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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제목: 사토리와 사마디의 차이점
질문: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일별(엿봄)인 사토리의 경험과 우주의식인 사마디의 경험 차이는 무엇입니까?
사마디는 틈으로 시작하지만 끝이 없다.
틈새는 항상 시작과 끝이 있다. 경계가 있다.
틈새는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마디는 틈으로 시작하지만 영원하다. 끝이 없다.
그래서 그 사건이 발생하고 거기 끝이 없다면 그것은 사마디이다.
하지만 만일 시작과 끝이 있는 완전한 틈새라면, 그것은 사토리이다.
그 둘은 다르다.
만약 그것이 단지 살짝 엿봄(일별), 틈새라면, 그 틈새는 다시 사라진다.
만약 괄호가 시작되고, 그 괄호가 닫히면, 단지 들여다 보고 돌아 온 것이다.
만약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다시금 사라졌다. 이런 것이 사토리 이다.
사토리는 사마디를 엿볼 수 있는, 사마디의 일별이다.
그러나 사마디는 아니다.
사마디는 어떠한 끝이 없는 앎의 시작 의미한다.
인도에서 사토리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때때로
사토리의 간격이 클 때 사토리를 사마디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일별일 뿐이다.
그대는 우주와 잠시 마주쳤다.
그것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사라졌다.
물론, 그대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시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가 그대 속으로 스며들어, 그대에게 무엇인가가 더해졌다.
그대는 결코 다시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그대는 그대에게 변화를 주었던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그것은 추억일 뿐이다. 그것은 일별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순간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일별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마디가 일어난 순간,
그대는 기억을 위해 그곳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마디 순간에는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는 중에는 아는자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단지 일별의 경우에만 아는자가 남아 있는다.
그래서 아는자(일별한 자)는 이것을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
그는 그것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고,
그것을 갈망할 수 있고,
그것을 다시 경험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흘끗 본 사람, 본 사람이 거기 있다.
그것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 기억은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을 따라 다닐 것이며,
그 현상을 거듭 거듭 요구할 것이다.
사마디가 일어난 순간,
그대는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그곳에 있지 않다.
사마디는 결코 기억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옛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선에서는
"옛 사람은 더 이상 없고 새로운 사람이 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기억도 있을 가능성은 없다.
옛것이 가고 새것이 왔으며,
새것이 올 때, 옛것은 사라지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만남이 없었다.
그러면 그것은 추억이 아니다.
그것을 따라다니는 괴로움도 없고,
안절 부절하지도 않고,
갈망하지도 않는다.
그리움도 없다.
있는 그대로 편하고 바라는 것이 없다.
그대가 욕망을 죽였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욕망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의미에서 욕망없음 이다.
욕망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욕망없음이다.
욕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거기 바램이 없고, 미래도 없다.
왜냐하면 미래는 우리의 갈망을 통해 창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이다.
욕망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그리고 미래가 없으면,
과거는 항상 미래의 갈망에 대한 혹은 통한 배경이기 때문에,
과거의 필요성도 없다.
미래가 없음을 안다면,
바로 이 순간이 죽을 것임을 안다면,
과거를 기억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대의 이름도 기억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름은 미래가 있을 때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가 없다면,
그대는 과거로 돌아가는 모든 다리를 불태울 뿐이다.
그들은 필요 없다.
과거는 완전히 무의미해졌다.
과거가 의미 있는 것은 오직 미래에 대한 혹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사마디가 일어난 순간 미래는 비존재가 된다.
그것은 없다. 오직 현재 순간만 있다.
현재만이 유일한 시제다.
과거조차 없다. 과거도 떨어지고 미래 또한 떨어진다.
지금 순간의 존재가 전체 존재가 된다.
그대는 전체 존재 안에 있지만, 전체 존재와 다른 실체가 아니다.
그대가 전체 존재와 다르게 되는 것은 그대의 과거와 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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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주위에 결정화된 과거와 미래가 장벽이다.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현재와 그대 사이의 유일한 장벽이다.
그래서 사마디가 일어날 때 과거와 미래가 없다.
따라서 사마디가 일어 날때,
그대는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현재 자체이다,
그대가 현재 자체가 되는 것이다.
사마디는 일별이 아니다.
사마디는 죽음이다.
그러나 사토리는 일별이고 죽음이 아니다.
그리고 사토리는 많은 방법을 통해 가능하다.
심미적인 경험은 사토리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음악은 사토리를 일어나게 할 원천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사토리를 일어나게 할 원천이 될 수 있다.
과거가 무의미해지는 어떤 강렬한 순간에서,
지금 현재에 존재함에 의한 어떤 강렬한 순간에서 사토리가 가능해진다.
