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불교문화원(원장 김재원)의 창립 10주년 행사로 지난 3월 15일 대구의 진산 팔공산 일원에서 제 78회
삼국유사문화유적 답사여행을 하고 '팔공산의 역사와 그 흔적'이란 주제 발표를 했다.
▲ 신숭겸 장군을 추모하는 표충단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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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는 신숭겸 장군, 김락 장군을 기리는 미리사, 표충단 답사로 시작됐다. 수원에서 내려간 필자는 신숭겸을 모신
미리사. 표충단은 못가고 방짜유기박물관부터 동행했다.
방짜유기박물관은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방짜유기장 이봉주 선생의 기증품으로 대구시가 만들고 운영한다. 방짜유기는 구리와 주석의
78:22의 황금비율로 만든 식기류, 제기류, 악기류, 생활용품 등을 살펴보고 설명을 들었다. 이봉주옹은 문경 가은에서 지금도 방짜유기를 만들고
있다. 방짜 놋그릇의 효능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 방짜유기박물관 주물유기 만드는 과정 견학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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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그릇은 천연살균 부패방지로 인간에게 유익한 그릇. 열쇠. 생활도구. 악기 등을 만들어 실생활에 사용되고 있다. 필자가 어릴
때는 집안에 놋그릇. 화로 등이 상당량 있었는데 스테인렌스가 나오자 모두 바뀌 버렸다. 요즘 놋그릇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혼수품으로 다시 인기가
높아지고 있으며 실생활에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방짜유기박물관 앞쪽 석물가게는 재미있는 남근석 모아두었는데 필자는 여러모양의 거시기에 마음을 빼앗겨 얼른 들러서 사진을
찍었다.
다음코스는 옛 동화사 입구의 마애불상에 대하여 결가부좌가 아닌 유희좌로 앉아 있는 자애로운 마애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 동화사 입구 일주문 앞의 마애좌불상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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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일주문에는 ‘팔공산동화사봉황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동화사의 현 일주문은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을 헐어 만들어 본래
동화사의 안정감이 훼손되었다는 지적과 함께 전문가의 역사적 고증으로 제대로 복원되기를 희망했다.
그 다음은 인악당을 찾았는데 인악대사의 비를 살펴보았다. 국내에 유일한 봉황새 형상의 봉부 위에 비문을 새우고 이수를 얹은
모양은 특이했다. 대부분의 비석은 거북모양의 귀부에 세워져있다.
▲ 특이한 봉부에 안치된 인악대사 비가 안치된 인악당 설명 장면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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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공양 후 조선시대에 만든 동화사 종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봉서루와 봉황이 알은 품은 바위와 상상의 새인 봉황의 알에 대하여
재미있는 설명을 했다.
팔공산의 풍수지리형은 봉황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팔공산 정상 비로봉(해발 1192m)에서 좌측날개는 동봉, 수봉, 인봉,
노적봉, 관봉으로 이어지고, 우측날개는 서봉, 톱날바위, 파계봉, 가산으로 이어져있어 약 20km이다.
팔공산에는 국보 2개(군위 아미타여래삼존석굴, 거조암 영산전)를 포함하여 276개의 불교문화재가 산재되어 있고 역사유적 및
군사요충으로 팔공산 일대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래서 하루 빨리 팔공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를 소망했다.
▲ 봉서루 앞에서 봉황 설명 장면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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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공산 동화사는 비봉귀소형 풍수지리의 명당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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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 봉서루 입구의 너럭바위는 봉황의 꼬리부분이며 봉황의 알 모양의 돌을 3개 비치하고 상상속의 봉황을 새긴 조형물이
있었다. 대웅전의 꽃살문은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봉황은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전설의 새로 팔공산은 구만리장천을 나는 비봉귀소형(또는 봉황포란형)의
길지이다. 그래서 동화사 주변에는 봉황이 머물도록 대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했다. 동화사 경내에는 큰 오동나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필자는
이날 제대로 보질 못해 아쉽다. 옛길로 오르면서 계곡을 연결한 해탈교의 연꽃봉오리와 아치가 아름답다.
봉서루 누각은 누하점입형으로 2층 누각 아래로 양반이나 고관대작들도 부처님을 만나러올 때는 말에서 내려서 오도록 건물을
지었다는 설명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그럴 듯했다. 조선시대에는 승려도 팔천민(승려·사노비(私奴婢)·백정·무당·광대·상여꾼·기생·공장(工匠)에
속했기에 산중 승려들은 은연 중에 양반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동화사 대웅전의 모습과 꽃살문양이 예술품이다.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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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사람을 대인이라 부르는데 깨달은 부처님은 큰 영웅이란 뜻에서 大雄이라 부르고 부처님을 모신 큰집이란 뜻에서 大雄殿이라
불렀다고 했다. 건물의 규모와 용도에 따라 <殿.堂.閤.閣.樓.亭.臺>라는 설명을 동행한 홍민자 문화관광해설사는 귀띔을 했다.
