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산리 670번지로 이사를 왔다!!
구동훈 / 양도면 조산리
올해 9월, 양도면 조산리로 이사를 왔다.
이사 온 집은 동, 서, 남, 북으로 사방이 논, 밭에 둘러싸여 있고, 저 멀리 앞으로는 마니산, 뒤로는 진강산이 보인다. 2층집인데, 옥상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면 어찌나 경치가 좋은지 답답하다가도 속이 뻥! 뚫리고 기분이 좋아진다. 또, 논길을 따라서 경치를 보며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밤에는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별님들이 많이 계셔서 낮, 밤으로 참 좋다! 어머니는 들판에 홀딱 벗고 앉아 있는 느낌이라고 재미있는 표현을 하신다.
과천에서 96년도부터 살았고 그 이전에는 마포 성미산마을에 살았다고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과천에서도 오랫동안 관악산 아래 감나무 집 2층이 우리 집이었고 이사 오기 전에는 청계산자락에 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았던 곳은 언제나 자연과 함께하는 곳이었다. 과천에서의 어린 시절은 봄에 개구리 알과 도롱뇽 알을 가지고 놀았고 여름에는 매미채를, 가을에는 감을 따고 낙엽을 던지며 놀았다. 과천과 강화를 오가는 생활은 결국 형과 함께 산마을 브라더스가 되었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강화에 자주 들락날락하며 생긴 추억이 많이 있다. 처음 강화에 온 것이 언제냐고 어머니에게 물으니 4살 때라고 하신다. 96년도 과천에 살면서 우리는 강화도에 여행을 다닌 것이다. 처음 왔을 때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수녀님과 함께 온 기억이 조금 있다. 그 후로도 매년 두세 번씩 오면서 모내기도 하고 고구마, 감자를 캐는 활동을 한 것은, 몸으로 한 체험이라서 그런 걸까? 아직도 생생하다.
어렸을 때 모내기를 하기 위해 논에 들어가면 물이 허리까지 차올라서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온몸에 흙을 묻혀가며 모내기를 했고, 고구마, 감자를 캘 때 형이랑 누가 누가 더 큰 고구마를 캐는지 시합도 하고 내 머리보다 더 큰 것들을 모아가서 집에서 맛있게 쪄먹은 기억이 있다. 참 즐거웠다. 사진촬영이 취미였던 어머니가 강화에서도 어린 시절 재미있는 사진들을 많이 찍어주셨다.
강화에서 97년
산마을 브라더스로
강화와의 인연은 형과 함께 양도면 삼흥리에 있는 기숙사 대안학교인 산마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더욱 깊어졌다. 학교 건축을 할 때도 어머니는 형과 나를 데리고 보여주셨던 기억이 있다. 산마을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자연, 평화, 상생을 교육이념으로 하는 산마을은 나의 영혼을 성장시켜준 곳이다. 공동체생활의 원칙을 지켜야 하는 기숙사 생활부터 흥미로운 동아리 활동과 건강한 사회변화를 주도하신 분들의 각종 강연회를 접할 수 있었다. 다양한 책들을 읽었고, 어느 곳보다 유익한 기회들이 많았다. 특히나 5 18 광주항쟁기념행사와 지리산 종주를 고등학교 시절에 다녀온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사실은 중학교 3학년 때 지원을 했으나 떨어지고 과천고등학교에 다녔었다. 그러다가 2학년 때 한 학생이 휴학하게 되어 내가 전학을 올 수 있었다. 나는 이미 형과 함께 전교생을 많이 알고 있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산마을에 적응할 수 있었다. 이전에 다녔던 학교는 한 학년에 400명씩 전교생이 1,000명이 넘는 학교였다. 워낙 많다 보니 같은 반 친구들조차도 어색한 점이 있었고, 남녀 분반이었기 때문에 여자 친구들과는 동아리에 들어가서야 몇 명 알 수 있었다. 선생님들과도 수업이 끝나면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과천고등학교의 생활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으나 어머니는 나에게 산마을고등학교가 아주 잘 맞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처음 산마을에 왔을 때 전학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보다도 형, 누나들과 동생들 그리고 훌륭한 선생님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한 학년에 20명씩 전교생이 60명 정도의 작은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매일매일 함께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고, 선생님들과의 이야기 나누는 시간도 많았다. 서로의 기쁨과 슬픔, 고민을 나눌 수 있는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기뻤다.
산마을에는 일반 학교의 야자대신 ‘야학’이 있다. 여러 가지 강좌를 개설하여 학생들이 관심 있는 수업을 선택하여 듣는다. 나는 그중에서 자연건강요법, 서각, 인문학 산책, 시사 포인트, 미술, 밴드를 들었는데, 이외에도 다양하고 정말 유익한 수업이 많이 있다. 산마을에서만의 특별한 수업을 들으면서 몸과 정신이 성장할 수 있었다.
