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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니아어·수메르어의 해독에도 성공하였다. |
수메르[Sumer]
메소포타미아 남쪽에 있으며
누리에서 가장 오랜 문명을 일군 겨레 또는 나라
지금의 이라크 땅에 든다.
수메르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이 흐르는 땅으로
BC 5천년쯤부터 농경민이 붙박아
BC 3000년쯤에는 오리엔트에서,
누리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낳았다.
이들은 두 강의 중·상류 지역
또는 엘람지방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이 지방에는 소택지(沼澤地)가 많고
두 강에서 생기는 홍수나 페르샤만(灣)의 높은 조수 때문에
일찍부터 간척·배수·관개·축제(築堤) 등의
토목공사가 이뤄져 마을끼리 서로 도왔으며
이를 통해 힘있는 씨족은 센 발언권을 가졌다.
이들의 문명은 시기에 따라
알 우바이드기(期),
우루크기, 젬데트나스르기의 3기로 나뉜다.
① 우바이드기는 BC 3300∼BC 3100년경에 해당하는 문명으로
채색토기를 수반한 펴묻기[伸葬]와
니그로풍의 여자 토우(土偶)가 있었으며,
기단 위에 세운 신전을 중심으로 한 작은 규모의 도시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비(非)수메르적인 서아시아 옛 민족의 문명이라는 설도 있다.
② 우루크기는 BC 3100~BC 2900년쯤의 문명으로
쇠붙이를 썼으며,
수메르 문명의 특징인 신전(지구라트) 짓기가 시작되었고
원통인장(圓筒印章)도 발명되었다.
또 여러 가지 기술이 자라서 도시국가를 이루고,
고형(古型)의 설형문자가 쓰이는 등 수메르문명이 이루어졌다.
③ 젬데트나스르기는 BC 2900∼BC 2600년경으로
전기(前期)문명이 발전하여 역사시대로 들어가는 때다.
그러나 수메르인의 민족이나 언어의 귀속, 원주지에 관해서는 밝지 않은 점이 많다.
이 무렵의 정치는 촌락 공동체시대의 평등한 원리가 남아 있어 일반 시민의 성년남자로 구성되는 민회(民會)와 씨족장들의 장로회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과 같은 도시의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는
일시적으로 도시의 전권이 위임되는 왕이 뽑혔다.
초기 왕조시대에 들어서면 우루크·우르·키시·니푸르 등의 힘있는 도시국가가 우두머리를 다투었다.
이 중 니푸르의 엔릴신(神)은 각 도시의 왕들이 선망하여
수메르의 종교상의 중심적인 신으로 되었다.
초기 왕조시대에는 500년 간 각 도시국가가 같이 서서 다투었고,
각 도시는 신의 소유라고 생각되어 성벽으로 둘러싸인 신전을 중심으로 한 시역(市域)과 주위의 농경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시에서는 정치·경제·군사·생활 등이 모두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신전공동체 또는 신전국가라고 할 정도였다.
도시간의 싸움이 잦자 점차 왕권이 자리잡는 한편 세습되었다.
또한 도시신(都市神)을 제사하는 신전은 많은 수입이 있었으므로 사제계급은 세속적으로도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국가는 수리권(水利權)이나 농경지·교역로의 확보를 둘러싼 옆 도시와의 싸움과 안으로 왕과 사제계급의 대립으로 쇠약해졌다.
초기 왕조시대 말기에는 라가시왕 우르카기나의 사회개혁이 있었으나 실패하여 움마의 왕 루갈자기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움마도 BC 2300년경에 셈계(系)인 아카드의 사르곤왕에게 무너져 수메르의 도시국가시대는 끝났다.
180년 동안의 사르곤왕조 뒤 수메르는 한때 다시 번영하여 우르 제3왕조를 일으켰으나 5대만에 동방의 엘람에게 무너지니 수메르는 셈족에게 동화되고,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수메르의 문화는 누리의 가장 오랜 문명으로서 오리엔트 역사상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들은 그림문자[繪文字]로부터 독특한 설형문자를 발명하여
고대 오리엔트에서 널리 쓰였다.
