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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18)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순례] * 제8구간 (풍산→삼강) ② [병산서원-하회마을]
2020년 10월 15일 (일요일) [오정택 내외]▶ 이상배 동행
[병산서원]→ [하회마을]→ [만송정] 솔숲→ ‘하회탈춤’
병산서원(屛山書院)
□ 916번 지방도로→ 하회교차로(좌회전)→ 병산길→ 낙동강 따라→ [병산서원]→ [하회마을]→ 하회교차로(좌회전)→ 916번 도로→ 풍천파출소→ 914번 도로→ 광덕교→ 광덕1사거리→ 광덕솔밭길→ 화천서원 주차장→ [옥연정사]→ 부용대→ [겸암정사]→ [화천서원]→ (예천) 백수식당→ 풍천 [구담고택]
화산 아래 [병산서원]
☆… 풍산읍 안동 김씨 종택이 있는 '소산리 마을'과 안동 권씨 종택이 있는 '가일마을'을 둘러보고,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찾았다. 916번 도로 하회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병산길’을 따라가면 낙동강 강안으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가 이어진다. 그 길로 한참을 들어가면 병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해발 328m의 화산 아래 낙동강을 마주하여 남향으로 앉은 병산서원은 그 앞에 하얀 모래사장 안쪽에 낙동강이 흐르고, 낙동강과 임해 있는 절벽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병산(屛山)을 마주하고 있다.
* [안동 병산서원] ―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후생을 강학하는 공간
병산서원(屛山書院)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풍악서당(風岳書堂)’을 모태로 하여 설립되었다. 서당은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시절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더욱 학문에 정진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는 중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부친상을 당하여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다. 그후 선조 5년(1572년) 서애 선생 31세 때 그 서당을 병산(屛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그 서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의해 불태워졌다.
1607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년) 선생이 타계하고 난 후, 광해군 6년(1614년)에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비롯하여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門人)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병산서원(屛山書院)’으로 개칭, 위상이 바뀌었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 공의 위패를 존덕사에 종향하였다. 철종 14년(1863년)에 ‘屛山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병산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 입교당(立敎堂)은 1921년에, 사당 존덕사(尊德祠)는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초정일(丁日)과 9월 초정일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중종 37)~1607(선조 4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이현(而見)이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본관은 풍산으로, 류성룡은 1542년(중종 37) 10월에 의성현 사촌 마을 외가에서 아버지 류중영(柳仲郢, 1515~1573))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8년 17세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이다. 부친 류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목사ㆍ황해도관찰사ㆍ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
1562년 가을, 21세의 류성룡은 형 류운룡과 함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에 매진했다. 퇴계는 이들 형제의 학문적 자질을 높이 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형 운룡은 당시의 선비들이, 학문이 채 영글기도 전에 과거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세태를 한탄하고,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형 운룡에 이어 류성룡을 본 스승 퇴계는 그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며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임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또한 스펀지처럼 학문을 빨아들이는 그를 보고 “마치 빠른 수레가 길에 나선 듯하니 매우 가상하다.”고 찬탄하였다. 퇴계 이황의 또 다른 제자로 류성룡과 동문수학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내가 퇴계 선생 밑에 오래 있었으나 한 번도 제자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만이 이런 칭송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20대 시절, 류성룡은 스승인 퇴계(退溪)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여 배우기를 힘쓰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퇴계 선생을 통해 류성룡이 가장 관심을 갖고 배운 책은『근사록(近思錄)』이었다.『근사록』은 훌륭한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학문을 간추린 것으로, 송나라 때에 주자(朱子)와 여조겸(呂祖謙)이 편집한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받은『근사록』의 가르침은 향후 그의 학문과 정치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특히『맹자(孟子)』를 탐독하고 암송하면서 경세정치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 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賜暇) 독서하였다.