대웅전의 주춧돌을 보면서 그랭이기법에 대하여 설명도 해주었는데 그랭이는 콤파스의 순수 우리말이라고 했다. 자연석의 돌모양을
따라서 나무기둥을 안치하면 흔들림이 없고 튼튼한 건축물이 되는 것이다. 산신각의 산신과 호랑이이에 대해서 태초에 자연신으로 큰 바위, 거목 등에
대하여 무속신앙으로 영험해하고 숭배한 것일 게다. 어쩌면 나약하고 오래 살지 못하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소박한 기복으로 무속신앙으로 당연하게
생성 것인지도 모른다.
탐방객을 태운 관광버스는 동화천을 타고 동화사 옛길에 입구에 세웠다. 일주문 앞에는 마애석불이 있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관음부처님의 모습이 하늘에서 구름은 타고 내려앉아 오른발의 결가부좌를 풀었기에 유희좌라고 불렀고, 눈썹바위 아래 부처님의 화사한 돌조각으로
사바세계에서 동화사를 찾는 사람을 굽어본다.
이 마애좌상석불은 하지(6월 21일)인 전후에만 햇볕이 든다고 한다. 이때가 제일로 보기 좋은 모습이라고 말했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마애석불 사진이라도 보고 싶었다.
▲ 일주문에는 팔공산동화사봉황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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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자 모양의 팔공산동화사봉황문의 현판이 새겨진 일주문을 지나 계곡물소리와 아름드리 소나무 가로수가 도열한 듯
사람들을 반긴다. 물소리를 들으며 조금 오르면 1992년 건축된 높이 33m 의 통일약사여래대불과 그 앞에 조성된 17m 석탑 2기와 7.6m의
석등 2기는 엄청난 크기에 놀라고 자연과의 부조화에 놀란다.
무엇보다 동화사 본래 모습과 자연스러움에 어긋나는 부조화로 인간의 탐심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필자는 왜 건물마다 최대,
최고, 처음을 강조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보다는 자연과 어울리고 아름답고 실용적인 예술성을 강조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 통일약사여래불 앞 탑에 대한 설명 '아수라'의 팔이 6개로 무질서로 힘샌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
박익희 기자 | |
통일약사여래불을 세울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의지. 서의현 스님의 권력욕 등이 빚은 엄청난 부처님의 조형물에 감동보다는
예산낭비와 잘못된 탐욕이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통일대불은 경기도 무형문화재인 박찬봉선생의 작품이다. 노태우 대통령 글씨로 현판을 붙여놓았다.
잘 쓴 글씨로 볼 수가 없다. 차라리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가 글씨체로 남겼드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대불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치어 본 모습이
오히려 아름답다.
다음은 동화사 인악당을 보러갔는데 그곳에는 봉황의 몸체인 봉부(鳳部)에 비신과 이수를 올려놓은 특이한 비각인데 알고 보니
인악대사를 기리는 碑로 이런 형태의 비석으로는 국내유일 하다고 설명했다.
금강산도 식후 경이라...동화사 공양간에서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고 난후 본절 동화사를 찾았다.
동화사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승군을 이끌던 사령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1592년 4월23일
정명가도(征明街道)를 요구하며 일본은 동래성을 짓밟고 8일만에 파죽지세로 대구읍성을 점령한다. 나라는 제승방략체재로 국방을 유지했다는데 조선은
국방과 치안에 소홀하여 강토는 초토화되자 살생을 금하는 승려가 승병을 조직하고 성을 쌓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스님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살생마저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비극이고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동화사 바로 위의 비로암을 찾았다. 김재원 원장은 이쪽 계곡과 저쪽 계곡이 다르다는 지적을 해주고 현재의 일주문이 산을
헐어내었기에 동화사의 기운이 쇠락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비로암 3층석탑에서 1967년에 도굴당했는데 석탑안에서 사리호가 나왔다고 한다. 사리호에 새겨진 글에서 당시의 권력층에서
벌인 비극적인 살육과 화해를 위해 민애왕을 죽인 김우징은 신무왕이 되고 그 아들 경문왕의 결단으로 민애왕을 추모하는 글을 새겨서 화해를 기원하는
사리호를 석탑에 봉안한 것이었다. 살육과 복수, 증오와 싸움 후에 참회와 화해, 용서와 평화는 반복되는 역사의 산물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927년 동수전투는 후삼국시대에 견훤과 왕건의 싸움에서 왕건은 파군재에서 신숭겸과 김락의 희생으로 변복을 하여 전이갑
형제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살아나 영웅으로 거듭났다. 왕건은 안심, 반야월을 지나 은적사로 피했다는 학창시절에 들었던 옛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이어서 찾은 곳은 부인사이다. 김재원 원장은 여기서 많은 얘기를 쏟아냈다. 개성 흥왕사의 대장경을 부인사로 옮겨왔다.
그러나 부인사의 대장경은 1232년에 불타고 없어졌다. 몽고군은 용인 처인성에서 김윤후 장군에게 패하고 몽고장군 살라타이는 사망한다.
