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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의 강원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년~1810년 ?)는 조선 후기 영조 정조시대의 화가이다. 한국적 풍속화로 조선 시대 4대 화가에 꼽히는 화가이며 어려서 경기도 안산에서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 이론가인 강세황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다. 28세 때인 1773년에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어 영조어진과 왕세자의 초상을 그렸다. 1781년에는 정조어진 익선관본 도사의 동참화사로 활약했으며, 이 무렵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라 자신의 호를 '단원'이라 지었다. 단원은 산수화,·도석인물(道釋人物)화, 풍속화조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승지로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그 명성을 자자하니 임금이지만 정조임금도 무척이나 가보고 싶었으나 國政에 힘써야 하는 군왕으로서 최소 한 달은 걸리는 금강산 유람을 다녀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림으로나마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금강산 풍경화를 그려 올 화가는 자신이 왕세손(王世孫) 시절부터 신임하고 아꼈던 김홍도를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카메라가 있어 카메라로 풍물을 촬영하여 여러 사람이 볼 수 있지만 이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그림으로 이 명승지를 보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44세 때인 1788년 가을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및 관동팔경 지역을 사생 여행하게 된다. 이때 정조임금은 김홍도와 함께 동료이자 선배화원인 김응환도 동행할 것을 명하고, 두 사람이 거쳐 가는 지방의 수령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부족함이 없이 준비해 주라고 특별히 지시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결심과 지시 때문에 우리들은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을 통하여 훌륭한 화가가 그린 옛 모습의 강원도 명승지를 지금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김홍도가 다녀온 금강산과 관동팔경 사생 여행의 경로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가는 한양에서 철원, 회양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을 주로 보는 코스가 아니고 한양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영동고속도로와 동해안 해안도로, 그리고 금강산에 이르는 코스를 잡았다. 이것은 김홍도의 여행 목적이 단순히 금강산뿐만이 아니라 관동팔경까지 포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관동팔경의 명승지를 얼마나 가보고 싶어 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금강산은 관동팔경과 함께 바다(海)와 산(山) 절경의 중심이었지만, 오직 금강산만이 볼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김홍도가 지나간 지역 중에는 남한의 대표적 명산, 설악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북한 금강산과 통천군, 북한 고성군도 강원도이고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도 예전엔 강원도였고 관동팔경이 있기에 함께 자료를 수집하였다.
<삼척 죽서루(竹西樓)> 죽서루는 보물 제213호. 삼척시 서쪽 오십천이 흐르는 강안에 솟아 있는 절벽 위에 위치해 있는데 관동8경의 하나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1275년(충렬왕 1)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1403년(태종 3)에 부사 김효손(金孝孫)이 중수한 것이다.
조선 19대 숙종임금은 '열성어제'에 수록된 죽서루의 찬양시에서 『硉兀層崖百尺樓(율올층애백척루) 朝雲夕月影淸流(조운석월영청류) 粼粼波裡魚浮沒(린린파리어부몰) 無事凭欄狎白鷗(무사빙란압백구)』 『우뚝 솟은 층층벼랑에 백척 루가 더 높고 조석으로 구름과 달이 맑은 물에 비치네. 반짝이는 물결 속에 물고기도 뛰는데 할 일없이 난간에 기대어 갈매기와 노니네.』하였고 조선 22대 정조임금은 단원 김흥도가 그려서 가지고 온 죽서루 그림을 보고 오십천 절벽위의 죽서루를 바다 해변의 벼랑위에 세워진 죽서루로 잘못 알고 지은 시에서 (正祖御製詩 정조어제시) 『彫石鐫崖寄一樓(조석전애기일루) 樓邊滄海海邊鷗(누변창해해변구)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복야유)』 『돌 다듬고 절벽 깎아 세운 누각하나. 누각 옆이 푸른 바다이고 바닷가에는 갈매기 노니네, 죽서루 있는 고을 태수는 누구 집 아들인가, 미녀들 가득 싣고 밤새워 뱃놀이 하겠구나.』 삼척부사를 시샘하는 듯한 어제를 죽서루에 내렸다. 조선시대 두 임금이 죽서루의 경치에 반해 어제 시를 남긴 것도 드문 일이다. 조선 숙종의 어제시판 조선 정조의 어제시판
<동해 능파대. 추암 촛대바위> 동해시의 명소 추암 촛대바위는 수중의 기암 괴석이 바다를 배경으로 촛대바위와 함께 어울려 빚어내는 비경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장소다. 촛대처럼 생긴 기이하고 절묘한 모습의 바위가 무리를 이루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동해 무릉계곡> 무릉계곡은 두타산(1,353m)과 청옥산(1,256m), 고적대(1,354m)에서 발원한 계류들이 흐르는 골짜기로, 호암소부터 용추폭포까지 약4㎞의 계곡으로, 산수의 풍치가 절경을 이루어 소금강이라고도 불리며, 1977년 3월 17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계곡 하류에는 1,500여 평의 무릉반석을 중심으로 두타산성 등의 유적과 더불어 1998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된 계곡의 입구에는 유서 깊은 삼화사(三和寺)가 있다.