즉 어떤 사랑의 순간에, 어떤 음악 감정의 순간에, 어떤 시적 감정의 순간에,
미래에 대한 욕망이 없어지고 과거가 간섭하지 않는 어떤 미적 현상의 순간에, 사토리는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견일 뿐이다.
사토리를 통해 처음으로 사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별은 의미가 깊다. 최초의 맛, 즉 사마디의 최초의 뚜렷한 향기는 사토리를 통해 나온다.
그래서 사토리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사토리가 전부라고 느낀다면 장애가 될 수 있다.
사토리에는 그대를 속일 수 있는 행복이 그 안에 있다.
그것은 그 나름의 행복이 있다.
그대가 사마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토리가 그대에게 찾아오는 궁극이라고 생각 할 수 있고, 그러면 그대는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 매달리게 되면 도움이 되었던 것,
우호적이었던 것이 장벽이 되고 적으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사토리의 위험성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인지하고 있다면 사토리의 체험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한 순간적인 일별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다른 수단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말과 어떤 의사소통으로 설명하려고 해도 그것에 대한 암시조차 될 수 없다.
사토리는 존재를 향한 돌파구, 심연을 향한 하나의 돌파구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존재, 심연을 향한 한 순간적인 돌파구로서 의미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 순간을 알지 못했고, 그것이 닫히기 전까지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카메라를 한 번 클릭하는 것과 같이, 한 순간 번쩍 하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지면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그 순간에 다시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걸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갈망하지 말라.
그것을 바라지 말라.
그것을 기억 속에서 잠들게 하라.
그것을 문제로 만들지 말고 그냥 잊어버려라.
그것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그 순간들은 점점 더 그대에게 다시 다가올 것이다.
그 일별이 점점 더 당신에게 다시 다가올 것이다.
요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닫힌다. 그러면 일별은 막힌다.
그것은 항상 그대가 그것을 인지 않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찾지 않을 때, 여러분이 편안할 때,
그대가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여러분이 명상조차 하지 않을 때 온다.
명상을 하고 있을 때도 그 일별은 불가능하다.
명상을 하고 있지 않을 때, 단지 흘러가도록 놓아 버릴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을 때,
이러한 긴장없는, 여유로운 순간에 사토리가 일어난다.
그것은 점점 더 일어나기 시작할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바라지 말라.
그리고 그것을 절대로 사마디로 착각하지 말라.
질문: 사토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합니까?
사토리는 많은 사람들한테 가능하다.
왜냐하면 때로는 준비가 필요없고,
때로는 우연한 기회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상황은 만들어지지만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진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그것이 사토리인지 모를 수도 있고,
사토리라고 해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솟구치는 큰 사랑도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화학 약품을 통해서도 사토리는 가능하다.
메스칼린, LSD, 마리화나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화학적 변화를 통해 마음이 충분히 확장되어 일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화학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음과 신체는 화학적인 단위이기에, 화학적으로도 일별이 가능하다.
어떤 때는 갑작스런 위험이 엄청나게 스며들어서 그 일별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어떤 때는 커다란 충격으로 그 순간 일별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미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시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지적 태도가 아닌 현실에 대한 감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일별은 가능해질 수 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지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일별이 불가능하다.
때때로 그것은 지식인에게 일어날 수 있지만,
단지 어떤 강렬한, 지적인 긴장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갑자기 긴장이 풀릴 때 일어난다.
바로 아르키메데스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는 욕조에서 그일이 일어 났다.
벌거벗은 채 거리로 나와 "유레카, 찾았다!"하고 울부 짖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어떤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끊임없는 긴장감을 갑자기 풀어주는 것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어 문제 때문에 존재하던 긴장이 갑자기 완전히 풀렸다.
그는 벌거벗은 채 거리로 뛰쳐나와 "유레카,드디어 찾았다!"라고 외쳤다.
지식인에게는 자신의 온 마음과 정신을 요구하는 문제,
그를 지적 긴장의 정점에 이르게 했던 큰 문제가 갑자기 해결된다면
그것은 그를 사토리 한순간의 순간으로 몰고 올 수 있다.
그러나 사토리는 심미학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더 쉽다.
질문: 지적 긴장감도 사토리를 달성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대가 토론 중에 지적으로 긴장하지만,
긴장 상태가 극에 달하지 않으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러나 그대가 완전히 긴장된 상태에서 갑자기 뭔가가 이해된다면,
그 이해는 해방이 될 것이고 사토리는 일어날 수 있다.
혹은, 이 토론에 전혀 긴장이 없다면,
우리는 단지 잡담을 하고, 완전히 느긋하고, 전혀 심각하지 않다면,
이 토론조차도 심미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
꽃만 심미적일 뿐만 아니라, 말조차도 그럴 수 있다.
나무만이 심미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도 그럴 수 있다.
떠다니는 구름을 볼 때만 사토리가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대화에 참여하더라도 사토리는 가능해진다.
