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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행12 - 제남 박물관에서 당나라와 송나라 역사를 구경하고 천불산에 가다!
2025년 9월 9일 산동성의 성도 지난(제남)에서 택시를 세워 타고는 30분 가량을 달려서 제남의
산동 박물관 山東 博物館 Shandong Museum 에 도착하니 60세 이상이면 신분증을
보고는 무료 입장을 시키는데 박물관의 규모가 너무나도 커서 이른바 대륙 스케일을 실감합니다.
오늘이 화요일인데도 박물관 안에는 젊은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놀라운데... 중국 젊은이들의
자기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는걸 느끼면서 고대사와 한나라
시대와 오호16국 시대 전시물들을 보고는 중국을 통일한 수와 당나라 시대를 전시한 방을 봅니다.
이후 탁발씨의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면서 왕조가 바뀌었고 동위는
북제, 서위는 북주로 바뀌는데 고씨의 북제는 처음에는 강성했으나
곡률광, 고장공이라는 뛰어난 명장들이 황제에게 죽으면서 점차 쇠퇴합니다.
반면에 우문씨의 북주는 점점 강성해졌으니 두 나라의 강을 사이에 둔 대치 지역
에서 처음에는 겨울에 북주가 북제를 막으려고 얼음을 깨서 도강을
막으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북제가 북주를 막으려고 얼음을 깼다고 합니다.
끝내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의 우문씨 무제는 중원 통일을 꿈꾸었으나.... 급서하자
황제의 장인이자 북주의 대장군이었던 양견은 권력을 장악한 뒤, 섭정을 시작
했는데 우문씨 선제(宣帝)가 매우 어리석어 난폭한 짓만 하다가 죽게 되자
북주 정제에게 선양(?)을 받은 뒤에 수나라를 건국하니 바로 수 (隋) 문제 입니다.
수 문제는 즉위한지 8년째인 588년 10월에 한금호 (韓擒虎), 하약필 (賀若弼) 등
의 명장들에게 52만 대군을 맡겨 여덟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남조의
진 (陳) 을 공격하였으니 진의 수도 건강 (建康) 은 순식간에 함락되고, 우물에
숨어있던 황제 진숙보 (陳叔寶) 가 사로잡히면서 진(陳) 나라는 완전히 멸망합니다.
남조는 북방 이민족에게 망하지 않고 사직을 지켜냈으며 일방적인 열위에만 있지
는 않고 몇차례 큰 공세를 퍼부은 적도 있었으며 초기에는 북방 오호들이
16개 국가로 명멸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는데.... 자치통감
에서는 위나라 위주로 기재하다가 뒤에는 동진-유송-제-양-진으로 기록을 합니다.
남조는 대체적으로는 열세로 수비위주 였는데, 송·위 전쟁기에 북조의 북위가 자만
하고 치밀한 준비 없이 무턱대고 강남으로 대군을 남진시켰다가 패배하기도
했으니 이런 점에서는 남조가 늘 북조에게 열위에 있지만은 않았으며..... 또
북방과 중원의 백성들도 살육과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송 (宋, 420년 ~ 479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439년 ~ 589년) 강남 지방에서 유유 (劉裕) 에 의해 건국된
남조 첫번째 왕조로 유송(劉宋)이라 부르기도 하니 동진말기 강남에서 손은(孫恩)이 난을 일으키자,
형주의 유력자 환현 (桓玄)이 반란의 진정을 핑계로 건강에 들어가 제위를 빼앗자 팽성 (彭城) 의 하급
군인이었던 유유 (劉裕) 는 병사를 일으켜 손은과 환현을 무찌르고 동진 황제 안제 (安帝) 를 복위시킵니다
제 (齊, 479년 ~ 502년) 는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에서 건국된 남조의 2번째 왕조로 남제 (南齊)
라 부르는데 송나라 말기 소도성은 난릉 (蘭陵) 출신의 하급 병사로 유휴범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자가 된뒤 황제를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479년 순제로 부터 선양 받아 제나라를 건국합니다.