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도승지·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류성룡은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 류성룡은, 임진왜란 중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고,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제조와 성곽수축 등 군비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보내온 문서에서 류성룡에 대해 “그에게 국정을 맡기면 … 사직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중흥시킬 것(王誠擧國政…計安社稷 再造山河)”이라고 극찬하였다. ‘재조산하(再造山河)’라는 말은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사후 안동 병산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류성룡은 학문적 업적보다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수습한 정치가로서 업적이 보다 주목되는 인물이다.『징비록(懲毖錄)』·『상례고증(喪禮考證)』·『신종록(愼終錄)』·『영모록(永慕錄)』·『난후잡록(亂後雜錄)』등 그의 저술에도 경세에 관한 내용이 절대적이어서 성리학자로서의 특징을 읽을 수 있는 글은 적은 편이다. 그러나 퇴계 이황의 고제(高弟)로서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영남학파의 발전에 한 축을 이루는 사상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류성룡은 스승 이황이 확립한 성리학의 기본 관점을 그대로 계승하지만, 사단칠정과 같은 성리설의 문제에 관한 특별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문인으로는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김응조(金應祖) 등이 유명하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역사적 가치] ―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
☆… 류성룡을 배향한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9개 서원이 2019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9개 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소수서원(紹修書院)’, 경상남도 함양군 ‘남계서원(南溪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옥산서원(玉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서원(陶山書院)’ 전라남도 장성군 ‘필암서원(筆巖書院), 대구광역시 달성군 ’도동서원(道洞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병산서원(屛山書院)‘, 전라북도 정읍시 ’무성서원(武城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돈암서원(遯巖書院)‘이다. 9개 서원은 한국의 문화유산을 넘어, 세계적인 인류의 문화 유산이 된 것이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의 구성과 의미
* [복례문(復禮門)] ― 자신의 욕망을 이겨 다른 사람과 한마음을 이루는 …
☆… 병산서원 원내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정면 1칸의 대문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의 경우는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문의 좌우로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복례문(復禮門)의 ‘復禮’는『논어』 「안연(顔淵)」편에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을 실행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자신의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간다면 천하 사람이 모두 어질게 될 것이다.(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고 한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사람마다 탐욕의 유혹을 이겨내고 예(禮)로서 자신을 절제하여 유학의 종지인 인(仁)을 이룩하라는 의미에서 ‘복례문’이라 했다.
* [광영지(光影池)] ― 복례문과 만대루 사이에 있는 작은 연못, 백일홍 흐드러지게 핀 …
☆… 광영지(光影池)는 정문인 복례문을 들어서면 바로 통행로 좌측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광영지의 ‘光影’은 주자의 시「관서유감」중 ‘天光雲影共徘徊’에서 인용한 것이다.
▶ 觀書有感(관서유감, 글 읽는 즐거움) -朱熹(주희)
半畝方塘一鑑開(반무방당일감개) 조그마한 연못은 거울 같아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 묻건대 어찌하야 그리 맑은 고
爲有原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 끝없이 샘물 솟아 그렇더란다
昨夜江邊春水生(작야강변춘수생) 어젯밤 강변에 봄비 내려서,
艨艟巨艦一毛輕(몽동거함일모경) 크나큰 전함도 깃털 같아라,
向來枉費推移力(향래왕비추이력) 애써서 밀어도 소용없더니
今日流中自在行(금일류중자재행) 오늘은 물길에 저절로 가네,
* [자연과 하나가 되는 열린 공간, 만대루(晩對樓)] ― 장식적 요소를 극도로 절제한 건축의 멋
☆… 병산서원의 문루인 만대루(晩對樓)는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마루를 받치고 있는 36개의 기둥들은 자연 그대로의 나무 모양을 살려서 사용하여,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멀리서 보면 기둥 위에 지붕이 덩그렇게 놓인,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이다. 누각을 지탱하는 기둥과 지붕으로 구성된 단순한 부재, 장식적 공간을 극도로 절제했다. 바닥 평면과 기둥 높이 그리고 지붕의 물매 등 산뜻한 멋을 이룬다. 건물 안의 인공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로 이어진다. 누각의 마루는 유생들이 우주 질서와 자연 순환을 탐구하던 성리학적 이상향의 공간이다.
만대루에 오르면, 낙동강과 병산(屛山)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기둥 사이로 바라보이는 낙동강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우물마루에서 배어나는 윤기에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초석 위에 자연 그대로의 기둥으로 구성된 아래층과는 대조적으로, 위층은 반듯하게 다듬은 누마루 기둥들이 정제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조선 선비의 청청한 정신이 아래 위층 건물에 동시에 살아난다.
☆… 만대루(晩對樓)의 ‘晩對’는 두보(杜甫 701-762)의 시(詩)에도 나오고, 주희(朱熹 1,130-1,200)의 시(詩)에서 도 나온다. 당나라 두보의 시「백제성루(白帝城樓)」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翠屛宜晩對]”에서 따온 것이다. 병산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이 만대루 앞 사각형 연지[光影池]에 비치고 서원 안마당에 달빛이 가득 내리면 병산서원은 그야말로 고요한 시적 공간이 되기도 한다.
▶ 두보(杜甫)의 시「白帝城樓」(백제성루)
江度寒山閣(강도한산각) 강은 차가운 산 전각을 지나고,
城高絕塞樓(성고절새루) 성은 아득한 변방 누각에 높다.