긴장감이 전혀 없는 참여 혹은 그 반대로 매우 긴장된 참여가 필요하다.
시작부터 긴장이 전적으로 풀릴 수 있고 혹은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풀릴 수 있다.
그 어느 쪽이든 그것이 일어날 때,
대화에서도 토론에서 조차도 사토리의 근원이 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사토리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대가 우연히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아이가 웃고 있는 것을 본다. 사토리가 일어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하이쿠가 있다.
수도승이 길을 건너고 있다.
아주 평범한 꽃이 벽 너머에서 밖을 엿보고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꽃이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매일 볼 수 있는 너무나 평범한 꽃이다.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그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은 항상 어디선가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전에는 그것을 정말로 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들여 보았다. 사토리가 일어났다.
평범한 꽃은 결코 쳐다보지 않는다.
너무 흔해서 잊어버린다.
그래서 수도승은 이 꽃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그것을 보았고, 그 사건은 경이적인 것이 되었다.
이 꽃과의 첫 만남, 바로 이 평범한 꽃과의 만남이 독특해진다.
이제 그는 그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낀다.
그것은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그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용서를 구했다. 그 일이 일어났다.
꽃이 저기에 있었고, 수도승이 저기에 서서 춤을 추고 있다.
누군가 물었다, "무슨 일이 십니까?"
수도승이
"나는 아주 흔한 꽃에서 보기 드문 것을 보았다.
그 꽃은 항상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전에 그것을 본 적이 없다.
오늘 만남이 일어났다."
그 꽃은 이제 평범한 꽃이 아니다.
수도승이 꽃 속으로 스며들었고,
꽃은 수도승에게 침투했다.
평범한 것, 조약돌이라도 근원이 될 수 있다.
어린이에게 조약돌은 근원이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근원이 아니다.
어떤 흔치 않은 일,
어떤 희귀한 일,
어떤 일이든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일이라면 사토리의 근원이 될 수 있고,
만약 그대가 그곳에 있다면, 그대의 존재가 있다면, 그 현상은 일어날 수 있다.
사토리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다.
사토리라고 해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사토리인 줄 몰랐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사건이 모든 영적 탐구가 시작되는 원인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탐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얼핏 조차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찾으려고 할 수 있는가?
먼저 무엇인가가 그대에게 왔음에 틀림없고,
어떤 광선이 당신에게 왔음에 틀림없었다.
손길, 산들바람, 무엇인가 그대에게 찾아왔음에 틀림없으며,
그리하여 탐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대 모르게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만 영적인 탐구는 가능하다.
사랑에 빠져 있을 수도 있고,
음악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자연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우정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어떤 교감 속에 있을 수도 있다.
그대에게 행복의 원천이 되어온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제 기억, 기억일 뿐이다.
의식적인 기억조차 아닐 수도 있고, 무의식일 수도 있다.
그것은 그대 안 깊은 곳에서 씨앗처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씨앗은 탐구의 원천이 될 것이고,
그대는 계속해서 그대가 모르는 것을 찾을 것이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그대는 무엇을 찾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어디인가,
심지어 그대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경험,
어떤 행복한 순간이 있다.
그것이 그대의 마음의 일부분이 되었다.
마음의 짐이 되었다.
그것은 씨앗이 되었고, 이제 씨앗이 그 길을 헤쳐나가고 있다.
그대는 그대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찾고 있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사람이 성실하고 정직하다면 신이 있는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신을 찾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이라는 단어는 그대가 알지 못하는 한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래서 그대는 신이나 모크샤, 해방을 추구할 수 없다. 그대는 할 수 없다.
성실한 구도자는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것이다.
찾는것이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이다.
어디선가 무엇인가 흘끗 본적이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씨앗이 되었고, 그것이 그대에게 강요하며, 미지의 것을 향해 밀어붙인다.
영적 구도는 외부에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 미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미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밖에서 끌어 당기는 것이라면 그 구도는 불성실하고, 진실하지 않다.
그러면 그것은 단지 새로운 종류의 만족을 찾는 것, 그대 욕망의 새로운 전환에 불과하다.
영적 구도는 항상 그대가 엿본 그대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것을 향한 추진력이다.
그대는 그것을 해석하지 않았다.
그대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알지 못했다.
무의식 속 깊은 곳에 있는 사토리에 대한 어린 시절 기억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자궁에 있는 행복한 사토리의 순간일 수도 있다.
걱정도 없고, 긴장도 없고, 완전히 편안한 마음 상태를 가진 행복한 존재일 수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깊고 무의식적인 느낌,
의식적으로 알지 못했던 느낌,
그것이 그대를 밀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리학자들은 영적 구도라는 전체 개념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행복했던 경험에서 나온다는 데 동의한다.
그것은 매우 행복하고, 매우 어둡다.