양 (梁, 502년 ~ 557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한족이 강남에 건국한 남조의 3번째 왕조로
남제 말기에 황제였던 동혼후는 폭정을 해서 많은 대신들을 살해했고 먼 친척인
소의를 살해하니 옹주자사로 양양에 있던 소의의 동생인 소연은 폭군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함락한뒤 동혼후를 살해하고 화제를 옹립했는데
502년에 소연은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무제입니다.
진 (陳, 557년 ~ 589년)은 남조 최후의 왕조로 남진(南陳)이라고도 하는데 진나라를 건국한 진패선
(陳覇先) 은 미천한 가문의 군인 출신으로 후경(後景)의 난에 유능한 지휘관으로 난을 진압하고,
원제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북제(北齊)에 동조한 소연명 (蕭淵明) 을 제위에 올린 동료
왕승변(王僧弁)을 타도하고 경제를 추대하였으나 이후 경제의 선양을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수문제는 581년 수나라를 개국한후 서방진출을 위해 낙양 대신 장안을 도읍으로 정했으며
장성을 복구해 돌궐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고 운하를 파서 회수와 장강을 이었으며
후량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고는 장강 상류의 촉(쓰촨성)에서 대규모 함대를 장강을
따라 내려보낼 수 있었으니.... 남조의 진(陳) 은 오나라 처럼 양면 전선을 맞이했으니
형주 방어선과 사천(백제성) 방어선에 회남과 양자강 합비마저 뺏긴지라 쉽게 무느집니다.
수문제가 남조 진(陳)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당시 돌궐은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하였는데 양제가
북방을 순시하다가 돌궐의 장막에 이르러 우연히 고구려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배구는 천하의 대세가 이미 정해졌으니 고구려에서도 조공을 바치게 하여 천하를 얻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였으니 결국에는 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명나라때 백과사전인 (도서편 圖書篇)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때 수(隋)나라 문제 및 양제와의 2대에 걸친 긴 전쟁은 598년, 612년, 613년,
614년 등 4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특히 수양제의 제2차 원정은 양국 모두 국가의 모든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한 총력전의 양상을 띤 전쟁이었으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일어났던 전쟁입니다.
"왕이 요수(遼水) 넓이를 말하나 장강(長江)만 하겠으며 고구려 인구의 많고 적음이 진(陳)만 하겠는가?
짐이 만일 포용하고 기르려함이 없고, 이전 잘못을 질책하려고만 한다면 장군에게 명할 것이지 어찌
많은 힘을 필요로 하겠는가? 은근히 타이르고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할 뿐이다. 왕이 글을 받고
황공해서 표(表)를 올려 사과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삼국사기》권제19 <고구려본기> 제7“
제1차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장마와 태풍 등으로 30만 중에 8~9할이 전멸하여 별다는 교전도
없이 그냥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 기록이 전해지며, 혹자는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대패했다는 정황
을 암시하는 듯한 기록들을 근거로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을 축소, 은폐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2년(서기 591)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표문(表文)를 올려 사은하고 왕을 봉해 주기
를 청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3월에 수나라 황제가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
와 의복을 주었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사은하였다. 3년 (592)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8년(597) 여름 5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 遼東糞土臣某 “왕도 역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더러운 땅(糞土 분토)의 신하 모(某)’ 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황제가 이리하여 군진을 풀고 고구려를
처음과 같이 대하였다. 백제왕 창(昌=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서 군대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벌할
수 없다.” 라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 총 병력은 113만 3800명이고, 200만
이라 (과장해) 불렀으며, 식량 운반자는 배 였다.《수서》 권4, 제기, 제4, <양제 하 편>
그러나 고구려-수 전쟁의 수나라군 113만명 병력의 기록만큼은 숫자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중국의 정사 《수서》에는 '113만 3,800명' 이라고 무려 100의 자리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수나라의 호적 제도와 용 (庸) 제 등의 징용 및 징병 기록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서술이 불가능합니다.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만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 (중략)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 만에야 출발
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 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 어영(御營) 안에는 12위 (衛)· 3대 (臺)· 5성 (省)· 9시 (寺) 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 (內外前後左右)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1월.