<강릉 경포대(鏡浦臺)> 경포대는 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위치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호(1971.12.16 지정)이다.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이다. 고려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 존무사(存撫使) 박숙정(朴淑貞)에 의하여 신라 사선(四仙)이 놀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印月寺) 터에 창건되었으며, 그뒤 조선 1508년(중종 3)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다고 전해진다. 여러 차례의 중수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경포대와 경포호수는 1981년 강원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경포호수는 호숫물이 거울과 같이 맑다고 하여 경호(鏡湖)라고도 불린다. 면적은 1.064㎢, 호수둘레 5.21㎞, 준설 후의 평균 수심은 약 0.96m이다. 바닷가에는 유명한 경포해수욕장(길이 6km)이 있다. 경포대에서는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의 달이요, 둘은 호수의 달, 셋은 바다의 달, 넷은 술잔의 달, 다섯은 님의 눈에 비친 달이라는 경포호수의 탄생에 얽힌 애잔한 이야기가 전한다.
<강릉 구산서원(丘山書院)> 구산서원은 퇴계 이황선생의 시 ‘서원십영(書院十詠)에 등장하는 서원으로 강릉 구정면에 있었다고 한다. 현제 강릉시 성산면 구산리에 있는 오봉서원(五峰書院)의 위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강릉 호해정(湖海亭)> 호해정은 강릉시 저동 경포호의 북쪽 언덕위에 위치한 누각이며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 강원도 유형문화제 제 62호로 지정되어 있다.
<강릉 대관령(大關嶺)> 대관련은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며 높이 832m. 총연장 13㎞. 강릉에서 서쪽으로 17㎞ 정도 떨어져 있다. 예로부터 태백산맥을 넘는 고개의 하나로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이 일대는 황병산,· 선자령,· 노인봉,· 발왕산에 둘러싸인 고개이다. 대관령은 예로부터 고개가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을 빌려 대관령이 되었다. 또 다른 유래로는 영동지방으로 오는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대관령이 유래했다고 한다.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고 하여 아흔아홉 구비라고도 한다. 옛날에 서울 사는 어느 선비가 감이 많이 생산되는 강릉에서 곶감 한 접을 사서 구비를 돌때마다 하나씩 먹고나서 정상에 도착해 보니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양양 낙산사(洛山寺)>
낙산사는 양양읍에서 북쪽으로 약 7㎞ 떨어진 곳에 있는 사찰이다. 낙산의 정상부에서 남쪽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형의 가장 평탄한 능선 위에 낙산사의 주요 가람이 배치되어 있다. 낙산사 사찰의 주축은 낙산의 지세에 따라 북서쪽에서 남동을 향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있으며, 북쪽과 서남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낙산사 일원은 2008년 12월 18일에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낙산사는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낙산사에 있는 많은 문화제는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건칠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362호),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보물 제1723호), 양양 낙산사 일원(사적 제495호), 의상대와 홍련암(명승 제27호), 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낙산사원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홍련암(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등이다. 