긴장이라고는 한 가닥도 없다.
처음 빛을 보는 순간 긴장이 느껴지기 시작하지만 어둠은 절대적인 이완이다.
걱정도 없고, 할 일도 없다.
그대는 숨도 쉴 필요가 없다.
그대의 어머니는 그대를 위해 숨을 쉰다.
그대는 모크샤가 성취되었을 때의 존재감으로 해석되는 대로 정확히 존재한다.
모든 것은 바로 그대로 이다. 그저 행복하다.
이 상태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바로 그렇다.
그래서 완전한 이완을 경험한 것이
그대 내부에 깊이 무의식적인 씨앗으로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유년시절의 심미적 행복, 유년시절의 사토리 경험일 것이다.
모든 어린 시절은 사토리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낙원은 사라지고, 아담은 낙원에서 쫓겨난다.
그러나 그 기억은 거기 있고, 그대를 밀어내는 알려지지 않은 기억은 있다.
사마디는 이것과는 다르다.
그대는 사마디를 알지 못했지만, 사토리를 통해 뭔가 더 큰 것이 가능하다는 약속이 있다.
사토리는 당신을 사마디로 인도하는 약속이 된다.
질문: 이를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단 한 가지: 자각해야 한다. 저항해서는 안 된다.
저항하면 안 된다.
저항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항이 있다.
그래서 고통이 있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저항이 있다.
만약 브라흐마 랜드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것은 에고의 죽음이 더 가까이 다가오도록 하기 시작할 뿐이다.
내면의 저항이 있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인다.
이 저항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즉, 명상을 중단하거나
혹은 명상을 초월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것도 일종의 저항이다.
그것이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내버려 두어라.
그냥 자각하고 완전히 받아들이라.
그것과 같이 있으라.
그것이 무엇을 하든 그것을 하도록 내버려두어라.
그리고 그것에 협조하라.
질문: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자로 남아 있어야 합니까?
단지 지켜보는 자가 되지말라!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단지 지켜보는 자가 되는 것은 장벽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자가 되지 마라.
그것에 협력하고, 하나가 되어라.
그것에 협조하고,그것에 완전히 복종하라.
그것에 스스로 복종하라!
그대가
"무엇이든 하라,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고 말하면서 그대는 그저 협조하라.
그것에 저항하지 말고 관여하지도 마라.
왜냐하면 관여도 저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함께 하고 그것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대는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계획할 수도 없다.
그대는 단지 그것에 복종하고 그것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다.
브라흐마 란드라는 나름대로의 지혜가 있고, 모든 센터는 나름대로의 지혜가 있다.
우리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몸의 어떤 내면의 작용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그대는 긴장을 일으키기 때문에 소란을 일으킨다.
몸 전체의 작용, 내면의 작용은 무의식적이다.
예를 들어,
일단 음식을 섭취한 후에는 그 음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며,
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도록 해야 한다.
위장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을 교란하게 되고,
일 전체가 교란되어 위 전체가 병들게 된다.
마찬가지로 브라흐마 란드라가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관여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에 주의를 하게되면 그것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가 그 일을 방해 할 것이다.
그대는 그것과 일대일로 마주하게 될 것이고,이 마주침은 소란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 과정은 불필요하게 길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부터는 그냥 그것과 같이 있고,
같이 움직이고,
같이 고통을 받고,
그것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
그대는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
전적으로 그것에 맡겨야 한다.
이 복종은 아카르마, 비활동이다.
복종은 관여보다 더 아카르마인데,
관여하는 것은 카르마, 행동, 곧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냥 그것과 함께 있으라.
그대가 자각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과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에 관여나 주의 하지 마라.
그대는 자각할 것이다.
그것은 다르다.
그것과 함께 있는 동안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스며드는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계속 언제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대는 그것과 함께 이며,
그대의 자각과 그 사건 사이에는 모순이 없을 것이다.
질문: 명상이 사마디로 이어지는 것입니까?
초기에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마음을 넘어서지 않는 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일단 그대가 마음 밖으로 나가게 되면 노력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이 여전히 필요하다면 그것은 그대가 마음 너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력이 필요한 지복은 마음의 것이다.
아무런 노력도 필요 없는 지복은 자연스러워 진다.
그것은 존재의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숨쉬는 것과 같다.
노력도 필요 없다.
노력이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주의심도 필요 없다.
그것이 계속된다.
이제는 무엇인가 그대에게 추가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대이다. 사마디가 된다.
드얀, 명상은 노력이고, 사마디는 노력없음 없다.
명상은 노력이고, 엑스터시는 노력없음 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명상이 무용지물이 되는 지점에 이르지 않는 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길이 쓸모없게 되어야만 한다.
목표를 달성했다면,
목표에 도달하였다면 그 길은 더 이상 필요없다.