翠屏宜晚對(취병의만대) 푸른 절벽은 늦을 녘까지 마주 대할 만하고
白谷會深遊(백곡회심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
急急能鳴雁(급급능명안) 울 줄 아는 기러기 빠르디 빠르고,
輕輕不下鷗(경경부하구) 내려오지 않는 갈매기 가볍디가볍다.
彝陵春色起(이릉춘색기) 이릉에 봄빛이 일어나니,
漸擬放扁舟(점의방편주) 작은 배를 점점 띄우려 한다.
‘백제성’은 촉한의 유비(劉備)가 최후를 맞은 곳으로, 당나라 시인 두보가, 유명한 백제성 누대를 바라보면서 지은 시「晩對亭」에 나오는 ‘翠屏宜晚對(취병의만대)’에서 취했다.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싫지 않다는 뜻이다.
▶ 주자(朱子)의 시「晩對亭」(만대정)
倚笻南山巓(기공남산전) 지팡이에 의지해 남산에 오르니
卻立有晩對(각입유만대) 멀리 만대봉이 있네
蒼峭矗寒空(창초촉한공) 가파르고 가파른 모습 차가운 하늘에 우뚝한데
落日明影翠(낙일명영취) 지는 해는 푸른 절벽을 비추네,
‘晩對’는 주자의 무이정사(武夷精舍) 경치를 그린「무이잡영(武夷雜詠)」중의「晩對亭」(만대정)에도 나온다. 해질 녘에 취병을 바라보는 감회를 읊었다. 저녁 해가 병풍처럼 펼쳐진 푸른 절벽을 비스듬하게 비추는 모습에서, 두보와 주자는 산의 생기를 더 선명하게 느꼈던 것이다.
* [병산서원, 입교당(立敎堂)] ― 유생들이 배우고 훈장님이 기거하는 서원의 강학 공간
☆… 입교당(立敎堂)은 병산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만대루 밑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전면의 높은 석축단 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입교당은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2단으로 석축을 쌓았으며,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높은 쪽은 건물의 기단으로, 낮은 쪽은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영주 부석사 같이, 경상도 절집의 진입 공간이 누마루를 지나 대웅전 영역에 진입하는 방식과 똑같다. 이는 백제계 사찰 건축에서 보이는 누각을 끼고 돌아드는 방식과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는데, 산지 지형이 대부분인 경상도 지역에서 행했던 공간 활용의 좋은 예이다. 입교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을 중심으로 원장과 훈장이 기거하는 공간(명성재, 경의재)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교당(立敎堂)은 중심 강당으로, ‘立敎’는『小學』 立敎편에서 하늘로 부여받은 착한 본성에 따라 인간윤리를 닦아가는 가르침을 바르게 세운다는 것에서 인용한 것이다. 유생들이 배워야할 성현의 가르침인 오륜(五倫)을 바르게 세운다는 의미이며, 서생은 자기의 몸을 바로 세우고 나아가 선비로서의 사명을 바로 세우는 공부를 한다.
☆… 입교당 동쪽 대청 온돌방 ‘명성재(明誠齋)’는 반 칸 목을 물려서 개방하였으나, 서쪽 온돌방인 ‘경의재(敬義齋)’ 앞은 좁은 툇마루를 내달아 언뜻 보면 대칭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비대칭의 구도로 구성하였다. 대청의 전면은 창호나 벽을 설치하지 않고 개방하여 만대루의 트인 공간 사이로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明誠齋(명성재)’의 ‘明誠’은『중용』21장에 “정성(精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짐을 성(性)이라 이르고,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정성(精誠)스러워짐을 교(敎)라 하니, 정성(精誠)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정성(精誠)스러워진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성(誠)은 성실히 하는 것으로 행(行)에 해당하고, 밝음(明)은 이치를 밝히는 것으로 지(知)에 해당한다.
‘敬義齋(경의재)’의 ‘敬義’는 『주역』「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 “군자는 경(敬)을 행함으로써 내면을 곧게 하고, 의(義)를 행함으로써 외면(행동)을 바르게 한다.(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는 구절에서 인용하였다.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을 닦아 자신을 곧게 하고 의(義)를 행함으로서 행동의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 입교당의 앞마당은 가로 세로 12미터 내외의 마당이다. 안동 사대부 종가의 ‘ㅁ’자집 안마당을 보는 듯하다. 이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보편적 미감이다. 마당 동쪽에는 ‘동직재(動直齋)’, 서쪽에는 ‘장서실(藏書室)’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동·서재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동재는 고학년, 서재는 신참 유생이 사용하는 곳이다.