또한 12진법과 60진법을 썼으며 태음력을 따랐다.
수메르법이라는 법전도 편찬되었다.
우르 제3왕조시대의
《우르남무 법전》이나 《슐기 법전》은 단편적이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며 문학·신화·종교에 관한 책도 전해진다.
노아의 방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홍수전설을 담고 있는
《길가메시서사시》도 잘 알려져 있다.
수메르는 그들의 역사기록은 남기지 못하였으나
《왕명표(王名表)》에는 많은 왕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러나 우르 제1왕조 이전은 전설적인 부분이 많다.
건축·미술·공예에도
뛰어나 신전의 기단에서 발전하였다고 생각되는
지구라트[聖塔]는 평면의 직사각형기단을
계단으로 쌓아 올린 수메르 특유의 것으로
바벨탑의 원형이 되었다.
우르 및 에리두·우루크·라가시·키시·니푸르·움마·알 우바이드 등의 발굴은 고도의 도시생활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우르의 왕묘에서 나온
많은 유품은 이들의 높은 기술 수준과 예술 재능을 나타내고 있다.
두리새김[丸彫]으로 된 조각으로
우루크의 《여성 두상(頭像)》,
텔 아스마르·마리에서 발견된 《사제상(司祭像)》 《예배자상》이 있고,
부조에는 《와르카의 큰 잔》 《독수리의 비(碑)》가 대표적이다.
수메르에서는 점토 말고는 원료가 나오지 않아
석재나 광석·귀금속은 모두 무역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먼 거리 무역이 행해져
그 무역을 통하여 수메르문명은 오리엔트 각지로 퍼졌다.
- 두산백과
수메르(Sumer)는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 지방이다.
수메르 문명은 누리에서 가장 오랜 문명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략 기원전 3500년부터 수메르 지방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기원전 2000년쯤에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아카드지방에 살던 셈족 계통의
아카드 사람들이 수메르 땅을 빼앗고 바빌로니아를 세웠다.
"수메르인"이란 말은 그들의 뒤를 이은 아카드 사람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방에 사는 사람을 부르던 말이었다.
수메르 사람들은 그들을 웅 상 기가(?? sa? g?g-ga, 음성학적으로 uŋ saŋ giga) "검은 머리 사람들"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땅은 키엔기르(Ki-en-?ir) "수메르말을 쓰는 사람들의 땅"이라고 불렀다.
아카드어 "수메르"는 아마도 이것의 방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수메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의 "시날"(Shinar),
이집트의 "신그르"(Sngr),
모두 "수메르"의 서방 사투리로 볼 수 있다.
수메르인은 셈어족이 아니고,
언어학자들이 수메르어의 바탕이 된
기저 언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때 침입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옛 글은
초기 우바이드기(기원전 5200년~4500 또는6090~5429)에
문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이 지방에 붙박은
수메르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충적된 기름진 땅을 부쳤다.
당시에는 강우량이 오늘보다 적어서,
척박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 살려 한 모든 인종들의 도전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잘 관리하여
농업용수와 먹는 물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수메르말에는 운하, 제방, 저수지 등에 얽힌 낱말이 많이 보인다.
수메르 인들은 북부지방에서 농업 기술을 익힌 뒤에 남쪽으로 내려온 농부들이었다.
북부의 사마라 유적(기원전 5700년~4900)의 토기와 연속성을 보인다.
사마라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 중류 지방에서 비로소 원시 형태의 경작을 시작한 부족들이다.
우바이드 유적과 사마라 유적의 비슷함은 라르샤 근처의 텔 아웨이리 (1980년에 프랑스 발굴단에 의해 발굴됨)에서 발견된 사마라 토기와 유사한 전기 우바이드 토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북부 지방의 농부들은, 신전 중심의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고,
물을 잘 써먹는 기술을 얻으면서,
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되자
남쪽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는 여남은 낱의 독립된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도시국가들은 대체로 수로와 경계석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는 도시의 수호신이나 수호여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루갈이라고 불리는 임금이 다스렸다.