2010년도 입학식 축하연주
형과 함께 동반입대를 했다.
산마을고등학교를 졸업 후 3월에 나는 바로 대학이 아닌 군대에 입학을 했다.
내가 복무한 부대는 강원도 철원에 있는 포병대대로 자대배치를 받은 곳은 기타가 수북이 쌓여 있는 음악이 있는 곳이었다. 병사가 60명이 채 안 되는 산 중턱에 위치한 작은 부대였다. 주변에 논 과 밭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생활해온 산마을고등학교와 비슷해 친근감이 들기도 하였다. 형과 함께 부대에 하모니카 동아리를 만들어서 반년마다 열리는 대대 동아리 경연대회에 총 3번 참여하여 1등 2번, 2등 1번의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특히, 마지막 대회는 날짜 변경으로 인하여 휴가 기간에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복귀해서 받은 감동의 1등이었기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 휴가까지 반납하며 참여한 우리 형제는 포상휴가를 일등병 이등병 후임들에게 휴가를 양보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 흐뭇한 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입대하였기 때문에 전역 후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여행도 다니고, 일도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싶었다. 전역하는 날부터 어머니가 활동하시는 강화마을협동조합의 창립기념식에 하모니카 연주를 하기위해 철원에서 택시를 타고 강화군농업기술센터로 갔다. 참... 택시비가 15만원이었다.
2013년에 나는
성공회 김성수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인사를 드렸다. 어릴 때는 매번 만날 때마다 내 머리에 있는 상처를 보면서 어디 진짠가 아닌가 보자 하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일 년 동안 김성수 할아버지가 설립하신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인 ‘우리마을’에서 장기 자원봉사활동을 하기로 하였으나 하모니카 수업을 하게 되어 아쉽게도 몇 번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다른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매주 금요일은 서울의 삼일초등학교 4학년 재량시간에 전체 6학급 하모니카 수업을 하고, 화요일에는 내가 졸업한 산마을고등학교 야학 시간에 하모니카 수업을 하고 있다. 3년 전 까지만 해도 수업을 듣는 학생의 입장에서, 이제는 선생님이 되어 수업을 준비한다. 후배들과 함께하는 것은 학생 시절 선생님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다. 나이 차이가 적지만 때로는 선생님처럼 진지하게, 때로는 형처럼 장난도 치면서 재미있고 정겨운 수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도장리 주민 네 분과 함께 하모니카 수업도 하게 되었다. 비록 만나면 하모니카를 연습하는 것보다 술 마시는 날이 더 많은 것 같긴 하지만...꾸준히 해서 함께 멋진 무대를 만드는 기대를 하고 있다. 도장리에서도 조산리에서도, 강화의 이곳저곳에서 아름다운 하모니카 멜로디가 울려 퍼질 것이다.
하모니카 수업 이외에도 올해에는 강화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봄에는 마을 논에서 못자리 작업도 참여하였는데, 산마을에 다닐 때 한 번 해본 경험이 있어서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일을 다 마치면 근처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역시 몸을 쓰고 난 뒤의 밥은 꿀맛이다!
6월에는 길상면 온수리 성당에서 ‘제5회 한여름밤의 음악회’ 무대에서 형과 함께 하모니카 연주를 하였다. 오랜만에 정말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연주라 긴장도 되었지만,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다른 멋진 공연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또 얼마 전 10월 ‘제3회 우리마을 미디어 문화제 어울림축제’ 가 있었는데 멋진 성악가들과 함께 하모니카 연주를 하였다. 정말 훌륭한 성악가분들이 많이 오셔서 하모니카가 너무 약하게 보이면 어쩌나 하는 기대로 ‘출선야상곡’이라는 나름의 대곡을 준비하였지만, 두 번째 곡인 ‘Danny Boy’를 마쳤을 때 더욱 박수를 많이 받았고 나 혼자만 앵콜도 받았다! 앵콜곡으로 ‘아빠의 청춘’ 을 불러서 모두가 더욱 흥겨울 수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강화와 서울을 오가느라 정신없는 한 해를 보낸 것 같다. 군대에서의 ‘전역 후 계획’ 중 이루어진 것이 몇 개 없어서 더욱 씁쓸하다. 2013년이 가기 전에 마니산에 오르면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싶다. 내년에는 피아노와 작곡, 음악공부에 전념하려고 한다. 후년에도 10년 20년 이후에도 강화 청년으로, 강화 시민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살게 될 것인가?...
앞으로 강화 청년으로서의 삶이 나 자신도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