어쨌든 수나라 군대가 북방의 탁군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산동성 동래에 병선 300여척을 건조하라는 명령
이 내려가니 원정에 늦지 않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자 일꾼들은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일하느라 전체의 3·4할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오랫동안 물속에 있어서 하반신이
썩고 구더기가 슬었다고 하는데 고구려는 저력을 발휘하니 수나라는 대패하고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하조가 2일 만에 완성하여 다시 한번 공격하자,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대패를 당하여 무려 10,000명
의 사망자를 냈으니........ 야전에서는 수나라 군대의 우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형세가 됩니다.
수나라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요동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함락이 되지않고 요동성 군사들이 가끔
나가서 싸웠던 것으로 보이며 불리해지면 성문을 닫고 버텼고, 수나라군은 시간이 지나도 요동성을
함락하지 못하며 본래 전력이 엉망이 되는데 양제는 요동성을 겹겹히 포위하며 100만이면 함락은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요동성의 병력은 강한 저항을 했고 3개월간 수 양제의 공격을 버텨냅니다.
수나라는 수 문제, 수 양제의 2대에 걸쳐 고구려와 싸웠으나 결국 패하였으니 특히 수 양제
가 고구려와 벌였던 2차 전쟁의 경우에는 살수대첩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30만의
대군이 궤멸당하는 엄청난 대패를 겪고 말았는데... 그에 따라 피해도 막심하여
엄청난 군량미와 군수 물자가 소진되었으며 수나라 조정의 재정도 상당히 소모되었습니다.
수나라 말기에 사방에서 병란이 일어났는데, 그중 두명의 팔주국의 후예 즉 이호(李虎)의 손자
이연과 이필(李弼)의 증손자 이밀이 병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연의 모친은
독고신의 넷째 딸이었고, 이연 또한 수 문제의 처조카이자 양제의 이종사촌형
이었으므로 당나라 황실과 관롱집단, 수나라 황실은 매우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연은 이러한 까닭으로 쉽게 수나라의 대흥을 함락할수 있었고, 중국을 재통일하니 관롱집단의 지지
를 쟁취하는 일이 중요함을 보여주는데 천인커는 "이씨 당나라 황실은 당나라 300년 통치의 중심
이니 고조, 태종과 고종의 전기(前期)는 장상 및 문무대신들이 서위, 북주, 수나라 이래 세업 (世業)
을 계승한 자들로 곧 우문태가 '관중 위주 정책' 하에 결집한 집단의 후예들이다." 라고 평가했습니다.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일본은 견수사에 이어 견당사를 보내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는등, 동아시아 여러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 역대 왕조
중에서도 당나라는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1000년 이상 지속되는 동아시아의 중국 중심
의 세계관을 완성한 나라였으나 안록산의난 이후 이민족들과 중국 민중의 불만이 폭발해 쇠퇴합니다.
당나라 황실은 수나라 황실처럼 한족인지 선비족인지 불분명한데 한족 왕조들에 의해 편찬된 기록이나
조선시대 동몽선습등을 보면 당을 선비족 정권보다는 한족 혹은 한화된 선비족 정권으로 여기는데,
당나라때 쓰여진“구당서”에는 이씨 황실이 진나라의 명장 이신, 전한의 명장 이광의 후손을 자칭한
흥성제 이고의 자손임을 밝혔으나 후대인 송대에 쓰여진 “신당서”에는 이민족 혈통을 강조했습니다.
당나라의 멸망후, 중국의 후계 왕조들과 주변 국가들은 당나라를 한족(漢族) 국가로 인식했으니
황족을 포함해 지배층에 선비족 혈통이 많았지만 북위 효문제 이래 선비족을 포함한 5호의
한족화와 한족 사족층의 등용이 진행됐기 때문으로 특히 홍농 양씨, 태원 이씨, 청하 최씨,
박릉 최씨 등 유서깊은 한족 명문가들이 북주 이래 수당 시대의 지배층이 된 관롱 집단
에 포함되었는데..... 요미원은 수나라와 당나라 황족들을 튀르크계 철륵에 기원했다고 봅니다.