병산서원은 입교당 앞뜰을 건물과 울타리 담으로 막아서 경내와 경외를 뚜렷이 구분하였지만, 만대루의 트인 공간을 통하여 시각적으로는 완전히 개방된 공간으로 꾸몄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서원 안으로 끌어들인 특이한 구조다. …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산수(山水)가 없으면 감정을 순화하지 못하여 사람이 거칠어진다. 산수(山水)란 멀리서 대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큰 포부를 갖게 하여 인물을 만들어내고, 가까이 대하면 심지를 깨끗하게 하고 정신을 즐겁게 한다.”고 했다. 서원이 산수경치가 빼어난 곳에 위치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 [신문(神門)과 존덕사(尊德祠)] ― 신문은, 존덕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 신문(神門)은 사당의 정문으로, 서원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한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는다. 향사례에서 신문 앞의 마당은 중요한 장소가 된다. 외삼문 중앙 두 기둥에 주역의 팔괘(八卦)가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는 서애 선생의 일생과 그 시기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주역의 괘로 풀어서 세겨 둔 것이다
☆… 존덕사(尊德祠)는 서애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우러른다.’는 뜻에서 명명하였다. 이곳에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위패와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의 위패를 모신 사당(祠堂)이다. 잘 다듬은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변형된 익공형(翼工形)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청이 되어 있고, 전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있다.
존덕사(尊德祠)의 '尊德'은『중용』27장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고, 묻고 배움을 길로 삼는다.(君子尊德性而道問學)’ 에서 취하였다. 윗자리에 거처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래에 일하면서 배반하지 아니하여 명철보신(明哲保身. 旣明且哲하고 以保其身)한 서애 선생의 삶을 존숭하는 의미가 있다.
* [전사청(典祀廳)과 주사(廚舍)] ― 제향을 진행하고, 사당(祠堂)에 올릴 제수를 장만하는 곳
전사청(典祀廳)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부엌[廚所] 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써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주방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다. 존덕사의 오른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주사(廚舍, 주방이 있는 건물)는 서원의 관리인이 거주하는 곳으로 사당을 관리하는 고지기, 유사를 보좌하는 장무 등이 있고 , 유생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역할과 향사 때 제수를 준비하는 일을 한다. 병산서원의 주사는 안동지방 특유의 뜰 집으로 안마당을 중심으로 口형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헛간, 고방, 방앗간 ,부엌, 장독대 등이 돌아가면서 배치되어 있다.
* [달팽이 뒷간] ― 열린 공간이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특이한 구조
☆… 서원 밖 주사(廚舍) 바깥에 있는 노천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이 하늘에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400여 년 전 서원 건물과 함께 지었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한다. 병산서원의 부속 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260호(1978년)로 지정되었다. 2003년 보수 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병산서원을 통해서 본 서원 건축의 특성] ― 절제되고 단아한 건축양식과 자연과 인간의 합일
조선 건축은 온돌방과 마루가 자연스럽게 어울려 배치되어 있다. 온돌방은 벽으로 둘러싸인 따뜻한 공간으로서 외부에 폐쇄적인 반면, 마루는 사방으로 트여 있어 개방적이고 시원한 공간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은 가을부터 봄까지 머무는 겨울 공간이며, 마루는 여름 공간이다. 한옥은 자연의 일부이다. 온돌방은 벽과 창호로 실내를 한정해 자신만의 은둔세계를 만들지만, 대청마루는 외부로 트인 공간이어서 주변 자연 속에 건물이 그대로 스며드는 개방적인 공간이 된다. 특히 사방으로 트인 누마루는 자연에 자신을 투영해 세계를 관조하는 공간이다. 반면에 건물과 담으로 둘러싸인 뜰은 늘 고요함이 서려 있다. 이러한 조선 건축의 특성은 살림집, 사찰, 궁궐, 누정(樓亭) 건축 등 모든 건축에 나타나는데, 특히 서원에는 이러한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서원은 성리학적 가치관과 자연관이 반영된 물리적 표상이다. 서원 건축에는 절제되고 단아한 건축 형식과 질서 그리고 자연과 인공을 합일하려는 공간 처리와 배치 형식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이 극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성리학의 미학으로 만들어낸 조선의 사랑방 가구와 석물에서 보는 것과 같은 또 다른 형식의 질박한 조형미이기도 하다. ― * 이 글은「병산서원, 비어 있음 미학의 절정」 (한국의 미 산책, 2007. 11. 30., 최선호)을 참조하여 정리한 것이다.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의 병산서원을 돌아보고 나니,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의성 김씨 학봉과 풍산 류씨 서애는 조선시대 안동지방에서 명문가(名門家)를 대표하는 분들이다. 두 분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다. 우선 두 사람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벗으로 두 사람 다 빼어난 제자였다. 그리고 당대 과거에 급제하여 관계(官界)에 나가 국가의 요직을 맡기도 하고, 왜국에 통신사로도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의 위기에서 한 사람은 영의정으로, 다른 한 사람은 초유사나 의병장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분들이다.
