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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역고원(雪域高原)에 떠 있는 쌍무지개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무지개를 잃어버렸다. 어릴 적 뒷동산에 항상 떠 있던 그 무지개를 말이다. 아니, 잃은 게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쫓아내었다. 우리들의 욕망들과 맞바꾸어 무지개를 먼 곳으로 쫓아냈다는 표현이 어쩌면 맞을 것이이리라….
그 뒤로 우리들의 삶은 비록 물질적인 성취는 어느 정도 이루었다지만 그 대신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채 허망한 욕구 충족에 골몰하면서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풍요로움 속 어디에도 만족함은 없었고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다고 느끼면서 살게 된 것이다.
그럼, 우리들에 의해 쫓겨난 무지개는 어디로 갔을까?
숨겨진 불교왕국 샴발라의 전설은 과거 천여 년 동안 설역고원의 민초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유토피아였다. 그들은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순결함을 간직한 알려지지 않은 비경 속의 왕국 샴발라가 존재하고 있고 과거 수천 년 동안 신성한‘시간의 수례바퀴의 가르침’이 전해져 내려왔다고…
이 신비스런 전설은 그들뿐만 아니라, 근래에 들어서는 무지개 꿈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메시지를 안겨주고 있다. 사실, 현대문명의 총아인 고성능 정찰기나 인공위성의 정밀사진에 의해 지구촌이 낱낱이 해부된 지 오래인 현재 시점에서 지구촌 어디인가, 아름다운 산과 넓은 평원 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곳곳에 찬란한 사원과 마을들이 있는, 설산에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가 아직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면 누구들 신비스러워하지 않겠는가?
여러 종류의 자료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샴발라로 가는 길은 정말로 험난하다. 그 길에는 초월적인 천신들과 무서운 형상을 한 악마의 화신들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환상적인 정령들이나 날개달린 뱀이나 사람얼굴을 한 물고기나 눈사자 같은 신화적인 동물이 나타나 나그네를 괴롭히거나 도와주거나 한다. 또한 마법적인 힘이 지배하는 숲이나 사막 그리고 몸에 닿으면 돌로 변해버리는 강물도 건너야 한다.
물론 그길 위에는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행운이 뒤따른다면 젊음의 샘이나 온갖 진귀한 보석으로 가득한 골짜기도 만날 수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샴발라로 가는 길은 다양한 모험이 도사리고 있는 장편의 로드다큐멘터리(road D.)그 자체이다. 그러니 역마살을 타고난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가 그곳- 무지개가 항상 떠 있는 바로 그 곳으로 -가서 영생을 누리며 살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이번 책을 쓰게 된 동기를 고백하자면 이렇다. 몇 년 전인가 일산 호수공원에서 대규모 <티베트 탕카전>이 열린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필자는 그 전시회의 큐레이터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전시된 그림들은 티베트의 고대 벽화나 탕카를 바탕으로 근래에 정부차원에서 다시 집대성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초대형으로 만든 것들이었는데, 그 수천 폭의 그림 중에 <시륜경사대종단성도(時輪經 四大種壇城圖)>와 <천구절첩설도(天球折疊設圖)>이란 제목의 그림이 유독 내 눈에 띠었다. 여기서 천구(天球)의 모양이 동그랗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타원형으로 그려져 있고 또한 굴곡이 져 있었는데, 한자로 표기된‘접철(折疊)’제목을 본 순간 나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접철’이란 뜻은 “접다, 개다”라는 의미이니 이 말은 “우주를 접거나 갠다.”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이 일련의 그림들은 현대물리학에서 요즘 가설로 등장하는 4차원 아니 다차원(多次元)의 개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몇몇 천재과학자에 의해 제기된‘불랙 홀(Black hole)’이나‘우주공간의 주름설’같은 가설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 옛날, 온 세상 사람들이 지구는 평평하여 먼 바다로 나가면 한없는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믿고 있을 때에, 아니 어떻게 그들은 다차원의 개념을 생각하였고 또한 그것을 기록과 그림으로 남겨 놓았단 말인가?
그때의 신선한 충격은 그 뒤 내게 묵직한 화두로 남겨졌고, 그것이 티베트에 대한 나의 관심을 종교로부터, 티베트 문화 전반으로, 다시 <샴발라의 전설>로, 다시 그들의 메시아인 <게싸르 전기>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샴발라라는 곳이 시간이나 공간이 주름 잡혀 겹쳐진 곳에 정말로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긍정론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물론 그 바탕에는 가끔씩 나를 놀라게 만드는 그들의 기상천외한 전설에서 비롯되었지만…
뭐,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윤회론적 진화론(進化論)을 주장하여 자기 조상이 손오공(孫悟空)이라는 철학적인 유인원(類人猿)이었다는 것을, 인간의 생명은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지금의 히말라야가 까마득한 옛날에는 바다 속이었음을, 이미 인식했던 초능력적인 민족이었으니까, 그들의 우주론도 불가능하지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확신에서 증폭되었다.