낙산사는 창건 후 여러 번의 소실과 중창이 계속되었다. 특히 1950년 6.25 전쟁 시에는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다가 1953년부터 1999년 까지 모든 문화제와 전각이 건립되었었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의 동해안을 휩쓴 대형 산불 화재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어 보물 제479호 낙산사 동종 까지 소실되었다. 화재 후 정부와 종단에서는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중창 신축 복구를 계속하여 지금은 옛 사찰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양양 관음굴, 홍련암(紅蓮庵)> 양양 낙산사 홍련암(襄陽 洛山寺 紅蓮庵)은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 동쪽 해변에 자리 잡은 불전이다. 1984년 6월 2일 강원도의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을 직접 보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련암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의상대와 함께 홍련암을 명승 제27호로 지정하였다. 한국의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인 홍련암은 해변에 자리 잡은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홍련암은 2005년 낙산사의 화재시에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
<속초 영랑호(永郎湖)> 영랑호는 속초시 장천동·금호동 및 영랑동에 걸쳐 있는 호수이다. 속초시에는 영랑호와 청초호(靑草湖)의 두 석호(潟湖)가 동해와 접하여 있다. 영랑호는 속초시 서북쪽 장사동, 영랑동, 동명동, 금호동에 둘러싸인 둘레 8㎞, 넓이 약 1,190,088m²(36만 평)의 자연호수이다. 영랑호라 명명된 것은 신라의 화랑인 '영랑'이 이 호수를 발견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금강산에도 영랑호가 있다. 뒷편 멀리 울산바위가 보인다.
<설악산 계조굴 계조암(繼祖庵)> 계조암은 설악산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늘 높이 솟아있는 거대한 울산바위 아래 있는 자연 석굴을 사원으로 만들어 그 구조가 특이하다. 652년(신라 진덕여왕 6년) 자장(慈藏)율사가 신흥사의 전신인 향성사(香城寺)와 함께 창건하였으며 신흥사의 부속암자이다. 현재 경내에 있는 석간수와 흔들바위가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석굴 뒤쪽에는 백여명이 함께 앉아 식사할 수 있다는 식당암(食堂庵)이라는 반석이 있다.
<설악산 와선대(臥仙臺)> 와선대는 소공원에서 약 2.8km 지점, 비선대 아래에 있다 천불동 첫머리의 계곡에 흰빛을 띤 한 개의 넓은 바위가 천년의 못을 이루고 있는데, 옛날 마고선이라는 신선이 바둑과 거문고를 즐기며 아름다운 경치를 누워서 감상하였다고 하여 와선대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설악산 토왕폭. 토왕성폭포(土王城瀑布)> 토왕성폭포는 속초시 설악동에 있는 폭포이며 일명 신광폭포(神光瀑布)라고도 한다. 설악산국립공원의 외설악지역에 속하며 칠성봉(七星峰, 1,077m) 북쪽 계곡 높이 약 450m 지점에 위치한다. 폭포의 이름은 토기(土氣)가 왕성하지 않으면 기암괴봉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오행설(五行說)에서 유래되었다. . 2013년 명승 제96호로 지정되었다. 폭포수가 3단을 이루면서 떨어지는 모습이 절경이며, 상단150m, 중단80m, 하단90m로 총 길이가 320m에 이르는 연폭으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도 웅장하다.
