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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광주시민의 정당방위
증언자 : 염경태(남)
생년월일 : 1962. 3. 7(당시 나이 18세)
직 업 : 인쇄공(현재 양화공)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1980년 당시 인쇄공이었던 염경태 씨는 5월 19일 저녁부터 시내 전역을 돌며 시위에 참여, 공수부대에 잡혀 구타 당하지만 도망쳐 연행 당하지는 않았다. 현재까지 후유증이 남아 있으나 당시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이 맞는 것을 보고
나는 전남 나주군 세지면 동곡에서 아들만 넷인 집안의 셋째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논, 밭 몇 뙈기와 당숙네 농사를 소작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평범한 농가였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75년, 부모님은 자식들 교육과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광주로 이사했다. 전답을 팔아 광천동에 조그마한 중국음식점을 마련해 나왔으나 시골에서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생활이었다. 부모님은 직종을 바꿔가며 살아보려고 무척 애를 쓰셨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주로 집에서 부모님 일을 거들었다. 일년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정식 중학교가 아닌 성심학교에 들어가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 뒤 용봉동에 있는 공과학원에서 선반일을 배운 나는 무작정 서울에 올라가 카뷰레타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보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큰형이 어떻게 알고 나를 데리러 왔다. 광주로 다시 내려와 친척의 소개로 백운동에 있는 삼호인쇄소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중 5·18을 만났다.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날 인쇄소에서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군인들이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간다고 하니 집에 들어올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인쇄소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별생각 없이 인쇄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인 19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하고 저녁에 퇴근을 했다. 집이 시청 뒤 중흥동이어서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차가 다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광남로를 걸어 집으로 향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광장까지 아무일 없이 도착했다. 그런데 북동성당 쪽 터미널 옆에 차렷자세로 대열지은 공수부대원들이 있는가 하면, 소방서 쪽에서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공수부대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최루탄을 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시위대를 쫓아 진압봉을 휘둘렀다. 그런 상황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일단 집으로 들어간 나는 어머니가 저녁밥을 차리는 동안 식구들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내가 다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광장으로 나오니 경상도 번호판을 단 8톤 트럭이 불타고 있었다. 경상도 출신의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시민을 죽인다는 소문이 떠도는 것과 함께 공수부대들의 잔인한 행동을 본 시민들이 화가 나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위대열과 합류했다. 얼마 뒤에는 시위대열의 맨 앞에 서서 돌을 던졌다. 밀고 밀리기를 거듭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잡히는 사람들이면 누구든지 무자비하게 두들겨팼다. 차도와 인도에 서서 구경만 하던 시민들도 공수대원들의 잔인한 행동을 보고는 하나 둘씩 시위대에 참여했다.
어느 순간 나는 쫓아오는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잡히는 즉시 머리, 어깨, 몸통, 다리 할 것 없이 온몸에 진압봉과 군화발이 쏟아졌다. 이빨 하나가 부러져 나가고 머리가 터져 피가 흘렀다. 어디를 어떻게 맞는지조차 느낄 겨를이 없었다. 한참동안 정신없이 맞았다.
그러다 잔뜩 짓밟혀 한풀 꺾인 우리를 놔두고 공수부대원이 또다시 시위대를 잡으러 달려갔다. 잡혀서 맞은 사람, 쫓기는 사람, 쫓아가는 공수대들이 뒤섞여 주위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그 혼란한 틈을 이용해 시위대열 쪽으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다행히 다시 잡히지는 않았다.
나는 두려움과 통증으로 근처 골목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들면서 공수대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큰길에서는 아직도 많은 시민들이 나처럼 죄없이 두들겨맞고 끌려가고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공수부대놈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다시 시위대열로 들어갔다. 그때 외쳤던 구호나 노래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공수대원들은 여전히 "이 새끼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치며 우리들을 추격해 왔다.
광주와 광주시민을 위해
그때부터 며칠 동안 계속 집에 들어가지 않고 시위에 참여했다. 19일 밤부터 내가 주로 있었던 곳은 국세청과 광주경찰서 부근의 골목이었다. 국세청 근방 골목에서 싸울 때는 경찰들이 최루탄 가스를 쏘며 우리를 제지했다. 그때의 최루탄은 지금처럼 파편이 터지면서 가루가 날리는 것이 아니라 가스로 된 최루탄이었다. 그래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 그것을 집어 다시 경찰들에게 던질 수 있었다.