만약 누구라도 험난한 나그네길 끝에 샴발라에 들어갈 수만 있다
면 세 가지 중 하나는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첫째는 보석 같은 물질적 재물이고 둘째는 책 같은 지식창고이고 셋째는 니르바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숨겨진 의식을 열수 있는 열쇄이다. 물론 세 가지를 다 얻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꼭 한 가지만 허락된다면, 자, 그럼, 독자제위는 어떤 것을 골라잡겠는가?
이런 선택은 마치 한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맞는 인생의 돌잔치에서 아기 앞에 놓인 여러 가지 물건들- 돈, 먹을 거리, 학용품, 공구, 악기, 실 등- 에서 아기가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아기의 인생의 방향이 달라진다는 식과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아기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떤 물건을 집었던지, 그 물건이 상징하는 방향대로 그의 인생이 흘러갈 확률이 많지는 않지만, 샴발라로의 길은 마지막 선택이기에 큰 책임이 따른다. 일단 그 길 위에 선다면 이번 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 그 길을 걸으며 완성자로서 나아가야할 막중한 의무가 있기 때문이니까…
이번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크게는 두 줄기의 씨줄과 두 줄기의 날줄이라는, 두 축(軸)으로 겹쳐 짜여 있다고 할 수 있고 이 위에 다시 두 줄기 쌍무지개가 씨줄과 날줄로 서로 교차하면서 찬란한 무늬를 놓고 있다고 표현할 수가 있다. 무지개란 보통 실과 물감으로 만든 섬유질 실이 아니다. 그 자체가 광택을 지닌 광섬유(光纖維)이다. 그렇기에 맑고 푸른 설역(雪域)의 무한대의 하늘을 캔버스 삼아 두 줄기 쌍무지개의 일곱 색깔 무지개가 서로 교차하면서 한 폭의 거대한 오색무늬 금주단(金繡緞,Tapestry)을 짜듯 이번 글을 써내려왔다. 그리고 또 다른 두 축의 날줄은 시간적으로 부침을 달리한 티베트의 두 종교인 뵌뽀교와 불교를, 씨줄은 샴발라(Shambhala)의 전설과 게싸르(Gesar)라는 서사시(敍事詩)를 말한다.
물론 이 네 줄기 실이 풀려져 나오는 네 개의 실타래 자체가 티베트 종교와 문화의 에센스이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 자체의 비중이 만만치 않은 것이지만, 그것들이 네 갈래나 만나 짜진 완성품은 마치 무지개처럼 휘황찬란할뿐더러 또한 웅혼하기도 하여 아무나 쉽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요소들은 티베트문화의 기층을 이루는 것이기에 어느 것 하나라도 빼어 놓을 수 없었기에 전체적으로 보면 다소 산만하게 느끼실 독자도 계실 것이지만, 그렇지만 필자로서는 어느 것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만큼 그것들은 신선하고 매력적인 것들이어서 그 기쁨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책의 가장 큰 주제는‘샴발라’라는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인류의 원초적인 소망을, 다음으로는 티베트 민초들의 메시아(Messiah)사상을 다루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서사시(敍事詩)로 알려진 <게싸르 대왕의 전기> 는 그 장대한 스케일이나 흥미로운 줄거리의 전개 그리고 신화적인 성격을 가진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다차원의 무대로 벌리는, 마치 한편의 S.F적인 대하드라마여서 독자들을 신화의 삼매경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리라 자부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우리가 어릴 적 잃어버린 그 무지개의 전설을 찾아나서는 구도적 여행이 될 것이다.
이번 생에 오롯이 수행자의 길을 걷지 못했더라도, 아파트 평수 넓히는 데 급급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이번 생에 일단‘샴발라 왕국의 주민등록의 전입신고’만이나마 해 놓을 수만 있다면,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면 우리들의 영혼이 ‘진화의 상승곡선’을 그을 것이라는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니까…
2006년 봄이 오는 길목, 홍천강 수리재에서 다정거사 삼가 두 손 모으다.
샴발라 VS 샹그리라
지구상 어딘가에 만년설에 덮인 거대한 산 속에 숨겨진 신비롭고 아름다운 왕국이 존재한다 치자. 그곳의 사람들은 굶주림도, 다툼도, 미움도 없고 온화하고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수백 년 이상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누군들 그런 곳에 가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곳이 샴발라라는 이름이면 어떻고 샹그리라이면 어떠하리…
티끌세상의 잡다한 일에 찌들다 보면 문득 우리는 히말라야산맥 뒤에 숨어있었던 특이한 자연환경을 가진 한 나라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런 곳에 한번 가보거나 아주 그런 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해보기도 한다. 바로 우리가 '티베트(Tibet)'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는 자기네를, ‘뵈’라고 부르고 있고, 자기네 땅을‘강쩬’즉 설역고원(雪域高原) 이라 부르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티베트라는 명사는 낯선 이름인데, 이는 고대 왕국 ‘투뵈’의 중국식 표기‘토번(吐蕃)’이 음역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마치 우리의 고려가 코리아로 변한 것 같은 경우일 것이다.