<고성 청간정(淸澗亭)> 청간정은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에 있는 조선시대 건립된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2호이다. 설악산 연봉(連峰)에서 발원한 청간천이 동해로 흘러드는 하구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정자 안쪽 추녀 밑에 걸려 있는 ‘淸澗亭’ 현판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이며 이와 마주하여 최규하 대통령의 친필 휘호인 '악해상조고루상(嶽海相調古樓上) 과시관동수일경(果是關東秀逸景)' 시판이 게시되어 있어 한 정자에 두 대통령의 휘호가 게시되어 있는 특이한 정자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휘호 명판 최규하 전 대통령의 휘호 시판
<평창 청심대(淸心臺)> 영동고속도로 진부IC를 나와서 국도 59호선 평창군 진부면 마평리에 있는 청심대(淸心臺)는 1418년(태종 18) 강릉도호부사 양수(梁需)가 한양 내직으로 명을 받아 상경하게 되자 그동안 부사의 총애를 받던 명기 청심(淸心)이 그냥 혜여지기 서운하니 대관령 넘어 까지만 동행하여 전송하게 해 달라는 간청으로 이곳까지 동행하던 중 강변 절벽의 경치를 보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제 혜여지면 다시 볼 수 없고 강릉에 돌아가면 또 다른 관리에게 수청을 들어야 하는 관기 생활을 하게 되므로 이에 청심은 굳은 절개를 지키려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청심의 정절을 기리고자 청심대라 명명되었으며, 이곳의 정자는 1927년도에 면 관내 유지들이 성금을 모금하여 정자를 건립하였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월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로 강원도 중남부에 있는 60여 개의 절을 관리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존 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통도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사찰 일부가 소실된 것을 중창하였고 6.25전쟁 14후퇴 시에는 사찰 10여 채가 소실된 것을 1964년에 적광전을 중창한 이래로 계속 중건하여, 현재는 대강당,·삼성각,·심검당,·승가학원,· 용금루,·일주문,·요사채, 등이 중창되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8각9층석탑(국보 제48호),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보물 제140호) 등이 있다.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오대산의 상원사는 월정사와 함께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으며, 성덕왕 4년(705년)에 중창하였으나, 1946년에 불타 1947년에 새로 지은 절이다. 이 절에는 신라 성덕왕 24년에 만든 높이 1.67m, 지름 91cm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제36호)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소리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또한 세조가 직접 보았다고 하는 문수동자의 모습을 조각한 문수동자상, 상원사를 중창하기 위해 세조가 쓴 친필어첩인 중창권선문이 있다. 상원사 입구에는 관대걸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 역시 오대산과 얽힌 세조의 전설 중의 하나이다. 세조가 몸에 종기가 많이 나서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서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지나가던 한 동승에게 등을 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승에게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고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요."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며, 목욕을 할 때 관대를 걸어두었던 그곳이 지금의 관대걸이다.
<오대산 사고(五臺山 史庫)> 오대산 사고는 사적 제37호로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북쪽 10리 남호암(南虎巖) 기슭에 있는 국가의 외사고(外史庫)로서 오대산사고가 설치된 것은 1606년(선조 39)이었다. 이 사고에는 일부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족보인 선원보락을 보관되어 있던 곳인데 일제 강점기에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강제 반출되었던 사고본 일부인 46책이 2006년에 우리나라로 반환되어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는데 원래 있던 이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오대산 중대(中帶)> 오대산 중대암은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전, 적멸보궁이며 상원사(上院寺)를 지나 중대 사자암(獅子庵) 위쪽에 위치한다. 보물 제1995호이며 적멸보궁이란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사찰로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금강산 구룡폭포(九龍瀑布)>
금강산 구룡폭포는 폭포의 높이 74m, 너비 4m 이고, 일명 중향폭포(衆香瀑布)라고도 한다. 금강산 온정리 소재지에서 약 30리쯤 되는 신계천의 위쪽 구룡연 구역에 있다. 이 폭포는 설악산의 대승폭포(大勝瀑布), 개성 대흥산성(大興山城)의 박연폭포(朴淵瀑布)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 중 하나이며, 금강산 십이폭포(十二瀑布), 비봉폭포(飛鳳瀑布), 조양폭포(朝陽瀑布)와 함께 금강산 4대 명폭의 하나인데 웅대하고 경치가 뛰어나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
<금강산 만물상(萬物相) > 금강산 만물상 구역은 금강산 외금강지역의 온정천 상류의 한하계와 만상계, 만물상의 명승들을 포괄하는 명승구역으로, 금강산의 산악미를 대표하며 깎아지른 층암절벽과 천태만상의 생김새를 가진 기암괴석들로 특이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원래 만물초(萬物草)라 하였다. 수수만년 비바람에 자연적으로 다듬어져 자기 나름의 형체를 갖춘 바위들이 수많이 솟아 있어 이곳에서 만물의 모양새를 다 볼 수 있다고 하여 만물상이라 하였다. 외금강의 신계천(神溪川) 상류에 두부침식(頭部侵蝕)으로 형성된 바위산인데, 북쪽의 오봉산(五峰山, 1,264m)·세지봉(勢至峰, 1,041m)·문수봉(文殊峰, 906m)· 수정봉(水晶峰, 773m)으로 이어지는 연봉과 남쪽의 상등봉(上登峰, 1,227m)에서 관음봉(觀音峰, 458m)으로 연결되는 관음연봉과의 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금강산 내금강 만폭동(萬瀑洞)> 내금강 만폭동은 북한 천년기념물 제455호(1985년 7월 지정)로 금강문에서부터 화룡담 까지 약 1km 구간을 포괄하는 곳인데 금강산 중에서 계곡의 절경을 대표하는 구역으로 만개나 되는 수많은 폭포와 소(沼 늪소)가 있다고 하여 이름이 붙혀졌다고 한다.