☆…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자가 사순(士純), 호가 학봉(鶴峯)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성일은 안동 임하(臨河)에서 의성 김씨 종가 청계공 김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556년(명종 11) 도산서당으로 퇴계 선생을 찾아가 문하생이 되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正字) ·대교(待敎) ·봉교(奉敎)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死六臣)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병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귀국한 이듬해인 1579년 홍문관교리를 거쳐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가 되어 함경도 변경지역의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어 장기간 끌어온 송사(訟事)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590년 일본의 정황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통신사행의 부사(副使)가 되었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 보고 때문에 임진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각인되었고,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학봉은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하게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학봉은 정사와 부사가 입을 모아 전쟁의 위험성만을 강조하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일부러 정사와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민심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전쟁의 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준비할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성일은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 류성룡의 변호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었다. 경상도로 내려가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하며, 의병을 두루 모으고 관군과 의병간의 협력도 도모케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 8월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충정을 다할 기회를 맞았다.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모으며,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진주성을 왜군으로부터 지키도록 하였다. 1593년에 진주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던 중에 숨을 거두었다. … 김성일은, 안동에서는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적군과 의연히 대처한 지사의 면모로 더 잘 알려져 있고, 특히 퇴계의 수제자이자 퇴계의 학맥을 이은, 제자를 많이 둔 학자로서 존경받고 있다. …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泗濱)서원, 영양의 영산(英山)서원, 의성의 빙계(氷溪)서원, 하동의 영계(永溪)서원, 청송의 송학(松鶴)서원, 나주의 경현(景賢)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 ― 그 제자·후손들이 벌인 ‘병호시비(屛虎是非)’
퇴계(退溪)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지난 1575년(선조 8) 안동지역 사림(士林)들이 힘을 모아 안동부 동북쪽 월곡 여산촌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건립하였다. 이 곳은 퇴계 선생이 젊었을 때 독서하던 곳이다. 1576년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퇴계 선생을 봉향한 서원이라는 점에서 이 서원은 큰 영향력을 가졌으며, 서원의 규모도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대표 서원이었다. 그러나 여강서원은 1605년 대홍수로 유실되었고, 1606년 북쪽으로 100보 위치에 중창하였다. 숙종 2년(1676)에 현판을 하사 받아 호계서원(虎溪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호계서원은 안동유림의 본거지이며, 안동선비문화의 상징으로, 400여 년 동안 안동 정신문화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1625년(인조 3) 이 호계서원에 퇴계 선생의 양대 제자 김성일(金誠一)과 류성룡(柳成龍)을 추가 배향하면서, ‘스승인 퇴계 선생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좀더 서열이 높은 분을 왼쪽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기 때문에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서애 류성룡 쪽에서는 벼슬로서 영의정이 더 높으니 서애를 왼쪽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김성일 쪽에서는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을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봉이 서애보다 네 살이 많다.) 그것은 단순히 서애와 학봉의 인물이나 학문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서애의 사상을 따르는 제자들과 학봉의 사상을 숭상하는 제자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가치평가를 받느냐의 문제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풍산 류씨와 의성 김씨라는 안동의 명문사족간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 결국 학봉을 왼편, 서애를 오른편에 모시기로 했다. 그런데 서애 쪽에서는 순순히 승복하지 않고 문제를 삼았다. 그런데 당시 영남학파의 좌장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서애를 왼편에 배향해야 한다'는 제정(制定)을 내림으로써, 서애를 왼쪽에 모시게 되었다. 당시 학봉의 제자들은 불만이 있었지만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우복(愚伏)의 판정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러나 잠복된 시비(是非)는 세월을 넘어서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1805년 영남 유림들이, 공자와 맹자를 모시는 성균관 문묘(文廟)에, 퇴계의 4대 제자인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여헌(旅軒) 장현광 (張顯光, 1554~1637)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게 해달라고 청원을 올리면서, 누구를 앞에 적느냐에 문제가 생겼다. 이때 나이순으로 학봉이 앞이 오르니 서애 쪽에서 서열이 잘못 됐다고 따로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이 건(件) 자체를 기각해버렸고 네 분의 문묘 종사(從祀)가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때 억울하게 문묘 종사(從祀)의 길이 막혀버린 정구와 장현광의 제자들이 두 분을 따로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에 모실 것을 결정하자 안동 유림은 이를 규탄하는 통문을 썼다. 이때 통문의 작성이 학봉 쪽이었던지 이번에도 학봉을 앞에 거명하니 서애파는 다시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200여 년에 걸쳐 세 번이나 서열이 문제되자, 결국 서애파가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서애를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따로 모셔가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이황(李滉)은 도산서원(陶山書院)에, 학봉(鶴峯)은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서애(西厓)는 병산서원(屛山書院)에 갈라서 모시게 되었다. 이를 두고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사이의 시비라고 해서 ‘병호시비(屛虎是非)’라고 한다. 그 뒤 모실 분을 잃어버린 호계서원은 사당 없이 강당만 남았다가, 안동댐 건설로 서원 자리가 수몰되게 되자 임하면으로 옮겼다. 그 시비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400여 년이 흘렀다.