다음은 수메르의 주요 도시들 위치순서대로(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늘여놓은 것이다.
괄호 안은 현재의 도시 이름이다.
마리
아가데
키시 (Tell Uheimir & Ingharra)
중소 도시:
짐비르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기원전 29세기쯤 초기 왕조 시대부터
역사적 기록들이 드물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기원전 26세기경 라가시기부터는 많은 자료들이 나오고 있다.
아카드 제국이 들어서면서 막을 내린다.
기원전 22세기 "수메르 부흥기"를 맞았다가,
기원전 1730년,
메소포타미아가 바빌로니아에게 다스려질 때까지 이어진다.
우바이드기(期) 동안에 특징적인 양식을 갖는 양직의 도기류들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만 영역에 퍼져 있다.
인근의 도시인 우루크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에리두를 뛰어넘게 된다.
느린 물레에서 만들어진 채색 토기에서,
빠른 물레에서 양산하여 만든
비채색 토기로 바뀌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대략 기원전 4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량의 물품이
커다란 신전중심 도시들이 많이 세워졌고,
집권화된 관료층이 전문화된 일꾼들을 고용하였다.
이 시기에 노예 제도가 시작되었다는 많은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지중해 서안,
이란 중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수메르 상인들과,
모든 주변세력에게 영향을 미쳤고,
점차 주변세력들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교될 만큼 자랐다.
그러나 수메르의 도시들은 먼 거리의 식민지를 무력으로 제압할 만한 군사력은 갖추지 못했다.
기후 변화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이 시기에 홀로세 최적기후 (Holocene climatic optimum)라고 불리는 따뜻하고 습도가 높은 기후가 끝나고,
건조한 기후가 이어졌다.
역사적 기록들은
대체로 수메르인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루갈안네문두(Lugal-Anne-Mundu)와 같은 왕은 지중해, 타우루스, 자그로스까지 영역을 넓혔던 것으로 적혀 있다.
또한 그보다 조금 전에,
역사적 과정의 신화와 얽혀 있는
엔메카르와 길가메시와 같은 왕들도 넓은 지역을 다스렸다.
고대 수메르의 왕들의 목록이 초기 왕조들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많은 고대 왕명표와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이름도 들어 있을 수 있다.
목록에서 다른 문서에서 찾을 수 있는
키시의 첫번째 왕조의 13번째 왕이다.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첫번째 왕은 키시의 엔메바라게시(Enmebaragesi)로 왕조의 22번째 왕이자,
끝에서 두번째 왕이며,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이름이 나온다.
당시 패권이 키시에서 우루크로 넘어갔던 것으로 미루어,
길가메시가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루갈자게시(Lugal-Zage-Si)는 라가시 왕조를 전복시키고,
우루크를 정복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고,
마지막 수메르인 왕이었다.
모든 도시들 실질적으로 지배하였고,
또한, 그의 영토는 페르시아 만을 따라 엘람의 일부까지 미쳤다.
그는 통치를 위하여 공포(terror)정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된 독수리 석비에서
적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독수리석비
기원전 2800년쯤부터 쓰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원전 2500년쯤부터는 완전히 고대 아카드어로만 씌어진 책을 찾을 수도 있다.
그 기간에도 대부분의 행정관련 서판은 서기들이 주로 사용하던 수메르어로 씌어져 있다.
겔브(Gelb)와 베스텐홀츠(Westenholz)는
사르곤시대와 아가데지방, 우르 제3 왕조기--을 구별해 냈다.
대략 1000년 정도 (기원전 2800년~1800년) 같이 쓰이다가
수메르어는 끝내 쓰이지 않게 된다.