이 나라는 매우 특별한 곳으로써 한 민족과 자연환경이 외부문명세계로부터 거의 고립된 채 외부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랜 세월 독특한 생활방식과 문화를 가꾸어오면서 발전해 내려온, 세계사적으로 보면 아주 특별한 케이스에 해당되는 나라로 분류된다. 그러나 티베트는 중세기 때부터 고수해온 법왕제(法王制)라는 제정일치제도로 말미암아 한 독립국가로서의 탄력을 잃어버려 강자만이 존재하는 국제사회의 무한경쟁에서 뒤쳐져 1950년대에 붉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한 중국에 의해 맥없이 병합되고 말았다. 그 후 중국의 ‘죽의 장막’이 펼쳐져 있던 40년간 티베트 본토의 상황은 완전히 베일에 가려있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의 개방정책의 일환으로 티베트의 실상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우리가 본 것은, 우리의 예상대로 심각한 상태였다. 가까운 세월 티베트를 점령하고 있는 중국의 정책적인 숨겨진 의도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티베트의 중국화’는 비단 영토와 주권이란 개념에 머물지 않고 민족의 정체성이나 문화나 종교 전반에 깊숙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말살행위는 ‘다양성의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우리 인류의 중요한 페이지를 찢어버리고 있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어느 문화비평가의 말 같이,
“먼 훗날 어느 땐가 우리는 찢겨진 가장자리에 남아있는 그 문화의 잔재를 보면서 본래 그것이 어떤 모습일까? 하고 궁금해 할지도 모를 때가 오겠지만, 그러나 그 때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이제 우리는 문화 다양성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티베트 문화의 에센스인 샴발라 왕국과 게싸르 대왕의 이야기를 인류공동의 재산으로 후세에 전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더 늦어서,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기 전에, 변질되거나 말살되기 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이런“해야한다”라는 무슨 사명적인 운동차원과 우리의 주제를 꼭 연결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영원한 이상향이나 구원의 메시아를 추구는 인류 공통의 염원이었기에 자연적으로 누구에게나 친근감이 있기 때문이니까. 단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기적으로 말살과 변질의 위기를 맞고 있기에 좀 더 따듯한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제동장치 없이 앞으로만 치닫는 물질문명의 부작용과 현재 지구촌의 대부분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일부 서구문화의 획일성에 대한 우려는 이미 오래전부터 뜻있는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예견되어 내려왔다. 세상이 이상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다양성의 원칙’이 필요하다. 그것은 민족 또는 문화와 종교의 우열을 따지는 차원을 넘어 있어야 하는 그냥 존재 그 자체의 법칙이다. 무릇 문화나 종교란 고급이나 저급으로 나눌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더구나 한 민족의 존재이유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스스로를 우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민족이라도, 아무리 스스로를 고급문화라고 착각하고 있는 문화라도, 열성 민족과 저급문화나 종교를 무시하고 파괴하여 말살시킬 권리는 없을 것이다. 우성이 아닌 열성일지라도, 고급이 아닌 저급일지라도 그것들은 나름대로 이 지구상에 존재해야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거시적(巨視的) 안목으로 본다면 모든 종족 또는 문화나 종교의 우열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 순서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바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호모사이언스가 우리들의 필요에 따라 다른 생물체의 마지막 씨앗자체를 말살하는 행위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 되듯이,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우성민족 또는 고급문화나 종교라고 착각하고 있는 일부 극우파적인 집단들일지라도‘다양성의 원칙’을 준수해야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와 같은 대전제 하에서 우리는 지금부터 존재의 위기에 처한, 어떤 한 나라의 민족, 문화, 종교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단, 여기서 우리는, 우성이나 열성민족도, 고급이나 저급의 문화나 종교의 차별도 없는, 그런 객관적인 기준을 유지할 수 있을 때 투명한 지혜의 눈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 그 속에서 찬란한 같은 무지개의 빛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샴발라 왕국은 해석에 따라서 3곳으로 인식된다고 한다. 그 첫째는 히말라야 산맥 어딘가에 있다는 숨겨진 공간적인 곳으로 우리가 찾아 떠나야 할 본 주제의 왕국이고, 두 번째로는 초능력적 영혼들만이 사는 다차원의 우주 공간에 있다는 실체적이지 않은 곳으로 주로 신지학(神智學)같은 오컬트(Occult)적 관점에서 보는 다소 허황되게 보이는 왕국이고, 세 번째로는 인간 육체 속의 의식과 신경회로의 중심체인 짜끄라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왕국이라고 한다.
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날 이야기이지만 샴발라 왕국의 통치이념은‘깔라짜끄라 딴뜨라(Kalacakra Tantra)’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시간을 의미하는 ‘깔라’ 와 수례를 의미하는 ‘짜끄라’ 그리고 수행법인 ‘딴뜨라’의 합성어이기에 전체적으로는 ‘시간의 수례바퀴의 수행법’ 또는 ‘시간의 순환의 가르침’으로 직역될 수 있다. 좀 더 광의적인 해석으로는, 창조에서 소멸에 이르는 주체인 시간의 단위를 의미하거나 또한 수례바퀴가 한 바퀴 도는데 소요되는 시간만큼 물리학적 시간이 흐른다는 객관적 인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로 그 점을 수행의 기본적 화두로 삼는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비교적 간단하게 보이는 이론이지만, 수례바퀴가 한 바퀴 도는 정해진 시간에 수례바퀴 또한 공간적으로 이동하였기에 당연히 ‘시간의 흐름’에 ‘공간의 개념’을 접합시켜야 하기에 이 화두가 그리 간단하게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시간의 수례바퀴의 가르침’을 올바른 수행을 통하여‘샴발라’라는‘영원한 풍요와 행복의 골짜기’로 들어가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Nirvana)라는 경지에 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깔라짜끄라’는 단어가 바로 샴발라의 ‘키워드’인 셈이다.