[400년 병호시비(屛虎是非)의 종지부] ― 호계서원 복원으로 화합한 서애-학봉 두 문중
그런데 최근 두 문중 간의 갈등이 400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중, 2020년 11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한국국학진흥원 옆 산록에, (구한말 서원 훼철령과 댐 건설로 수몰 위기를 겪은) 호계서원을 다시 건립하여, 2020년 11월 20일 오전 호계서원 복원을 기념하는 고유제가 열렸다. 새로 지은 호계서원에, 양 문중이 서로 화합하여, 퇴계 선생의 위패를 중심으로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좌·우에 모시게 되었다. 이제 400여 년간 대립했던 ‘병호시비(屛虎是非)’가 일단락된 것이다. 호계서원의 건설은 경상북도(이철우 도지사)가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금반 호계서원 완공과 고유제에 앞서, 지난 2월 말 안동시청에서, 서애(西厓) 문중의 류영하 종손과 학봉(鶴峯) 문중의 김종길 종손이, 퇴계(退溪)의 종손인 이근필 옹이 배석한 자리에서, 복원될 호계서원의 위패 봉안 순서에 기꺼이 합의했다. 벼슬의 서열에 따라 서애 류성룡을 퇴계 선생의 왼쪽에, 학봉 김성일을 오른쪽에 모시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학봉의 옆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추가로 모시기로 합의했다. 대산 이상정은 학봉 계열의 문인으로 퇴계의 학문을 가장 잘 계승하여 발전시킨 사람이다. … 서로 배려하고 양보한 결과이다. 비로소 역사적인 화합의 장을 만든 것이다.
당초, 호계서원(虎溪書院)은 1573년 안동유림이 주축이 되어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서 세웠다. 하지만, 1625년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가 봉안되면서 '병호시비(屛虎是非)'가 불거졌다. 서애와 학봉의 위패 중 어느 쪽을 상석(좌측)에 두느냐를 놓고 400년간 논쟁을 벌여 왔던 것이다.
서애 류성룡(1542~1607)과 학봉 김성일(1538~1593)은 두 분 다 안동에서 나고 자란 퇴계의 수제자다. 학봉은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초유사로 적과 싸우던 중 병사했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선조를 모시면서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 일을 한 인물이다. 경상북도가 거액을 들여 안동 국학진흥원 옆에 호계서원(虎溪書院)을 복원하면서 400년 만에 대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호계서원(虎溪書院) 이석희(84) 원장은 “두 분 모두 퇴계의 수제자로 영남 유림의 큰 어른들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자존심 싸움이 이어져 온 것 같다”며 “누가 어느 자리를 차지하느냐보다는 위대한 학자의 사상을 기리는 일이 더 중요한 만큼 계속되는 논란은 무의미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한국국학진흥원 옆 산록에 새로 지은 호계서원(2020.11.20) 앞으로 나무를 심어 조경을 해야 한다.
☆… 호계서원(虎溪書院)을 새로 건설·복원한 것을 계기로 서애(西厓)와 학봉(鶴峯)의 두 문중이 그 동안의 길고 긴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화합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사실 서애나 학봉 두 분이 살아계실 때는 두 분 다 퇴계 선생을 모시고 늘 공경하는 마음으로 서로 우애가 깊었다. 각 문중이나 제자들이 자기의 조상이나 스승을 더 높이 모시려는 열렬한 마음이 그 동안 오랜 갈등을 빚어왔다. 이제 그 첨예한 대립을 극복하고, 양 문중이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화합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쁘고 경하할 일이다.