부인사대장경은 결코 초조대장경이라하면 안되고 부인사대장경 또는 팔공산대장경이라 불러야 된다고 주장했다. 부인사에는 몸체는
하나인 특이한 쌍석등이 있었다. 본래 석등은 깨어졌는지 새롭게 만들어 끼워넣은 것 같았다.
부인사를 나와서 신무동 마애불은 탐방을 생략하고 기성동 3층 석탑을 보러갔다. 송림사 위쪽 조용하던 도덕산 뒤편, 가산산성
앞쪽인 한티재 아래는 완전 난개발로 휘황찬란한 러브모텔과 대형음식점, 전원주택이 혼재되어 인간이 버린 오물물들이 그대로 계곡을 타고 흘렀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소관인지. 칠곡군 소관인지 따지지 말고 환경오염만은 제발 막아주길 바란다.
▲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기성동 삼층석탑, 넘어진 것을 보수했는데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고 말했다.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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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박사는 어쩌면 매화가 피었을 것 같다며 개울을 건너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숨겨진 탑을 찾아갔다. 예상대로 이제 막 매화가
꽃을 피우며 향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목은 이색이 지은 탐매가를 암송했는데 어쩌면 오늘은 역사와 인문학에 대해 즐거운 당일치기 소풍이 헛되지
않았다. 나는 약간 위험한 곳에서 참가한 회원들의 손을 맞잡아 올려주었다.
- 이 색-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 매화꽃, 경기데일리 자료사진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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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한재미나리가 유명세를 타더니만 팔공산도 이제 미나리재배단지로 탈바꿈 되었나보다. 팔공산 일원 도로변에는 미나리를 파는
곳이 많았다.
매화가 피어나기 시작하는 곳에서 觀花美心을 느끼며 아내랑 같이 오면 더 좋겠다는 작은 허전함을 살짝 느꼈다.
마지막 일정으로 예정된 코스인 파계사를 찾았다. 예전에 여러 차례 가본 곳이지만 파계사(把溪寺)는 9줄기의 계곡물을 모은다는
뜻으로 실제로 파계사 오르는 길에는 계곡물을 저장하는 제방이 있었다. 사찰에는 동화사 주지를 역임한 허웅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계신다고
한다.
파계사는 숙종과 최무수리 사이에서 태어난 영조왕 안녕을 기원하는 곳이라고 한다. 영조의 복장유물로 나왔다고 전해진다. 파계사
위쪽 성전암에는 조게종 종정 성철스님이 한동안 계신 곳으로 유명하며 철웅스님도 계신 곳이었지만... 인간은 누구나 공평하게 생노병사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지금은 모두 떠나고 그 분들의 전설 같은 얘기만 회자된다.
▲ 파계사의 구시, 종이를 만들때 사용했던 지통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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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느낀 점은 파계사, 동화사, 부인사에도 성전건립의 명분으로 많은 불사를 일으켜 사찰의 규모는 점점 확대되어 가는데
인간은 점점 더 외롭고 허허롭다. 종교 본래의 중생구제와 위무를 느끼도록 종교인들의 성찰이 있기를 소망한다.
아마도 국내 종교의 양적팽창 발전에도 불구하고 투명하지 않는 회계처리와 일부 성직자의 일탈행위가 도를 넘어 지탄을 받고있는
것 같았다.
큰 절집마다 템플스테이니 뭐니 구호가 소란스럽고 객들만 북적거리는데 살갑게 맞아주는 스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그립기만
하다.
불사를 일으킬 때는 자연과 조화로운 건축물을 보고 싶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우리 건축물의 기본을 살리는
불사가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통일약사대불 앞에서 기념 촬영, 요즘 부처님도 비만형인가? 팔성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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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사에서 영남불교문화연구원 10년의 경과보고와 흔적 5권 봉정식, 감사패 증정과 ‘팔공산의 역사와 그 흔적’에 대하여
김재원 원장의 엄청난 이야기보따리가 보석처럼 쏟아졌다. 갈 길 먼 필자는 말씀 중에 서둘러 귀경 채비로 슬그머니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재원 박사는 "팔공산의 부처님은 어떤 때에는 진리자체로 비로자나불, 미래의 구세주 미륵불, 이상적인 인간상 석가모니불,
참회하고 하소연 할 대상인 아미타불로 변모하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새벽부터 부산을 떤 육신은 피곤했으나 언제나 듬직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팔공산이라는 명산대찰에 남겨진 소중한 역사문화유적과 그
흔적 이야기는 내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자정 가까이에 수원으로 복귀했다. 10년 세월동안 영남불교문화연구원을 이끈 김재원 원장님과 총무님, 회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제 78회 팔공산 일원 답사기 졸고를 마친다.
▲ 김재원 박사의 무궁무진한 역사문화유적 얘기가 진행됐다. © 박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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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답사날은 야외에서 원장님의 구수한 말씀을 들었고,
한 귀로 흘린 얘기를 편하게 마무리하며 눈으로 봅니다.
언제 다시 만나는 날,
영남일보에서 답사 다녔던 감춰진 재미난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호산인님의 글과 사진을 잘 보았습니다. 그 날 지나친 것까지도 다시 복습하는 기분입니다. 고맙습니다. 김종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