 싸웠으며, 이집트의 델타 지대에서 적과 조우했을 때 왼쪽 날개를 지휘했던 것도 안티파트로스다. 그의 활약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전해지고 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지> 14:128-134).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카이사르는 기원전 47년 안티파트로스에게 로마 시민권을 유대 총독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안티파트로스는 나바테아의 명문가 여서 큐프로스를 아내로 맞았다. 큐프로스와의 사이에 파사에로스, 헤롯, 요셉, 훼롤라스 4명의 아들과 살로메가 태어났다. 차남이 후대에 대왕이라 일컬어진 인물이고, 안티파트로스는 ‘15세의 헤롯(요세푸스)’을 갈릴리 지사로, 또 형인 파사에로스를 예루살렘 지사로 임명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역모의 주동자인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시리아 총독이 됐다. 하스몬 왕조의 안티고노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파사에로스와 헤롯은 카시우스와 협력해 이 반란을 제압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 안토니우스가 동방 지배자로서 카시우스 등을 제압했다. 그러자 파사에로스와 헤롯은 안토니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 둘은 유대의 4분령 태수(Tetrarches)로 임명됐다.
기원전 40년 페르시아에 본거지를 둔 파르티아가 시리아를 침략해 예루살렘을 약탈했다. 이에 편승해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 안티고노스는 파르티아의 도움을 받아 한때 하스몬가를 부흥시켰으나(재위 기원전 40-37) 파사에로스와 헤롯은 이에 저항했다. 헤롯은 가까스로 화를 면했다. 그러나 형인 파사에로스는 감옥에서 자살했고, 히르카누스는 두 귀가 잘렸다. 신체에 상처를 입은 자는 대제사장에 오르지 못하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다.
헤롯은 유대를 탈출하자 곧바로 로마로 달려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의 청을 받아들여 파르티아에 추대된 안티고노스를 규탄하고 헤롯을 ‘유대 왕’으로 삼기로 했다. 헤롯은 로마의 지원을 등에 업고, 유대로 돌아와 예루살렘에 있는 안티고노스를 항복시키고 안티오키아로 끌고가 참수형에 처했다. 이로써 하스몬 왕조는 명실 공히 멸망 하게 된다.
안티파트로스와 헤롯 부자의 공통점은 교묘한 처세술을 이용해 난세를 헤쳐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티파트로스의 폼페이우스에 대한 헌신, 이어 카이사르에 대한 충성, 카이사르 사후 카시우스에 대한 헤롯의 지원, 그 후 안토니우스에 대한 변심, 나아가 안토니우스 사후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충성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시류를 놓치지 않고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교묘하게 영압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특히 헤롯이 옥타비아누스(재위 기원전 27-기원후 14)의 신임을 얻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유대 외에 사마리아와 동요르단 지역도 위임받아 예전의 다윗 통일왕국에 필적하는 영토를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헤롯 왕은 일대 공공사업 건설자이기도 했다. 그 전형은 예루살렘 신전의 대확장이었는데, 이 공사는 기원전 20년에 시작돼 헤롯 왕이 죽고도 한참 뒤인 64년에 끝났다. 당시 이 신전의 웅대함은 ‘헤롯의 신전을 아직 보지 않는 자는 아름다움을 논할 수 없다’는 말을 낳았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탄식의 벽’은 바로 이 헤롯 제3신전의 서쪽 벽이다. 그 밖의 헤롯은 사마리아에 세바스테(옥타비아누스의 그리스명)란 헬레니즘풍 도시와 지중해 연안에 카이사레아란 대항만 도시를 건설하고, 또한 마사다를 대역 요새 기지로 다시 건설하고 나아가 자신의 이름을 딴 헤로디온과 마카에로스라는 요새도 건설했다.
그러나 헤롯의 약점은 그의 출생에 있었다. 헤롯은 이두마이아인 태생이어서 반쪽짜리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헤롯이 안토니우스에게 도움을 청한 후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안티고노스를 예루살렘까지 몰아 부쳤는데, 이때 안티고노스는 헤롯 측과 로마군에 대항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위는 왕족의 일원에게 주어지는 것이 항상 너희의 습관인데 만약 너희가 이제 와서 그것을 평민이자 이두마이아인인 반쪽자리 유대인인 헤롯에게 준다면 그것은 너희의 정의에 반하는 것 아니냐”(요세푸스, <유대고대지> 14:403).
그야말로 헤롯의 약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말이었다. 이 때문에 헤롯은 기원전 37년 예루살렘에 포위된 상황에서 히르카누스 2세의 손녀딸로 하스만가의 여성인 마리암네를 아내로 선택했다. 하스몬가와 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혈통에 대한 불신을 제거하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헤롯은 아내의 동생인 아리스토불루스(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으나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에게 유대인의 인기가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리코에서 수영하던 그를 익사시켰다. 몇 년 후(기원전 30경), 하스몬가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히르카누스 2세를 암살하고, 아내인 마리암네와 그 어머니도 처형했다. 기원전 7년에는 마리암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알렉산드로와 아리스토불루스를 모반 혐의로 처형하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맏아들 안티파스가지 죽이는 등 그는 끝까지 왕위에 대한 집착과 모반에 대한 의혹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