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Middle East)지방의 역사와 문화<2>
4. 중동지방의 석유산업
이곳은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은 비옥한 토질로 농업이 일찍 발달하여 살기가 좋은 지역도 많았지만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지역이 사막화되면서 대부분 유목생활을 하거나 부근 지역을 떠돌며 물건을 사고파는 캐러밴(Caravan) 활동 등으로 열악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캐러밴(Caravan)은 낙타에 자잘구레한 생활용품을 싣고 사막을 가로질러 다니는 장사치들이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영국인이 이곳 사막지역에서 석유를 발견하면서 얼마 후부터 갑자기 중동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이곳의 석유를 두고 영국, 미국 등 세계의 강국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1960년 들어 이곳 석유생산국들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결성하여 뭉치고 가장 큰 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끌면서 차츰 경제권을 거머쥐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에 중동 붐이 일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제사정이 몹시 좋지 않은 박정희 정권시절이었는데 정주영을 앞세워 중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는데 우리나라 산업역군들이 수없이 많이 중동으로 가서 돈을 벌어들였는데 주로 사우디아라비아로, 내 친구들도 많이 다녀왔다.
5. 중동지방의 신기한 이야기들
알라딘의 램프 / 신드밧드의 모험(나르는 양탄자) / 열려라 참깨(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우리가 예전 아라비아(Arabia)라고 부르던 중동지역은 숱한 신기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는 곳이었다.
1954년, 손로원이 작사하고 한복남이 작곡, 허민이 노래한 ‘페르샤 왕자’를 소개해 본다.
페르샤 왕자
별을 보고 점을 치는 페르샤 왕자 눈 감으면 찾아드는 검은 그림자
가슴에다 불을 놓고 재를 뿌리는 아라비아 공주는 꿈속의 공주
오늘 밤도 외로운 밤 별빛이 흐른다.
1950년대, 너무나 유행하던 우리나라 가요인데 가사에서 보는 것처럼 페르샤(아라비아지방)는 신비에 쌓인 곳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Arabian Nights)도 신기한 이야기들로 가득해서 너무나 인기가 많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천일야화라고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1000일 동안의 밤 이야기로 이해하지만 사실 천일야화(千一夜話)로 ‘천 하룻밤(1001) 동안의 이야기(1 Thousand and 1 Night Story)’이다.
이 아라비안나이트는 이 지역에 전승되던 설화(說話)를 모은 것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의 동방학자 앙트와느(Antoine)가 소아시아를 여행하면서 마호메트 교도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모아서 1704년 번역에 착수하여 17년에 걸쳐 체계적으로 완성하였는데 모두 12권 분량이었다고 한다.
앙트와느 가랑은 이야기의 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의 에피소드를 써서 첫머리에 올린다.
페르시아의 왕 사리아르는 왕비를 너무나 사랑했는데 어느 날 사냥을 하러 가다가 왕비가 너무 보고 싶어 일행을 그곳에 잠시 쉬게 하고 서둘러 왕궁으로 되돌아와서 침실로 가자 시종들이 기급을 하며 숨어버린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왕이 침실로 가서 보았더니 왕비가 젊은 남성 흑인과 놀아나고 있었다.
왕은 즉시 흑인과 왕비를 죽여 버리고는 새로운 법령을 내려 매일 저녁 미인을 한사람씩 뽑아 수청을 들게 한 후 아침이면 바로 죽여 버렸는데 3년간이나 지속된다. 페르시아 전국 딸을 가진 부모들은 공포에 떨게 되어 일찍 시집을 보내거나 국외로 도피시키는 부모도 많았다고 한다.
보다 못한 재상(宰相)의 딸이었던 세라자드(Sheherazade)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자신이 하룻밤 수청을 들게 해달라고 하는데 동생 두냐자드를 데리고 가도록 허락받는다. 이른 저녁 왕의 수청을 든 후, 왕에게 간청을 하여 허락을 받는데...
‘제 동생이 제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서 데리고 왔는데 이야기를 해주면 안될까요?’
왕이 허락을 하자 커튼을 치고 바깥에 작은 침대를 가져다 놓고 동생 두냐자르를 데려오도록 한다.
그리고는 왕은 주무시라고 하고 소곤소곤 커튼 밖에 있는 동생에게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왕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다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는 부분에 이르자 동녘이 훤히 밝아오는데 세라자드는 동생에게 이제 날이 밝았으니 자기는 곧 죽게 될 것이라며 이야기를 마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한다.
그때까지 이야기를 전부 귀 기울이고 듣고 있던 왕은 다음날 이야기를 마저 듣고 죽이기로 하고 왕궁으로 나가 일을 보고는 밤이 되자 왕이 먼저 동생을 불러다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한다.
그렇게 하여 가지가지 이야기가 1001일 밤이나 계속 되는데 거의 3년간이나 계속된 셈이다.
