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일까, CG일까. 요즘 할리우드영화들이 선보이는 '만들어진 괴물' 크리처들은 이런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생생하고 자연스럽다. <킹콩>의 킹콩이나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아슬란도 털 하나하나를 CG로 창조한 크리처다. 그리고 문어발 수염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캐리비안의 해적>의 데비 존스 선장이 있다. 이 기기묘묘한 놈들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사진으로 보는 할리우드 크리처 시각효과 <캐리비안의 해적> <킹콩> <반지의 제왕> <헐크> 등 할리우드 판타지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디지털 크리처들의 제작과정과 첨단 테크놀러지를 사진으로 엮었다.
▪ ILM 테크니컬 디렉터 이승훈 인터뷰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등 다수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크리처 제작에 참여한 이승훈 씨를 만났다.
<캐리비안의 해적 3: 세상의 끝에서>(이하 <캐리비안의 해적 3>)에 문어발 수염(텐타클)과 집게 발, 어깨에는 조개껍데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데비 존스 선장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에서 주인공 해리가 독수리 머리에 말의 다리를 가진 가상 동물 벅빅이 아니라 빗자루나 타고 다닌다고 생각해보라. 영 심심하지 않을까? 올 여름 선보일 이들 초기대 할리우드영화들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언제부턴가 할리우드는 만화책 속 평면영웅을 3D로 재탄생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게 됐다. 실재하지는 않지만 정말 존재하는 듯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만들어진 괴물’, 즉 '크리처'를 대거 등장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눈 깜짝할 새 진보를 거듭하는 컴퓨터그래픽 기술 덕에 크리처의 진화도 놀랍다.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특수효과 전문회사 ILM과 피터 잭슨 감독과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며 <반지의 제왕> <킹콩>을 통해 놀라운 특수효과를 선보여온 웨타 디지털이 작업한 작품 속 크리처들의 제작비밀 속으로 들어간다.
할리우드의 피조물들
<캐리비안의 해적 3>이 기대되는 이유는 2편의 마지막에서 거대한 바다괴물 크라켄에 의해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린 ‘블랙 펄’의 선장 잭 스패로우(조니 뎁)의 행방이 궁금해서만은 아니다. 화가 나면 텐타클들이 제각각 격렬하게 꿈틀대는 ‘플라잉 더치맨’ 호의 선장 데비 존스를 다시 보고 싶기 때문이고, 바다 속에서 100년은 묵었다 나온 듯한 기괴한 모습들의 플라잉 더치맨의 선원이 또 어떻게 변했나 궁금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편에서는 16명이었던 선원들이 3편에서는 더 늘었다. 상어 머리를 한 마커스나 온몸에 해초를 휘감고 있는 해초맨도 여전하지만, 그 외에 가오리 같은 머리를 지닌 만 레이, 생선 모양의 머리에 아가미가 머리 가운데로 쭈뼛 솟은 피네건, 흐물흐물한 해파리를 머리에 얹은 채 몸 전체가 녹아내리는 듯한 모습을 한 선원 젤리 등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다.
도대체 얘들은 어떻게 만들어낸 걸까. 지난 4월 말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열린 ‘ILM의 영화 속 디지털 크리처 제작 프로세스’ 워크숍에서는 ILM의 한국인 테크니컬 디렉터 이승훈 씨가 ILM이 2005년 <나니아 연대기>의 수많은 크리처를 만들기 위해 개발한 블록 파티의 원리를 통해 간단히 설명했다. 이승훈 씨는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크리처들은 다양한 종족부터 고릴라, 비버 부부, 늑대, 표범 등 수십 종의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200개도 넘었고 이들을 5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작업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기존 영화들처럼 캐릭터 종류가 10개 정도라면 10명이 만들면 되지만 캐릭터가 수백 가지로 늘어날 경우 인력 여건상 제 시간에 제작하는 일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ILM의 크리처 테크니컬 디렉터 슈퍼바이저 제프 화이트가 수많은 크리처, 혹은 캐릭터들을 시간 안에 만들어낼 수 있는 블록 파티(Block Party)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블록 파티의 기본 원리는 장난감 레고에서 착안했다. 레고는 몸통, 팔, 다리 등이 분리된다. 같은 몸통에 팔, 다리만 바꿔 끼우면 또 다른 레고 장난감이 된다. 이 원리를 크리처 제작에 응용한 것이 블록 파티다. 머리, 몸, 다리, 발, 팔, 손목 등을 모두 기본형 블록으로 만든 후, 특정 영화 속 크리처가 요구하는 형태에 따라 팔, 다리, 혹은 머리만 바꿔 끼우는 것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2, 3편에 나오는 다양한 선원들은 모두 이 원리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마커스나 젤리, 얼굴에 쭈뼛쭈뼛 가시가 돋아 있어 성게 얼굴을 갖고 있는 퀼이나 피네건, 만 레이 등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에 팔 두 개, 다리 두 개로 구성된 인간 몸을 갖고 있는 크리처들이다. 데비 존스 선장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결국 이 모든 선원들의 기본형은 같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만 레이는 생선 가오리를 닮은 머리끝에 긴 꼬리지느러미가 붙어 있는데 이 꼬리지느러미 모양의 블록만 끼워 넣는 식으로 만들면 된다. 데비 존스 선장의 오른손은 집게손인데 그러면 이 팔만 빼서 집게모양의 블록을 끼워 넣으면 되는 것.