<금강산 수미탑(須彌塔)> 수미탑은 내금강 수미봉에 있는 자연탑형 기둥 암이다. 귀면암(鬼面巖)은 외금강 만물상 입구에 있는 괴암으로 모양이 귀신 같이 험상궂게 생겼다고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금강산 삼일포(三日浦)> 금강산 삼일포는 외금강의 금강산 온천 입구인 온정리(溫井里)에서 12km 가량 북쪽에 있는 석호(潟湖-바다와 분리된 호수)로 36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호수로 그 풍경이 으뜸이다. 삼일포(三日浦)란 이름은 신라시대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석랑(南石郞) 안상랑(安祥郞) 등 4명의 화랑(花郞)들이 뱃놀이를 하다가 절경에 정신이 빠져 3일 동안 돌아가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금강산 선담(船潭)>
금강산 선담은 외금강 구연대에 있는 소(沼)이다. 지역 모양이 배 모양과 같다고 하여 선담이라고 한다. 개울 양쪽을 가로지른 큰 바위벽 아래 마치 돌구유 같이 우묵하게 파인 곳에 물을 함빡 담고 있다. 이 선담은 그 생김새가 기묘할 뿐 아니라 위와 아래에 각각 누운 폭포가 잇닿아 있어 더 한층 그윽하고 아름답다. 길이 23m, 너비8m, 깊이 4m나 되는 이 선담은 내금강의 선담과 구별하여 외선담이라고도 한다.
<금강산 해금강(海金剛)> 해금강 전면과 후면
해금강은 강원도 고성군에서 북쪽으로 1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 걸쳐 해안을 따라 있는 명승지이다. 경치가 금강산을 닮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태백산맥의 한줄기가 동해안으로 뻗어 이루어진 것이고 해돋이 광경이 훌륭하다. 화강암이 해안에서 특히 풍화와 침식에 의해 형성된 반석, 언덕, 암초 등을 이루어 절경을 이룬다. 송도(松島), 불암(佛巖), 대봉(大峰), 선암(船巖), 작도(雀島)와 천만 가지의 기묘한 생김새를 가진 해만물상(海萬物相) 및 입석리(立石里) 해안 등이 유명하다.
<해산정(海山亭)>
해산정은 서쪽으로 금강이, 동쪽으로 해금강이 바라다 보이고 남쪽으로 남강이 흘러가는 바다 산 강을 아우른 천혜의 정자이며 고성의 해산정(海山亭)은 관동10경의 하나이다. 해산정은 바다와 산, 강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에 海(해)와 山(산)을 취해 이름을 삼았다. 그 바다는 해금강이 있는 바다요, 그 산은 외금강이니 더 무엇을 보탤 수 있겠는가?