우리는 경찰차(페퍼포그) 한 대를 빼앗았다. 그뿐만 아니라 경찰들이 진압시 쓰는 모자를 뺏거나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서 머리에 쓰기도 했다. 나도 모자 하나를 주워서 쓰고 다녔는데 나중에는 무거워서 벗어버렸다. 나는 그날 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낯설지 않은 마음으로 행동했다. 어떤 때는 급박하게 붸기다 가정집 담벼락을 뛰어넘어 들어갈 때도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아찔할 정도로 높은 담을 가볍게 타고 다니거나 지붕과 지붕을 건너뛰었다. 그런 식으로 불쑥 뛰어들어가도 그집 주인은 전혀 놀라거나 불쾌해 하지 않고 오히려 바깥 동정을 살펴보아가면서 주변에 공수 부대나 경찰이 없는가를 확인해 주어 광주시민은 누구나 한마음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그때까지 공수부대에게 맞은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장동 로터리에 가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마 부상당한 시위대를 위해 임시진료소를 만들어 놓았었던 것 같다. 거기서 나는 공수대놈들한테 맞을 때 터진 머리 위 부분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붙였다. 젊은 여자들이 그 일을 하고 있었는데, 굉장히 어두웠기 때문에 그 얼굴이나 옷차림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19일은 그렇게 잠 한숨 못 자고 시위대열과 함께 거리에서 날을 샜다.
20일에도 역시 사람들이 모이면 '김대중 씨 석방하라', '전두환이 물러나라'를 외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어느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기보다는 시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끼니는 시민들이 가져다주는 김밥이나 빵, 요구르트 등으로 웠다. 어떤 시민은 장갑을 가져다 나눠주기도 했다.
내가 광주은행 본점 쪽에서 충장로 파출소 쪽으로 가고 있는데, 사람들이 지하상가 공사장으로 시체를 찾으러 간다고 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갔다. 그런데 막상 공사장 밑으로 내려가니 주위가 캄캄한 데다 조그마한 소리를 내도 크게 울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주변에 사람이 없고 혼자만 남아 있어 얼른 되돌아 나와버렸다.
충장로 파출소 쪽에서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지하상가 공사장 안에서 시체를 찾아가지고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내가 있던 쪽에서는 상당히 떨어진 거리라서 나는 죽은 사람이 몇 명이고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도청으로 옮겨지는 것 같았다. 그 뒤로는 어떤 사람이 공사장 주변에 있던 중장비로 도청에 있는 공수부대를 밀어버리겠다고 했다. 그는 서투르게 운전하다가 중장비를 공사장에 처박아버렸다.
이런저런 일들을 보면서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날 저녁 MBC 방송국이 불에 탔다. 그때 나도 우연찮게 그 근처에 있었다. MBC 방송국 옆 건물에 '문화상사'라는 전자제품 대리점이 있었는데, 그곳에 불이 옮겨붙을 것을 대비해 사람들이 가전제품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나도 그 일을 거들었다. 우리들은 중앙국민학교 쪽으로 전자제품들을 꺼내놓았는데 그것을 훔쳐가거나 훼손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얼마 후에 장동 로터리 쪽에서 장갑차 한 대가 오더니 기껏 시민들이 불에 타지 않도록 꺼내놓은 물건들을 밀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그 무렵 가두방송을 하는 차를 따라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보지 못했다. 가두 방송을 하던 사람은 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여자분이었는데 며칠 뒤 그분이 간첩으로 몰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가두방송 차를 따라 광주공원과 불로동다리를 거쳐 시내 전역을 한번 돌았고 광주역을 지나 KBS 방송국으로 갔다. 가두방송차 뒤에는 많은 시민들이 따라다녔다. 광주의 상황을 방송을 통해 전국에 알리라 고 요구하기 위해 KBS 방송국에 갔으나 방송국은 셔터가 굳게 잠겨져 있었고 한 쪽 셔터만 검게 그을려 있었다.