더구나, 2020년 필자가 낙동강(洛東江)을 종주(從走)하면서 내세운 주제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어서 그 감회가 남다르다. 지천(支川)의 물줄기가 본류에 들어오면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큰 물줄기를 이루듯이, ‘참다운 삶이란 모든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나의 절절한 기원이 낙동강 호계서원에서 그 결실을 거두었으니 더없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현금의 우리나라의 사정을 보건대, 정권의 편 가르기식 정치가 빚어낸 망국적 국민 분열, 그것도 적대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호계서원의 화합은 실로 그 의미한 바가 크다. 작금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국민화합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 그것이다. 각자의 개성과 생각은 다를지라도 대의(大義)를 위해 한마음이 되는 일이다.
하회마을
☆…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가는 강변길은 열려 있지 않다. 그래서 병산서원의 뒷산인 화산(338m)의 산길을 넘어가야 한다. 그리 가파르지는 않지만 1.4km의 산길이다. 약 40분이 걸린다. 산을 넘어가면 하회마을 초입이다. 거기엔 하회탈춤박물관과 공연장이 있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가문의 세거지이도 하지만, 그 문화역사적 가치로 보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사문화 마을이다. 그리고 나아가, 하회마을은 2010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이제는 세계인이 주목하는 인류의 문화유산이 되었다.
☆… 하회마을은 풍산(豊山) 류씨(柳氏)가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同姓)마을이다. 1392년 조선 초기 공조전서를 지낸 류종혜(柳從惠) 공이 입향한 후 풍산 류씨 600여 년간 세거하고 있다. 겸손의 유학자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과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국난 극복에 큰 공을 세운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더욱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 물돌이)’라고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해당하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해발 328m의 화산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다. 수령이 600여 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가 있는 지역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화산 너머 병산서원이 있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坐向)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들의 집들이 정남 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기와집을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하회마을의 주요 고택을 둘러본다.
☐ 양진당(養眞堂) 또는 입암고택(立巖古宅) 보물 제306호
☆… 우뚝 솟은 솟을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 선생과 서애 류성룡 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사랑채는 고려 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조선 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공존하는 고택이다.
양진당은 풍산 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 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였는데, 고려 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불천위는 공신이나 대학자 등 탁월한 사람에게만 사당에 영원히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 서애종택(西厓宗宅)
☆… 충효당은 문충공(文忠公)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西厓宗宅)’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 당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초가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 당하고 낙향했을 당시,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弄丸齋)에서 타계했다. 서애의 묘소도 풍산읍 수미동 산록에 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西厓)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 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元之) 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永慕閣)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 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하고 있으며, 충효당 바깥마당에는 1999년 4월 21일 영국의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기념 식수(植樹)한 구상나무가 서 있다.
☐ 영모각(永慕閣, 박물관)
☆… 충효당 내 영모각(永慕閣)에는 류성룡(柳成龍,1542∼1607) 선생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충효당 사랑채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1966년 6월에 개관하였으며 1977년 6월에 한옥으로 신축하였다. 명칭은 서애 선생이 쓴 ‘영모록(永慕錄)’에서 따왔다. ‘영모록(永慕錄)’은 풍산 류씨 세계(世系)를 집록한 책으로, ‘永慕’는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영모각에는 국보132호「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보물160호「류성룡 종손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11종 22점과 보물460호「류성룡종손가유물(柳成龍宗孫家遺物)」가운데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이 중「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군무를 총괄하던 서애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기록과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문건과 자료들이 일괄 지정된 것이다. [보물160호]는 류성룡 선생이 직접 쓴 것과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조정에서 선생에게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 화경당(和敬堂, 중요민속자료 제84호)
☆… 이 건물, 화경당(和敬堂)은 정조·순조 조에 초계문신과 예조·호조의 참판을 역임한 학서(鶴棲) 류이좌(柳怡佐)의 아버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柳師春) 공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처음 건립하였다.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은 경상도도사를 지낸 그의 증손 석호 류도성(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 작천고택(鵲泉古宅, 중요민속자료 제87호)
☆… 지금은 집주인 이름을 딴 '류시주 가옥'이라고도 하나, 원래는 작천(鵲泉) 류도관 공의 호를 따「작천고택(鵲泉古宅)」이라 불려왔다. 건축수법과 양식으로 미루어 조선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은 일(一)자형 안채만 남아 있는데, 갑술년(1934) 대홍수로 1채가 유실되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며,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이어지는 앞마당에 작은 토담을 두어 사랑손님과 안채의 부녀자가 마주치지 않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 염행당(念行堂, 중요민속자료 제90호)
☆… 충효당과 더불어 하회의 남쪽을 대표하는 남촌댁(당호 염행당)은 정종21년 지은 99칸의 건물로서 하회마을 남쪽 사대부의 가옥을 대표하였으나, 1954년 화재로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대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다. 많은 도서와 진귀한 골동품들도 그 때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특징은 문간채는 솟을 대문을 두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구들연기를 하나의 큰 굴뚝으로 뽑아낼 정도로 사대부집 가운데에서도 훌륭한 건물이었다. 별당채는 별도로 일곽을 둘러 조성하여 후원 별당의 아취(雅趣)가 느껴진다. 벽체의 화방담은 화경당(북촌)의 화방담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가식이나 과장 없이 천연덕스럽게 장식하였는데, 기와쪽을 이용하여 석쇠무늬를 바탕으로 희(囍)자와 수(壽)자를 만들었다.