<내금강 장안사(長安寺)>
내금강 장안사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내금강 지역에 있는 사찰이었다. 장안사는 유점사, 신계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내금강의 입구부인 노송(老松)이 늘어선 곳에 자리 잡은 신라 때에 창건한 거찰로 여러 차례에 걸친 흥망의 역사를 지닌다. 신라 법흥왕 때, 또는 551년(양원왕 12) 고구려의 승려 혜량(惠亮)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중수하고 소실되고를 반복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300여칸이나 되는 대 사찰로 증축되어 오다가 6.25전쟁시에 소실되어 그 터만 남아 있다.
<내금강 명경대(明鏡臺)>
내금강 명경대는 높이 90m, 너비 30m이며 1980년 2월 북한 천연기념물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장안사에서 북동쪽 1km 지점인 백천동 골짜기에 있다. 화강암 바위로 바위면이 반듯하고 적갈색을 띠고 있어 마치 거울을 산에 세워놓은 것 같다고도 하고 또는 바위 밑 계곡물에 비치는 그림자가 거울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명경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옆에는 면적 180㎡, 깊이 3.8m의 황류담(옥경담)이라는 둥그런 소(沼)와 배석대가 있다. 주변에는 단풍나무 박달나무 참나무 등이 울창하다. 명경대와 배석대 둘레에는 십왕봉 판관봉 인봉 죄인봉 사자봉 지옥문 극락문 등이 있다.
<내금강 문탑(門塔)>
내금강 문탑은 내금강 명경대구역 백탑동으로 들어가는 돌문형 바위이다. 높이 20m나 되는 바위가 양쪽에 대문기둥처럼 우뚝서있어 문탑이라고 한다.
<내금강 영원암(靈源庵)>
금강산에서 가장 깊고 고요한 곳으로 알려진 내금강 명경구역의 영원동에는 개울 물 흐르는 소리, 이름 모를 새들이 우짖는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온다. 그런 가운데 우뚝 솟은 지장봉(地藏峰: 1,381m)을 배경으로 탁 트인 곳에 ‘영원암(靈源庵) 터’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소실되고 없지만 영원암은 금강산 일원에서도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알려졌었다. 신라 때 영원조사(靈源祖師)라는 스님이 이곳에 살면서 도를 닦았다고 하여 이름이 지어졌다. 영원조사는 경상남도 동래의 범어사 명학스님과의 인과보응 전설이 있다.
<내금강 증명탑(證明塔)>
내금강 증명탑은 금강산 내금강 명경대구역 백합동에 있는 자연 돌탑 무리들 가운데 있는 문탑의 동쪽에 있는 높이 30여m 되는 큰 바위탑이다. 겉면이 인공적으로 다듬은 듯이 매끈하여 등불과 같이 밝게 빛나는 탑이라는 뜻에서 증명탑이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바위에는 예서(隸書)로 ‘證明塔’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한다.
<통천 총석정(叢石亭)>
총석정은 강원도 통천군 고저읍 총석리 바닷가에 있는 누정이며 바다 위에 빽빽이 솟아 있는 돌기둥(叢石) 위에 세워 총석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총석들은 현무암이 오랜 세월 비바람과 파도에 부딪혀 그 면들이 갈려져 떨어지면서 6각형·8각형 등 여러 가지 모양의 돌기둥들이 장관을 이룬다. 또한 총석들은 그 생김새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뉘는데, 바다로 향하여 오른쪽에 좌총(坐叢: 앉은 자세), 왼쪽에 와총(臥叢: 누운 자세), 그 사이에 입총(立叢: 선 자세)이 있고, 주위에 묘하게 생긴 바위들과 돌기둥 위의 소나무가 신비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총석정은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이곳의 절벽과 바위가 신기하고 아름다워 이곳을 ‘통천금강(通川金剛)’이라고 하였고, 이 곳에서의 아침 해돋이구경이 절경이라고 하였다.