소르킬드 야콥슨(Thorkild Jacobsen)은 사르곤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의 역사가 끊어짐이 거의 없다고 보고,
?어족과 수메르어의 충돌이 너무 많이 강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엘람인들에게 아카드어를 잠시 동안이나마 강요했던 것은 맞다.
새로운 수메르의 지도자,
예술이 발달하고, 사르곤을 따라 신권 정치를 표방하였다.
영향력을 미치면서 마지막 수메르 부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미 수메르 지역은 아모리족이 많이 들어오면서
?어족의 성격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중세에 라틴어가 이어 쓰였던 것처럼,
설형문자가 이어 쓰이는 동안에는
수메르어도 여전히 학교에서 종교적 언어로 가르쳐졌다.
생태학적으로는, 수메르 땅에는 소금기가 많아져서
농업 생산력이 줄었다.
농업 용수의 증발량이 많아지면서
땅에 녹아있는 소금기가 많아진 것이
농업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기원전 2000년쯤부터는
규모가 작은 도시부터 서서히 수메르 문화가 무너져 간다.
우르의 군기에 그려진 초기 전차 기원전 2600
엘람인의 침략과,
이비-신 지배 하(기원전 2004년)에서의 약탈 이후,
기원전 1730년 함무라비임금의 바빌로니아로 넘어간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토양의 염분 증가로 인한,
남부 이라크 지방으로부터 북부 지방으로의
인구이동 시기와 일치한다.
이 지방에서 토양 염분 증가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경작된 토지에 배수가 잘 되지 않은 상황에서,
건조한 기후로 인한
수분의 증발은 토양 속에 소금 결정을 축적시키고,
결국은 수확량을 결정적으로 줄어들게 만들었다.
밀보다 염분에 더 강한 보리를 많이 경작하기 시작했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기원전 2100년~1700년 사이 인구는 거의 3/5로 줄어들었다
수메르인은 봄마다
수태 준비를 마친 대지에 씨를 뿌린 뒤 탐무즈의 부활제를 올렸다.
그들은 탐무즈를 성장의 신으로서,
대지의 여신이 탐하는 남성적인 힘의 상징으로서 믿었다.
이러한 풍년제 기간에는 모든 아내들이 제 남편뿐 아니라,
좋아하는 다른 사내와도 잘 수 있는 권리를 남편에게 인정받고는 자유롭게 사랑의 상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이 아닌 연인의 정액은 밖으로 흐르게 하여 임신하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혼의 의무를 저버리기 때문이다.
수메르 말
수메르 말이 적힌 설형문자
수메르어는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고대 수메르족이 쓰던 언어이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000년대 말 경에
단순한 행정기록만을 남길 수 있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문자체계를 수정하고 형성하여
기원전 2500~2000년 사이에는 가장 복잡한 역사적,
문학적 작품도 어렵지 않게 표현할 수 있는
충분한 감각과 유연성을 갖춘 쐐기문자(설형(楔形)문자) 체계가 되었다.
기원전 2000년대가 끝나기 전에 수메르 인들이 점토판,
기둥, 원주 등에
당시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던 문학적 창작물들을 새겼다.
기원전 2000년 말기에
셈 족인 아카드 인들이 점진적으로 수메르를 정복하면서
수메르 문자를 받아들이고 수메르어가 구두언어로 사멸한 지 오랜 뒤에도 그들은 그것을 공부하고 모방했다.
따라서 수메르의 단어와 어구를 아카드어로 번역한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전이 편찬되어
수메르어의 단어 의미, 문법, 소리를 알아내는 데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
설형문자(楔形文字)로 쓰여져 있다.
카프카스어 ·드라비다어,
아프리카의 반투어와 같이 첨가철(添加綴)이나 접미사가 잘 발달한 교착어계(膠着語系)에 속한다.
중국티베트어와 같은 고립어계통에도 관련이 있다.
또, 알타이어와는 닮은 단어가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19세기 이래
이들 제어족과의 비교연구를 자세히 다루어 왔으나
현재 그 소속은 분명치 않다.