618년에 고조 이연에 의해 건국된 당나라 시대는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
(晩唐) 으로 4시기로 시대를 구분하는데 당나라의 시를 편년할 때 쓰던 용어가 사학계
에서도 쓰이는데 626년 진왕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제와 조카들을 죽이고
고조로 부터 양위받아 황제로 즉위했으니 “627년부터 649년까지를 청관의 치” 라고 부릅니다.
630년 이정이 10만 대군으로 동돌궐을 멸망시켰고, 634년에는 토욕혼을 정벌하고 속국
으로 삼았으며 640년 후군집은 고창국을 멸망시켜 서역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644년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해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당태종이 고연수의 15만(?) 고구려
대군을 격파했으나 이후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는 당태종은 굴욕적으로 철수 합니다.
647년 울독군산 북쪽에서 설연타를 격파했고 651년 당나라가 노실필과 연합하자...
서돌궐의 을비돌육가한이 토화라로 도주했으며, 660년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
시키고 의자왕등 1만 3천인을 포로로 잡아 끌고왔으며 663년 나당연합군이 백강
전투에서 백제부흥군과 1천척의 왜군을 당나라 수군이 화공으로 크게 격파했습니다.
668년 글필하력과 이세적이 신라 김유신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해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주민
대다수를 포로로 잡아왔으며..... 670년 토번의 가르친링이 대비천 전투에서 당군을 궤멸
시키고 안서 4진을 점령했고 이 해에 신라와 나당전쟁이 발발했으며, 675년 신라군이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당군이 패배해 한반도 전역 점유에 실패합니다.
이 당시 티베트인들이 세운 토번이 강성해져서 서쪽에서 국경을 침범해 당군을 대파하고 수도
장안을 위협하니, 다급해진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 책임자인 설인귀를 급히 귀국
시켰지만 대비천전투에서 토번군에 패했으니.... 당나라는 서쪽 토번의 위협에 대처하는게
더 긴요한지라 동쪽 한반도 까지 2개 전선을 유지하는게 불가능해져 철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682년 왕방익이 이려하(일리강)에서 서돌궐의 반군을 섬멸시키고, 열해(이식쿨호)에서 10만여명
을 격파했으며 이 해에 돌궐 제2 제국이 다시 성립됐고 683년 고종이 붕어하자 중종 이현이
즉위했으며..... 684년 측천무후에 의해 중종이 폐위되고 예종 이단이 즉위했지만 690년
예종이 폐위되고 측천무후가 즉위해 국호를 주(周),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무주혁명) 했습니다.
750년 고선지가 2차 서역 원정을 개시해 사마르칸트와 타쉬켄트(석국)를 점령했고 751년에
고선지의 당군이 이슬람 아바스 왕조와 탈라스 전투에서 접전햇는데, 카를룩의 반란으로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했으며 755 ~ 763년 안사의난 대란으로 당나라의 쇠락과 번진 할거
가 시작됐으며 756년 마외병변으로 양귀비를 자살시켰고 양국충 등 양씨 일족이 절멸합니다.
875 ~ 884년 황소의 대란이 일어나 당나라의 몰락이 가속됐으며 888년 희종이 붕어하고 환관 양복공
이 소종 이엽을 옹립했으며 900년 황태자 이유가 환관 유계술, 왕중선의 반란으로 즉위합니다.
다음해 이유가 폐위되고 소종이 다시 복위됐으며 903년 주전충과 최윤이 환관
수백명을 몰살시켰으며 품계낮은 어린 환관 30인만 남겨 청소에 이용합니다.
904년 권신 주온(주전충) 이 소종을 시해하고 이축을 애종으로 옹립했으며 905년
주전충이 당의 충신 38명을 학살한 백마역의 화가 일어났고 907년 주전충이
애종으로 부터 양위를 받아 후량을 건국하니 당왕조는 289년만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고는 박물관을 나와 다시 도로변에서 택시를 세워서 타고는 20여분을
달려서 천불산 (千佛山) 에 도착해서는 수많은 계단을 걸어서
오르는 길을 잠시 걸은 후에... 다시 옆 길로 해서 케이블카를 타러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