사실 깔라짜끄라라는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아니지만, 이번 책에서 수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방편론으로 가능한 부분에서는 이 말 대신에 조금 간략한 ‘시륜’또는 ‘시륜철학’이란 단어를 사용할 생각이다. 물론 원어인 티베트어나 산스크리트어의 분위기와 맛이 반감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내용상의 난해함만은 어쩔 수 없더라도 최소한도 단어 자체의 이질감만은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로 독자제위는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깔라짜끄라 딴트라’의 가르침을 경전상태로 편집한 것은 한역명으로『시륜경』류(類)로 표기할 예정이다. 여기서‘류’를 강조함은 이 경전은 원전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로 주석서로 나눠지게 된다는 뜻으로, 예를 들면 『시륜근본경(時輪根本經)』과 축소판인『시륜섭략경(攝略經)』과 주석서인『시륜섭략경무구광대소(無垢光大疏)』같은 식이다.
머리말에서 잠시 이번 책의 저술동기를 간략히 이야기한 있지만, 이를 다시 부연설명을 하자면 아래와 같다. 이 시륜철학의 요체에는 천문학과 점성학 같은 천체과학이론을 다룬 분야가 있는데, 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현대과학이 요즘 들어 제기하는 첨단 과학적 가설을 이미 그들은 고대에 제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시륜철학을 중생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시각화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 중에는 참고도와 같이 <시륜경사대종단성도(時輪經 四大種壇城圖)>이란 것이 있다. 그 속에는 천구(天球)의 형상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 천구가 동그랗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타원형으로 그려져 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바라보곤 하여 나도 유심히 뜯어보다가 궁금증이 일어서 그림을 그린 작가들 중 한명에게 물어보게 되었는데, 그의 대답은 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티베트인들은 시륜철학의 관점에 따라 지구가 타원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 다음 그림인 <천구절첩설(天球折疊設)>은 더욱 의미심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을 들으며 한자로 표기된 제목을 본 순간 나는 정신이 멍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접철’이란 뜻은 ‘접다’ 또는 ‘개다’라는 의미이니 이 말은 바로 “우주를 접거나 갠다”라는 뜻이 아닌가?
이 일련의 그림들은 현대물리학에서 요즘 가설로 등장하는 4차원 아니 다차원(多次元)의 개념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같은 천재과학자에 의해 제기된‘불랙 홀’을 설명하는,‘우주공간의 주름설’과 일맥상통하는 이론이었다. 아니 그 옛날, 온 세상 사람들이 지구는 평평하여 먼 바다로 나가면 한없는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을 때에, 아니 어떻게 그들은 다차원의 개념을 생각하였고 또한 그것을 그림으로 남겨 놓았단 말인가? 또한 <일월성진궤적도(日月星辰軌迹圖)>를 보면 그들의 천문학의 높은 수준을 엿볼 수 있고 또한 15일을 단위로 계산하여 길흉을 예측한다는 <나후도(羅睺圖)>는 달을 기준으로 하는 음력체계를 이미 고대에 완성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론으로는 현대의 미스터리인 ‘버뮤다’삼각지대나 ‘뮤’대륙이나 ‘아틀란티스’대륙의 가설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신선한 충격은 그 뒤 내게 묵직한 화두로 남겨졌고, 그것이 다시 샴발라의 전설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샴발라라는 곳이 허무맹랑한 전설이나 신화 속의 믿거나 말거나한 곳이 아닐 수 있다는 쪽으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런 곳이 정말로 시간이나 공간이 주름 잡혀 겹쳐진 곳에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긍정론은 그 뒤 내 가치관을 흔들어 지금까지 그 알량한 주입식 지식으로 굳어졌던 에고를 다시 수정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바탕에는 가끔씩 나를 놀라게 만드는 그들의 기상천외한 전설에서 비롯되었지만. 뭐,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진화론을 만들어 자기 조상이 손오공이라는 철학적인 유인원이었임을, 인간의 생명은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지금의 히말라야가 까마득한 옛날에는 바다 속이었다는 과학적 사실을, 이미 직감한 초능력적인 민족이었으니까, 그들의 우주론도 불가능하지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확신에서 증폭되었지만 말이다. 일부 독자는 나의 이런 견해가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를 하느냐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이란 뒷문은 항상 열려있는 것도 괜찮을 것이 아니겠는가?