<나니아 연대기>도 마찬가지다. <나니아 연대기>에는 상체는 인간, 하체는 말인 반인반마족 센타우루스,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염소인 파우누스, 파우누스처럼 하체가 염소인데 머리에 염소 뿔이 달린 사티로스, 인간의 몸에 황소 머리와 황소 발굽을 가진 미노타우루스, 앵무새 머리에 비늘로 덮인 발톱을 가진 앵클 슬라이서 등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여러 종족들이 모두 등장한다. 이 경우 역시 블록 파티를 이용해 기본형에 크리처들의 특성에 맞게 말 다리, 염소 머리, 황소 머리 등으로 바꿔 끼움으로써 짧은 시간 안에 여러 크리처들을 만들어내 시간을 절약하는 셈이다. 이런 뺐다 끼웠다 하는 '플러그 앤 소켓' 원리를 통해 제한된 시간 안에 다양한 크리처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한 영화에 하나씩 등장하는 크리처들의 수가 대폭 늘어나, 누가 누군지 외우기도 힘든 지경이 됐다.
인간과 CG의 결합
최근 할리우드영화에서 큰 분기점을 찍은 크리처들의 공통적 특징은 인간과 CG의 결합이다. 시작은 골룸이었다. 때는 2003년,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출연한 디지털 배우 골룸은 사악함과 선함을 오가며 관객들에게 제대로 자기를 각인시킨다. 절대반지를 영구히 녹이기 위해 불의 산을 힘겹게 오르는 프로도 일행을 안내하며 골짝을 뛰어다니는 골룸의 동작은 컴퓨터로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자연스럽고 유연했다. 선악 사이에서 분열증적 증세를 보이는 미묘한 표정변화도 섬세했다. 골룸의 출현은 당시 크리처들을 만들던 테크니컬 디렉터들을 놀라게 했다.
2005년, 미모의 여배우 앤 대로우(나오미 왓츠)와 감정적 교류를 하는 괴물 킹콩 또한, 얼굴은 킹콩의 그것이었지만 움찔거리는 콧잔등, 이마의 주름, 눈물이 맺힌 듯한 눈동자 등 인간에 필적할 만큼 감정 전달이 풍부한 '감수성 넘치는 크리처'로 탄생했다. 원리는 간단하다. 킹콩과 골룸 안에 실제 배우 앤디 서키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졌듯 앤디 서키스가 골룸을 흉내 냈던 개그우먼 조혜련처럼 분장을 했다거나 놀이동산 앞에서 동물 탈을 뒤집어 쓴 이벤트 회사 직원처럼 킹콩 탈을 뒤집어 쓴 건 아니다. 앤디 서키스는 그가 연구한 골룸이나 킹콩의 동작을 모션캡처 카메라 앞에서 재연했고, 카메라가 캡처한 배우의 동작과 얼굴 근육 등이 컴퓨터로 전송돼 3D 디지털 배우로 재탄생했다. 다만, 킹콩이나 골룸의 탈 대신 얼굴과 몸의 형태와 동작을 캡처할 수 있도록 온몸과 얼굴에 100여 개가 넘는 마커를 부착했을 뿐이다.
얼굴이나 몸에 송곳 같은 점들을 부착하고 블루 스크린이나 특수제작된 스튜디오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크리처가 등장하는 영화현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되고 있다. 2006년, <캐리비안의 해적 2: 망자의 함>에서 첫 선을 보인 희대의 캐릭터 데비 존스 선장의 탄생에도 배우 빌 나이가 톡톡한 기여를 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특수효과상을 받은 ILM의 특수효과 슈퍼바이저 존 놀은 “영화에서 데비 존스 선장과 함께 그가 이끄는 배 플라잉 더치맨 호의 선원들을 만드는 데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데비 존스가 성공적 캐릭터가 된 데는 배우 빌 나이와의 파트너십이 가장 중요했다”고 말한다. 영화상에서 데비 존스 선장을 보면 골룸이나 킹콩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배우 빌 나이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기 힘들다. 실제 빌 나이도 연기할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빚어질지 알지 못한 채 파자마 같은 회색 슈트에 모션캡처를 위해 마커를 잔뜩 붙이고 촬영에 임했다. 그러나 데비 존스의 얼굴 골격은 빌 나이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광대뼈가 높고 턱은 길고 뾰족하다. 말할 때 입모양 등도 빌 나이의 그것이다. 빌 나이의 동작을 일일이 캡처해 그 위에 CG로 집게발을 끼우고 문어발 수염을 입힌 것이다. 결국 데비 존스가 이 독특한 모습을 하고서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데는 인간 빌 나이가 컴퓨터 그래픽과 결합한 덕분이다.
