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났으니 개괄적 영국 역사 이야기를 좀 하자
대제국의 역사를 이갸기 한다는 말 자체가 어패는 있지만 대충.
1만년 전에 지구 빙하가 녹기 시작, 8천년 전에는 유럽과 영국은 섬과 대륙으로 갈라지고, 섬의 역사에는 외부 세력으로 부터 정복의 향연이 펼져진다.
최초 이베리아(지금 스페인)인이라고 하는 부족이 이주했고 뒤에 켈트족이 등장해서 성채를 구축하고 살기 시작하는데 기원전 2세기 경에는 브리튼 문화가 갗추어지지만 기원전 55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2개군단으로 침략한다.
이때 그의 갈리아 전쟁사에 처음 브리튼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카이사르가 프랑스 독일 벨기에 지역의 갈리아를 정벌할 때 이 브리튼 섬의 켈트족이 도와 줬다는 핑게로 쳐들어갔지만 실은 풍부한 지하자원 때문이었다.
이후 클라우디우스 , 하드리아누스 장벽 (장장 120키로로 지금도 영국과 스코틀랜드 경계역할을 한다)에 이르기 까지 410년 철수할 때 까지 455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로만 브리튼이라는 이름으로 동화되었다.
서로마가 망하고 중세가 시작되면서 주변 여러 종족들로 부터 허구한 날 코피가 터지니 유럽 본토에서 앵글족 섹슨족들의 용병을 부르고 이민자들을 잘 받아들였는데 왠걸,
이 편편하고 기름진 땅을 남줄거 어딧냐 내가 먹어버리지.
결국 켈트족은 버티지 못하고 이 앵글로 색슨족들에게 복속 하였고 그들 중 일부는 황량한 서쪽 지방인 웨일즈, 스코를랜드, 남쪽 끄트머리 콘월 지방으로 줄행랑치고 일부는 대륙으로 건너가서 브르타뉴 공국을 세우기도 한다.
게르만 족들은 훈족에 쫒겨서 여러방면으로 쳐들어오지만 브리튼 섬에는 주로 앵글로 색슨 족들이었고 오늘 날 잉글랜드라는 말은 해석이 앵글족의 땅이라는 말.
5세기 부터 시작된 게르만 족의 지배는 7세기 까지 이어진다
나중에는 앵글로색슨 국가들 끼리 또 치고 받아서 칠왕국이 등장.
이렇게 브리튼( 켈트)족을 주로 웨일즈,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쫒아낸 것 까지는 좋았는데 지들끼지 자루를 또 찢어서 칠왕국이 세워지고 8~9세기에는 바이킹들이 거창하게 침략 한다.
기독교 관점에서 이상한 이교도들의 대공격을 받고는 칠왕국 대부분 정복,
후둘겨 맞고 지리멸렬 하지만 유일한 웨식스의 국왕 알프레드 대왕( 이 great라는 명칭 아무나 안붙는다)의 선전으로 10세기 초에는 바이킹들을 깡그리 몰아내고 칠왕국을 통일해 드디어 하나의 잉글랜드 왕이 등장하지만 ( 그냥 세력이 젤 쎄니 왕중의 왕으로 올려줄께),
잠시 뿐이고 11세기에 또 바이킹들의 공격.
덴마크 왕자 한 넘을 중심으로 강한 북해제국을 이루지만 이 놈 사후 융합의 부조화로 또 분열( 모든 세력의 결집은 분열의 반복이니) 돼 버리고,
잉글랜드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등극으로 다시 앵글로색슨족의 웨식스 왕국이 들어서는데,
이 참회왕 에드워드가 영국서 내가 처음 관광지로 택한 웨스트민스트 사원을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재건하도록 지시한다.
이 군주는 왕자시절 부터 참 많은 업적과 용맹성으로 명군, 성군, 그 반대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다.
전쟁비용을 대기 위해 유대인들의 재산을 다 털고 내쫒아버린 일(히틀러에 비하면 양반이긴 하지) 등,
성품이 대단히 완고하고 적에게는 무자비한 잔인성.
별명이 스코틀랜드 망치라고 하며 확실한 제압은 했지만 스콧인들에게는 악마의 화신이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영화로 1995년 개봉했고 심심하면 종편에서 틀어주는 브레이브 하트.
실존 인물이었든 스코틀랜드 저항군의 지도자 윌리엄 월레스를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는지 표현 불가.
그를 간단히 죽여달라고 권하는 며누리와의 관계를
(물론 영화자체도 역사와 상이한, 엉터리도 있지만 ) 보면 권모술수, 잔인.