샴발라 왕국의 전설은 티베트경전에서 묘사된 그 이상으로 티베트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민초들의 의식 속에는 샴발라는 이상형의 왕국을 넘어 서방 극락정토나 또는 불교의 최종의 도달점인 니르바나와 같은 동격으로 각인될 정도였다. 우리는 장터에서<게싸르대왕전기> 나 불교의 본생담 같은 설화를 전문적으로 읊고 다니는 ‘링줌’이란 이야기꾼들이 사람이 많이 모인 광장에다가 샴발라 왕국의 그림을 펼쳐놓고서 구도자가 그곳으로 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상대방에 눈높이에 맞게 각색된 이야기는 누구나 새겨들을 수 있는 우화적 내용으로 꾸며져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어떤 부자가 샴발라에 가려는 열망에 빠져있는 두 구도자에게 황금의 예물을 전해주며 그곳에 도착하면 그 대신 공덕을 빌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황금을 거절한 사람은 무사히 샴발라에 도착하였지만, 황금을 받은 사람은 짐의 무게가 늘어가 산 아래로 추락하여 샴발라에 가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는 식이다. 또 한사람의 용감한 구도자가 멀고 험난한 길을 가는 중에 한 늙은 수행인에게 와서 샴발라 왕국으로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하자, 이에 이 늙은 현자는 “샴발라는 그대 마음속에 있는데, 무슨 또 샴발라를 찾는가?”라고 말하였다는 식이다. 어찌 보면 우리의 선문답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의 담백한 이야기꺼리들이다. 그러니까 티베트의 민초들의 가슴 속에 들어있는 샴발라는 수 없이 많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각기의 그릇에 따라 또 다른 샴발라를 가슴 속에 숨겨놓고 있다고나 할까?
이제부터는 ‘샹그리라’이야기로 들어 가보자.
티베트 언어학자들은 샹그리라(Shangrila)의 뜻을 3가지로 풀이한다. 첫째로 해석으로‘샹’은 마음을, ‘그’는 소유격을, ‘리’는 ‘태양’을, ‘라’는 ‘달’을 뜻하여, 전체적으로는“마음속의 해와 달”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샹그’는 ‘흰 달빛’을, ‘리라’는 ‘태양’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는 현 행정구역상의 중국 남부의 윈난성(雲南省)의 쭝디엔(中甸縣)의 옛 이름인‘일월성(日月城)’을 가리킨다는 한다. 또한 세 번째는 우리의 제일 주제인 ‘샴발라’의 사투리라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어느 것이 정답인지 확정된 바 없다.
그러나 ‘샹그리라’라는 이름이 세계에 알려져 인구에 화자 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엉뚱하게도 서구 사람에 의해서다. 그럼으로 현재 샴발라와 샹그리라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샹그리라는 샴발라의 영어식 발음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본래의 뜻이 변질된 것이지만, 그런 현상은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의 영향이 그만큼 컸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샹그리라가 신비의 베일을 벗고 외부 세계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33년, 영국인 소설가 제임스 힐턴(James Hilton)의 소설에 의해서였다.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를 불러일으킨 이 이색적인 소재를 가진 소설은 당시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찌든 서양인들에게 잃어버린 낙원의 꿈을 자극하여 세계적으로 붐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같은 이름의 흑백영화로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상영되었는데, 1960년대에는 우리나라 T.V에 방송된바 있고 몇몇 출판사에서 같은 이름으로 번역판도 출간된 바 있다. 요 근래에는 인도, 네팔, 부탄, 시킴 등이 저마다 히말라야 산록의 한 마을들을 정해 샹그리라라고 별명을 붙여 관광용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중국도 샹그리라를 물색하고 나섰다. 1996년 중국 정부는 민속학자, 종교학자, 언어학자, 지리학자, 역사학자 등 50여명의 국내외 전문가들로‘샹그리라 탐사대’를 구성하여 윈난(雲南), 쓰촨(四川), 티베트를 면밀히 조사했다. 힐턴의 소설에 나오는 설산과 대초원, 강과 협곡, 원시삼림, 다양한 동식물, 티베트 불교 사원 등이 그 기준이었다. 그리하여 쭝디엔 현이 소설의 무대와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중국은 그곳을 1992년까지는 개방하지 않았다. 티베트의 미개방 정책과 맞물려 있는 변경에 위치한 소수민족에 대한 정치적 고려가 그 주된 이유였지만, 중국 정부도 마침내 2001년 12월 그곳을 아예 샹그리라 현(縣)으로 이름을 바꾸며 관광지로 개방했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샹그리라로 둔갑을 한 것이다. 그 이유야 뻔하다. 『잃어버린 지평선』의 유명세를 빌어 국제적인 관광지로 개발하여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물론 그곳이 샹그리라라는 소설의 무대라는 학자들의 논리는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작 소설의 저자인 제임스 힐턴은 그 근처에도 와 보지 않은 채 소설을 썼기에 그 누구도 단정은 내릴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이런 결정은 티베트 본토와 지척이라는 쭝디엔의 지리적 요건과 천혜의 계곡미 등으로 여러 사정으로 티베트 본토를 가 볼 수 없는 관광객들에게 티베트의 환상을 대리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셈이라는 배경은 확실하다. 그런 영향으로 요즘은 중국어권 어디에서나 ‘샹그리라(香格里拉)’라는 상호나 상품명이 번져가고 있는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인들의‘비단이 장사 왕서방 기질’탓으로 샹그리라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 샹그리라에 대해서는 뒤에 11장에서 다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다시 샴발라 이야기로 들어가서 이번 장을 마감하기로 한다. 