빌 나이가 컴퓨터 그래픽과 보다 자연스럽게 결합할 수 있도록 도와준 기술은 ILM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모션캡처 프로그램 iMOCAP이다. iMOCAP은 여타 모션캡처 프로그램에 비해 영화제작의 용이성을 상당부분 고려했다. 기존 모션캡처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배우의 동작을 캡처하기 위해 세트에서만 촬영해야 하며, 여러 배우가 함께 있을 경우 캡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상대 배우가 있는 신에서도 혼자서 상상하며 연기를 해야 한다. 없는 데 있는 것처럼 연기해야 하므로 감정이 제대로 살지 않는 건 당연하다. iMOCAP은 이를 보완해 실제 로케이션 촬영지나 세트 등 모든 환경에서 캡처가 가능하고, 배우들이 함께 연기를 해도 동작 캡처가 가능하다. 그래서 실제 <캐리비안의 해적> 촬영을 위해 만든 세트 플라잉 더치맨 호 위에서 데비 존스가 선원들과 대화하는 장면의 경우 다른 배우들과 대화하는 빌 나이의 동작이나 표정을 캡처함으로써 보다 생생한 데비 존스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 기술의 발달 덕분에 인간과 디지털 배우의 결합이 한결 용이하게 됐다.
출렁이는 근육의 등장
2003년 이안 감독의 <헐크>가 나왔을 때, 평평한 종이만화 속 녹색 괴물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쇄도했다. 게다가 <헐크>는 원래 있는 게 아니라 배우 에릭 바나가 때때로 분노하면 온몸의 근육이 변하면서 헐크로 변신해가는 캐릭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릭 바나가 헐크로 변모하는 과정을 만드는 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다. ‘디지털 더블링’ 기술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더블링이란 모션캡처 기술을 기본으로 해서 만들어진 컴퓨터 속 3D 배우를 어느 순간 실제 배우와 바꿔치기 하는 기술이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 포터가 괴물에게 잡혀 던져질 때, 실제 해리 포터 역할을 하는 배우 다니엘 래드클리프를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때, 해리 포터의 동작을 모션캡처를 통해 캡처해 그와 똑같은 모양새를 지닌 해리 포터 분신 디지털 더블을 만들고 이 디지털 더블을 진짜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바꿔치기하는 게 디지털 더블링이다. 에릭 바나가 헐크로 변모하는 순간도 실제 배우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순간은 진짜 배우 에릭 바나지만, 이후 근육이 변해갈 때는 디지털 더블 에릭 바나를 사용해 컴퓨터에서 변해가는 근육을 그려 넣은 셈이다.
그러나 정작 <헐크>에서 문제가 됐던 부분은 변해가는 헐크가 아니라 변한 후의 헐크였다. 지금은 헐크나 또 다른 크리처들을 만들 때 움직일 때의 근육의 출렁임을 표현하기 위해 실제로 피부와 스켈레톤(골조) 사이에 근육을 만들어 집어넣는다. 그리고 골조가 움직일 때마다 이 근육이 따라서 움직임에 따라 피부가 출렁여서 자연스러운 크리처가 만들어진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에서 오비완(이안 맥그리거)이 종종 타고 다니던 크리처 '보가'는 이런 원리를 통해 자연스러우면서도 손쉽게 만들어진 크리처다.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잭 스패로우(조니 뎁)의 배 '블랙 펄'을 깨부수는 커다란 문어 모양의 바다괴물 크라켄도 같은 경우다. 크라켄의 문어발이 배를 덮치거나 사람을 움켜쥘 때마다 생기는 출렁거림을 위해 문어 피부 안에 근육을 넣어 자연스러움을 줬다.
헐크를 만들 때는 이런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팔을 앞으로 들었을 때, 팔을 옆으로 들었을 때, 팔을 위로 들었을 때 등 매번 팔의 움직임, 다리의 움직임마다 각각의 쉐이프(크리처의 형상을 일컬음)를 일일이 만들어야 했다. 헐크의 동작 하나하나마다 각각의 근육 형태를 고려해 쉐이프를 만들어야 하므로, 헐크 한 명의 크리처를 위해 수백 가지의 형태를 만들어둬야 했던 것. 불과 4년 전이지만 여러 명의 캐릭터를 하나의 기본형으로 뚝딱 만들어내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블록 파티에 이어 실제 크리처 안에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근육을 심어 넣음으로써 크리처들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세상이 됐다. 피나 미세한 혈관만 없을 뿐, 오늘날의 크리처는 뼈, 근육, 피부 모두를 갖춘 또 하나의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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