허나 전체적으로 그는 명장이었고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그의 무덤을 분명 보긴 했는데 지금은 사진만 보고 구별을 못하는 나는 바보다
에드워드 1세 영문 사진을 못찍은 것이 과실.
그도 그럴것이 다음 일정이 버킹엄 궁전 근위병 교대식이 11시이니 이동 시간 30분을 제하면 한 시간 정도만 관람여유다.
역사 이야기 담에 또 하자
이 무덤의 주인이 엘리자베스1세에 의해 처형된 스코틀랜드 메리여왕이다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의 메리1세( 앞서 소개한 엘리자베스1세의 이복언니 블러드 메리)와 구분하기 위해 메리 스투어트( 스투어트는 가문)라고도 불리지만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으니 공식적으로는 성이 붙지 않고 메리 여왕, 혹은 메리 2세와 구분키 위해 메리1세로 칭할수도 있다.
이 한 많은 여왕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의 2남 1녀 중 막내자 고명 딸로 태어난다
그런데 왕자들은 장남은 생후 이틀만에 죽고, 차남은 돌이 지날 무렵 요절이다
메리 부친 제임스 5세는 친잉글랜드파(개신교), 친프랑스파(가톨릭)들의 내전과 영국과의 전쟁으로 치친 나머지 병상에서 30세를 일기로 승하한다.
이제 메리는 유일한 적장녀로 왕위에 오르는데 생후 6일만이다
친프랑스계 섭정에 의해 6살 때 프랑스로 보내져 지적이고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라 16세 때 왕세자 프랑수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되는데 시아버지가 사고로 또 일찍 승하하여 프랑스 왕비가 된다(남편 프랑수아가 왕관을 쓰게 되었으니 당연히).
그런데 시어미니가 이태리 메디치 가문 출신( 벼락 출세한 장사꾼)이라고 여러사람 앞에서 시어머니를 모욕 끝에 고부갈등을 자초하게 되면서 그녀의 자제력 부족한 단면을 잘 보여 준다.
그녀는 180키에 건강한 미인이지만 남편은 선천적 장애로 비실이.
그래도 남편 프랑수와 2세는 어릴적 소꼽 친구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도 가혹한 운명은 피할수 없으니 남편이 즉위 1년 6개월만에 요절(16살)해 버리고 비실이라 후사가 없다.
후사가 없으니 열살인 시동생 샤를 9세가 즉위를 하게 되는데 그녀가 자초해서 앙숙이 돼버린 시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하게 되었고,
메리를 쫒아버리듯이 스코틀렌드로 보내버렸다.
그 동안 스코틀랜드는 핏덩어리 메리를 대신해 섭정하든 자가 1560년에
이미 숨졌기 때문에 메리의 귀환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바야흐르 유럽은 천주교가 자초한 결과로 1517년 루터 95개조 반박문 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이 무르익어 루터회, 성공회 등 여러 개신교가 생겨나 지지고 복고 혼란의 부르스 시대.
예외 없이 스코틀랜드도 종교내전이 벌어졌고 천주교 세력이 패망, 개신교가 득세한 가운데 귀국한 메리는 개신교가 판치는 자국에서 엄연한 외톨이 천주교 신세.
재혼을 하지만 불행하였고, 정 없었든 남편의 피살, 남편 살해용의자와의 간통,
급기야는 그녀의 이 분별없는 행위들에 의해 처음 기반이 돼 준 카돌릭 신도들 사이에서도 눈 밖에 나는 결과를 가져왔고,
종교, 정적들과의 전쟁서 패하고 쫒기는 신세가 되어 가장 가까운 친척인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에게 피신을 간다.
이 시기 영국의 국교는 헨리8세가 성질 나서 만든 성공회인데 개신교로서 카돌릭과 이를 갈았고 나중에 그의 딸 메리1세 여왕은 천주교인이라 개신교 측근을 청소해버리고, 명군인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도이니 그를 따르는 측근들의 시선에는 이 쫒겨온 메리여왕에게 칼날이 서 있다.
영국 여왕자리의 계승권( 계승권 자체는 헨리7세의 적손이니 정직한 혈통임은 맞다)을 주장해서 주변의 측근들로 부터 부추김, 도망와서 오갈데 없이 된 그녀를 친척이라고 연금, 시녀들, 돌봐 준 엘리자베스 1세를 여러차레 배신해서 반란을 꽤하는 그녀에게 여왕이 여러번 방패가 돼 줬지만 반복 되는 그녀의 철없는 욕망을 막을 수 없어 결국 재판에 회부, 18년 감금생활을 하는데 여왕의 친척이라는 특혜속에서 행동반경에 얼마간 여유가 생기자 또 반란을 기도, 끝내는 사형선고.