대도무문(大道無門)처럼, 샴발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시간의 수례바퀴’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그곳은 지정된 시간에 정확히 그 대문의 문턱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조건이 붙는다. 물론 그 시간이 언제인지, 그 대문이 어디인지는 각자의 그릇에 따라 알아내야 한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샴발라로 들어가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티베트 민초들은 이번 생에 참된 수행과 많은 공덕을 쌓으면 내생에 샴발라에 태어나 영원히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말하자면 극락세계에 가까운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그들의 이승에서의 삶이 고달팠기에 더욱더 그런 세계를 그리워했을 것이지만, 그런 무지개 꿈을 꿀 수 있었기에 이승은 그리 지루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한 기온과 물기와 토양이 어울러져야만 풀과 나무와 꽃이 피듯이 샴발라왕국의 대문이 약속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준비된 이들에게만 열린다는 사실은 우리가 끊임없이 진리를 구하기 위해 의식의 진화를 이룩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이번 생의 숙제라고 시사해주는 것이 아닐까?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샴발라 왕국
숨겨진 왕국 샴발라와 그 도읍지 깔라파의 모양은 티베트 불교대장경 텐규르 목록 속에 들어 있는 기록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우선 거시적 조감도(鳥瞰圖)상으로 보면 샴발라는 만다라형의 거대한 둥근 모양으로 그 경계에는 대 설산이 솟아있어 외부세계와 단절되고 있으며 그 안에는 8개의 연꽃 모양과 같이 8개국으로 구분되고 있다. 그 중심인 연꽃의 꽃술과 같은 모양의 땅에는 샴발라의 수도인 깔라파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안에도 역시 큰 설산이 솟아 있다.
8개 연꽃(八葉蓮花)모양의 소왕국은 각기 12개 지방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96개 구역으로 쪼개져 각기 군소 왕이 다스리고 있다. 8개국으로 이루어진 한 조각의 연꽃잎 모양의 땅에는 1억2천만의 마을들이 있는데, 그 전체를 합하면 크고 작은 마을의 수가 9억6천만 개에 달한다. 또 이 1천만 개의 마을마다 각각의 마을이 1천만 개씩이 딸려있으며, 각각의 마을마다 그곳을 통치하는 작은 왕이 하나씩이 있다.
각각의 소왕국에는 황금지붕으로 된 탑들이 솟아 있는 사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도로와 민가들 사이로 푸른 풀밭과 여러 가지 종류의 꽃피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데, 각각의 연잎모양의 땅들 사이는 큰 강이 흐르고 있어 자연스럽게 경계가 구분되고 있다.
이 왕국의 주민들은 수확은 언제나 실패하지 않아서 식량은 항상 윤택하였기에 질병과 기아의 걱정 없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풍족하기에 황금과 보석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사용할 필요는 별로 없다. 샴발라의 주민들은 모두 건강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는데,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몸에는 하얀색의 길고 헐거운 우아한 웃옷을 입고 또한 항상 성스러운 산스크리트 말을 사용한다.
샴발라의 주민들은 영생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3백년 이상의 장수를 누릴 수 있고 다음 생에 태어나도 적어도 이번 생에 이 왕국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조건 이상의 복락을 누릴 수 있는 보장을 받는다. 그들은 아직 완전한 깨달음은 얻지 못했기에 아직 중생으로서의 카르마(Karma, 業)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바깥세계의 사람들에 비하면 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들은 계속 깨달음을 위해 정진을 계속하고 이런 결과는 그들의 아이들을 점점 지혜롭게 만들게 된다. 샴발라는 이렇게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에 가장 근접한 곳이 되었다.
왕국의 법률은 공정하고 온건하여 매질이나 감금 같은 육체적인 처벌은 없다. 이곳에는 부도덕이나 악의 기운조차도 없고 싸움이나 전쟁 같은 용어도 애초부터 없다. 그러므로 천신들과 비길만한 행복과 기쁨만이 충만한 곳이다. 그래서 샴발라의 어원이‘행복의 원천’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렇게 행복스럽게 온갖 복락을 누리는 샴발라 왕국의 주민들이라도 매일 놀고먹는 것만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엄격한 의무가 있다. 바로 전통적인 방법에 의한 수행을 통해 깨끗한 마음과 육체로써 오랫동안 수련을 쌓아 어떤 경지를 터득해야하는 것이다. 바로 티베트불교의 최고의 지혜인‘시간의 수례바퀴 가르침’인‘깔라짜끄라 딴뜨라’를 말한다. 이 수행법은 가장 복잡하고 비밀스러운 티베트불교의 최고의 가르침으로 오직 스승이 내면적인 에센스를 들어내어 그것을 전수받을 극히 선택된 제자에게 직접 전수해준다. 물론 이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을 얻어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인 니르바나(Nirvana, 涅槃)에 이르는 것이다. 이 수행법은, 만약 올바른 방법으로 수련만 한다면 니르바나에 이르는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빠른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티베트의 일반적인 인식에는 사람의 선한 행위에는 좋은 결과가 뒤따른다고 한다.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천계에 다시 태어나서 그가 지상, 즉 전생에서 이루고 싶었던 모든 소원인 젊음, 아름다움, 부귀. 능력 그리고 감각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을 천신과 같이 누리기만 한 결과로 그의 복덕의 창고를 모두 소비한 다음에는 다시 점차 피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고 죽은 다음에 다시 태어나긴 하지만, 이번에는 바로 아래의 낮은 단계의 세상에 태어난다는 식이다. 물론 반대 경우도 있어서 상승곡선을 그으며 바로 윗 단계로 점차로 올라갈 수도 있다. 이른바 불교의 인과응보론(因果應報論)이다.