함무라비 왕 무렵까지 약 1,500년 간 쓰였으나
셈어계에 압도되어 사어(死語)가 되었다.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역사상 가장 먼저 문자로 표기된 언어
BC 3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 남부지방에서 사용된 이 언어는
설형문자로 표기되었다.
언어학자들은 수메르어와
다른 언어와의 상관관계를 아직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수메르어의 역사는 4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원시 수메르어,
고대 수메르어, 신수메르어, 후기 수메르어 시대이다.
원시 수메르어는 BC 3100~2500년경에 쓰였으며
대표적인 문헌은 교과서 및 상업이나 행정문서들이다.
그러나 원시 수메르어는 아직도 거의 해독되지 못한 상태이다.
고대 수메르어는 BC 2500~2300년에 지속되었고,
주로 수메르인의 도시인
라가시의 초기 통치자들이 남긴 기록이 대부분이다.
이 기록은 상업·법률·행정과 관련된 문서,
신에게 바친 비문, 편지, 주문 등을 포함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 형태의 수메르어를 더 잘 해석하고 있다.
신수메르어가 쓰이던 시기에
셈족인 아카드인들이 바빌로니아를 통치했으며,
그결과 수메르어 대신 아카드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BC 2000년경 사막에서 온 셈족이
수메르인의 3번째 왕조인 우르 왕조를 멸망시켜
셈족의 왕조인 이신 왕조,
라르사 왕조, 바빌론 왕조를 세우게 되자
신수메르어는 소멸되었다.
이왕조들이 번성한 시기를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라고 부른다.
BC 2000년경부터 수메르인들은 정치적 주체성을 잃어버렸고,
수메르어는 구어로는 차츰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대신 아카드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어는 설형문자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수메르어를 후기 수메르어라고 한다.
이 시대의 초기에 수메르 문어는 왕의 비문뿐만 아니라
법률 및 행정 문서에서도 널리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문헌들은
대개 수메르어와 바빌로니아어의
2가지 언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수메르어로 된 문헌은 매우 풍부하여,
신화·서사시·송가·애가·의례전서·주문·격언집 등과
처세훈을 모아 놓은 지혜 문집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 문헌들은 대부분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수메르어가 구어로 더이상 쓰이지 않게 된 뒤에도
수세기 동안 바빌로니아의 학교에서는 이 언어를 공부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수메르어의 낱말들을 그리스 문자로 옮겨 쓴 것을 보여주는 설형문자 서판이 만들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할 무렵,
수메르어에 대한 지식은
설형문자에 대한 지식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이 언어가 다시 발견된 것은
19세기초에 설형문자로 씌어진 문헌이 해독된 뒤였다.
수메르어는 접두사·접요사·접미사를 사용하는 교착어이다.
같은 어근이 명사와 동사에 모두 쓰이는 경우가 많고,
명사와 동사는 문장 속에서 그 낱말이 차지하는 위치와 서로 다른 접사가 붙음으로써 구별된다.
수메르어의 발음 체계는 비교적 단순하여,
4개의 모음과 16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수메르어의 자음에는 유성음과 무성음의 구별은 없지만,
유기음과 무기음은 구별된다.
명사는 수와 격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며,
복수는 접미사를 붙이거나 같은 글자를 중첩함으로써 나타낸다.
동사 변화는 매우 복잡하여,
접두사·접요사·접미사가 모두 엄격한 순서에 따라
동사 변화에 관계한다.
수메르어의 방언은
수메르어의 공식 방언인 '에메기르'와,
송가나 주문에 흔히 쓰인 '에메살'을 비롯한
몇몇 방언이 알려져 있다.
1976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학자들이
최초의 수메르어 표준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제1권이 1984년 10월에 출판되었다.
설형문자
BC 3000년경부터 약 3,000년간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고대 오리엔트에서 광범하게 사용된 문자
터키 이스탄불박물관의 설형문자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회화문자(그림문자)에서 생긴 문자이다.