그녀를 살려줄려고 여왕은 무던히도 애 썼다고는 하지만 측근들이 제시하는 여러차레의 반란증거를 끝내는 다 물리치지 못했다. 설사 그녀를 제거하기 위한 여왕 측근들의 조작이거나 스콧 메리를 부추긴 영국 귀족 내의 천주교 동조자들이 있었다 해도
본인의 처신의 결과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도끼가 한 번은 뒤통수를 쳐서 고통을 줬고, 두 번째도 제대로 못짜르고, 세 번째야 목에서 머리가 떨어졌는데
집행자가 머리카락을 들고 서는데 이미 감옥에 갇힐 때 부터 병이 전신에 번져 머리는 다 빠지고 가발 상태.
이 가발이 벗겨지면서 대머리가 땅에서 구르고, 그 입술은 15분이나 움직였다고 한다.
시체가 적당한 곳에 묻혔으나 아들인 스코틀랜드 에드워드 6세가 영국 왕에 오르는데 이가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다
엘리자베스 1세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후사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라면서 모자간 서로 애정이 없었으나 어머니인 그녀의 시체를 이 곳 웨스트민스트 사원으로 옮겨 놓았다
그가 영국 왕위에 오름으로서 영국은 명실상부한 그레리트 브리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이 성립 된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진 연합왕국이다.
그러므로 잉글랜드는 국가 이름이 아니고 지역명이다. 스코들랜드, 웨일즈도 마찬가지.
그리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왕국이고( 두 곳 중 왕국은 스코들랜드가 먼저 열었다), 웨일즈는 그 보다 격이 낮은 공국이었다
앞서 말한 그레이트 브리튼에 북아일랜드를 합치면 유나이트 킹덤, 즉 영국이라는 국가가 된다.
영국의 정식 국명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이다. 이를 간단히 줄여서 UK라고 부른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는 제각기 자치제를 실시하지만, 실권은 의회에 있다
그리고 런던은 영국의 수도이자 잉글랜드의 수도이다.
또 한 브리튼(Britain)은 그레이트 브리튼이나 영국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1920년 무명묭사의 묘,
이 비석 아래에 이름도 계급도 알 수 없는 한 영국 용사의 몸이 누워 있다.
프랑스에서 수습하여
국왕 조지5세,
국무대신,
군대 상관,
수많은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1920년 11월11일 휴전일에
국토에서 가장 빛나는 곳에 묻혔다.
1914-1918년의 대전쟁에서
하느님을 위해
국왕과 국가를 위해
사랑하는 자들의 고향과 대영제국을 위해
신성하고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세계의 자유를 위해
사람이 바칠수 있는 가장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수많은 자들을 기린다
그는 하느님과 가문에
선을 이루었으므로
이곳에 왕들과 함께 묻노라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 영국 육군 전사자 중 한 명으로, 전사한 군인들을 대표하여 매장되기 위해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든 전후 발굴 유해들 가운데 선발 되었다. 벨기에서 발견된 뒤 관에 안치한 유해들을 늘어놓고 육군장교 한 사람이 눈을 가린 채 몇 바퀴 돈 후 관들 사이로 지나가다 그중 하나에 손을 대는 방식으로 뽑았다.
이 무명용사는 훗날 미국으로 부터 참전한 모든 영국군을 대표하여 메달 오브 아너를 받았으며 무덤 근처 기둥에 훈장이 있다.
이 무덤은 전쟁에서 전사한 영국 군인 모두를 기리는 상징이며, 유럽의 문화 특성상 성당 바닥에 안치된 다른 무덤은 밟아도 상관 없지만 이 무덤만은 밟는 게 금지라, 장례식을 할 때에도 관을 운구하는 사람들이 여기만은 피해서 걸어간다.
왕실 역시 예외는 아니다. 왕가의 결혼식도.
내 눈을 호사 시킨다고 여러 위치에서 사진을 찍고
추가로 올림니다
성가대 자리 위에 군주 자리, 주요 귀족들 자리, 이름도 씌여 있기도 하다
화려한 전면 모자이크
못찍었다는,
참회왕 에드워드,
내가 찍은 사진이 아니고 안내 사진을 찍은거네요
이곳은 매우 취약한 곳이라 예약한 사람들만 출입이 가능하다고.
스코틀랜드 에드워드 6세가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로 등극하고 사후의 묘
헨리 3세
헨리 5세
헨리7세 예배당
다시 엘리자베스 1세로 오늘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