‘알라딘의 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신드밧드의 모험’ 등이 이야기의 줄거리인데 너무나 신기한 이야기들이 넘쳐나서 세계 모든 나라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팔미라(Palmyra) 유적(시리아) / 페트라(Petra) 유적(레바논) / 통곡(痛哭)의 벽(이스라엘)
그 밖에도 히타이트 고대왕국(BC 20세기)의 유물유적은 물론 이집트 파라오와의 전투장면 부조(浮彫)가 지금도 남아있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方舟)’도 이곳이며, 중국에서 낙타에 비단을 싣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거나 천산북로와 천산남로 등을 거쳐 수만 킬로를 오던 실크로드(Silk Road)의 종착점인 유럽과 만나는 지점도 이곳이었다. 당시 그 경유지의 한 곳이었던 고대도시 팔미라(Palmyra) 유적도 있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잃어버린 도시 페트라(Petra) 유적도 현재 요르단에 있다.
BC 6세기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야기를 베르디가 오페라로 만드는데 그 오페라의 대표적인 곡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또 AD 70년,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성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벽인 ‘통곡의 벽(Wailing Wall)’은 현재도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의 성지이다.
AD 6세기,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Mohamet)가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로 기록한 것이 꾸란(Koran), 혹은 40세에 알라(Allah)의 계시를 받은 뒤 적었다고도 하는 성서인데 모든 종교의 완성체라 주장하고 알라(Allah:야훼)를 유일신으로 모신다. 무함마드는 출생지 메카(Mecca)에서 냉대와 박해로 시달리자 AD 622년, 400km 북쪽의 메디나(Medina)로 거쳐를 옮기는데 이것을 헤지라(Hegira-聖遷)라 부르고 이슬람력(曆)의 기원(起源)으로 삼는다. 그러나 모든 기도를 드릴 때 제단(祭壇)을 자신이 태어난 메카(Mecca)로 향하도록 했고, 일반가정에서도 기도를 올릴 때 반드시 메카 방향으로 앉아 기도를 드린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바미안(Bamiyan) 불상(佛像:높이 55m)은 AD 6세기 간다라 미술양식으로 조성된 거대한 부처님 석상인데 이슬람 집단인 탈레반 집권 후 로켓포를 쏘아 부셔버렸다.
우리나라 신라의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도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바미얀 석불(파괴전:아프가니스탄) / 알라무트 요새(매의 둥지:이란) / 마사다 요새(이스라엘)
아시아 대초원의 유목민이었던 몽골족은 칭기즈칸이 집권한 후 중국 전역은 물론, 유럽까지 쳐들어가며 대국을 건설한다. 당시 이란 남부는 이슬람 시아파인 어쌔신(Assassin)파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알라무트(Alamut) 요새를 세우고 온갖 잔인한 일들을 저질렀는데 요새이름을 ‘매의 둥지’라 불렀으며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렸지만 몽골족의 공격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산의 장로(長老)라 불리던 요새의 주인 하산(Hassan)은 건장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암살자(暗殺者)들로 양성하는데... 특수교육을 통하여 신출귀몰, 다양한 암살기술을 가르친 후 이슬람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돈을 받고 제거해 주는 집단으로, 성공하고 돌아오면 마약(해시시)에 취하게 하고 최고의 음식, 아름다운 미녀들로 파묻혀 천국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했다고 한다. 만약 암살에 실패하고 잡히면 그 자리에서 알라(Allah)를 위한 순교(殉敎)라고 교육받았으니 웃으며 자살...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물속에서, 벽속에서 소리 없이 나타나 목표물을 제거하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진다고 했는데 이 귀신집단을 몽고족들은 하루아침에 없애버린다.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은 몽고족이 지나간 자리는 풀 한포기도 살아남는 것이 없다고 했다한다.
우는 아이도 ‘몽골족이 나타났다’ 하면 곧바로 울음을 뚝 그쳤다는....
하나 더 이야기하면 기원전 1세기, 이 지역은 유대왕인 헤롯(Herodes I)이 통치했는데 예루살렘 성전, 마사다(Masada) 요새, 헤로듐(Herodium) 요새를 건축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로마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가 통치했는데 세계정복을 꿈꾸던 로마가 쳐들어오자 헤롯은 마사다 요새로 피신하는데 그곳에서 병으로 일생을 마감한다. 당시 절벽 위에 세워진 마사다 요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로마군이 몇 년을 걸쳐 공격해도 함락이 되지 않은 요새였는데 성안의 유대인들은 마지막으로 모여 회의를 한 후 제비를 뽑아 10명을 뽑는다. 나머지 군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전 가족을 스스로 모두 죽이고 본인은 그 옆에 누워 기다린다. 제비를 뽑았던 열 명은 전 요새를 돌며 가족들 시체 옆에 누워있는 동료를 다시 죽인다.
그리고 모인 열 명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명이 누워있는 아홉 명을 차례로 죽이고 자신도 자결..
이튿날 아침 로마군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시작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어 몇 년 만에 비로소 요새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가는 곳마다 웃는 표정의 시체들이 누워있었는데 세어보니 총 960구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로마와 유대왕국의 7년간의 전쟁은 끝났지만 다시 50여년 후 마사다의 비극에 응어리진 원한 때문이었을까 유대인들의 항전이 다시 시작된다.
이곳을 주제로 한 영화들도 수없이 많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 벤허(Ben Hur) 등이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