문자의 체계는 BC 3000년경부터
수메르인들이 기록을 위해 젖은 점토 위에 도구를 이용해
흔적을 남기기 시작하면서부터 발달했으며,
초기에는 주로 수를 세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점토 위에 갈대나 금속으로 만든 펜으로 새겨 썼기 때문에
문자의 선이 쐐기 모양으로 되어
설형문자라고 하며 쐐기문자라고도 한다.
설형문자를 발명한 것은 수메르인(人)으로,
점토를 굳혀서 만든 서판에
주로 신전에 바치는 물품(곡물·소·양·물고기·노예 등)을
표시한 문자기호를 새겼다.
수메르 유적에서 발견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우루크(Uruk)의 에안나 신역(神域)의 제4층(우루크 후기)에서 발견된 회화문자였다.
발견된 문자의 수도 많은데,
현재 알려진 문자의 수는 약 1,000자에 달한다.
우루크 유적의 문서는 상형문자 양식의
설형문자로 작성되었으며 사물은 그림으로,
숫자는 짧은 선이나 원의 반복으로,
고유명사는 그림의 본래 의미가 아닌 통상적 발음에 따라 해석하게끔 조합한 그림들로 표시했다.
BC 3100년 무렵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 점토판의 문자들은 초기 수메르어로 보이며,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는 못했다.
우루크 유적에서 출토된 설형문자 이후로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걸쳐 점차 발달된 다양한 형태의 설형문자들이 출토되었으며,
대부분이 점토판 형식으로 발견되었으나,
후대로 갈수록 석판이나 금속판에 새긴 경우도 있었다.
우루크 유적 다음으로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잠다트 나스르(Jamdat Nasr) 유적에서
출토된 점토판은 회화문자에서
설형문자로 발전하는 과도기의 형태를 보여 주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쓰기가 이루어졌다.
그 후로도 설형문자는
그 기호가 조금씩 간략화되어 쐐기 모양에 가까워졌으며,
표음문자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 왕조시대에 이르면 설형문자는 일반화되고,
표의 ·표음문자가 병용되었다.
바빌로니아 남부를 통일한 셈계의 아카드인들은
설형문자를 채용하여 아카드어(語)를 표기하였다.
그로부터 표음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커지고,
표의문자의 수는 줄어들었다.
아카드어는 제국 멸망 후에도 국제어로서
오리엔트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문자기호의 수는 초기수메르에서는 2000 정도 사용되었으나,
중기바빌로니아에서는 600 정도,
후기아시리아에서는 350 정도로 감소되었다.
고대페르시아 설형문자는 자획(字畵)도 간략해지고,
자수도 37개로 정리되었다.
시리아의 라스 샴라에서
발견된 우가리트 설형문자는 30개의 자음문자로만 되어 있고
자음알파벳 방식으로 발전해 있었다.
설형문자는 BC 1세기경까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문자나 아람문자의 보급으로 점차 잊혀지게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중근동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고대 유적에 남아 있는
설형문자의 각명(刻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세기에 유럽인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설형문자 조각문을 재발견했고,
1802년에 독일인 G.F. 그로테펜트는
고대페르시아 쐐기문자를 거의 해독하는 데 이르렀다.
1850년대에 영국인 H.C. 롤린슨은 베히스툰(비슈툰)
3개 국어 각문(刻文)을 연구해서 여기에 포함된
고대페르시아 설형문자와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로 기록된 바빌로니아 설형문자를 해독했다.
이어서 롤린슨은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1857년에 엘람어 ·바빌로니아어 ·수메르어 등으로 기
록된 미발표된 각문들을 해독해 냈다.
설형문자의 연구는 유적의 고고학적 조사와 병행되어 진행되었다.
각지의 박물관이나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점토판 문서들이 정리 ·
해독(解讀) ·출판되고 있다.
문서 내용은 경제관계를 중심으로
정치 ·종교 ·문학 ·외교 ·천문학 ·수학 ·연대기 등 각 방면에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