이 논리는 다시 이어진다. 비록 자비스런 마음과 행동에서 우러난 선한 일일지라도 그것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반드시 참된 자아를 깨울 수 있고 또한 그가 스스로 옳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지혜를 터득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만 그는 모든 경험을 초월하여 지옥과 천당 저편의 궁극적인 목표인 니르바나에 이르게 된다. 이런 초월을 증득한 다음에야 그는 더 이상 출생과 죽음사이를 윤회하지 않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된다는 것이다. 위의 논리는 ‘지혜와 행위의 합일’을 강조하는 티베트불교의 알맹이에 해당된다.
대개의 티베트인들은 샴발라는 불교의 궁극의 경지 니르바나의 중간 정거장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누구든지 한번 샴발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다시는 육도윤회(六道輪回)의 단계에서 그 이하의 단계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증수표 같은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기에 샴발라는 비록 천국은 아니지만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오직 하나의 순결한 땅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샴발라 왕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역사상의 석가세존이 세상에 머무실 때라고 한다. 그 때 깔라짜끄라(Kalacakra)의 가르침이 전래되어서 현재까지도 번성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한층 더 크게 융성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이 샴발라의 명칭은 석가족인 샴바까(Shambhaka)가 다스림으로써 그와 같이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는 설도 있고 또는 자재천(自在天, Īśwara)의 이름이기도 해서, 그가 다스리는 나라를 샴발라라고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지만, 서구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로는 인도의 비슈누(Visunu) 신화의 한 갈래에서 출현하는 갠지스 강변의 ‘샴발라’ 라는 신화에서 전래받은 것이라는 설이 가장 비중이 크다. 샴발라의 불교 전래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할 예정이기에 우선은 줄이기로 한다.
한 때 영원한 이상향 샴발라의 열풍이 거세였을 때 어떤 미국외신기자가 그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해대자, 14대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농담으로 받아넘기셨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그 전설을 믿고서 인도에서 계속 북쪽으로 간다면 북극에 도착할 것이오. 그래도 더 북쪽으로 나아간다면 베링해협을 지나 북아메리카에 도착할 것이오. 그러니까 이상향 샴발라는 바로 아메리카, 바로 당신 고향 땅이 아니겠소?”
패러독스(Paradox)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역설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옳은 말이니까. 달라이 라마성하는 샴발라에 대해서는‘외계존재설’의 지지자라고 알려져 있다.
어떤 자료는 지구촌의 진리가 야만인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날 샴발라의 왕은 다른 혹성에서 철로 만든 바퀴, 즉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로 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설은 현재도 많은 티베트의 고승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한다. 깔라짜끄라의 어원인‘시간의 수레바퀴’가 바로 외계의 비행접시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서양학자들은 많다. 한편 외계설과 궤도를 약간 달리하는‘샴발라의 투명설’을 주장하는 기록도 적지 않다. 샴발라라는 곳은 보통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혹시 우연하게 샴발라의 문턱에 들어갔더라도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넓은 초원과 찬란한 황금빛 사원이 보이는 대신에, 눈에 덮여 있는 텅 빈 계곡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 어떤 사람에게? 샴발라의 대문은 열려지는가?
티베트불교의 이론으로는 사물을 보는 우리 인간의 눈은 다섯까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티베트의 고승들의 공통된 증언으로는, 샴발라를 느낄 수 있거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지의 안목은, 적어도 세 번째‘신통의 눈’그 이상이라고 한다.
그 첫째는 미혹에 빠져 있는 보통사람의 눈으로‘물의 눈‘이라고 부른다. 다음으로는‘육체의 눈’이 있는데, 좋은 카르마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의 눈으로 대개 18일 동안의 거리 정도를 바라볼 수 있다. 다음 단계로는 수행자가 참선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면 그의 비전은 좀 더 예민해져서 숨겨진 물체와 장소를 인식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데, 이를‘신통의 눈’이라 한다. 네 번째는‘지혜의 눈’인데. 타인의 마음을 관통할 수 있고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이라도 정확히 알 수 있는 눈을 말한다. 마지막으로‘붓다의 눈’으로 궁극적인 자연의 존재와 실상을 깨달은 눈이다.