다시 시위대를 따라 광주역 앞에 모여 있는 시위대와 합류했다. 내 손에는 언제부터인가 각목이 쥐어져 있었다. 한참 동안 어둠 속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공수부대에게 붸기다가 곤봉으로 머리를 얻어맞았다. 그러나 붙잡히지는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 군인들과 시위대의 구별이 뚜렸하지 않았다. 맞은 곳이 아픈지도 모를 정도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다시 광주역을 벗어나 다른 시위대열과 함께 중흥동, 시교육청, 시청 등지를 돌아다녔다. 시내는 가는 곳마다 칠흑같이 어두웠다. 시위대가 시청으로 몰려 갔을 때 시청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하고 사방이 캄캄했다. 시위대가 시청으로 들어가려고도 했으나 혹시라도 공수부대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다시 사람들과 함께 계림동, 산장입구, 산수오거리 등을 통해 현재의 동명로로 이동했다. 공수부대와 경찰들과의 충돌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종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위대열과 함께 하다 보니 또 하루를 노상에서 지샜다.
무장항쟁
21일 아침에 사람들이 태극기를 덮은 시체 두구를 리어커에 싣고 도청 앞 분수대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리어커가 내 앞을 지날 때 나도 리어커 옆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시체는 맞아서 죽었는지 온몸이 멍들고 부어 있었다.
그 뒤로부터는 시위대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타고 다녔다. 한참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 전남대 앞으로 가게 되었다. 전남대 안에서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최루탄을 쏘며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 당시 전남대 정문 근방에는 새로 짓는 건물이 많아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면 근처의 집이나 공사 중인 건물 안으로 피했다. 그곳에서 다시 차를 타고 방림동 삼일아파트로 가게 되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와 우리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주면서 고생한다고 격려해 주었다. 우리 일행은 시내에서 일어난 공수부대의 만행을 얘기하면서 그 근방 일대를 돌며 시민들에게 시내로 모이라고 했다. 내가 탄 차에는 중, 고등학교 정도의 아이들도 꽤 있었다.
앞뒤가 연결되어서 생각나지는 않지만 차를 타고 다니던 중 나는 아세아자동차 공장에도 가게 되었다. 정문에서 수위가 사람들을 막으려 했으나 총을 든 사람들이 공포탄을 쏘자 문을 열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게 된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나는 25인승 소형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어떻게 하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으로 걸어가게 되었는데, 북동성당과 대한극장 사이에서 총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사과 궤짝 같은 것에 총이 들어 있고 실탄은 없었다. 나는 실탄이 없는 총은 쓸모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총을 받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15명 정도 되는 사람들과 월산동에 있는 동일약국 옥상에서 보초를 섰다. 조를 편성해서 교대로 보초를 섰다. 보초를 서지 않는 사람들은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가 숨어 있으면서 휴식을 취했다.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는 예비군으로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총기사용법과 지켜야 할 규율들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팀에는 총이 7자루 정도 있었다. 총은 교대하면서 보초서는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외부에 노출될 것을 염려하여 내 머리에 붙여진 붕대를 떼라고 했다. 담배 또한 숨어서 피우도록 통제했다. 밤새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도 한 번 공포탄을 쏘았다. 그때 함께 보초를 섰던 사람 중에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는 누구나 광주와 광주시민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싸웠기 때문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모여도 금방 친숙해졌다. 우리는 비록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통제하고 지켜주었다.
22일 아침 날이 밝자 우리 일행은 함께 그곳을 나왔다. 나는 마침 근처를 지나던 군용 트럭을 타고 양동 닭전머리를 거쳐 광주공원으로 갔다. 공원에서는 총기를 다룰지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 오발사고를 낼 것을 염려해 그들로부터 총을 회수하고 있었다. 총은 청년과 어른들에게만 지급되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M1과 실탄 28발을 지급받았다.
총을 받은 후 나는 약 20여 명 정도의 사람들과 한일은행 앞 제일치과 옥상에서 보초서는 임무를 맡았다. 치과병원에서 우리들에게 밥을 가져다주었다. 맛있게 밥을 먹고 한참을 있어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전신전화국에 가서 정부 쪽과 직접 통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자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동의한 우리는 중앙국민학교 맞은편에 있는 전신전화국으로 몰려갔다. 전신전화국에는 셔터가 굳게 내려져 있고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흐지부지 그곳을 되돌아나온 우리는 뿔뿔히 흩어져 총을 든 채로 시내를 돌아다녔다. 함께 있던 사람들과는 헤어지고 말았다. 나는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25일 오전까지 나는 도청과 시내를 오가며 지냈다. 한번은 공원에서 공수부대원 한 명이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 웃옷은 벗겨진 채로 바지만 입고 있었는데 바지는 공수부대원들이 입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주로 시내 전역을 돌아다녔다. 밥은 도청 안에서 먹었다.