<통천 환선정(喚仙亭)>
환선정은 총석정 반대편에 있던 정자인데 총석정 서쪽 언덕에 있어 서로 마주본다. 돌들이 바둑판에 놓은 돌처럼 무수히 흩어져 있고, 투호놀이의 산가지처럼 세워져 엇갈려 있어 기이한 모양을 연출하고 있다. 두 정자 사이에는 바닷물이 돌아 흐른다. 벌려 서 있는 절벽은 둘러친 병풍 같고 우뚝 솟은 기이한 바위는 대자리를 묶어 놓은 것 같다.
<통천 시중대(侍中臺)>
시중대는 북강원 통천군 학일면에 있는 정자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을 북쪽 7리쯤에 긴 산등성이 뻗어나가다가 동쪽으로 서렸는데 3면이 모두 큰 호수이다. 호수 물이 넘치고, 물가가 돌고 굽으며 밖으로는 큰 바다가 둘렀으며 작은 섬이 바다 가운데 들어선 것이 일곱이다. 천도(穿島), 묘도(卯島), 우도(芋島), 승도(僧島), 석도(石島), 송도(松島), 백도(白島)라고 부른다. 호수와 바다 사이에 푸른 소나무들이 길을 끼고 있는 곳에 대(臺)를 예전에는 칠보(七寶)라고 하였다.
<통천 옹천(甕遷)>
옹천은 강원도 고성군과 통천군 경계선상에는 '독벼루'라는 높은 벼랑이 있다. 마치 큰 독이 물에 거꾸로 박혀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고성과 통천을 오가려면 험한 산길을 몇 십리 돌아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벼랑에 두어 자 되는 너비의 길을 내었는데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다닐 수 있다. 길 아래는 천길 벼랑이고 벼랑 밑으로는 파도에 밀린 검푸른 바다물이 소용돌이 친다. 이런 줄도 모르고 고려말에 왜구들이 여기를 쳐들어왔을 때 고성, 통천사람들이 섬멸시킨 뒤로는 옹천은 '왜륜천'이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울진 망양정(望洋亭)>
망양정은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의 뒷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정자이다. 동해와 접한 산봉우리에 위치하여 서쪽으로는 관광명소인 성류굴이 있고 정자 아래에는 망양해수욕장이 펼쳐져 있다. 망양정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기성면 밀양리 해안에 처음 세워졌으나 1471년 송종 2년에 현종산에 옮겼다가 1860년 철종 11년에 이곳으로 이전 중수하였다.
<울진 성류굴(聖留窟)> 성류굴은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석회동굴이다. 천연기념물 제155호(1963년에 지정). 길이 800m. 일명 선유굴(仙留窟), 장천굴(掌天窟)이라 한다. 성류굴은 임진왜란 때 부처를 이 굴에 피난, 보호하였다는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생대(始生代)의 변성퇴적층의 석회암지대에 발달하며, 동굴의 바로 옆을 흐르는 왕피천(王避川)의 침수로 동굴 속에 넓고 깊은 동굴호수가 발달하고 있다. 그리고 12개의 광장과 3개의 연못을 비롯하여 종유석(鍾乳石)· 석순(石筍)·석주(石柱)가 많다. 임진왜란 때 주민 500여 명이 이 굴 속에 피난하였는데, 왜병이 이 굴의 입구를 막아 모두 질식하였다는 애화도 있다. 동굴은 수평적인 횡굴로 동굴호수의 깊이는 5m가 넘으며, 동굴의 통로에 따라 종유석과 석순·석주 등이 계속된다.
<평해 월송정(越松亭)>
월송정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송림에 자리 잡고 있다. 1326년(충숙왕 13)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처음으로 지었다. 충선왕 때 안축(安軸)의 기문에 “정자를 여기에 지으면 그 운치가 한송(寒松) ·월송(越松)의 두 정자와 서로 갑을이 될 것이다”라고 한 기록이 있으며, 1349년(충정왕 1) 이곡(李穀)이 쓴 「동유기(東遊記)」에 의하면 평해군청에서 5리 되는 곳에 이르면 일만 주의 소나무 속의 정자를 월송이라 하고, 이 월송에 사선(四仙)이 놀고 지나갔다 하여 그 이름이 연유된 것이라고 하였다. ♬♬ Jong Y. L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