☐ 양오당(養吾堂, 중요민속자료 제91호)
☆… 당호는 양오당(養吾堂)이며, 주일재(主一齎)는 류후장(柳後章 1650~1706)의 아호이다. 이 집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증손인 류만하 공이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지은 집으로 그의 아들인 류후장 공이 증축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면 사랑채가 정면에 보이고, 좌측에는 작은 담을 쌓아 놓았는데, 이것을 내외담이라 한다. 안채로 통하는 문 앞에 내외담을 쌓아둠으로써 문을 열어도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주일재는 사랑채, 안채, 사당, 광채(곡식 등을 넣어 두는 곳)로 구성되어 있다.
☐ 하동고택(河東古宅, 중요민속자료 제177호)
☆… 하회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하동고택(河東古宅)」이라 부른다. 지금의 예천군 용궁 현감을 지낸 류교목(柳敎睦) 공이 조선 헌종2년(1836년)에 세웠고, 1953년 현재 소유자의 부친이 인수하였다. 전체 24칸의 활궁(弓)자형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채로 이어져 있는 민도리집이다.
특이한 점은 대문채는 초가집이지만 사랑채와 안채 등은 기와집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건축적 특징은 창건자가 후손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차례 융성하면 한 차례는 쇠락하므로 욕심을 내어 전부를 채우려 말고, 부족한 가운데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안채 가운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 열린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 일을 하는 부녀자들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 [하회마을] ―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 하회마을은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우리나라의 열 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2010. 7. 31) 되었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의안에서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양동’은 주거 건축물과 정자(亭子), 정사(精舍), 서원(書院) 등 전통 건축물들의 조화와 그 배치 방법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문집, 예술작품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 및 문화적 성과물과 공동체 놀이, 세시풍속 및 전통 관혼상제 등 주민들의 생활과 신앙에 관계된 무형유산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점도 높이 평가하였다.
☐ 만송정숲(萬松亭, 천연기념물 제473호)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마을 122호)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2006년 11월 27일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되었다.
☆… 조선 선조 때 서애(西厓)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1983년에 세운 만송정비(萬松亭碑)에는 이 솔숲의 내력과 함께, 현재의 숲이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송정비(萬松亭碑)
부용대에서 바라본 만송정(萬松亭)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 이 소나무들의 크기는 나무높이 16~18m, 가슴높이 줄기지름 30~70㎝ 정도이다. 이 숲은 여름에는 홍수 때 수해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주며,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 혹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보호면적은 47만 6,430㎡이다.
매년 음력 7월 16일 밤에는 이 숲에서 강 건너편 부용대 꼭대기까지 밧줄로 이어 불꽃을 피우는 선유(船游)줄불놀이가 펼쳐진다. 부용대에서부터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참나무숯의 불꽃이 하늘에서 터지고, 그 빛이 강물에 비치는 모습은 장관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의 뱃놀이와 함께 펼쳐졌다고 하니 그 풍류를 짐작할 수 있겠다. 4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줄불놀이는 일제강점기부터 수십 년간 중단되다가 최근 다시 이어지는 전통놀이이다. 중요민속마을로 지정된 하회마을과, 그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 그리고 맞은편의 부용대와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난 마을 숲으로 그 역사적ㆍ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
[하회마을에서 바라본 부용대] ― 오른쪽 강안에 옥연정사, 왼쪽에 겸암정사가 있다.
선유(船游)줄불놀이 ―[자료 사진]
하회마을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기도 하지만,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었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 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들의 삶 자체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하회탈(국보 121호) /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자료 사진]
☆… 오늘 여정의 두번째 소구간인 병산서원과 하회마을 탐방을 마쳤다. 다음 여정은, 광덕리 화천서원 주차장에서 낙동강 강안으로 내려가 류성룡의 '옥연정사'를 탐방하고, 다시 되돌아 나와 '부용대'에 올라 낙동강이 품고 돌아가는 하회마을의 풍경을 조망한 후, 강안으로 내려가 류운룡의 '겸암정사'를 둘러볼 것이다. 그리고, 부용대를 내려와서 주차장 바로 앞에 있는 '화천서원'을 탐방할 예정이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