23일, 24일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지 않다. 23일 이후에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식사제공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도청에서 밥을 먹은 것 같다. 도청에서는 연고자가 있는 시체들을 상무관으로 옮기고 있었다. 도청 안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어서 몹시 어수선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도청과 시내를 왔다갔다하며 지내던 우연히 도청 안에서 거울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어찌나 추레하던지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맞춰입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양복바지는 물론이고 웃옷까지 군데군데 찢겨져 너덜너덜했다. 머리는 더부룩하게 자라 있고, 며칠 동안 세수 한번 못해본 얼굴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지저분했다. 그때까지 외모에 대해서 신경을 쓸 생각을 못했었던 것이다. 세수를 하려 했으나 씻을 곳이 없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집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이 25일이었다.
19일 해거름에 집을 나와 25일 오전 12시쯤에 처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내가 집에 들어서니 옆집 수영상회 아주머니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반갑게 소리쳤다.
"오메, 저 집 아들 와야."
집안 식구들은 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어디서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젊은 사람이 며칠씩 안 들어오면 모두 죽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딱 한 번 도청에 나가 나를 찾았다고 한다. 그 뒤로는 나를 전혀 찾지 않았는데 그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 친정 고모댁 식구들이 인공 때 식구를 찾으러 나갔다가 일곱 명이 차례로 몰상당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일 때문에 어머니는 이미 죽은 자식을 찾으러 다니다 다른 사람까지 죽게 되지 않을까 걱정을 했던 것이다.
포기했던 내가 불쑥 나타나니 식구들은 모두 깜작 놀라면서도 몹시 반가워했다. 그날은 집에서 푹 쉬고 다음날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동생과 함께 다시 도청 앞 광장으로 갔다. 거리는 온통 깨지고 부서진 것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나와 동생이 도착했을 때 도청 앞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궐기대회를 하고 있었다. 안경을 끼고 곱슬머리에 군복 바지를 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말하는 것이 보였다. 어떤 외신기자는 취재를 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녔다. 상무관으로 가다가 보니까 전일빌딩 벽에 김대중씨 사진과 함께 무엇인가 씌어진 벽보가 붙어 있었다. 그 벽보 내용이 무엇인지는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상무관 안에는 많은 시체들이 입관되어 있었고 분향하는 일반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어떤 할머니가 관을 붙들고 통곡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와 동생은 그곳에 마련된 분향소에 분향을 하고 묵념을 올렸다. 광주시민은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나는 당시에 5·18이 왜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 그런데도 계속 시위에 참여한 것은 광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수부대의 만행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광주시민이면 누구나 공수부대원들의 잔인한 만행을 보고 분노했고, 그래서 자발적으로 밤을 지새며 싸웠다. 여대생을 발가벗기고 유방을 잘랐다든지,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소문이 아니더라도 눈앞에서 공수대들의 만행을 보았던 것이다. 경상도 출신들로만 구성된 공수부대원들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려버리려고 한다는 말이 떠돌면서 사람들은 경상도 차를 보며 무조건 불태워버렸다.
나는 지금도 5·18이 일어나게 된 동기가 공수부대들의 잔인한 진압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시에 최전방에 투입되어야 할 공수부대가 제 나라의 무고한 시민을 진압하는 데 앞장서서 학살을 서슴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5·18이 끝난 직후 집에서 약을 먹으면서 잠시 쉬다가 다시 인쇄소에 나갔다. 그러다 주위에서 현재의 직장이 더 전망있는 직종이라 소개해 주어서 1980년 10월에 직장을 옮겼다. 현재 나는 신발 만드는 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하고 있다.
건강은 특별히 생활하는 데 불편할 정도는 아니고, 그때 부러진 이가 그대로 있고, 날씨가 궂으면 맞아서 얼이 든 팔다리의 상태가 좋지 않다. 5·18 부상자 신고는 1988년 6월에 YWCA에다 했고, 건강관리협회에서 진단을 받은 후 부상자로 판명됐다. 직장 때문에 부상자회 활동은 거의 못하고 있다. (조사정리 임금옥)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힘찬 월요일 시작 하셨죠.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보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