그 이외도‘제3의 눈(The third eye)’이라고 널리 알려진 것도 있는데, 이는 위의 5단계 구분법과는 다른 체계로 사용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이를‘쉬바의 눈’으로도 불리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지혜의 눈’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래의 이미지를 내다볼 수 있고 정신적인 지혜의 눈을 통해 보살의 형상이 예시하는 것이 나타나는 경지를 말한다. 제3의 눈’은 대개 인도나 네팔 식 사원의 건축물의 중앙이나 불상의 양미간에,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서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길을 한참 붙잡게 한다.
육체적인 눈 이외에도 샴발라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조건은 카르마(Karma,業)에 달렸다고 한다. 과거 전생에서의 행위에 따라 다음 생의 과보가 결정되어진다는 카르마 사상은 티베트 뿐만 아니라 모든 불교권에서도 가장 보편화된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이에 따라 선한 카르마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샴발라가 있는 숨겨진 계곡의 입구가 열린다고 한다.
『세계의 미스터리 비밀을 벗다』라는 책을 쓴 실비아브라운(sylvia Browne)이라는 현대의 뛰어난 영매(靈媒)는 그녀가 모시는 ‘신의 언어’를 빌려 샴발라의 어원이 산스크리트가 아니고 레무리아 대륙에서 온 언어라고 말하며,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샹그리라는 각각 고리 모양의 산맥에 둘러싸인 여덟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여덟 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처럼 보인다. 맨 안쪽 고리의 한복판에는 수도인 깔라파가 있고 황금, 금강석, 산호, 보석 등으로 이루어진 왕궁이 있는데, 모두 반짝이는 얼음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샴발라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왕궁에는 외계의 생명체를 연구하는 고성능 망원경 구실을 하는 렌즈들로 이루어진 특별한 창이 있다. 샴발라의 주민들은 수백 년 동안 그물처럼 얽혀 있는 지하터널을 오가는 자동차와 비행기를 이용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샴발라 사람들은 투시력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능력 그리고 마음대로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능력을 얻는다.
물론 이 코쟁이 무당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말의 근거가 되는 샴발라에 대한 지식은 19세기 초의 샴발라 열풍과 이어지는 신지학회(神智學會)의 활동의 결과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헝가리의 인류학자 코스마 드 코로스(Cosma De Coros)는 천신만고 끝에 라싸에 도착한 뒤, 샴발라의 전설에 매혹되어 그 근원적인 텍스트인『시륜경』을 찾아내는데 성공하여 전설속의 샴발라 왕국의 위치를 비정하였지만, 그러나 그의 이론은 서방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샴발라의 존재여부의 논쟁은 그 후 침묵에 들어가서 한 세기 가까이 거의 진전이 없었다가 독일의 구룬웨델(Albert Grunwedel)이 샴발라의 대한 책, 특히 제3대 빤첸라마의 샴발라의 안내서인『샴발라이 람익』을 번역하여 출판함으로써 다시 관심이 본격적으로 고조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실비아브라운이라는 무당이 말한 ‘신의 언어’란 실은 구룬웨델의 번역물에 기초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샴발라에 이르는 길(The Way to Shambhala)』이란 역저를 저술한 인류학자인 에드윈(Edwin Bernbaum)은 전 세계의 이상향을 비교분석하면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동서양적으로 모든 이상형의 무대는 3가지 기본적인 테마로 분류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첫째는 단테의『신곡(神曲)』중에서의 푸르게토리(Purgatory)산과 같이 죄를 정화함으로서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의 나라들 같은 유형들이고, 둘째는 오얏이나 천도복숭아 같이 특수한 음식물을 먹음으로서 육체적으로 영생을 얻어 들어갈 수 있는 곳들이고 , 세 번째는 샴발라같이 메시아의 출현에 의해 황금기를 맞는 숨겨진 신비의 왕국 같은 유형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마지막 유형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가게 될 것이다.
샴발라 왕국에서 전해 내려온 여러 종류의 깔라짜끄라 딴뜨라의 기록을 분석해보면, 샴발라에는 현재 티베트인들이 쓰고 있는 역산법과 천문학과 점성학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깔라파의 궁전에는 다른 혹성이나 태양계 시스템의 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초강력 망원경의 렌즈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특별한 하늘광선이 비추고 있고 나아가 왕은 일정한 거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거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현대과학용어로 본다면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니터할 수 있는 텔레비전 스크린 같은 것으로, 또한‘바람에 의한 석마(石馬)’는 바로‘하늘을 나는 비행체’로 볼 수 있다. 또한 화학적 물질을 또 다른 물질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나 바람 같은 자연적 힘을 에너지화 하는 물리적 방법도 실용화 하였다고 보여 지는데, 이런 과학의 진보는 샴발라의 주민들로 하여금 깔라짜끄라의 요체를 터득하는 명상수행의 큰 도움이 되게 하여 그 결과로 실질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육체와 마음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런 능력은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고 육체적으로는 범인들은 할 수 없는 룽곰(縮地法)이나 뚬모(生命熱, Tummo)같은 일종의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수적 효과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첫댓글 옴 아 훔~
샴발라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많았는데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열공하겠습니다^^
희고 푸른 산 속에 붉은 桃花, 저곳이 샴발라인가
샹그리라vs 샴발라의 구별이 이제는 확연해졌습니다.
신비의 왕국, 샴발라여~
샴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